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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이스라엘의 패망원인 (호 13:1-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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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스라엘의 패망원인(호 13:1-16)

우리는 너무나도 자주 그리스도인들이 이 세상에서 다른 사람들과 잘 어울리지도 못하고 빛과 소금된 삶을 살지 못하는 것을 보게 됩니다. 그뿐만 아니라 예수 믿는 사람들도 사업에 실패를 해서 다른 사람들에게 피해를 주거나 빚쟁이들에게 쫓기는 것을 자주 보게 됩니다. 더욱이 우리는 신앙만으로 이 세상에 적응해서 살아가는 것이 더욱 더 어렵다는 것을 느끼게 됩니다. 신앙을 고집하면 모든 것을 다 잃을 것 같습니다.

영국의 토인비 박사는 세계의 여러 문명의 흥망 성쇄에 대하여 연구한 뒤 어떤 문명이 망하는 것은 새로운 도전에 응전하지 못했기 때문이라는 이론을 제시했습니다. 이것은 다른 말로 표현하면 정신이 신선하지 못하고 썩어버렸기 때문에 망했다는 뜻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본다면 도저히 망하려고 해도 망할 수 없는 나라가 이스라엘과 유다입니다. 왜냐하면 거기에서는 언제나 새로운 하나님의 말씀이 솟아나는 곳이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오늘 말씀은 이스라엘 나라가 이미 멸망한 것을 기정 사실화하고 있습니다. 대단히 비통한 마음으로 이스라엘의 멸망에 대하여 말씀하면서 그 이유가 어디에 있는지 우리에게 보여주고 있습니다. 실제로 호세아 선지는 이스라엘의 멸망을 경험한 선지였습니다. 그런데 그는 이스라엘이 멸망했다고만 말하지 않고 도대체 어떻게 해서 하나님을 믿는다고 하던 이스라엘이 이렇게 비참하게 망하게 되었는지 그 이유를 제시하고 있습니다.

1. 이스라엘의 세상 동화

이스라엘 백성들이 가나안 땅에서 생활하면서 겪은 어려움 중 하나가 주위에 어느 나라도 여호와를 섬기는 나라가 없었다는 사실입니다. 그뿐만 아니라 여호와를 믿는 신앙은 너무나도 독특해서 도무지 다른 나라와 섞일 수가 없었습니다.

1절,“에브라임이 말을 발하면 사람이 떨었도다. 저가 이스라엘 중에 자기를 높이더니 바알로 범죄함으로 망하였거늘”

이스라엘 백성들이 가나안 땅에 겪었던 어려움은 광야 생활하면서 겪었던 것과는 또 다른 것이었습니다. 광야 시절에는 그야말로 생존이 문제였습니다. 하루 하루 먹고 사는 것이 기적과 같았습니다. 그런데 하루 하루 사는 것이 합쳐지니까 무려 사십년이 되었습니다. 그런데 가나안 땅에 들어가니까 또 다른 문제가 있었는데 그것은 다른 족속들과 함께 어울려 살아야 하는데 신앙을 지켜야 하는 것이었습니다. 우리가 생각하기에 다른 족속들은 자기 신앙을 가지고 이스라엘 백성들은 여호와의 신앙을 지키면 되지 않는가 생각할지 모르겠지만 옛날의 모든 생활은 신이 지배를 했고 신끼리 통하지 않으면 도대체 거래나 관계가 이루어지지 않았습니다.

우리가 이 세상 사는데도 마찬가지이지만 믿는 사람들끼리만 무엇을 할 수가 없습니다. 우리는 믿지 않는 사람들과도 일을 해야 하고 어떤 경우에는 함께 놀러도 가고 함께 음식을 먹어야 할 때도 있습니다. 그럴 때마다 걸리는 것이 무엇인가 하면 신앙입니다. 그럴 때 어느 정도 그들과 어울려야 하며 어느 정도 동화되어야 하느냐 하는 것입니다. 술 한 잔까지는 해도 되는 것입니까? 아니면 믿지 않는 사람과도 멋있는 사람이 있으면 결혼을 해도 되는 것입니까? 아마 우리가 믿지 않는 사람들을 전혀 인정하지 않는다면 도저히 이 세상에서 살수가 없을 것입니다.

그래서 천주교 같은 경우에는 신부나 수녀는 아예 복장을 따로 해서 평소에도 자신의 신앙이나 신분을 나타냅니다. 우리도 그런 식으로 항상 십자가 목걸이를 하고 남자들도 가슴에 십자가를 붙이고 살아야 할까요? 아마 그러면 우리는 외단 섬에서 사는 것과 같은 소외감을 느낄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 나라에 힘을 주셨습니다. ‘에브라임이 말을 발하면 사람이 떨었도다’라고 하는 것은 이스라엘 족속들은 주위 나라에서 쉽게 무시할 수 없는 힘을 가진 나라였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에브라임의 문제가 무엇입니까? 너무 나간 것입니다. ‘이스라엘 중에 자기를 높이더니 바알로 인하여 범죄함으로 망하였거늘’이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다시 말해서 북쪽 이스라엘 족속들은 이방인들과 관계하는 데 좀 대담했습니다. 즉 다른 이스라엘 백성들은 하지 않는 짓까지 하더라는 것입니다. 그것이 무엇입니까? 바알을 섬겨서 망했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이스라엘 역사중 어느 사건을 두고 말하는지 알 수가 없습니다.

제 생각같아서는 이스라엘 백성들이 과거에 바알을 심하게 섬겨서 큰 낭패에 빠진 적이 있었습니다. 한번은 왕국이 세워지기 전에 엘리 제사장 때 바알을 많이 섬겨서 블레셋 족속들에게 법궤를 빼앗기도 성막이 불탔던 적이 있습니다. 그때 이스라엘은 거의 한번 망했다가 다시 살아난 것입니다. 그렇지 않이면 엘리야 때 바알신을 심하게 섬겨서 무려 삼년 반 동안이나 비가 오지 않아서 많은 이스라엘 백성들이 굶어 죽었던 적이 있습니다. 이미 이스라엘은 지금의 상태에 오기 전에 바알신을 섬겨서 거의 망했던 적이 있었습니다. 그런데도 불구하고 그들은 전심으로 하나님께로 돌아오지 않고 있습니다.

그 이유가 무엇입니까? 자신들의 처지를 세상 나라와 똑같이 생각을 했기 때문입니다. 당시 다른 나라는 혼자 힘으로 자기 나라를 지키는 나라가 없었습니다. 그래서 모든 나라들이 서로 상호간에 상호 방위 조약같은 것도 맺었고 무역도 했습니다. 그럴 때 중요한 것이 서로의 신을 인정하는 것이었습니다. 이스라엘 나라는 이 일에 적극적이었습니다. 아예 자신들이 나서서 바알을 신을 받아 들였습니다. 그렇게 해서라도 나라를 굳건게하게 지켜야 한다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무조건 다른 나라를 무시하거나 외면하라고 하지 아니하셔습니다. 어느 정도의 동맹이나 협력관계가 필요했고 또 그것을 인정하셨습니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하나님과의 관계가 변할 정도로 동맹을 맺거나 같아져서는 안된다는 것입니다. 호세아 선지자는 이 결론적인 설교를 통하여 이스라엘이 망할 수 밖에 없는 것은 하나님과의 근본적인 관계가 변질될 정도로 이방 나라와 동화된데 있다고 선언하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오늘 우리들에게도 무조건 이 세상에서 멀어지고 혼자 고립되어 지내라고 말씀하시지 않습니다. 얼마든지 좋은 이웃을 사귈 수도 있고 사회적인 활동을 할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과의 관계가 변할 정도로 이 세상과 같아지는 것은 하나님과 원수가 되는 것입니다.

2절,&985170;이제도 저희가 더욱 범죄하여 그 은으로 자기를 위하여 우상을 부어만들되 자기의 공교함을 따라 우상을 만들었으며 그것은 다 장색이 만든 것이어늘 저희가 그것에 대하여 말하기를&985170;제사를 드리는 자는 송아지의 입을 맞출 것이라 하도다.”

원래 하나님은 말씀하시는 하나님이시기 때문에 형상이 없습니다. 그리고 하나님께서는 형상을 만들지 말라고 하셨습니다. 그런데 이스라엘 백성들은 송아지 우상을 만들어 내었습니다. 그 이유가 무엇입니까? 이미 그들에게 말씀이 없어졌기 때문에 말씀을 대신할 수 있는 형식이 필요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말씀으로만 찾아오시는 분이시기 때문에 그 분의 말씀을 듣는 것이 하나님을 잘 섬기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스라엘 백성들은 말씀만 듣고 가만히 있는 것은 몸이 근질근질해서 참을 수가 없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을 송아지로 만들었습니다. 그리고는 사람들에게 그 송아지의 입에 입을 맞추게 했습니다. 원래 하나님의 종교의 특징은 그 분의 말씀을 듣고 내 생각을 버리고 내 고집을 버리고 하나님의 뜻에 순종해서 사는 것인데 자신의 종교적인 열심히나 감정으로 바꾸어버렸습니다.

그러나 송아지는 어떻습니까? 무슨 짓을 했든지 입만 한번 맞추면 그만입니다. 골치아프게 율법을 배울 필요도 없고 율법을 지킬 필요도 없습니다. 그냥 예배를 한번 드리고는 끝입니다. 자기가 하고 싶은대로 다 해도 됩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을 지키는 것은 하나님의 말씀이었습니다. 물론 그들이 하나님의 말씀대로 살면 이 세상에서 고립될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나 고립되어라는 것입니다. 그러면 어떻게 됩니까? 하나님께서 그들을 지켜주시고 결국 이 세상 사람들은 어려울 때 도움을 청하러 오게 되어 있습니다.

우리가 세상 친구들과 보면 마치 평행선을 달리는 것 같습니다. 생각하는 것이나 취미나 가치관등 모든 것이 달라서 도저히 함께 어떤 일을 할 수 없습니다. 그런데 주위에 있는 친구들은 다 세상 친구들이기 때문에 따돌림을 받을 수 밖에 없고 이 세상 일에 손해를 볼 수밖에 없습니다. 그렇다고 해서 무리하게 가까워지거나 하나되려고 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그냥 그대로 평행선을 달리는 것입니다. 그러다보면 하나님께서 나에게 조금씩 힘을 주시는 데 그때 이 세상 사람들이 도움을 요청하게 되어 있습니다. 그때 도와주면 나의 신앙을 양보하지 않고서도 얼마든지 이 세상에서 세상과 상대를 할 수 있게 됩니다. 그러나 에브라임이 한 것은 세상에 동화되는 것을 너무 서둘렀다는 것입니다. 너무 빨리 이 세상 사람들과 가까워지려고 하고 너무 빨리 세상 사람들로부터 인정을 받으려고 하다보니까 하나님을 잃게 되어버렸습니다.

하나님께서는 그들의 상태를 어떻게 보십니까? 무려 네 가지나 예를 들어서 말씀하십니다. 3절, “이러므로 저희는 아침 구름같으며 쉽게 사라지는 이슬같으며 광풍에 날리우는 쭉정이같으며 굴뚝에서 나가는 연기같으리라.”

여기 네 가지는 모두 의미없이 사라지는 허무한 것들입니다.뜨거운 여름의 아침구름이 그렇고, 아침 이슬이 그렇고, 곡식 쭉정이가 그렇고, 굴뚝에서 나가는 연기가 그렇습니다.

여러분, 우리가 붙들고 있는 것이 아무리 대단하게 보여도 하나님께서 한번 불어버리시면 한 순간에 다 날아갑니다. 자기딴에는 고생 고생해서 돈을 모아도 한번 큰 사고 터지면 그 뒤치닥거리한다고 모은 손 한 순간에 다 날아가고 고생 고생해서 어느 정도 높은 신분에 올라가도 한번 문제가 터지면 목날아가는 것은 아무 것도 아닙니다. 정치인들은 이런 것을 너무 잘 실감할 것입니다. 그렇게 세도가 당당했는데 정권이 바뀌면 어떻게 됩니까? 줄줄이 묶여서 교도소로 끌려 들어갑니다. 우리는 우리가 가지고 있는 것들이 한 순간 날아갈 수도 있다고 생각해야 하나님을 붙잡게 됩니다.

다시 말해서 하나님 앞에서 가장 가치없는 것이 무엇인가 하면 자신의 신분을 지키지 못해서 세상에 동화된 하나님의 백성들입니다. 하나님께서 무엇 때문에 이 세상에 하나님의 백성을 주셨습니까? 이 세상을 지키고 바꾸기 위해서입니다. 예를 들어서 어떤 약이 있는데 너무 오래 되어서 약이 변했다면 어떻게 하겠습니까? 그 약부터 먼저 버릴 것입니다. 조금도 아까워하지 않고 버릴 것입니다. 하나님 앞에서 누가 참으로 가치있고 존귀한 사람입니까? 이 세상에서 잘 적응이 되지 않지만 끝가지 평행선을 달리면서도 자신의 신앙을 지키는 것입니다. 그 사람은 기회가 주어지면 세상에 영향을 줄 수가 있습니다. 그런데 미리 세상과 동화되어버려서 세상의 것들에 잔뜩 배가 부른 사람은 무슨 소용이 있겠습니까? 하나님께서는 전혀 아까워하지 않고 버리시겠다고 말씀하십니다.

오늘 기독교에 가장 놀라운 것은 예배 한번 드리는 것 말로는 전혀 하나님의 백성의 특징을 찾아 볼 수가 없다는 것입니다. 그것이 바로 송아지 신앙의 특징입니다. 마치 하나님은 예배를 드려주지 않으면 보채는 어린아이처럼 생각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예배를 한번 드리고는 어떻게 합니까? 자기 하고 싶은대로 다 하는 것입니다. 먹고 마시고 떠드는데 세상 사람들과 다를 것이 아무 것도 없습니다. 바로 그것이 자기 자신을 아침 안개처럼 날라가게 만드는 것입니다. 송아지 종교의 특징이 무엇입니까? 그렇게 편할 수가 없습니다. 예배만 드려주면 아무 소리도 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환란날이 오면 송아지는 우리에게 아무런 도움이 되지 않습니다.

2. 가장 중요한 것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생명보다 더 중요한 것이 무엇입니까? 그것은 바로 하나님과의 언약이었습니다.

4절, “그러나 네가 애굽 땅에서 나옴으로부터 나는 네 하나님 여호와라. 나밖에 네가 다른 신을 알지 말 것이라. 나 외에는 구원자가 없느니라.”

이스라엘 백성들의 존재는 다른 백성들의 존재와 달랐습니다. 왜냐하면 다른 나라 백성들은 그냥 이 세상에 아무데나 정착해서 사는 것이지만 이스라엘 백성들은 하나님과의 언약에 따라서 존재하는 것이 특징이었습니다. 다시 말해서 하나님은 왕이시고 이스라엘 백성들은 그 신하 나라였습니다.

주로 이런 주종 관계는 위대한 구원이 있고 난 후 체결되는 것이었습니다.

예를 들어서 다른 나라로부터 공격을 받아서 멸망하게 되었는데 어떤 왕이 구원을 해 주었다면 그 후 주종관계를 맺습니다. 그때 언약을 체결하게 되는데 언약을 어겼을 때 멸망당할 것을 약속하십니다. 대개 짐승을 죽여 놓고 그 사이를 구원받은 백성들이 지나가는데 그것은 언약을 어기면 죽은 짐승처럼 죽임을 당해서 들짐승의 밥이 되겠다는 것을 서약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의 왕이 되신 것은 그냥 우연히 되어진 것이 아니었습니다. 애굽의 노예 상태에 있는 그들을 열 가지 기적과 홍해를 가르는 능력으로 구원하신 후 시내산에서 피를 뿌리는 언약을 맺음으로 하나님의 백성이 된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그 언약대로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가나안 땅을 주셨습니다. 여기서 이스라엘 백성들이 피를 뿌리는 의식을 행한 것은 짐승을 죽이고 그 사이를 행진하는 의식의 약식입니다. 다시 말해서 하나님의 언약을 어기고 다른 신을 섬기면 죽임을 당하겠다는 약속이었습니다.

이스라엘은 하나님께서 창조하신 백성들이요 그 능력으로 붙드시는 나라였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생각해야 했던 것이 무엇입니까? 그들은 근본적으로 존재 자체가 다른 나라나 사람들과는 다르다는 것입니다. 다른 민족들은 자연적으로 존재했고 자연적으로 멸망합니다. 다시 말해서 힘이 없으면 망한다는 뜻입니다. 그러나 이스라엘은 언약으로 세워졌고 그들이 하나님의 말씀에 헌신되어 있는 한 그들은 절대로 망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말씀을 버릴 때에는 그들은 망하게 됩니다.

근본적으로 이스라엘 백성들은 이 세상에서 긴장을 느끼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왜냐하면 말씀을 듣지 않으면 자꾸 세상으로 떠내려 가게 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또 세상적으로 살면 일시적으로 잘되는 것처럼 보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백성들은 말씀을 듣고 기를 쓰고 세상을 거슬러 올라가야 살 수 있습니다. 그렇지 않으면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세상으로 따라가게 되어 있습니다. 그래서 그들이 살 수 있는 길은 눈에 보이는 편한 길을 버리고 자꾸 하나님의 말씀을 붙드는 것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변질되는 과정을 보십시오. 5-6절, “내가 광야 마른 땅에서 너를 권고하였거늘 저희가 먹이운대로 배부르며 배부름으로 마음이 교만하며 이로 인하여 나를 잊었느니라.”

‘마른 땅에서 권고했다’는 것은 이스라엘 백성들이 광야를 방황하고 있을 때 하나님께서 그들을 기억하셨다는 뜻입니다. 하나님께서는 그 백성들을 반드시 기억하십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필요가 무엇인지 알고 계십니다. 우리가 하루 세 끼 먹어야 하는 걸 아시고 밤에는 잠을 자야 하며 또 집에서 자야 한다는 것도 알고 계십니다. 어려울때 함께 하셨던 하나님께서 편할 때는 버리십니까? 그러나 편해지면 하나님을 잊어버리는 것이 인간의 마음입니다. 그들이 한번 잘사는 생활을 맛보았을 때 가난하기를 원치 않았습니다. 그들의 마음이 늘 광야에서 살 때처럼 겸손했더라면 그들은 믿음으로 나갈 수 있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가나안 땅의 풍요를 한번 경험해 보니까, 그것이 하나의 전제가 되어버렸습니다.&985168;그래,나는 최소한 이 정도 이상은 살아야 돼!’

그래서 결국 그들은 세상을 따라가는 것이 잘 살게 되는 것으로 생각을 해서 세상을 따라가기 시작했습니다. 늘 하나님 앞에 아무 것도 가지지 않는 빈털털이 인생으로 매 순간 하나님이 공급하시는 힘으로 살면 이 세상을 두려워할 이유가 없습니다.&985168;이것보다 더 어려울 때도 하나님이 함께 하셨는데…’라는 생각을 하면 아무 것도 두려울 것이 없습니다. 그러나 주위에 잘 사는 사람들을 보고 부러워하는 자들은 반드시 세상에 빠져들게 되어 있습니다.

그 결과가 무엇입니까? 7-8절, “그러므로 내가 저희에게 사자같고 길가에서 기다리는 표범같으니라. 내가 새끼 잃은 곰같이 저희를 만나 그 염통 꺼풀을 찢고 거기서 암사자같이 저희를 삼키리라. 들짐승이 저희를 찢으리라.”

여기에 나타나는 짐승들은 이 당시 여행을 하는 자들에게 가장 무서운 적이었습니다. 그들은 자주 길가에서 이런 식으로 맹수의 공격을 받아 비참하게 죽어 있는 사람들의 시체를 보았을 것입니다. 아예 하나님을 믿지 않으면 몰라도 하나님을 믿는다고 하면서 하나님을 두려워하지 않으면 세상 사람들과는 친구가 될지 몰라도 하나님과는 원수가 됩니다.

하나님의 백성이 세상을 따라가면 하나님을 원수로 만들게 됩니다. 하나님께서는 마치 사자처럼 혹은 표범이나 새끼를 잃은 암콤처럼 이스라엘 백성들을 찢으실 것이라고 하십니다. 하나님께서 그냥 이스라엘 백성들을 잘 되게 내버려두시지 않고 이렇게 찢으시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그냥 내버려두시는 것이 찢기는 것입니다. 이 세상은 사자나 표범이 우글거리는 곳입니다.

새끼 잃은 암콤이 돌아다니는 곳입니다. 사실 이스라엘 백성들이 지금까지 살아온 것이 기적이었습니다. 그런데 그들이 하나님을 의지하지 않으니까 어떻게 됩니까? 하나님께서 내버려두시겠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더 위험한 것입니다. 자기들은 하나님이 도와주실 것으로 생각하고 있는데 실제로 하나님은 외면하시니까 꼼짝 못하고 망할 수 밖에 없습니다.

이스라엘이 망한 이유가 무엇입니까? 9절에 있습니다.&985170;이스라엘아 네가 패망하였나니 이는 너를 도와주는 나를 대적함이니라.”

그들의 결정적인 실수는 세상을 벗삼기 위하여 하나님을 적으로 만든 것입니다. 하나님은 이스라엘을 돕는 분입니다. 그러나 그들은 자신을 돕는 유일한 도움을 버리고 전혀 도움이 되지 않는 자들과 친하게 지내려고 했습니다. 가장 어리석은 자는 정말 자기를 위해 주고 사랑해 주는 사람을 배신하고 전혀 도움이 되지 않는 자들에게 선심을 쓰는 사람입니다.

사람을 두려워하거나 이 세상을 겁내지 마십시요. 어치피 이 세상은 우리 힘으로 살 수 없습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이 세상에 처음 보내실 때부터 우리가 우리 힘으로 살 수 있다고 해서 보내신 것이 아닙니다. 오직 믿음입니다. 우리는 모험을 할 수 밖에 없습니다. 그 모험이라는 것은 머리로는 도저히 살 것 같지 않은 이 세상을 말씀을 붙들고 나가보는 것입니다.

우리는 사람을 다 잃어버리는 한이 있어도 하나님을 잃어버리면 안됩니다. 차라리 이 세상 사람들을 모두 다 적으로 만드는 일이 있어도 하나님을 적으로 만들어서는 안됩니다.

결국 이스라엘은 자기 꾀에 빠진 것입니다. 이스라엘은 세상 나라와 같아지기 위하여 왕을 요구했습니다. 왕이 없을 때 모든 것이 불확실했습니다. 체제도 없었고 군사도 없었습니다. 적이 쳐들어 오면 그때마다 모든 것을 다시 시작해야만 했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불확실성을 없애기 위하여 왕을 요구했습니다. 그러나 그들이 하나님을 버렸을 때 이 왕들은 그들의 올무가 되었습니다.

10-11절, “전에 네가 이르기를&985170;내게 왕과 방백들을 주소서”하였느니라.네 모든 성읍에서 너를 구원할 자 네 왕이 이제 어디 있으며 네 재판장들이 어디 있느냐? 내가 분노함으로 네게 왕을 주고 진노함으로 폐하였노라.”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이 왕을 달라는 기도를 들어주신 것은 기쁨으로 들어 주신 것이 아니었습니다. 분노로 왕을 주고 진노함으로 이들을 폐하셨습니다. 다시 말해서 그들이 하나님께 대한 신앙을 가지면서 불확실한 것과 확실하고 안정되며 인간적인 것 중에서 불확실한 것을 버리고 안정을 택했지만 그것이 결국 바른 선택이 아니었다는 것입니다. 그 이유는 하나님께서 그 안정을 축복하시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언젠가는 하나님께서 안정된 삶을 주실 때가 있습니다. 그때까지는 불안하게 하는 것이 안전한 것입니다.

우리는 무엇인가 불확실한 것을 두려워합니다. 언제 집세가 올라서 이사해야 할지 모르고 언제 직장이 부도날지 모르는 상황을 너무나도 싫어합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 기뻐하시지 않은 줄 알면서 스스로 안정을 택합니다. 그러나 그 안정은 평안이 아니라는 것이 곧 밝혀지게 됩니다.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주신 왕은 징계의 수단으로 주신 것이었습니다. 그들의 요구대로 왕을 주신 것은 그들을 심판하는 수단이었습니다.

그들은 이 잘못된 왕들 때문에 더 하나님으로부터 멀어지게 되었습니다. 이제 하나님께 나아가려면 몇 배 더 어려워지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차라리 몇 배 더 어렵더라도 하나님을 의지하는 신앙으로 돌아갔더라면 그들에게는 소망이 있었을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의 모든 기도를 다 들어주시지 않는 것에 대하여 감사드려야 합니다. 특히 우리가 욕심으로 드리는 기도를 들어주시지 않아야 합니다. 왜냐하면 우리가 욕심으로 드리는 기도를 들어주신다는 것은 우리에 대하여 진노하시는 것이며 우리를 심판하시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내가 욕심으로 기도한 것이 응답되었을 때 두려워해야 합니다. 왜냐하면 그것이 올무가 되어서 진리로 돌아오지 못하는 경우가 많기 때문입니다.

3. 임박한 회개의 요청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의 죄를 어떤 봉지에 뭔가 꽉 차서 터지게 된 물건처럼 표현하십니다.

12절, “에브라임의 불의가 봉함되었고 그 죄가 저장되었나니”

지금까지는 감추어 두었기 때문에 표시가 나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시간이 자꾸 지나니까 더 이상 감출 수가 없습니다. 마치 어떤 여인이 몰래 아기를 가졌는데 시간이 갈수록 배가 불러오는 것과 같습니다. 사람은 언제까지나 죄를 숨길 수 없습니다. 언제까지나 자기 불만을 감출 수 없습니다. 오랫동안 자기 욕심을 숨겨 놓을 수가 없습니다. 반드시 터질 때가 있습니다.

13절, “해산하는 여인의 어려움이 저에게 임하리라. 저는 어리석은 자식이로다. 때가 임하였나니 산문(産門)에서 지체할 것이 아니니라.”

자식을 낳는 것은 반드시 나쁜 것이 아닙니다. 오히려 생명을 얻을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이스라엘은 어리석게도 만삭이 되어서 아이가 나오려고 하는데도 그것을 인정하려고 하지 않습니다. 여기&985168;산문에서 지체하지 않는다’는 것을 다른 번역에는&985168;지체되고 있다’고 번역하고 있습니다. 즉 아기를 낳아야 하는데 머뭇거리고 있는 것입니다. 진통이 오고 산문이 벌어지면 어떻게 해야 합니까? 빨리 병원으로 달려가야지요. 옛날 같으면 사람을 보내서 산파를 불러 와야 할 것입니다. 그러나 이 미련한 여자는 부끄러운 것만 생각해서 절대로 아기를 가진 것이 아니라고 잡아뗍니다. 그래서 결국 시간을 놓쳐서 산모와 아이가 다 함께 죽고 마는 경우를 비유로 말씀하고 있습니다.

미련한 그리스도인의 문제가 무엇입니까? 죄를 지었고 갈등이 있으면 빨리 그 사실을 인정하고 위신 체면 다 버리고 하나님께 나아와서 회개를 해야 합니다. 회개하는 데 체면이 무슨 소용이 있습니까? 그런데도 그것을 인정하지 않는 사람이 있습니다. 지금 때가 다 되어서 아기가 나오려고 하는데도 한사코 아니라고 잡아뗍니다. 욕을 한번 얻어먹고 창피를 당하더라도 터트려버리면 다시 살 길이 열리는데 끝까지 참고 있어서 나중에는 곪을대로 곪는 바람에 치료가 불가능하게 되어버리는 것입니다.

14절, “내가 저희를 음부의 권세에서 속량하며 사망에서 구속하리니 사망아 네 재앙이 어디 있느냐? 음부야 네 멸망이 어디있느냐? 뉘우침이 내 목전에 숨으리라.”

만일 하나님 앞에 만삭(滿朔)한 자같이 죄가 터질 것처럼 되었다고 하더라도 회개하기만 하면 다시 살 수 있다고 약속하십니다. 하나님께서 음부의 권세에서도 속량하시고 사망의 재앙에서도 건져내신다고 약속하십니다. 이것은 부활에 대한 놀라운 약속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이미 죽은 자라 하더라도 사망의 권세를 깨트리시고 그 사람을 건져내시겠다고 말씀하십니다. 하나님 앞에서는 너무나 늦은 것이 없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말씀을 듣고 하나님께 돌이키기만 하면 그의 영혼과 전 삶을 다시 살려주십니다.

‘사망아 네 재앙이 어디있느냐? 음부야 네 멸망이 어디있느냐?’라는 말씀은 고린도전서 15:55-56에서 이렇게 표현하고 있습니다. “사망아 너의 이기는 것이 어디있느냐? 사망아 너의 쏘는 것이 어디있느냐? 사망의 쏘는 것은 죄요 죄의 권능은 율법이라.”

결국 하나님께 진심으로 회개하고 나아오는 자에게는 사망의 권세가 깨뜨려지며 죄가 더 이상 그를 지배하지 못하게 됩니다. 우리가 신앙생활을 할 수 있는 것은 바로 이 부활의 능력이 있기 때문입니다. 진정으로 회개하고 하나님께 나아가기를 원하는 자에게는 하나님께서 사망의 쏘는 것으로부터 지켜주십니다. 그의 삶에는 힘이 있습니다. 약동하는 능력이 있습니다.

결국 무엇이라고 말씀하십니까?&985170;뉘우침이 내 목전에 숨으리라.” 결국 뉘우침이 없다는 것입니다. 하나님께 회개한 양심은 결코 후회하지 않습니다. 롬 11:29에는 “하나님의 은사와 부르심에는 후회하심이 없느니라.”고 말씀하십니다. 하나님의 은혜는 한(限)이 없습니다. 그의 부르심과 주시는 구원의 선물도 제한이 없습니다. 누구나 어떤 경우라도 하나님께 나아가기만 하면 이 새로운 삶을 얻을 수 있습니다.

우리가 이 세상에 적응해서 사는 것 자체는 죄가 아닙니다. 그러나 하나님과의 관계를 변질시켜 가면서 세상을 사랑하고 세상과 같아지려고 하는 것은 스스로 무덤을 파는 것과 같습니다. 하나님의 백성이 이 세상에서 사는 원리는 하나님을 모르는 사람들과 근본적으로 다릅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말씀때문에 살고 말씀때문에 지켜집니다. 그러나 세상을 사랑해서 하나님을 버리거나 신앙을 변질시킬 때 그는 하나님을 자기의 적으로 만드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송아지가 아닙니다. 무슨 짓이든지 다 하고 한번 와서 그 입에 입맞춤만 하면 다 되는 하나님이 아닙니다. 철저하게 말씀으로 살 것을 요구하시는 하나님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붙드는 것은 불확실한 것입니다. 그러나 확실한 것을 택하기 위하여 말씀을 버릴 때, 그때는 영혼이 병들기 시작합니다.

혹시라도 잘못되게 형통하면 큰 일입니다.하나님께 왕을 달라고 기도했는데 하나님께서 진노로 왕을 주시고 방백을 달라고 기도했는데 망할 방백을 주시면 큰 일입니다.

상황보다 더 중요한 것은 하나님의 말씀으로 지각이 새로워지는 것입니다. 처음 부르심을 받았을 때의 가난했던 영적 상태를 항상 기억하고 하나님의 은혜에 굶주리고 그 분 앞에 겸손할 수 있도록 애써야 합니다.

15절 말씀을 보면 이스라엘이 결실할 때에 동풍이 불어 옵니다. 한창 모든 것이 잘 되고 있는데, 이 모든 것을 죽이는 아라비아 사막의 마른 돌풍이 불어 옵니다. 그래서 모든 것을 다 황폐화시켜 버립니다. 근원이 마르고 샘이 마르며 모든 보배 그릇이 약탈됩니다. 이것은 앗수르의 침공을 의미하는데 ‘여호와의 바람’이라고 부르고 있습니다.

16절 말씀을 보면 사마리아가 그 하나님을 배반했기 때문에 형벌을 당합니다. 얼마나 참혹한지 아이는 부숴뜨려지고 아이밴 여자는 배가 갈리게 됩니다. 이 모든 것이 하나님을 버린 댓가요, 사람을 친구로 삼기 위하여 하나님을 적으로 만든 결과입니다.

우리는 하나님때문에 존재하는 자들입니다. 하나님과의 관계가 불변인 범위내에서 다른 사람을 만나고 교제하는 것이지, 그것이 변질되면서 성공하는 것은 재앙입니다. 결코 축복이 아닙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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