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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치료하시는 하나님 (호 06:1-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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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는 목사이기 때문에 병원 응급실이나 중환자실에 심방을 자주 가곤 했습니다. 그런데 응급실이나 중환자실에 누워있는 환자들 중에서 어떤 사람은 상태가 경미하여 금방 다시 일어설 수 있는 것 같은 사람이 있는가 하면 어떤 사람은 너무 심하게 상해서 도저히 회생될 것 같지 않은 분들도 있습니다. 그래서 어떤 사람의 병이 너무 심해서 거의 본래 얼굴을 알아볼 수 없을 정도로 수척해져서 산소 호흡기를 코에 꽂고 겨우 겨우 생명을 부지하고 있을 때 사람들은 고개를 좌우로 저으면서 ‘이 사람은 소생할 가망이 없어’라고 말을 하곤 합니다.

제가 주안에서 아주 사랑하던 한 젊은이가 있었습니다. 그는 머리는 좋은데 젊은 시절 많이 방황을 했습니다. 그래서 자주 술을 마셔서 행패를 부리는 바람에 자주 파출소에 잡혀가곤 했습니다. 집 식구들은 겨우 할 수 있는 것이 이 청년에서 제발 술을 마시지 말라고 부탁을 하거나 파출소에 붙들려 가 있으면 가서 사과하고 다시 집에 데려오는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런데 이 청년에게도 아주 중요한 한 사건이 터지게 되었습니다. 그것은 이 청년이 술만이 아니라 약도 먹기 시작한 것입니다. 그런데 어느 날 약에 중독이 된 상태에서 그만 고층 아파트에서 떨어지고 말았습니다. 그의 몸은 많이 부서졌지만 생명은 건지게 되었습니다. 그는 병원에서 복음을 듣게 되었는데 하나님 없이 자기 자신이 얼마나 방황을 하면서 살아왔는지 알게 되었습니다. 그 후 그는 완전히 과거의 삶을 청산하고 가장 훌륭한 주의 종으로 다시 태어나게 되었습니다. 이것이 사람이 할 수 있는 것과 하나님이 하시는 것의 차이입니다. 사실 하나님의 눈으로 보면 우리 한 사람 한 사람은 모두 전혀 가망이 없는 절망적인 상태에 있는 사람들에 불과합니다. 어떻게 매일 술이나 마시고 부인을 두들겨 패던 사람이 예수를 믿을 수 있다고 생각을 하겠습니까? 그러나 그런 일이 실제로 일어나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아무리 망가지고 깨어진 사람도 치료하시고 고치실 수 있습니다. 그러나 조건이 있습니다. 그는 자신이 그런 상태에 있다는 것을 하나님 앞에 인정을 해야 합니다.

오늘 본문 말씀은 앞으로 이스라엘 백성들이 얼만 비참하게 망가질지 보여주는 말씀입니다. 그의 형체를 알아볼 수 없을 정도로 찢기고 상하게 될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그들을 다시 회복시키실 것입니다. 그러나 그들에게 조건이 있습니다. 그것은 아무 조건없이 하나님께로 돌아오는 것입니다. 자신의 남은 삶을 철저하게 하나님의 손에 맡기는 것입니다.

1. 치료하시는 하나님

사람이 저지르는 일 가운데는 자신이 책임질 수 없는 것들이 많습니다. 화가 나서 무엇인가 집어던져서 깨어지면 사람은 그것을 다시 복구시킬 수 없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이 하시는 일은 절대로 그렇지 않습니다. 아무리 심하게 부서지고 깨어져도 하나님은 회복시킬 수 있습니다. 오히려 하나님께서는 처음 깨어지기 전보다 더 완벽한 모습으로 회복시키실 수 있는 능력을 가지고 있습니다.

우리가 지난번에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들을 징계하시는 두 가지 방식을 보았습니다. 하나는 좀처럼 조용히 힘을 잃게 하십니다. 5:12에 ‘내가 에브라임에게는 썩이는 좀 같으며’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힘이 빠지게 하십니다. 그러다가 어떻게 하십니까? 결정적인 순간에 사자처럼 물어뜯어서 갈기갈기 찢어놓습니다.

항상 말씀에 순종치 않는 백성들이 망하는 방법은 이 두 가지에 의해서입니다. 처음에는 능력이 자기 자신에게서 빠져나가는 것을 느끼지 못하는 사이에 야금야금 하나님의 은혜가 없어집니다. 그러다가 결정적인 순간에 하나님께서 내리치시는데 한 순간에 형체를 알아볼 수 없을 정도로 바닥에 내리쳐버리십니다. 그때의 모습을 보고 사람들은 모두 고개를 쩔레쩔레 흔들면서 ‘이제 이스라엘도 끝났군’이라고 중얼거립니다. 왜냐하면 너무나도 심하게 찢어지고 망가져서 도저히 형체를 알아볼 수 없게 되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오늘 본문에는 놀라운 초청의 소리가 들립니다. 그것이 무엇입니까? 하나님께로 돌아가자는 것입니다. 다시 하나님께로 돌아가기만 하면 아무리 심하게 깨어지고 망가졌을지라도 하나님께서는 다시 살리시고 치료하신다는 것입니다.

1절,“오라. 우리가 여호와께로 돌아가자 여호와께서 우리를 찢으셨으나 도로 낫게 하실 것이요 우리를 치셨으나 싸매어주실 것임이라”

누가 하는 말입니까? 호세아가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부르짖는 말입니다.

지금까지 이스라엘 백성들이 본 것은 호세아 가정의 불륜과 비극이었습니다. 호세아의 처 고멜의 바람기는 도저히 고쳐질 수 없는 것이었습니다. 호세아가 아무리 붙들고 이야기 해도 고멜의 음행은 고쳐지지 않았습니다. 결국 고멜은 노예로 팔려가서 아주 비참한 노예 생활을 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그런 고멜을 호세아는 다시 찾아와서 고치기 시작합니다.

앞으로 이스라엘 백성들의 형편은 어떻게 됩니까? 고멜처럼 될 것입니다. 나라는 망해버리고 이스라엘 백성들은 거의 대부분 전 세계에 흩어져 비참한 노예 생활을 하게 될 것입니다. 그런데 그들에게 들리는 소리가 무엇입니까? ‘오라. 우리가 여호와께 돌아가자’는 것입니다. 그 소리의 장본인이 누구입니까? 이미 한번 회복될 수 없을 정도로 가정이 파괴되어본 적이 있는 사람이었습니다. 한번 실패해 보았고 하나님의 능력으로 회복되어본 사람이 하는 말은 설득력이 있고 힘이 있습니다.

하나님은 어떤 분이십니까? 아무리 심하게 찢어지고 상하여서 형체를 알아볼 수 없게 되어 있어도 다시 회복시키실 수 있는 분이십니다.

여기서 ‘여호와께로 돌아간다’는 것이 무엇을 의미합니까? 이것은 마음의 상태를 바꾸는 것입니다. 지금까지는 하나님을 인정하지 않고 내 마음대로 살아왔습니다. ‘하나님은 하나님이고 나는 나’라는 식으로 살았습니다. 하나님없이도 얼마든지 행복할 수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형편없이 망하고 나니까 무슨 생각이 듭니까? ‘차라리 이렇게 될 줄 알았으면 그때 하나님이나 제대로 붙들걸’하는 생각이 드는 것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이렇게 비참하게 된 것은 누가 그렇게 하라고 해서 그렇게 된 것이 아닙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자기 능력을 과신한 것입니다. ‘우리가 다른 데 가면 이 정도는 못살겠나’하는 심정으로 하나님을 우습게 알았습니다. 너무나도 똑똑하고 잘났는데 하나님께서 자기들에게 아무 것도 못하게 하신다고 생각해서 하나님을 떨쳐버리고 자기 길로 갔습니다. 그 결과가 무엇입니까? 비참한 노예 상태였습니다.

한때 대기업체에서 무역 파트에 일하던 사람들 중에서 따로 나와서 오파상을 경영하다가 성공한 사람들도 많이 있지만 실패한 사람들은 더 많습니다. 그들은 대기업의 이름으로 사람들을 만나니까 참으로 자기에게 잘해주는 것입니다. 그리고 자기가 노력한 많은 이익금이 회사로 들어가게 되니까 자기 스스로 독립을 해 버립니다. 그러나 대기업체 있을 때에는 그렇게 잘해주던 사람들이 일단 독립을 하게 되면 완전히 관계가 변하는 것을 보게 됩니다. 아예 만나주려고 하지도 않습니다. 그 이유가 무엇입니까? 이제는 관계가 완전히 변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알거지가 된 사람들이 많았습니다.

주위에 있는 나라들이 이스라엘을 어느 정도 인정해준 것은 그들에게 하나님의 능력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무엇인가 신성한 것이 있었고 그들에게는 없는 고귀함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사실 그것은 하나님 때문에 그렇게 된 것인데 이스라엘 백성들은 자기가 똑똑해서 그렇게 된 줄 알고 하나님을 완전히 저버렸습니다. 아예 세상 사람들을 따라가 버렸습니다. 그러면 그들이 더 좋아할 줄 알았습니다. 그 결과가 무엇입니까? 완전한 사기꾼의 농간에 속아서 재산 다 잃고 빈털털이가 되어서 비참한 노예로 전락한 것입니다.

‘오라, 우리가 여호와께로 돌아가자’ 이 말이 무슨 말입니까? 이제 그들에게는 아무 소망이 없다는 것을 안 것입니다. 그들에게 남은 유일한 소망이 무엇입니까? 옛날 신앙으로 돌아가자는 것입니다. 물론 옛날과 같은 상태는 기대도 할 수 없습니다. 어떻게 뻔뻔스럽게 옛날의 그 상태를 요구할 수 있겠습니까? 기왕 망한 것 하나님이나 제대로 믿고 살자는 것이 ‘여호와께 돌아가는’ 것입니다.

이것은 마치 우리가 잘 아는 탕자 비유와 같습니다. 탕자는 자신의 능력을 과신하여 아버지의 재산을 챙겨 가지고 아버지 집을 떠났습니다. 그가 완전히 알거지가 된 후에 깨달은 것이 무엇입니까? 아버지 집으로 돌아가자는 것입니다. 옛날의 그 아들의 지위는 생각할 수도 없고 종의 하나라도 받아 달라고 하자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적어도 아버지 집에는 먹을 것은 있거든요.

오늘날 그래도 우리가 기를 펴고 사는 것은 하나님 안에 있기 때문입니다. 눈에 보이지 않는 하나님의 은혜가 우리를 지켜주시고 계시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이 울타리를 벗어나면 세상에서 마음껏 성공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이것이 바로 고멜을 망하게 한 것이고 이스라엘을 비참한 노예로 만들어서 전 세계에 흩어지게 된 것입니다.

사도 바울의 고백이 무엇입니까? ‘내게 능력 주시는 자 안에서 내가 모든 것을 할 수 있느니라’ 왜 능력을 주시지 않았는데 모든 것을 할려고 합니까?

그것이 망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완전히 망했어도 희망은 있습니다. 그것은 하나님께로 돌아가는 것입니다. 옛날 관계를 요구하는 것이 아닙니다. 그냥 하나님이나 바로 알고 죽으려고 하는 것입니다. 그러면 하나님의 치료가 이루어지기 시작합니다.

저는 제 형이 큰 심장 수술을 마친 직후 회복실에서 죽은 듯이 누워있는 그를 보았습니다. 그의 거의 죽은 것 같았습니다. 심장 수술은 세 가지였는데 안에 있는 판막을 금속으로 갈아 끼우고 심장이 비대해진 것을 잘라서 작게 만들고 그 안에 있는 피 덩어리를 꺼내는 것이었습니다. 너무 찢어지고 상한 상태에서 다시 살 수 있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러나 의사는 다시 살릴 수 있기 때문에 찢어 놓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치시는 것은 다시 우리를 싸매어 주실 수 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 돌아오면 어떻게 하십니까? 놀라운 속도로 회복시키십니다.

2절, “여호와께서 이틀 후에 우리를 살리시며 제 삼일에 우리를 일으키시리니 우리가 그 앞에서 살리라”

하나님은 어떤 분이십니까? 이틀 후에 살리시며 삼일만에 일으키시는 분입니다.&985168;이틀 후에 살리시며 제삼일에 일으키신다’는 것은 아주 빠른 시간 안에 치료하시고 회복시킨다는 뜻입니다. 어떤 사람은 제 3일에 일으킨다고 해서 예수님의 부활에 대한 예언이라고 주장하는 분들이 있습니다. 그러나 이것은 히브리인들이 사용하는 표현 방법을 잘 몰라서 그렇습니다.

아모스서에서도&985170;다메섹의 서너가지 죄로 인하여”라고 말씀하시는데 이것은 꼭 그들의 죄가 세가지 또는 네가지라는 뜻이 아닙니다. 이것은 몇 안되는 아주 작은 죄이지만 아주 중요한 것이며 결국 이것 때문에 하나님의 심판을 피할 수 없다는 뜻입니다. 그래서 여기서 ‘이틀 후에 살리시며 제삼일에 일으키신다’는 표현도 아주 짧은 시간 안에, 그것도 아주 긴박하게 하나님께서 회개하는 자들을 구원하셔서 다시 일으키신다는 뜻입니다. 이&985168;이틀과 사흘’은 너무나도 놀라운 이틀과 사흘입니다. 도저히 믿을 수 없는 일들이 이 짧은 시간 안에 일어나는데 나중에 나타나는 결과를 보면 모든 사람들이 놀라게 됩니다. 왜냐하면 거의 만신창이가 되어 도저히 다시 살 수 없었던 사람이 다시 놀랍게 재기해서 성공하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들에게 요구하시는 것이 무엇입니까? 이제는 더 이상 머리를 굴리지 말고 완전히 하나님의 뜻에 복종하라는 것입니다. 하나님 앞에 자신을 완전히 맡기기만 하면 하나님이 모든 것을 알아서 하십니다. 자르실 것은 자르시고 잡아매실 것은 잡아매시고 고치실 것은 고치십니다.

하나님의 구원은 상상할 수 없을 정도로 빠르고 신기한 방법으로 이루어집니다. 다른 사람들은 믿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이들이 너무나도 비참하게 되어 있고 너무나도 심하게 찢어져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말씀이 들리고 그 말씀 앞에 무릎꿇고 하나님의 얼굴을 구했을 때 나타나는 일은 너무나도 놀랍습니다.

“우리가 그 앞에서 살리라&985171;이 말씀은 우리가 그 앞에서 갖게 되는 당당한 자격을 의미합니다. 지금은 우리가 그 영광의 존전에서 쫓겨 났고 가장 비참한 자리에 있으며 다시 하나님의 얼굴을 뵐 것 같지 않지만 우리가 그 앞에서 살며 우리가 여호와 앞에서 영원히 살게 됩니다. 그리고 이제는 더 이상 다시는 세상으로 가지 말자는 것입니다.

마귀는 우리들에게 이렇게 속삭입니다.‘이 세상은 너무나도 신기한 것이 많고 배울 것도 많은데 하나님 앞에만 있으면 어떻게 하느냐?’라고 하면서 충동질합니다. 그러나 가장 존귀한 것이 무엇입니까? 하나님 앞에서 사는 것입니다.

이 세상은 그 찌꺼기 은혜로 사는 것입니다. 우리에게서 하나님의 남은 은혜가 흘러나가야 이 세상이 제대로 돌아갈 수 있습니다. 교회가 교회다운 것이 이 세상이 가장 복되게 되는 길입니다. 그런데 이 놀라운 복을 버리고 어디로 간단 말입니까? 사람들이 얼마나 미련한지 이 놀라운 축복들을 잃기 전에는 잘 깨닫지 못합니다.

세번째 권면이 무엇입니까? 힘써 하나님을 알자는 것입니다. 3절, “그러므로 우리가 여호와를 알자. 힘써 여호와를 알자. 그의 나오심은 새벽빛같이 일정하니 비와 같이, 땅을 적시는 늦은 비와 같이 우리에게 임하시리라 하리라.”

“여호와를 알자. 힘써 여호와를 알자”라는 말은 너무나도 숨가쁜 초청입니다. 이 말씀은 너무나도 진귀한 어떤 비밀을 알게 되었을 때 가까운 사람을 초청할 때와 같습니다. 눈을 한 쪽에 완전히 박아 두고서 다른 사람들에게 손짓하고 있습니다.

그것이 무엇입니까? 이 세상에서 가장 귀한 것이 무엇입니까? 하나님을 배우는 것입니다. 사실 이 세상에서 가장 어려운 것이 여호와를 아는 것입니다. 우리가 도대체 어떻게 여호와를 알 수 있습니까? 그것은 하나님께서 자신을 우리에게 나타내어 주셔야 우리가 하나님을 알 수 있습니다. 인격적인 존재는 자신이 스스로를 열어서 말하지 않는 이상 그 사람이 누구인지 우리는 모릅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말씀은 깊이 묵상해야 합니다. 왜냐하면 성경 말씀이야말로 하나님께서 자신을 열어서 우리에게 말씀하신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그 말씀을 붙들고 한번 살아보면 하나님이 얼마나 신실하신 분이시며 놀라운 분이신지 발견하게 됩니다. 하나님은 조용히 계십니다. 그러나 그 하시는 모든 일이 틀림이 없으십니다.

언제 하나님의 놀라운 성품이 더 들어납니까? 우리가 부족하고 연약할 때입니다. 도저히 살아날 수 없는 곤경에 처해 있을 때 하나님은 더 우리에게 분명하게 나타나십니다. 인간이 회복될 수 없는 어려움에 빠졌을 때 하나님의 은혜와 자비는 더 드러납니다.

오늘 본문에서 무엇이라고 말씀하고 있습니까? ‘그의 나오심은 새벽빛같이 일정하니 비와 같이 땅을 적시는 늦은 비와 같이 우리에게 임하시리라’

여기서 호세아는 두 가지 비유를 사용합니다. 우선 하나님은 새벽빛같이 일정하십니다. 무슨 말입니까? 밤이 깊어지면 다시는 새벽이 올 것 같지 않습니다. 영원히 밤만 계속될 것 같습니다. 사실 우리가 고난 가운데 빠져 있을 때 무엇을 생각합니까? 다시 새벽이 오지 않을 것 같은 생각이 듭니다. 영원히 이 고생이 계속 될 것 같습니다. 밤에 보초를 서는 사람은 새벽을 기다리는데 지칩니다. 아침이 오지 않을 것 같습니다. 그러나 아침은 너무나도 일정하게 찾아옵니다. 그처럼 하나님께서는 진심으로 하나님을 구하는 자에게 신실하게 나타나십니다. 우리는 의심이 됩니다. 불안합니다. 하나님께서 나의 기도를 들으시지 않을 것 같습니다. 그러나 진심으로 하나님의 얼굴을 구할 때 하나님은 나타나시지 않는 법이 없습니다. 하나님은 반드시 나타나십니다. 여러분 우리가 지금 드리는 기도는 절대로 헛되지 않을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기도할 마음을 주실 때에는 반드시 주실 축복이 예비되어 있습니다. 그런데 기도하지 않으면 그것이 다른 사람의 것이 되고 말 것입니다. 기도할 마음이 있고 기도할 기회가 있을 때에는 절대로 놓치지 마시기 바랍니다.

그 다음에는 이른 비와 늦은 비입니다. 팔레스타인의 기후는 비가 두 번 옵니다. 이른 비와 늦은 비입니다. 그 외에는 비가 오지 않습니다. 사람들은 비가 오지 않아서 밭이 타 들어가는 것을 보고 영원히 비가 오지 않을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놀랍게도 비가 내리기 시작합니다. 특히 늦은 비는 억수같이 쏟아지는 비입니다.&985168;땅을 적시는 늦은 비’라고 했는데 사실 이 비는 풍성한 비입니다. 도랑이 없던 곳에 도랑이 생기고 웬만한 것은 다 떠내려가게 하는 큰비입니다.

무슨 말씀입니까? 하나님께서는 회개하는 자에게 예외없이 자비로운 얼굴을 나타시며 예외없이 큰 은혜로 채워주신다는 뜻입니다.

2. 하나님이 원하시는 것

하나님께서 자기 백성들에게서 원하시는 것이 무엇입니까? 그것은 단 하나 밖에 없습니다. 오직 ‘인애’입니다.

이스라엘 자손들이 이렇게 된 이유가 무엇입니까? 4절, “에브라임아 내가 네게 어떻게 하랴? 유다야 내가 네게 어떻게 하랴? 너희의 인애가 아침 구름이나 쉬 없어지는 이슬같도다.”

‘내가 네게 어떻게 하랴?’고 물으시는 것은 다른 방법이 없다는 뜻입니다. 이런 방법이 아니고서는 다른 방법이 없다는 뜻입니다. 하나님께서 하실 수 있는 모든 방법을 다 동원해보았지만 그들에게는 다른 방법이 없었습니다.

에브라임은 이스라엘을 대표하는 지파입니다. 그들에게 인애가 없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그들에게 인애가 있는 것 같았습니다. 말하는 것을 보면 참으로 신실하게 약속을 지킬 것 같습니다. 그러나 돌아서서 보면 아닙니다. 그들의 약속은 ‘아침 구름’과 같았습니다. 너무나 가뭄이 심한데 아침에 구름이 잔뜩 끼어 있습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소망을 가졌습니다.&985168;이처럼 많은 구름이 생겼으니까 오늘은 비가 오겠지.’ 그러나 구름은 몇 십분을 가지 않습니다. 해가 떠오르니까 구름은 금방 사라져 버렸습니다. 구름이 아니고 아침 안개였던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들이 회개하고 뉘우치는 모습을 보고서&985168;참으로 그들에게서 어떤 결과를 기대할 수 있겠구나!’라고 생각하면서 소망을 가지셨습니다. 그러나 조금 지나보면 아무 것도 없습니다. 그들은 변한 것이 아무 것도 없었습니다.

이스라엘이나 유다가 회개하는 것 같은 눈치가 전혀 없었던 것이 아닙니다. 오히려 그들은 매번 회개하는 것 같았습니다. 그러나 그것이 몇 십분, 몇 시간을 가지 않았습니다.

그 이유가 무엇입니까? 하나님을 모르기 때문입니다.&985170;우리가 여호와를 알자 힘써 여호와를 알자”라고 소리치는 이유가 여기에 있습니다. 그들은 하나님이 자기들의 실제적인 부분을 돕지 못하는 것으로 생각했습니다. 그들의 신앙은 세상과 하나님을 대립상태에 놓았습니다. 하나님은 성전 안에만 계시고 이 세상일은 이 세상방식으로 살아야 된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러니까 성전 안에서는 인애가 있는데 성전 문만 나서면 인애가 없어지는 것입니다. 그들이 하는 말이 무엇입니까? ‘ 이 세상에서 돈이 없으면 누가 줍니까? 내가 뛰어다녀야지요. 하나님의 응답은 너무 늦어요.’라고 대답합니다. 하나님의 능력은 예배 시간에만 통하고 실제적인 삶에는 소용이 없다고 생각하니까 마음이 조급해질 수밖에 없습니다. 좀 하나님께서 응답해주시도록 기다리고 있어야 하는데 너무나도 빨리 세상적인 방법으로 돌아서더라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신앙이 지속적이지 않습니다. 냄비 신앙이라는 말입니다.

그 이유는 하나님의 능력을 믿지 않기 때문입니다. 그분의 능력을 제한하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 뭐라고 말씀하십니까? 6절, “나는 인애를 원하고 제사를 원치 아니하며 번제보다 하나님을 아는 것을 원하노라.”

이것은 하나님께서 예배를 기뻐하시지 않는다는 뜻이 아닙니다. 예배와 생활을 분리시키지 말라는 뜻입니다. 실제 생활에서는 하나님을 인정하지 않고 자기 머리로 살면서 예배는 그럴 듯하게 드림으로 스스로 위안 받으려고 하는 것은 거짓된 예배입니다. 예배라고 하는 것은 생활의 열매를 그대로 하나님께 거지고 나아오는 것입니다. 승리했으면 그 기쁨을 하나님께 드리고 실패했으면 그 실패한 것을 그래도 하나님 앞에 내어놓는 것입니다.

그것이 없는 예배는 우리 자신을 속이는 것 밖에 되지 않습니다. 예배를 드렸기 때문에 무엇인가 새 힘이 생길 것 같은데 그렇지 않습니다.

무엇이라고 말씀하십니까? 7절, “저희는 아담처럼 언약을 어기고 거기서 내게 패역을 행하였느니라.”

여기서 처음으로 아담이 하나님의 언약을 깨뜨렸다는 말이 나옵니다. 여기의 아담이 인류의 시조가 아니라 다른 아담이라는 해석이 몇몇 있습니다. 어떤 사람은 아담이라는 장소의 말한다고 하고 어떤 사람은 일반적인 사람을 의미한다고 합니다. 그러나 모든 정황을 살펴볼 때 이 ‘아담’은 바로 창세기의 그 아담입니다.

창세기에는 아담이 하나님과 언약을 맺었다는 말은 없습니다. 물론 하나님께서 아담에게 명령하셨지만 ‘언약’이라는 뜻의&985168;베리트’라는 단어가 나오지 않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과 아담이 맺은 것은 ‘언약’이었습니다. 이것은 영원한 생명을 건 언약이었습니다. 그러나 아담은 하나님과의 언약에 있어서 너무나도 불성실했습니다. 이 말은 그 언약은 아담이 지킬 수 없는 불가능한 약속이 아니었다는 것입니다. 만약 아담이 하나님이 어떤 분이신지 충분히 생각하고 있었더라면 이런 식으로 범죄하지는 않았을 것이라는 뜻입니다. 다시 말해서 아담은 너무 좋은 환경에서 언약을 어겼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이런 배신을 이스라엘과 유다 안에서 보시고 계십니다. 그들이 하나님께 범죄하는 것은 하나님께서 너무 무리한 것을 요구하셨기 때문이 아닙니다. 그들이 지키려고 마음만 먹었더라면, 그들이 과연 하나님이 어떤 분이신지만 생각하고 있었더라면 얼마든지 지킬 수 있는 언약이었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아담처럼 언약을 어기고 거기서 하나님께 패역했습니다.&985168;거기’라는 것은 약속의 땅 가나안을 의미한다고 생각됩니다. 마치 아담이 낙원에서 범죄했듯이 그들이 약속의 땅에서 범죄함으로 하나님의 땅을 더럽혀 놓았습니다.

그런데 잘 연결되지 않는 것 같은 말씀이 5절 말씀입니다.&985170;그러므로 내가 선지자들로 저희를 치고 내 입의 말로 저희를 죽였노니 내 심판은 발하는 빛과 같으니라.”

무슨 뜻입니까? 제 생각으로는 하나님께서 선지자들을 통하여 하신 말씀을 정말 제대로 들었다면 그 말을 듣고 그 자리에서 거꾸러지지 않을 수 없는 말씀들이었다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아주 강한 말씀을 보내셨고 거의 죽을 정도로 그들을 치셨습니다. 정말 제대로 된 사람이 이 말씀을 들었다면 도저히 한 순간도 견딜 수 없는 무서운 말씀들이었습니다. 마치 빛이 모든 것 속으로 파고 들어가서 다 밝혀 놓는 것 같은 말씀이었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이 말씀을 무시하고 반역했기 때문에 이처럼 멸망당하게 됩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결코 약한 말씀이 아닙니다. 무시무시한 말씀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을 두려워하지 않는 자들에게는 아무 소용이 없습니다. 무슨 뜻입니까? 하나님의 말씀을 두려워할 줄 알아야 한다는 말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두려워하지 않는 자에게는 아무런 대책이 없습니다.

에브라임과 유다는 말로 하는 것을 두려워하지 않았습니다. 무엇인가 눈에 보이는 재앙이 일어나지 않고 말로만 하는 것은 아무 소용이 없었습니다. 이것이 그들의 성실하지 못한 모습입니다. 신실한 사람은 모든 것이 말로 끝납니다. 긴 이야기를 할 필요가 없습니다. 말 한마디만 들어도 그렇게 마음이 아플 수가 없습니다. 그것이 정상입니다. 굳이 매를 들지 않아도 이 분이 이 정도로 말씀해야 할 정도라면 얼마나 고민하고 말씀하시는 것일까 정도는 생각을 해야 한다는 뜻입니다.

3. 이스라엘의 숨은 죄

하나님께서 한편으로는 용서의 말씀을 하시면서 다른 한편으로는 이스라엘의 또 다른 죄를 끄집어내시는 것은 바로 이런 죄들이 온전히 청산되지 않는 이상 하나님의 은혜를 진정으로 누릴 수 없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 지적하시는 것은 두 가지입니다. 하나는 이스라엘 제사장들의 죄이고, 다른 하나는 이스라엘에 깊이 뿌리 박힌 음행이었습니다. 한가지는 너무나도 깊이 감추어진 죄라서 고쳐지기 어렵고, 다른 하나는 너무나도 보편화되어서 치료되기 어렵습니다.

먼저 제사장들의 죄를 보십시요. 제사장들의 이 죄는 전혀 알려져 있지 않은 죄인 것 같습니다.

8-9절, “길르앗은 행악자의 고을이라. 피 발자취가 편만하도다. 강도떼가 사람을 기다림같이 제사장의 무리가 세겜 길에서 살인하니 저희가 사악을 행하였느니라.”

여기서 길르앗이나 세겜은 도피성의 하나입니다. 길르앗은 요단 동편에 있고 세겜은 요단 서편에 있습니다. 요단을 중심으로 이쪽과 저쪽에 도피성이 있고 그곳을 제사장들이 지켰습니다.

도피성이 무엇을 하는 곳입니까? 의도적인 살인이 아니라 부지불식간에 살인을 행한 자가 피하여 생명을 보전하는 곳입니다. 살인을 행한 자가 그곳으로 피하면 그곳에 있는 제사장은 그 죄를 심사하여 진정으로 의도적인 살인이 아니면 그 사람을 그곳에 보호하여 살게 합니다. 대제사장이 죽을 때까지 그는 거기서 살 수 있습니다.

그런데 길르앗과 세겜에서 어떤 일이 있었습니까? 이스라엘은 쿠데타가 자주 일어났고 그때마다 보복을 두려워한 많은 사람들이 길르앗이나 세겜으로 도망쳐서 도움을 청했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모두 죽었습니다. 그 이유는 그곳에 있는 제사장들이 청부살인업자들이었기 때문입니다. 제사장이기 때문에 안심하여 믿고 피했습니다. 그러나 거기에 피한 자들은 여지없이 죽임을 당했습니다. 어떻게 죽었는지 사람들은 알지 못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알고 계셨습니다. 제사장의 무리가 사람을 죽이기 위하여 길에서 매복하고 있었던 것을 하나님은 알고 계셨습니다. 그들은 죄인을 아끼지 않았습니다. 돈을 받고 죄인들을 넘겨주었습니다.

특히 도피성은 그리스도의 예표입니다. 마땅히 죽을 수 밖에 없는 죄인이 이 안에 피함으로 대제사장과 생명이 연합되어 대제사장이 죽을 때까지 이 안에 삽니다. 놀랍게도 대제사장이 죽으면 석방됩니다. 이것은 그리스도가 죽음으로 모든 정죄에서 해방되는 것과 같습니다.

이스라엘의 제사장은 돈을 좋아했습니다. 그러니까 돈을 받고 도피한 사람들을 원수들에게 넘겨주는 일을 했습니다. 그러나 이런 일이 워낙 은밀하게 행해지고 있었기 때문은 사람들은 잘 알지 못했습니다. 그러나 제사장이 돈을 좋아하면 이스라엘 백성들의 죄가 해결될 수가 없습니다. 돈을 받고 사람을 넘겨주는 사람들의 입에서 무슨 설교가 나오겠습니까? 그들의 입에서 용서하라는 말이 나오겠습니까? 죄를 회개하라는 말이 나오겠습니까?

특히 오랫동안 신앙생활을 한 사람이나 직분자들은 그것을 위장하는 능력을 가지고 있습니다. 처음 믿는 자는 잘못한 것이 다 드러납니다. 그러나 믿은지 오래 되고 중요한 직책을 맡은 자일수록 죄를 은폐하고 감추는 능력이 있습니다. 그래서 아무도 모르게 감쪽같이 숨깁니다. 나중에 문제가 터졌을 때에는 이미 회복할 수 없을 정도로 썩어버린 뒤입니다. 어떻게 하든지 교회는 돈과는 깨끗해야 합니다. 교회를 통해서 이익을 챙기려고 해서는 안됩니다. 교회에 절대로 무슨 이권 관계가 오고가서는 안됩니다. 오로지 죄인들이 하나님을 만나고 예배하는 곳이 되어야 합니다. 다른 사람들은 모두 교회에서 몸 바쳐 봉사하고 애를 써서 헌금을 하는데 이익을 보려고 하면 저주를 받습니다. 공사를 따내려고 로비를 하고 해서는 안됩니다. 무슨 이권을 챙기려고 하면 큰 일 납니다.

두번째로는 일반 백성들의 보편화된 음란입니다. 10절, “내가 이스라엘 집에서 가증한 일을 보았나니 거기서 에브라임은 행음하였고 이스라엘은 더럽혔느니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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