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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타작마당에서 있은 일 (호 09:1-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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타작마당에서 있은 일(호 9:1-17 )

요즘 난을 재배하는 집이 많습니다. 난을 키우는데는 공이 많이 듭니다.

예를 들어서 어떤 난 전문가가 어느 섬에 가서 아주 희귀한 난 한 그루를 발견했다고 합시다. 그의 반가움은 말로 이루 다 표현할 수 없을 것입니다.그는 그 난을 구해가지고 집에 가지고 왔습니다. 그런데 집에 가지고 와 보니 무슨 이유인지 모르겠지만 그저 평범한 한 잡초로 변해 있었다고 합시다. 그가 원한 것은 이 희귀한 난을 많이 번식시키는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그 희귀한 난은 없어지고 말았습니다. 그는 그것을 어떻게 하겠습니까? 아깝지만 할 수 없이 잡초로 변한 그 난을 버릴 것입니다.

오늘 본문에서 요절을 고르라고 한다면 그것은 당연히 10절입니다.&985170;옛적에 내가 이스라엘 만나기를 광야에서 포도를 만남같이 하였으며 너희 열조 보기를 무화과나무에서 처음 맺힌 첫 열매를 봄같이 하였거늘”

하나님께서 처음 이스라엘 백성들을 만났을 때의 반가움은 마치 아무런 생물이 없는 거친 광야에서 포도가 열려 있는 한 포도나무를 발견한 것과 같았습니다. 광야는 어떤 곳입니까? 그곳에서는 살아있는 나무를 구경할 수 없습니다.혹시 있다면 잡초나 가시나무가 있을 뿐이지요.그런데 그곳에 아주 탐스러운 한 그루의 포도나무가 있고 거기에 열매가 맺혀 있습니다.그런 포도는 너무 귀해서 얼른 먹지도 못할 것입니다.

무화과나무를 생각해 보십시오. 무화과나무를 한 번 심으면 5,6년이 지나야 첫 열매가 맺힙니다. 지금까지 한 번도 열매가 맺힌 적이 없었습니다. 그런데 어느 날 농부가 나가 보니까 첫 열매가 하나 열려 있습니다. 이 첫 열매는 너무 아까워서 먹지도 못합니다. 왜냐하면 그 첫 열매는 그냥 먹어버리기에는 너무나도 귀한 것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 보시기에 이스라엘 백성들은 참으로 귀한 족속들이었습니다. 다른 족속들은 무엇이 거룩한 것인지 몰랐습니다. 우상을 섬기고 자기 욕심대로 사는 자들이었습니다. 그러나 이스라엘 족속들은 죄가 무엇인지를 아는 자들이었습니다. 그들이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해서 사는 삶은 하나님 자신이 보셔도 너무나도 대견스럽고 존귀하게 어겨졌습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이 희귀한 족속들이 더 많아지도록 가나안 땅에 옮겨 심으셨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이 귀한 백성들을 애굽에서 파서 가나안 땅에 옮겨 심으셨습니다. 그렇게 하신 것은 그들이 더 많아지고 더 많은 영향을 미치는 백성이 되도록 하기 위해서입니다. 그런데 이상한 것은 이들을 가나안 땅에 옮겨 놓자마자 변질되고 말았습니다. 다시는 열매를 맺지 않을 뿐 아니라 평범한 잡초가 되고 말았습니다. 이제 어떻게 해야 합니까? 아깝지만 다시 파서 버릴 수밖에 없습니다. 왜냐하면 이것은 더 이상 하나님이 원하시는 나무가 아니기 때문입니다.

오늘 본문 말씀은 어느 타작마당에서부터 시작합니다. 타작마당은 원래 좀 시끄럽고 요란한 법입니다. 그러나 이스라엘 백성들의 타작마당은 무엇인가 분명히 좀 지나친 것이 있었습니다. 그것이 무엇입니까? 그것은 술을 마시고 뛰놀고 남녀가 어울려서 음란한 짓을 하는 완전히 미친 광란의 파티였던 것입니다. 이것은 바로 이방인의 풍년제사였습니다.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들을 이곳에 심으신 것은 이런 꼴을 보려고 하신 것이 아닙니다. 그들에게는 하나님께서 주신 특별한 감사의 방법이 있었습니다. 모두 하나님 앞에 둘러 서서 두 손을 모으고 ‘하나님 올 해도 우리들이 살 수 있도록 이 귀한 양식을 주시니 감사합니다’라고 기도하고 난 후 정말 기쁘고 감사한 마음으로 하님께 영광 돌리는 감사의 찬송을 원하셨던 것입니다. 그러나 이스라엘 백성들이 하는 짓은 하나님을 모르는 자들과 전혀 다를 바가 없었습니다. 아주 귀한 난인 줄 알고 심었는데 나타난 것은 평범하고 무가치한 잡초였습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이 타작마당에서부터 시작해서 그들이 더 이상 가나안 땅에 있을 수 없으며, 그들은 결국 자기들이 원하는대로 이방인에게로 돌아가야 할 것을 선언하십니다. 왜냐하면 그들이 그토록 원하는 것이 바로 이방인들과 같아지는 것이었기 때문입니다. 그토록 그들이 부러우면 그들을 따라가면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이 변질된 이스라엘에게 다시는 영광이 회복되지 않을 것이라고 선언하십니다. 마치 새가 푸드득 날아가고 난 후에는 다시 돌아오지 않는 것처럼 이스라엘의 영광도 한 번 날아가고 나면 다시는 회복되지 않을 것이라고 말씀하십니다. 그 이유는 그들이 참으로 귀한 것을 업신여기고 멸시했기 때문입니다.

1. 타작마당의 행실

이스라엘의 변질된 모습을 단번에 볼 수 있는 것이 그들의 타작마당이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에게는 가장 중요한 세 가지 절기가 있습니다. 그것은 무교절과 오순절과 수장절입니다. 이 세 절기는 모두 추수와 관계가 있습니다. 무교절은 처음 보리를 추수하는 때이고 오순절은 보리 추수를 마친 때입니다. 수장절은 가을 추수를 마친 때입니다.

그러나 이 세 절기는 모두 이스라엘 백성들의 구원과 연결되는 날이기도 합니다. 무교절은 그들이 애굽의 장자를 죽이는 재앙에서 구원받은 날입니다. 오순절은 그들이 시내산에서 율법을 받은 날입니다. 수장절은 그들이 광야 사십년 동안 하나님께서 지켜 주심으로, 특히 반석을 쳐서 거기서 물을 주심으로 구원받은 것을 기념하는 절기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중요한 것은 추수 그 자체가 아닙니다. 그들에게 중요한 것은 하나님의 구원이었습니다. 그들은 하나님의 구원을 기뻐하는 사람들이었습니다. 처음으로 보리를 추수하는 때는 유월절 어린양의 피로 구원받은 것을 기뻐하고 감사합니다. 보리 추수가 다 끝났을 때에는 시내산에서 하나님과 언약을 맺음으로 하나님의 백성된 것을 기뻐합니다. 가을 추수가 끝났을 때에는 하나님께서 광야 사십년 동안 그들을 지켜 주시고 인도해 주신 은혜를 감사드립니다. 그러나 이 구원에는 추수의 풍성한 곡식이 뒤따름으로 하나님께서 베푸신 구원의 풍성함을 더 실감하게 됩니다.

그들에게 중요한 것은 하나님의 구원이었습니다. 그러나 이 구원은 말로만 기뻐하는 구원이 아닙니다. 하나님께서는 풍성한 추수와 연결시킴으로 얼마나 이 구원이 말로만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며 피부로 그 풍성함을 느끼게 하셨습니다. 그런데 지금 이스라엘 백성들의 모습은 어떻습니까? 구원의 기쁨은 없어지고 오직 먹고 마시고 떠드는 이교적인 추수 감사제만 남아 있었습니다.

그러나 이스라엘 백성들의 타작마당에서 어떤 일이 일어나고 있었습니까? 1절,“이스라엘아 너는 이방 사람처럼 기뻐 뛰놀지 말라. 네가 행음하여 네 하나님을 떠나고 각 타작마당에서 음행의 값을 좋아하였느니라.”

이스라엘 백성들은 하나님의 구원을 기뻐하는 것이 아니라 추수 자체를 기뻐하고 있습니다.물론 인간이기 때문에 추수가 기쁠 수 있겠지요.그러나 그 정도가 아닙니다. 이 당시 이방인들에게 가장 중요한 것은 추수때 어떻게 하느냐는 것이었습니다. 추수때 큰 잔치를 행하고 사람들이 많은 성행위를 해야 그 다음 해에도 많은 추수를 거둘 수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이것이 가나안 족속들의 추수법이요 바알의 추수법이었습니다. ‘각 타작 마당’이라는 것을 주의해야 합니다. 모든 타작마당에서 이런 일이 일어나고 있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특별한 것은 바로 이 추수감사의 의식이었습니다. 다른 민족들은 추수 자체를 감사합니다. 왜냐하면 이제는 굶지 않고 배부르게 먹고 살 수 있게 되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이스라엘 백성들은 추수를 통하여 신실하신 하나님을 다시 한번 느끼게 됩니다.

주기도에서 예수님께서는 하나님 아버지께 기도하면서 ‘일용할 양식을 주옵시고’라고 기도하도록 가르치셨습니다. 물론 아무 것도 먹을 것이 없을 때에는 그야말로 한 끼 한 끼의 양식이 중요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직장이 있고 은행에 저금한 돈이 있으며 양식이 넉넉한 사람에게 있어서 일용한 양식이라고 하는 것은 너무 쩨쩨한 것이 아닐까요? 그래서 일용할 양식에 대한 기도를 소홀히 하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그러나 한끼의 식사는 단지 한끼의 식사로 끝나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는 바로 이 한끼의 식사를 통하여 매 순간 매 순간 하나님이 우리를 지키고 계시며 오늘만이 아니라 내일도 모레도 세상 마지막 날까지 우리를 지키시는 것을 보는 것입니다. 그리고 예수님이 뭐라고 말씀하셨습니까? ‘사람이 떡으로만 살 것이 아니요 오직 하나님의 입에서 나오는 말씀으로 살 것이니라’ 우리는 이 한 끼의 식사로 살지 않습니다. 사실 마음에 큰 근심이나 불안한 것이 있으면 음식을 먹어도 먹은 것 같지가 않습니다. 하루를 지내도 하루를 산 것 같지가 않습니다. 이것이 무엇을 의미합니까? 우리는 단지 한끼의 식사로 사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우리 마음에 은혜를 주시고 믿음을 주셔서 사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한끼의 식사를 대할 때마다 ‘하나님 참 감사합니다. 이 한 끼의 식사를 통하여 하나님께서 얼마나 신실하게 저희 삶을 지켜주시고 보호하시는지 느낄 수 있습니다. 그러나 저는 이 한끼의 식사로 살지 않습니다. 하나님께서 이 순간에도 공급해주시는 힘으로 삽니다’라는 고백이 있어야 할 것입니다.

지난주에도 직장이나 학교의 술 문화에 대하여 말씀을 드린 적이 있습니다. 학생들이 좋은 학교에 입학하는 것이 얼마나 감사한 일입니까? 그런데 학교의 선배들이 요구하는 것이 무엇입니까? 남학생이나 여학생이나 할 것없이 모두 엠티라고 해서 끌고 가서 술을 마시게 합니다. 우리 그리스도인들에게 있어서 하나님께서 대학의 공부할 수 있는 기회를 주신 것이 얼마나 감사합니까?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기대하시는 것은 조용히 하나님 앞에 무릎을 꿇고 눈물 흘리며 감사드리는 것입니다. ‘하나님 저를 구원해 주신 것만 해도 감사한데 또 이렇게 공부할 수 있는 기회를 주시니 감사합니다. 공부를 잘 할 수 있는 자신이 없지만 하나님께서 입학시켜주셨으니까 계속 힘주실 줄 믿습니다’라고 해야지요.

직장도 마찬가지입니다. 새로 누군가가 들어오면 회사 사람들은 술 마시는데 데리고 갑니다. 물론 식사를 거부할 필요는 없습니다. 그러나 사람들은 이 회사에서 잘 버티려면 술을 잘 마셔야 한다고 하면서 은근히 겁을 줄 것입니다. 그러나 나를 이 직장에 보내신 분은 너희들이 아니고 하나님이시라는 것을 마음속으로 분명히 해야 합니다. 그리고 하나님 앞에 혼자 나아가든지 아니면 함께 입사한 신앙의 형제들과 함께 조용히 하나님께 예배드리는 시간을 가지라는 것입니다.

‘하나님 아버지 나의 영혼을 구원해 주신 것만 해도 감사한데 새로운 직장까지 주시니 감사합니다. 저는 경험도 없고 아는 것도 없어서 직장 생활을 잘 해낼 자신이 없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취직을 시켜주셨으니까 잘 감당할 둘 믿습니다. 어려울 때마다 기도할테니까 저를 도와주십시요’라는 기도가 나와야 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 백성들이 추수해서 거두어들인 양식을 ‘음행의 값’이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원래 이스라엘 백성들이 추수한 것은 ‘구원의 선물’이었습니다. 그런데 ‘음행의 값’이라고 하십니다.

1절 하 ‘네가 행음하여 네 하나님을 떠나고 각 타작마당에서 음행의 값을 좋아하였느니라“

음행의 값이 무엇입니까? 얼마 전 신문에는 어떤 윤락 여성의 고발 내용이 신문에 실렸습니다. 그는 꾀임에 빠져 윤락가로 빠져들어 창녀 노릇을 하게 되었는데 더러운 짓을 하고 받은 돈은 모두 주인에게 다 빼앗겨버리고 자기 손에 들어오는 것은 얼마 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몇 집을 팔려 다니면서 빚은 눈덩이처럼 커져서 아무리 돈을 받아도 전부 빚 갚는 것으로 다 빼앗기고 늘 감금상태에서 노예처럼 살아왔다는 것입니다.

물론 추수한 것은 농사해서 얻은 것입니다. 그런데 중요한 것은 이것을 어떤 자세로 얻었느냐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 감사하는 마음으로 농사를 지었으면 그것은 하나님이 주신 선물입니다. 너무나도 아름다운 하나님의 축복입니다. 그러나 그들은 바알에게 잘 보이면 추수가 잘 된다고 해서 이방인들이 하는대로 똑같이 했습니다. 그것은 타작마당에서 완전히 섹스 파티를 여는 것이었습니다. 그렇게 해서 얻은 것은 하나님의 축복이 아니고 윤락 여성들이 음란한 짓을 해서 벌어들인 음행의 값이라는 것입니다.

우리는&985168;얼마나 많은 돈을 벌었느냐?’는 것을 중요하게 생각합니다. 그러나 하나님 앞에서는&985168;얼마나 많은 돈을 벌었으며 얼마나 헌금으로 많이 바쳤느냐?’는 것이 중요한 것이 아닙니다. 중요한 것은 은혜입니다. 우리는 모든 것을 믿음으로 해야 하고 하나님의 은혜로 해야 합니다. 믿음은 무엇입니까?

하나님은 나의 모든 삶을 책임져 주신다는 것이 믿음이고 은혜는 하나님께 감사하는 마음으로 하는 것입니다. 장사를 해도 감사하는 마음으로 하고 공부를 해도 감사하는 마음으로 하는 것입니다. 이렇게 해서 얻은 것이 하나님의 축복이요 하나님의 선물입니다.

그러나 만일 우리가 세상 사람들이 하는 것과 똑같이 속이고 거짓말하고 뇌물을 쓰고 술을 사주면서 돈을 벌면 그것이 음행의 값이 되는 것입니다.

사람들은 이 차이를 구분하지 못할지 모릅니다. 그러나 하나님에게는 이것이 아주 중요합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우리의 헌금을 받으시는데 관심이 없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삶과 우리의 마음을 받으시고 싶어 하십니다. 우리는 우리의 삶과 우리의 예배를 자꾸 분리시킵니다. 예배와 삶은 분리될 수 없습니다. 삶이 더러우면 예배도 더러운 것입니다. 깨끗지 않은 삶을 살면서 아무리 거창한 예배를 드린다고 해도 그것은 더러운 예배입니다.

하나님께서는 맛을 잃어버린 이스라엘 백성들을 어떻게 버리실지 무려 네번이나 반복해서 말씀하십니다.

첫째로,그들은 더 이상 가나안 땅의 곡식과 포도주를 먹지 못합니다. 2절,“타작마당이나 술틀이 저희를 기르지 못할 것이며 새 포도주도 떨어질 것이요”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들을 키우시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그들이 거룩한 백성들이기 때문입니다. 너무나도 귀한 정신과 신앙을 가지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지금 나타난 모습은 완전히 잡초의 모습입니다. 그래서 이런 자를 위해서라면 이처럼 비싼 곡식과 포도주를 주어서 키울 필요가 없다는 것입니다.

두번째로, 그들은 다시 이방에 포로되어 갈 것이라고 말씀하십니다. 3절,“저희가 여호와의 땅에 거하지 못하며 에브라임이 애굽으로 다시 가고 앗수르에서 더러운 것을 먹을 것이니라.”

‘여호와의 땅’은 거룩한 백성들을 키우는 곳입니다. 지금 이스라엘 족속들은 거룩하지 않으니까 여기에 있을 필요가 없습니다. 그들은 애굽으로 다시 돌아가야 합니다. ‘애굽으로 돌아간다’는 것은 그들이 다시 포로상태로 되돌아간다는 뜻입니다. 실제로 그들은 어디로 포로되어 갑니까? 앗수르입니다. 앗수르에서 그들은 율법적으로 더러운 음식을 먹게 될 것입니다. 다시 말해서 율법에서 금지하고 있는 음식만 먹게 되는 것입니다. 그것들은 모두 돼지 음식 같은 것입니다. ‘꿀꿀이 죽’입니다. 왜냐하면 돼지같이 살아왔기 때문입니다. 돼지같이 살아온 사람은 그런 돼지 먹이를 먹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백성이면서도 이런 더러운 짓을 하고 자기 욕심을 채우지 못해서 헐떡이는 자들은 귀하게 대접할 필요가 없습니다. 돼지우리에 쳐넣어서 돼지가 먹는 것들을 쳐먹도록 해야 맞다는 뜻입니다. 그러나 한번 생각해 보십시오. 우리가 이 세상에서 얼마나 하나님의 백성답지 못하게 살아왔습니까? 우리는 거의 세상 사람들과 같은 수준에서 살 때가 많습니다. 그런 우리의 모습에 대하여 하나님께서는 왜 너희 자신의 가치를 알지 못하고 그렇게 추한 수준에서 살려고 하느냐 하시면서 마음 아파하십니다. 사실 우리는 너무나도 많이 하나님의 마음을 아프게 했습니다. 그 이유가 무엇입니까? 이 세상 사람들을 두려워했고 또 한편으로는 그들처럼 자유롭고 살고 싶기도 했습니다. 그것이 돼지 같은 인생입니다. 그런 자신에 대하여 비통해 하고 부르짖어야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모든 축복을 빼앗길 날이 올 것입니다.

세번째로, 하나님께서는 그들이 드리는 제사를 막겠다고 말씀하십니다.

4-5절,“저희가 여호와께 전제를 드리지 못하며 여호와의 기뻐하시는 바도 되지 못할 것이라. 저희의 제물은 거상입은 자의 식물과 같아서 무릇 그것을 먹는 자는 더러워지나니 저희의 식물은 자기 먹기에만 소용될 뿐이라. 여호와의 집에 드릴 것이 아님이니라. 너희가 명절일과 여호와의 절일에 무엇을 하겠느냐?”

이스라엘 백성들이 하나님께 드리는 전제는 이미 우상에게 드리고 난 찌꺼기를 드리는 제사입니다.어떻게 이 포도주가 하나님께 기쁨이 되겠습니까? 이것은 마치 상을 당한 자들의 식물과 같아서 하나님께 기쁨이 될 수 없습니다.

우리는 이 말씀을 보고서 ‘아,초상집의 음식은 부정하구나! 먹어서는 안되겠구나!’라고 생각할 필요는 없습니다. 구약의 율법에서 상(喪)을 당한 자의 식물이 부정하다는 것은 거룩의 개념을 가르쳐 주기 위하여 정하신 것입니다. 이 당시에는 세균이나 박테리아의 존재를 모르기 때문에 왜 죽은 짐승의 고기를 먹어서는 안되는지를 몰랐습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죽은 짐승이나 죽은 자의 집에 대한 특별한 격리를 통하여 거룩의 개념을 가르쳐 주셨습니다.

그런데 이스라엘 백성이 우상에게 바친 후에 다시 하나님께 바치는 이 더러운 포도주의 제사는 하나님께 정말 역겨운 것이며 분노케 하는 제사였습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이런 제사를 드리지 못하게 하기 위해서라도 이들을 멀리 이방 나라로 쫓아버리겠다고 말씀하십니다.

네번째로, 혹시 그들이 재앙을 피하여 도망친다고 하더라도 결코 성공하지 못할 것이라고 말씀하십니다. 6절,“보라 저희가 멸망을 피하여 갈지라도 애굽은 저희를 모으고 놉은 저희를 장사하리니 저희의 은 보물은 찔레가 덮을 것이요 저희의 장막 안에는 가시덩굴이 퍼지리라.”

그들이 도망칠 수 있는 곳이 어디입니까? 애굽입니다. 애굽은 그들이 늘 마지막 보루로 의지하던 곳입니다. 그러나 애굽이 그들의 피난처가 되지 못할 것입니다. 여기의 ‘놉’은 북(北)애굽의 옛 이름입니다. 결국 그들은 북쪽 애굽까지 도망을 쳐서 배반을 당해서 몽땅 죽임을 당하게 된다는 뜻입니다. 하나님의 진노를 피할 길이 없습니다.

그 모든 이유가 어디에 있습니까? 그들이 독특한 맛을 잃어버렸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백성에게는 귀한 맛이 있습니다. 그것은 그들이 이 세상에서 잘 사는 것보다 하나님의 구원을 더 기뻐하는 것입니다.

2. 선지자의 거짓 증거

호세아 선지자는 지금 이스라엘 백성들이 어떤 상태에 있다고 선언합니까? 7절,“형벌의 날이 이르렀고 보응의 날이 임한 것을 이스라엘이 알지라. 선지자가 어리석었고 신에 감동하는 자가 미쳤나니 이는 네 죄악이 많고 네 원한이 큼이니라.”

이미 형벌의 날이 이르렀고 보응의 날이 임했습니다. 이제 얼마 있지 않으면 이 모든 일이 일어날 것입니다. 그러나 아무도 이 사실을 인정하려고 들지 않습니다. 그 이유가 무엇입니까? 선지자들이 미쳤기 때문입니다.

학자들 사이에서는&985168;여기서 말하는 선지자가 참 선지자냐? 아니면 거짓 선지지냐?’하는 것을 두고 견해가 엇갈립니다. 참 선지자라고 해석하는 자는 참 선지자가 있기는 해도 워낙 이스라엘 백성들이 이들의 말을 무시하고 거부하기 때문에 이들이 바보나 미친 사람처럼 취급당한다는 뜻으로 해석합니다. 그러나 여기서 말하는 선지자가 참 선지자일 수 없습니다. 이들은 다 거짓 선지자들입니다. 여기서 ‘어리석다’는 것은 더 이상 도덕적인 교훈을 줄 수 없다는 뜻입니다. 선지자들이 바보입니다. 그들은 미친 자들이었습니다. 무슨 말입니까? 하나님의 영으로 예언하는 자들이 아니었습니다. 그들은 듣기 좋은 말만 하는 자들이었습니다.

그러나 참 선지자는 미칠 수가 없습니다. 그들은 어리석지 않습니다.

한 사람이라도 오면 그냥 돌려보내어서는 안됩니다. 죄인들이 편안하게 자신의 길을 갈 수 있도록 듣기 좋은 소리나 해서 돌려보낸다면 그는 미친 선지자입니다. 입에서 신음 소리가 나오고 이를 갈게 해야 합니다.

미친 설교자의 특징은 한 시간 내내 설교를 들어도 무슨 소리를 하는지 도저히 알 수 없는 것입니다. 절대로 사람들의 마음을 상하게 하는 말을 하지 않습니다.

어떻게 해서 이런 일이 일어나게 되었습니까?

7절 끝‘ 이는 네 죄악이 많고 네 원한이 큼이니라“

그들의 죄악이 많고 원한이 크기 때문입니다. 그들의 지은 죄가 너무 많기 때문에 하나님께서는 이미 그들을 버리시기로 작정하셨습니다. 여기서 ‘죄악이 많고 원한이 크다’는 말이 무슨 뜻입니까? 너무나도 많은 사람들의 마음을 아프게 했기 때문에 회개시키지 않기로 작정하신 것입니다. 그렇게 되면 어떻게 됩니까? 바른 말씀을 들을 기회를 봉쇄당하기 때문에 멸망할 때까지 자기가 옳은 줄 압니다.

그래서 만일 내가 죄를 짓고 악한 길에 들어섰는데도 그 주간에 교회에서 위로의 말씀을 듣고 은혜의 말씀을 듣는다면 ‘아,내 죄가 너무 많기 때문에 하나님께서 나를 완전히 버리시기로 작정하셨구나.’라고 생각하면 틀림없습니다.

8절을 보십시요.“에브라임은 내 하나님의 파수꾼이어늘 선지자는 그 모든 행위에 새 잡는 자의 그물 같고 또 그 하나님의 전에서 원한을 품었도다.”

본문에는 선지자라는 주어가 생략되었다고 봅니다. 그러면 선지자는 에브라임의 하나님의 파수꾼이라고 번역할 수 있습니다. 그러면 의미가 잘 통합니다. 선지자는 파수꾼입니다. 이스라엘 사회의 위험을 경고하는 것이 그의 임무입니다.

이스라엘의 위험이 무엇입니까? 그들의 도덕적인 타락입니다. 그러나 선지자들은 무서운 올무였습니다. 사람들로 하여금 결사적으로 바른 길로 돌아가지 못하도록 막는 올무였습니다. 왜냐하면 선지자들이 괜찮다고 하기 때문에 사람들이 빠져 나오지 못하고 거기 있다가 망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의 부패상을 언제와 같다고 하셨습니까? 기브아 시대와 같다고 했습니다. 기브아 시대는 이스라엘이 가장 무섭게 타락해 있었을 때입니다. 기브아시대에 어떤 일이 있었습니까? 어떤 레위인에게 첩이 있었는데 베냐민족속이 있는 기브아에 갔을 때 동네 청년들이 몰려 와서 남자를 강간하려고 했습니다. 그때 그 레위인이 자신의 첩을 그들에게 내어 주었더니 밤새도록 강간했습니다. 그리고 새벽에 그 여자는 죽었습니다. 그것이 바로 기브아의 날입니다. 여러분 동성 연애라는 것은 철저하게 하나님을 우롱하고 무시하는 짓입니다. 그런데도 벤냐민 지파 사람들은 이들을 버리지 않고 자기 족속이라고 두둔하다가 어떻게 되었습니까? 남녀 아이들 모두 다 죽고 남자 육백명만 겨우 살아서 도망을 쳤습니다. 이것이 기브아의 날입니다. 죄가 있는 곳은 빨리 도망쳐야 살 수 있습니다. 그런데도 하나님을 두려워하지 않고 오히려 그런 사람들을 두둔하며 함께 있다가 망한 것입니다.

3. 사라지는 에브라임의 영광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의 사라지는 영광에 대하여 무엇이라고 말씀하십니까? 11절,“에브라임의 영광이 새같이 날아가리니 해산함이나 아이 뱀이나 잉태함이 없으리라.”

새가 있다가 푸드덕 날아가 버리면 어떻게 됩니까? 다시는 돌아오지 않습니다. 그 새는 다시 돌아오지 않습니다. 그것과 마찬가지로 이스라엘의 영광은 다시 회복되지 않을 것이라고 말씀하십니다. 그것은 근본적으로 그 귀한 맛을 잃어버렸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 철저하게 그들의 후손을 치십니다. 다시는 해산함이나 아이 뱀이나 잉태함이 없을 것이라고 말씀하십니다.

베냐민 지파를 보십시오. 거의 다 죽고 육백명만 남았습니다. 이스라엘 족속들은 한 지파가 찌그러져 다시는 소생되지 못할 줄 알고 크게 울었습니다. 베냐민은 소생되었습니다. 그 이유가 무엇입니까? 그들은 한번 큰 수술을 받았기 때문입니다. 육백명만 남고 다 죽는 것이 얼마나 큰 수술입니다. 그러나 그런 수술을 받았기 때문에 벤냐민 지파는 남았고 하나님께서는 그들을 위로하시기 위하여 초대 왕 사울을 벤냐민 지파에서 나오게 하셨습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수술하시기 전에 우리 스스로 수술해버리십시다. 자를 것은 잘라버리고 베어버릴 것은 베어버립시다. 그러면 하나님은 긍휼히 여기셔서 생각하지도 못한 축복을 우리에게 주실 것입니다.

앞으로 이 나라가 제대로 될 나라인지 아니면 망할 나라인지는 어른을 봐서는 알 수 없습니다. 자라는 세대를 보아야 합니다. 어른들은 좀 어리석고 힘이 없어도 자라는 청년들이 생각이 깊고 분명한 의식이 있으면 그 나라는 언젠가는 영광이 돌아옵니다. 그러나 자라는 세대가 아무런 의식도 없고 도덕 의식이 없다면 아마도 그 나라의 영광은 다시 돌아오지 않을 것입니다.

이것은 교회도 마찬가지입니다. 앞으로 이 교회의 장래가 어떨 것인가를 보려면 그 안에 있는 청년들이나 청소년들의 신앙을 보아야 합니다. 그들이 신앙적으로 살아있고 뜨거우며 그들의 숫자가 점점 많아지고 있으면 소망이 있습니다. 그러나 어른들은 많은데 아이들은 없고, 있더라도 거의 신앙이 없고 뜨거움도 없다면 그 교회나 민족의 미래는 대단히 어둡다고 보아야 합니다.

13-14절, “내가 보건대 에브라임은 아름다운 곳에 심긴 두로와 같으나 그 자식들을 살인하는 자에게로 끌어내리로다. 여호와여 저희에게 주소서. 무엇을 주시려나이까? 청컨대 배지 못하는 태와 젖없는 유방을 주시옵소서&985171;16절,“에브라임이 침을 입고 그 뿌리가 말라 과실을 맺지 못하나니 비록 아이를 낳을지라도 내가 그 사랑하는 태의 열매를 죽이리라.”

한국 교회는 이미 이런 현상이 나타나고 있습니다. 우리 자손들 가운데 참 신앙을 가진 아이들을 찾기가 어렵습니다. 교회 안에서 학생들의 숫자나 어린이의 숫자가 줄고 있는 것은 물론이고 그들의 영성은 정말 죽어 있습니다. 그 이유가 무엇입니까? 가르치는 부모들이나 선생들이 이들의 신앙을 위하여 결사적인 노력을 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그들을 복음으로 먹여서 강한 신앙인을 만들어야 하는데 그렇지 못하기 때문에 죽어가고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들을 축복하시고 이와 같이 가나안 땅에 심으신 이유가 무엇입니까? 그들에게 말씀이 있었고 구원에 기뻐하고 감사하는 신앙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이 귀한 신앙이 더욱 더 많이 생기고 더 확대될 수 있도록 하기 위하여 이곳에 심으셨습니다.

그러나 너무나도 빨리 변질되고 말았습니다. 이스라엘 조상들은 하나님께서 기뻐하시자마자 바알브올에게 가서 자기들의 몸을 바침으로 그 우상만큼이나 가증한 존재가 되고 말았습니다.

10절 하,“저희가 바알브올에게 가서 부끄러운 우상에게 몸을 드림으로 저희의 사랑하는 우상같이 가증하여졌도다”

하나님께서 충격을 받으신 것이 바로 이것입니다. 오랫동안 시험하거나 유혹한 것이 아닙니다. 발람이 이스라엘 백성들을 변질시키기 위하여 오랫동안 거짓 사상을 퍼뜨리고 설득을 한 것이 아닙니다. 단지 우상의 제단을 벌여 놓고 여자들이 그들을 불렀을 뿐인데 그들은 바로 그 자리에서 하나님을 떠나 우상과 합하여 더러운 자가 되고 말았습니다.

이것은 우리 안에 있는 죄성이 얼마나 뿌리 깊으며 우리의 부패가 얼마나 빨리 한 순간에 이루어지는가를 보여 줍니다. 아무리 좋은 신앙이라도 한 순간에 부패할 수 있습니다. 우리에게 믿음이 퇴색되는 순간, 그 한 찰라에 발람의 교훈이 들어오고 이세벨의 교훈은 들어옵니다. 좋은 교회가 타락하는데 오랜 시일이 걸리지 않습니다. 한 순간에 이루어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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