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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거짓된 회개 (호 07:1-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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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짓된 회개(호 7:1-16 )

얼마 전에 여자 중학생 두 명이 고층 아파트에서 떨어져 같이 죽었습니다. 신문에서는 가정 형편이 어려운 것을 비관해서 동반 자살한 것으로 보도를 했습니다. 그러나 진짜 이유는 이 두 소녀가 윤락 행위를 하다가 붙들려서 경찰에 입건되었는데 그것이 알려질까봐 두려워서 자살을 한 것으로 알려졌습니다. 너무나도 마음이 아팠습니다. 그 아이들은 이제 자기 인생은 끝났다고 생각한 것입니다. 물론 거의 끝났지만 그래서 가능성이 없는 것은 아니었는데 말입니다.

우리 몸이 아파서 병원에 의사를 찾아가서 치료를 받으려고 하면 아픈 증세를 자세하게 이야기해 주어야 합니다. 만약 그렇지 않고 자꾸 속이거나 거짓말을 하면 의사도 도와주기 어렵습니다. 물론 요즘은 의학이 워낙 발달해서 대충 이야기를 듣고 종합검사를 해보면 어느 곳이 문제가 있는지를 알 수 있습니다. 그러나 어떤 사람은 병원까지 와놓고서도 의사에게 아프지 않다고 말하고 한사코 아픈 곳을 보이지 않으려고 합니다. 지금 상태가 심각한데도 여유를 가지고 엉뚱한 소리만 말하면 의사도 어디가 아픈지 정확하게 알기가 어렵습니다.

그러나 죄 문제는 더 심각합니다. 어떤 죄에 깊이 빠져 있으면서도 일단 다른 사람들이 모르고 있으면 얼마든지 감출 수 있기 때문에 말을 하지 않고 가만히 있습니다. 특히 어떤 문제를 가지고 어려움을 호소하더라도 정말 중요한 부분은 빼놓고 엉뚱한 것만 가지고 말을 합니다. 그래서 겉으로 보기에는 큰 문제가 없는 것 같은데 이미 그 사람의 속은 너무 타버려서 고치는 것이 불가능하게 되어버린 경우가 많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 백성들의 상태가 바로 그러했습니다. 솔직하게 모든 것을 다 밝혔으면 설사 징계를 당하고 고통을 받는다 하더라도 다시 일어날 수가 있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끝까지 가장 중요한 핵심적인 죄를 말하지 못하는 것입니다. 그 결과 이스라엘의 양심은 완전히 시커멓게 타버려서 고칠 수가 없게 되어버렸습니다.

1. 빵 굽는 자의 화덕 이야기.

오늘 본문의 뛰어난 점은 호세아의 비유입니다. 호세아는 이스라엘 백성들의 문제를 진단하면서 세 가지 비유를 사용하고 있습니다. 그 첫 번째 비유가 빵 만드는 자의 화덕 비유입니다. 특히 빵 만드는 자의 화덕의 특징이 무엇입니까? 밤에는 불을 죽여 놓습니다. 옛날에는 불을 한번 끄트리면 다시 붙이기가 어렵기 때문에 불을 사용하지 않을 때에도 완전히 불을 끄지 않습니다. 그러다가 아침에 빵을 구울 때에는 그 불을 최고의 수준까지 높여 놓는 것입니다.

1절,&985170;내가 이스라엘을 치료하려 할 때에 에브라임의 죄와 사마리아의 악이 드러나도다. 저희는 궤사를 행하며 안으로 들어가 도적질하고 밖으로 떼지어 노략질하고”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 백성들의 병을 치료하려고 하십니다. 그리고 어떻게 해서든지 치료해서 다시 살게 하시기를 원하십니다. 그런데 이스라엘을 치료하려고 하면 할수록 드러나는 것이 무엇입니까? 그들의 숨은 죄들이었습니다. 다시 말해서 그들은 하나님 앞에 나와서 회개하면서도 거짓말을 하더라는 것입니다. 어떤 문제가 있어서 손을 대려고 하면 그것은 문제의 축에도 들지 못하고 더 심각한 문제가 또 숨어 있는 것입니다. 결국 그들은 의사 앞에 치료받으러 왔으면서도 거짓말하는 환자와 같습니다. 의사가 어떤 환자를 진찰하면서 ‘어디가 아파서 왔습니까?’라고 묻습니다. 그러니까 환자가 어디 어디가 아프다고 말하는데 보니까 사실은 그것도 거짓말이고 진짜 아픈 데는 감추고 끝까지 말을 하지 않더라는 것입니다.

‘저희는 궤사를 행하며 안으로 들어가 도적질하며 밖으로 떼지어 노략질하며’

여기서 ‘궤사’라고 하는 것은 ‘의도적인 거짓말’ 혹은 ‘사기’를 말합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늘 하나님 앞에 흉년이 들어서 농사가 안되었다고 울쌍이고 장사가 안되어 밑천을 다 날렸다고 불평을 합니다. 그러나 그들의 문제 안을 들여다보면 ‘궤사’가 문제였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가장 중요한 것은 땅이었습니다. 이 땅은 하나님께서 각자에게 주신 기업이기 때문에 매매의 대상이 되지 못했습니다. 그러나 이스라엘 백성들은 남의 땅을 차지하기 위하여 거짓을 만들었습니다. 거기 살았던 사람을 살지 않았다고 하고 아직 살아있는 사람을 죽었다는 식으로 문서를 꾸며서 하나님의 기업을 빼앗았습니다. ‘안으로 들어가며 도적질하고 밖으로 떼지어 나가며 노략질한다’고 했는데 이것은 한두 사람이 그렇게 한 것이 아니라 여러 명이 한 통속이 되어서 무리를 지어서 안팎으로 들락거리면서 이웃의 재산을 빼앗았다는 뜻입니다.

이스라엘의 모든 문제를 땅에서부터 시작되었습니다. 다른 사람의 땅을 차지하려는 욕심을 버리지 않는 한 이스라엘의 문제를 해결될 수가 없었습니다. 다른 모든 문제는 모두 지엽적인 것에 불과했습니다.

예를 들어서 한때 우리 나라에서 기업 하는 사람들의 문제가 금리에 있었습니다. 아무리 돈을 벌어도 금리가 높으니까 벌어들인 것을 모두 이자로 다 나갈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래서 IMF가 터진 후 정부는 지속적으로 저금리 정책을 펼쳐 나갔습니다.

2,3절,“내가 그 여러 악을 기억하였음을 저희가 마음에 생각지 아니하거니와 이제 그 행위가 저희를 에워싸고 내 목전에 있도다. 저희가 그 악으로 왕을, 그 거짓말로 방백들을 기쁘게 하도다”

이제 우리는 대략 그 원인이 어디에 있는지 알 수가 있습니다.

다른 나라와 이스라엘은 다른 점이 있었습니다. 그것은 다른 나라는 모두 땅이 왕의 것이었습니다. 국가는 왕의 소유였습니다. 그래서 왕이 백성들에게 땅을 빌려주고 막대한 세금을 받아내었습니다. 그런데 이스라엘은 각자가 자기 땅을 가졌습니다. 그러니까 세금이나 모든 부분에서 왕이 마음대로 백성들을 부릴 수가 없었습니다. 그래서 이스라엘의 왕이 한 것이 무엇입니까?

방백들을 동원해가지고 백성들의 땅을 하나씩 하나씩 빼앗아 왕의 것으로 만든 것입니다. 이것은 다른 말로 표현하면 하나님의 나라와 세상 나라의 구별을 없애버린 것입니다. ‘왜 이 나라 백성들만 이렇게 행복해야 하느냐’하는 것입니다. 다른 나라 백성들은 모두 왕에게 쩔쩔 매고 모든 것을 다 갖다 바치는데 유독 이스라엘 백성들만 그렇게 하지 않는 것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에게는 왕도 한 형제였습니다. 그는 하나님을 대신해서 통치할 뿐이지 절대적인 존재가 아니었습니다. 그래서 이스라엘의 왕이나 방백들이 한 것이 무엇인가 하면 세상의 방식을 동원해서 이스라엘을 다른 나라와 똑같이 만든 것입니다. 그러니까 모든 것을 왕 마음대로 할 수 있었습니다. 왕과 방백만 짜면 못할 것이 없었습니다.

5절,“우리 왕의 날에 방백들이 술의 뜨거움을 인하여 병이 나며 왕은 오만한 자들로 더불어 악수하는도다”

여기서 ‘우리 왕의 날’이라고 하는 것은 왕의 생일이나 즉위일을 의미합니다. 그 날에 방백들은 얼마나 술을 마셨는지 술독으로 병이 난다는 것입니다. 왜 그렇게 기뻐하고 있습니까? 하나님께서 주신 땅을 다 빼앗아서 이스라엘을 세상 나라와 똑같이 만들어놓았기 때문에 서로 기뻐서 축하를 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이스라엘의 일차적인 문제는 이스라엘과 세상의 근본적인 차이가 하나도 없어진 것입니다. 이스라엘은 이스라엘로서의 특징이 있는데 세상의 원리가 들어와서 이스라엘을 완전히 세상처럼 바꾸어 놓아버렸습니다.

이스라엘의 특징은 말씀이 지배하는 구조입니다. 왕이나 방백은 리더에 불과했습니다. 말씀을 실천하고 적용하는 것을 도와주는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들이 여기 저기 몰려다니면서 자기의 것을 챙길 성질의 것이 아니었습니다.

그러니까 어떻게 됩니까? 이스라엘은 모두 강자만 남게 되는 것입니다. 약한 사람은 아무도 여기에 살아 남을 수가 없었습니다.

하나님의 나라는 약한 자도 공존할 수 있어야 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오히려 약한 자들 때문에 강한 자들까지 은혜를 주십니다. 저희 교회에 가난한 자도 많고 장애인들도 많이 계십니다. 그런 분들이 마음껏 하나님을 믿을 수 있어야 하나님께서 강한 자들까지 은혜를 주시는 것입니다. 그러나 약한 자들이 있을 수 없는 이스라엘은 더 이상 치료할 가치가 없는 이스라엘이었습니다.

그러나 지금까지 이야기된 것은 이스라엘의 사회적인 현상이었습니다. 호세아는 여기서 한 걸음 더 나아가 심리적인 진단을 합니다.

4절, “저희는 다 간음하는 자라 빵 만드는 자에게 달궈진 화덕과 같도다.”

호세아는 이스라엘 백성들의 상태를 빵 만드는 자의 화덕으로 비유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이 당시의 빵 굽는 습관에 대하여 잘 모릅니다. 그런데 이스라엘 사람들은 빵을 구울 때 대개 마을 단위의 공동으로 빵을 굽습니다. 왜냐하면 불을 관리하기가 어렵기 때문입니다. 요즘이야 불을 껐다 켰다 하기가 쉽지만 이때에는 불을 한번 꺼뜨리면 불을 지피는 것이 여간 어려운 일이 아니었습니다. 그래서 아예 빵을 만드는 사람이 따로 있어서 화덕을 쓰지 않을 때에는 불을 좀 약하게 해놓았다가 빵을 구울 때에는 불을 잔뜩 지펴서 빵을 굽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 백성들의 상태를 간음하는 여자로 보십니다.

‘저희는 다 간음하는 자라 빵 만드는 자의 달궈진 화덕과 같도다’

빵 만드는 자의 화덕은 불이 꺼지는 법이 없습니다. 마찬가지로 이스라엘 백성들의 정욕도 절대로 완전히 꺼지는 법이 없었습니다. 잠시 잠잠해보이지만 그것이 근본적으로 해결된 것이 아니었습니다. 잠시 눈치를 살피느라고 욕심을 내어 보이지 않는 것이지 틈만 나면 얼마든지 불을 피울 수 있었습니다.

4절 하반절을 보십시요.&985170;저가 반죽을 뭉침으로 발교되기까지만 불 일으키기를 그칠 뿐이니라.”

마치 빵 만드는 사람이 반죽할 때 반죽이 발효할 때까지 불을 좀 낮추어 놓는 것처럼 잠시 불을 낮추어 놓은 것뿐입니다. 무엇인가 계획을 세우고 있고 무엇인가 음모를 꾸미고 있기 때문에 조용한 것이지, 마음의 욕심이 완전히 없어진 것이 아닙니다.

6절을 보십시요.&985170;저희는 엎드리어 기다릴 때에 그 마음을 화덕같이 예비하니 마치 빵 만드는 자가 밤새도록 자고 아침에 피우는 불의 일어나는 것 같도다.”

조용하던 것은 잠깐이고 금방 다시 불이 올라오는데 빵 만드는 사람이 밤에 불을 낮추어 놓았다가 아침에 맹렬히 불을 올리는 것과 같습니다.

그러면 이스라엘 백성들 가운데 자리잡은 이 정욕의 불길이 도대체 무엇입니까? 이것은 여러 가지였습니다. 성욕도 있고 분노의 불길도 있고 재물에 대한 탐욕도 있었습니다.

하나님의 백성의 특징이 무엇인가 하면 바로 이런 욕망의 불길을 죽일 수 있는 제도를 가진 사람들입니다. 하나님의 백성들이라고 해서 완전히 화도 내지 않거나 정욕이 없거나 재물에 대한 욕심이 없는 것은 아닙니다. 그들의 마음속에도 언제나 이런 욕망이 잠재되어 있습니다. 그러나 이런 욕망보다 더 강한 것이 성령의 불길입니다. 성령께서 이런 욕망들을 누르셔서 결코 행동에까지 가지는 못하게 하십니다. 그런데 이스라엘 백성들은 전혀 자기들의 성질이나 욕망을 죽이지 못하는 자들이었습니다. 한번 생각을 하면 반드시 해내어야 직성이 풀리는 자들이었습니다.

7절,&985170;저희가 다 화덕같이 뜨거워져서 그 재판장들을 삼키며 그 왕들을 다 엎드러지게 하며 저희 중에는 내게 부르짖는 자가 하나도 없도다.”

결국 이스라엘의 문제는 불을 잘 다루지 못한데서 있습니다. 그들이 자신의 정욕을 다룰 수 있었더라면 전쟁도 막을 수 있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자기 욕망의 불을 다스리지 못하니까 그 불이 뜨거워져서 자기 재판장도 삼키고 왕들도 삼키고 나라 전체도 망하게 하더라는 것입니다.

결국 이렇게 된 이유가 어디에 있습니까? 하나님을 두려워하지 않은 것입니다. 하나님을 두려워하는 사람은 욕망을 마음껏 키우지 못합니다. 왜냐하면 그 모든 것을 하나님이 보고 계신다는 것을 알기 때문입니다. 완전할 수는 없지만 하나님이 진노하시기 전에 먼저 자기가 하나님 앞에 나아가서 무풀을 꿇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을 두려워하지 않는 사람은 마음껏 욕망을 키웁니다. 그러면 결국 욕망이 그를 잡아 먹어버리는 것입니다.

이스라엘의 근본적인 죄가 무엇입니까? 그것은 하나님이 주신 것만으로는 만족할 수 없는 것이었습니다. 자기의 것은 너무나도 작아보였습니다. 그들은 다른 사람의 것만 보면 속에서 불같은 것이 치밀어 올랐습니다. 눈에 보이는 모든 땅이 자기 것이 될 것 같습니다.

하나님을 두려워하지 않으면 이 세상에서 하지 못할 일이 없습니다. 마치 이 세상은 주인 없는 땅처럼 보입니다. 머리가 좋고 돈이 있는 사람은 무엇이든지 자기 마음대로 할 수 있는 세상입니다. 그것이 무엇입니까? 화덕의 불입니다.

너무 너무 시간이 모자랍니다. 왜냐하면 조금만 더 시간이 있고 힘이 있으면 좀 더 많이 가질 수 있다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만족을 모르는 세상입니다. 그러나 잊어버리고 있는 것이 무엇입니까? 침묵 가운데 이 모든 것을 조용히 지켜보고 계신 분이 있다는 사실입니다. 모든 것이 다 하나님의 것이고 하나님께서 잠시 빌려주신 것뿐인데, 인간들은 마치 이 모든 것이 영원히 자기의 것이 될 수 있는 것처럼 속에서 분노로 서로 차지하려고 합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도로 찾으시는 날에 모두 한 순간에 망하고 말 것입니다.

오늘 하나님께서 우리 이방인들을 택하셔서 하나님의 백성으로 삼으신 이유가 무엇입니까? 온 세상을 축복하는 은혜의 통로가 되도록 하기 위해서입니다. 우리들은 우리 자신을 위해서 존재하는 자들이 아닙니다. 우리는 우리 자신을 위하여 존재하지 않습니다. 모두 남을 위하여 존재하는 것이고 은혜의 통로가 되기 위하여 존재합니다.

그러나 실상은 어떻습니까? 믿는 자들도 세상 사람들과 다를 바가 없습니다. 예배 시간은 조용한 것 같은 데 예배만 끝나면 자기 욕망을 향하여 달려갑니다. 조용히 예배드릴 때 무엇인가 회개하는 것 같지만 천만의 말씀입니다. 잠시 숨을 돌리고 있을 뿐입니다. 기회만 주어지면 하나님의 은혜는 다 저버리고 그냥 세상을 향하여 달음질합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 그냥 우리를 교회에 불러 놓기만 하시면 이것은 실패입니다. 불구자를 만들든지 폐인을 만들어 놓아야 합니다. 사회적인 불구자나 정신적인 폐인이 되지 않으면 정말 자신의 문제를 하나님 앞에 고백하면서 은혜를 달라고 매달리지 않습니다.

그래서 가장 은혜받는 자들이 아예 세상적으로 이런 음모를 세울 수조차 없을 정도로 실패한 사람들, 잠시 정욕의 불을 낮춘 상태에 있는 것이 아니라 아예 세상적으로 가능성이 끝나버린 사람, 그런 사람이 복받은 자입니다. 왜냐하면 그 사람은 하나님을 떠날 이유가 없기 때문입니다.

2. 뒤집지 않은 전병

8절,“에브라임이 열방에 혼잡되니 곧 뒤집지 않은 전병이로다”

‘전병’이라고 하는 것은 얇게 구운 과자같은 떡을 말합니다. 전병을 구울 때에는 이쪽 저쪽을 잘 구워서 골고루 익도록 해야 합니다.

그런데 이스라엘은 뒤집지 않은 전병입니다. 한쪽만 보면 아주 맛이 있을 것 같습니다. 그러나 뒷쪽은 완전히 타버렸거나 아니면 아직 전혀 익지 않은 모습입니다. 하나님은 이것을 에브라임의 혼잡이라고 말씀하십니다.

이것이 무엇을 의미합니까? 하나님 앞에 바쳐진 전병은 이스라엘의 전적인 헌신을 의미합니다. 그들은 하나님께서 주신 첫 곡식을 빻아서 하나님께 바쳤습니다. 이 바쳐진 떡은 이스라엘 자신을 의미합니다. 이것은 그들이 하나님이 주신 것으로 살며 하나님 앞에 바쳐진 삶을 사는 자라는 뜻입니다.

그런데 어느 순간부터 이상한 떡을 드리기 시작했습니다. 이 떡은 앞뒤가 달랐습니다. 떡은 떡인데 먹을 수 없는 떡이었습니다. 왜냐하면 한쪽은 아직 익지도 않았고 다른 쪽은 새카맣게 타버렸기 때문입니다.

이것은 이스라엘의 외교정책을 두고 하는 말씀입니다. 이스라엘은 유일하신 하나님을 믿음으로 존재합니다. 그러나 그들이 눈에 보이는 물질을 사랑하니까 눈에 보이지 않는 하나님을 믿을 수가 없었습니다. 그러니까 자꾸 세상적인 동맹관계를 통하여 나라를 유지하려고 했습니다. 그러나 이런 동맹은 자꾸 이스라엘에게 무리한 요구를 했습니다. 이스라엘의 국력은 바로 이런 동맹관계 때문에 시들어 가고 있었습니다. 가만히 있으면 돈이 들지 않을텐데 인간적인 방법으로 관계를 안전하게 하려고 하니까 자꾸 돈이 들고 국력은 쇠하여져 갔습니다.

예를 들어봅시다. 어떤 교인이 있는데 신앙이 아주 좋은 것처럼 보였습니다. 늘 기뻐하는 것 같고 입만 벌리면 하나님의 은혜가 감사하다고 말합니다. 또 이런 저런 행사가 있으면 돈도 척척 내놓습니다. 다른 사람들이 보기에는 정말 하나님께서 이 사람을 축복하셔서 그렇게 여유가 있는 줄 알았습니다. 그런데 알고 보니 이 사람은 빚으로 살고 있었습니다. 기왕 남의 돈을 쓰는 것이니까 무조건 쓰고 보자는 식이었습니다. 바로 이런 삶이 뒤집지 않은 전병입니다. 이쪽의 모습과 저쪽의 모습이 다릅니다. 겉으로는 은혜스러워 보이지만 실제로는 빚과 이자가 눈덩이처럼 불어나고 있고 실속이 하나도 없습니다. 결국 나중에는 어떻게 됩니까? 도망치는 수밖에 없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의 실제가 바로 이랬습니다. 겉으로는 나라가 유지되고 있습니다. 그러나 실제로는 다른 나라와 동맹을 맺어서 그 조공을 갚느라고 국고가 탕진되었습니다. 빚으로 사는 나라였습니다.

9절, “저는 이방인에게 그 힘이 삼키웠으나 알지 못하고 백발이 얼룩얼룩할지라도 깨닫지 못하는도다.”

이스라엘의 힘은 이미 이방인에게 삼키웠습니다. 그들이 지탱되는 것은 성령의 능력이 아니었습니다. 인간이 만들어 놓은 외교적인 관계 때문에 지탱되었습니다. 그러나 그들의 힘은 이미 다 빠졌습니다. 더 이상 지탱할 능력이 없습니다.

어떤 사람이 힘을 다 탕진하니까 갑자기 머리에 흰머리가 많이 났습니다. 그러나 자신은 그것을 알지 못하고 여전히 옛날처럼 힘이 있는 것처럼 생각합니다.

교회의 능력이 어디에 있습니까? 조직의 힘에 있습니까? 아니면 성령의 능력에 있습니까? 그러나 많은 경우 성령의 능력보다는 눈에 보이는 것을 더 의지합니다. 왜 교회가 더 커져야 합니까? 이미 구조가 커져 버렸기 때문입니다. 그 큰 구조가 유지되려면 자꾸 자꾸 커지지 않으면 안됩니다. 이것이 교회의 모순입니다.

교회의 생명은 성령의 능력에 있습니다. 성령의 능력을 잃어버린 교회는 이미 머리가 하얗게 센 사람과 같습니다. 아무 힘을 쓰지 못합니다. 그저 현상유지만 하는 것이지요.

하나님께서 무엇이라고 책망하십니까? 10절, “이스라엘의 교만은 그 얼굴에 증거가 되나니 저희가 이 모든 일을 당하여도 그 하나님 여호와께로 돌아오지 아니하며 구하지 아니하도다.”

교회가 이 정도로 되면&985168;정말 큰 일 났구나!’싶어서 하나님께 돌아와서 기도하고 바른 능력을 회복시켜 달라고 간구하여야 할텐데 그렇게 하는 사람이 없다는 것입니다. 그 이유가 무엇입니까? 당장 어떤 일이 일어나지 않기 때문입니다. 일단 하루하루는 버틸 수 있기 때문입니다. ‘나중에 어떻게 되겠지’하는 식으로 넘어가고 있습니다.

‘그 하나님 여호와께로 돌아온다’는 것이 무엇을 의미합니까? 여기서 ‘돌아온다’는 단어가 아주 중요한 단어입니다. 이스라엘을 완전히 제로(zero)상태에 놓고 새로 시작하는 것입니다. 아니 완전히 망했다고 생각하고 하나님의 처분에 모든 것을 다 맡기는 것입니다. 죄를 지은 사람이 무슨 권리가 있고 무슨 체면이 있습니까? 다른 사람들의 모욕이나 창피를 무릎쓰고 자기가 현재 누리고 있는 지위나 체면을 다 포기하고 오직 하나님의 처분에 맡기는 것이 돌아오는 것입니다.

믿는 사람들의 가장 큰 힘이 무엇입니까? 언제 어디서든지 무엇인가 문제가 있다고 생각이 되면 그 순간에 모든 것을 제로(zero)로 놓고 새로 시작할 수 있는 것입니다.

에브라임이 어떻게 합니까? 11절, “에브라임은 어리석은 비둘기같이 지혜가 없어서 애굽을 향하여 부르짖으며 앗수르로 가는도다&985171;

새 중에서도 똑똑한 새는 목표를 향하여 곧장 날아가는데, 어리석은 비둘기는 다른 쪽을 보면서 날아가는 모양입니다. 그러니까 그물에 걸려들지요.

이스라엘 백성들은 애굽의 도움을 바랬습니다. 그러나 몸은 앗수르 쪽으로 갑니다. 다시 말해서 머리 속으로 끊임없이 애굽과 앗수르를 저울질하면서 마음으로는 애굽을 원하면서 몸은 앗수르로 날아갑니다.

이제 그들이 그물에 걸려들게 됩니다. 그것이 무엇입니까? 드디어 애굽이 돕겠다고 제안한 것입니다. 그러자 이스라엘은 좋다고 하면서 앗수르와의 관계를 끊고 애굽으로 돌아섭니다. 그러나 그것이 함정이었습니다. 왜냐하면 애굽은 이스라엘을 도울 힘이 없었습니다. 책임질 수 없는 약속이었고 부도수표였습니다. 결국 이 그물에 걸려서 이스라엘은 앗수르에게 망합니다.

이것은 하나님을 의지하던 사람이 어떤 식으로 망하는지 잘 보여 줍니다. 하나님을 의지하지 않으면 자꾸 이쪽 저쪽을 기웃거리다가 결국 부도수표 하나를 받아들고 망합니다.

우리의 부도수표가 무엇입니까? 도움이 될 줄 알았는데 결정적인 순간에 도움이 되지 않는 것이 부도수표입니다. 결국 이것은 하나님이 아닌 것을 의지하는 것은 모두 부도 수표입니다. 물론 하나님께서는 애굽을 통해서 도우실 수도 있고 앗수르를 통해서 도우실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이스라엘은 자기들이 그쪽을 향해서 가서는 안됩니다.

하나님만 의지하면 하나님이 다른 사람을 통하여 나를 돕게 하십니다. 도움받을 만한 사람을 만나게 하십니다.

무엇이라고 말씀하십니까? 12절, “저희가 갈 때에 내가 나의 그물을 그 위에 쳐서 공중의 새처럼 떨어뜨리고 전에 그 공회에 들려준 대로 저희를 징계하리라.”

그물을 치는 분은 하나님입니다. 이 말은 반드시 땅에 떨어뜨리신다는 뜻입니다. 그리고 옛날 공회에서 들은대로 징계하시겠다고 말씀하십니다. 여기서 공회가 무엇입니까? 예배 시간에 들었는 말씀을 말합니다. 설교한 말씀대로 징계하십니다. 공회는 이스라엘 백성들이 하나님의 말씀을 듣기 위하여 모였던 교회를 말합니다. 결국 모든 것이 말씀대로 되어집니다. 그러니까 말씀을 들으면 결과가 이미 눈에 들어옵니다. 하나님의 말씀에 불순종하면서 자꾸 진실을 속이는 자는 결국 하루 아침에 망하게 되어 있습니다.

13절에 무엇이라고 말씀하십니까? “화 있을진저 저희가 나를 떠나 그릇 갔음이니라. 패망할진저 저희가 내게 범죄하였음이니라. 내가 저희를 구속하려 하나 저희가 나를 거스려 거짓을 말하고”

몸은 교회에 오지만 고개는 자꾸 세상을 향합니다. 몸은 천성을 향하여 가지만 머리는 자꾸 이 세상을 향합니다. 몸은 교회에 와있지만 머리 속은 세상으로 가득 합니다. 그러니까 하나님의 그물에 걸려듭니다. 정말 하나님을 두려워하는 사람은 아무리 좋은 제안을 해도 하나님께서 싫어하시는 약속은 하지 않습니다. 그래서 그물에 잘 걸려들지 않습니다.

예수믿는 사람들이 세상 사람들 비위맞추려고 하면 힘이 다빠지게 되어 있습니다. 결국 자기 방식대로 살아야 합니다. 그렇지 않고 하나님과 세상 사이를 왔다 갔다 하면 결국 그물에 걸려들게 되어 있습니다.

3. 거짓된 회개

호세아가 세번째로 사용하시는 비유는 ‘속이는 활’입니다.

16절,“저희가 돌아오나 높으신 자에게로 돌아오지 아니하니 속이는 활과 같으며”

활은 주인이 원하는대로 날아가야 합니다. 그러나 아무리 정확하게 겨냥해서 쏘아도 다른 곳으로 날아간다면 그 활은 속이는 활입니다. 이것은 활자체가 잘못 만들어진 것입니다. 만약 주인이 그 속이는 활을 믿고 전쟁터에 나가면 어떻게 됩니까? 그는 목숨을 잃고 말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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