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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참된 회개 (호 14: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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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끔 신문이나 텔레비젼을 보면 영국이나 프랑스의 그 유명한 열차들도 탈선을 해서 많은 사람들이 죽거나 다치는 것을 보게 됩니다. 기차가 한번 탈선을 하게 되면 어떻게 됩니까? 많은 사람들이 죽고 다치지만 다시 복구를 해서 열차선은 회복이 됩니다. 그런데 우리는 기차만이 아니라 어떤 사람이 가다가 잘못된 길로 빠지는 것도 탈선이라고 합니다. 사람이 한번 탈선하면 어떻게 됩니까? 열차보다 복구하는데 시간이 오래 걸립니다. 어떤 경우에는 회복되지 못하는 경우도 있을 것입니다.

그런데 호세아가 계속 말하고 있는 것이 무엇입니까? 개인만이 아니라 하나님의 백성들 전체가 탈선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당시 이스라엘 사회는 하나의 국가이었을 뿐 아니라 교회였습니다. 그런데 그들 전체가 하나님의 말씀을 거부하고 세상으로 나갔을 때 어떻게 되느냐 하는 것을 보여줍니다.

하나님의 백성이 망하는 것은 처음에는 망하는 것이 눈에 보이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겉으로 보기에 종교 행위는 계속 되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다가 한번 하나님께서 손을 들어 치시면 회복할 수 없을 정도로 멸망을 해버립니다. 이것이 바로 하나님의 백성의 책임입니다.

이 문제가 중요한 이유가 오늘 우리 사회의 기독교인들이 바로 거의 집단적으로 하나님의 말씀을 떠나는 현상이 나타나기 때문입니다. 오늘 기독교인들의 문제가 잘 진단이 되지 않는 이유는 교회에 오면 기독교인이지만 세상에 나가면 철저하게 세상 사람으로 살아가기 때문입니다. 바로 이것이 이스라엘 백성들이 빠진 오류였습니다. 사람들이 알아보지 않는다 하더라도 하나님의 백성들이 세상 사람이 될 수는 없었습니다. 하나님의 백성들의 타락은 위선적입니다. 겉으로는 타락하지 않은 것처럼 하면서 속으로는 곪아가고 있습니다. 이것이 한 두 사람의 경우가 아니고 전체적인 문제가 될 때에는 사회 전체가 날아가게 됩니다. 하나님의 백성들 때문에 세상 전체가 심판을 받게 되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 말씀은 이미 이스라엘의 멸망을 전제로 하고 있습니다. 실제로 이스라엘은 앗수르의 공격으로 망합니다. 대영박물관의 앗수르관에 가보면 앗수르 사람들이 이스라엘을 멸망시키면서 사람들을 어떻게 죽였는지 벽화로 남아 있습니다. 그런데 오늘 본문에서 하나님께서 말씀하시는 것이 무엇입니까? 언제든지 그들의 마음속에 ‘내가 하나님께 죄를 지었다. 다시 하나님께로 돌아가자’라는 생각이 들기만 하면 바로 주저하지 말고 돌아오라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이미 그런 생각이 드는 것 자체가 하나님께서 나를 용서하고 계신 것이며 하나님의 은혜가 임한 표시이기 때문입니다. 놀라운 것은 사람이 망할 때에는 끝까지 하나님과 겨루어보고 싶은 생각이 듭니다. 그래서 끝까지 겨루다가 망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은혜가 회복되면 자꾸 하나님께 돌아가고 싶은 생각이 듭니다. 죄짓는 생활이 지긋지긋하고 이제 거짓말하는 것도 싫고 정말 깨끗한 모습으로 돌아가고 싶은 마음이 듭니다. 이것이 바로 하나님께서 나를 부르고 계신 것입니다. 그때 주저하지 않고 하나님께로 돌아가면 나를 위하여 준비된 은혜가 있는 것을 발견하게 됩니다. 하나님의 축복이 회복되기 시작하는데 마치 선물이 준비된 것 같습니다.

1. 돌아오라는 초청

누구든지 하나님께 회개하고 돌아오는 것은 하나님께서 그를 말씀으로 불러 주셨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 회개하라고 초청해 주셔야만 합니다. 어떤 사람이 고통 가운데서 자신의 잘못을 깨닫고 자꾸 눈물이 흐르고 회개하고 싶은 생각이 드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이미 하나님께서 그를 부르고 계시기 때문입니다.

1절,&985170;이스라엘아 네 하나님 여호와께로 돌아오라. 네가 불의함을 인하여 엎드러졌느니라.”

하나님께서 고통 중에 있는 이스라엘 백성들을 향하여 ‘이스라엘아 네 하나님 여호와께로 돌아오라.’고 초청하십니다. 이것은 마치 잘못을 저지르고 집에서 쫓겨나서 집 주위를 빙빙 돌고 있는 자식에게 부모가 ‘빨리 들어오라’고 부르는 것과 같습니다. 부모님이 자식에게 뭐라고 말씀하십니까? ‘내 마음 변하기 전에 빨리 들어와’라고 말씀하시지요. 이때 ‘내 마음 변하기 전에’라는 말이 얼마나 반가운지 모릅니다.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돌아오라고 하시면서 그들이 어떻게 해서 이렇게 되었는지 이유를 분명하게 밝히십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나라를 잃고 전 세게에 포로가 되어 잡혀가게 되는 것은 하나님의 능력이 부족해서도 아니고 하나님의 마음이 변덕을 부려서 그런 것도 아니고 그들의 불의 때문이었습니다. 여기서 ‘불의’가 무엇입니까? 자기들의 것이 아닌 것을 가지고 자기들의 사람이 아닌 사람을 데리고 사는 것을 말합니다.

하나님의 백성들은 아무리 적어도 하나님이 주신 것으로 살아야 합니다. 그리고 하나님이 주신 것으로 만족을 해야 합니다. 그런데 거기서 이상한 방법을 써서 더 가지게 되면 이것이 좋은 것이 아니고 하나님의 은혜를 빼앗아가는 것이 됩니다. 그러니까 하나님의 백성들은 처음부터 작아도 하나님이 주신 것으로 만족하고 감사하는 법을 배워야 합니다.

아무리 어려워도 ‘하나님, 참 감사합니다. 하나님께서 저에게 주신 것 너무 좋아요. 그리고 기뻐요’ 이것이 마음 속에 박혀야 합니다.

한번 보십시다. 하나님, 감사해요. 하나님, 좋아요. 그리고 하나님, 기뻐요

이것이 우리의 생활이 되어야 합니다.

여기서 ‘네 하나님 여호와께 돌아오라’는 것은 그냥 맨 발로 불쑥 돌아오라는 말이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원하지 않는 것들을 버리고 돌아오라는 말입니다. 많은 사람들이 회개라고 하는 것은 자신의 바람직하지 못한 처지에 대하여 애달파하는 것으로 생각합니다. 사실 회개에는 그런 부분이 있습니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얼마나 슬퍼하며 눈물을 몇 방울 더 흘리느냐 하는 것이 아니라 의지적인 결단입니다. 성경에서 말하는 회개는 의지적인 결단입니다. 만나지 말아야 할 사람을 만나고 있다면 그 관계를 완전히 청산해야 합니다. 만일 부정한 재산을 가지고 있다면 다 돌려주어야 합니다. 다른 말로 말하면 먹은 만큼 토해내어야 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신약 성경에서 볼 수 있는 회개의 대표적인 예는 세리 삭개오입니다. 그는 예수님을 만난 후 토색한 것을 네 배나 갚았습니다. 그리고 재산의 반이 부정한 것으로 생각해서 반을 가난한 사람들에게 나누어주겠다고 약속을 했습니다. 회개는 감정적으로 비통해 하는 것이 아니라 의지적인 결단입니다.

오늘 본문 말씀은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어떻게 회개해야 할지 그리고 회개하는 기도까지 가르쳐 주십니다.

2절,“너는 말씀을 가지고 여호와께로 돌아와서 아뢰기를 모든 불의를 제하시고 선한 바를 받으소서 우리가 수송아지를 대신하여 주께 드리리이다”

‘말씀을 가지고 여호와께로 돌아와서’라는 것은 이제 새로 들은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반응을 말합니다. 다시 말해서 ‘하나님 오늘 저에게 이렇게 말씀하셨는데 이 말씀이 마음에 찔립니다. 제가 이 말씀대로 행하겠습니다’라고 말하는 것이 말씀을 가지고 하나님께로 돌아오는 것을 말합니다. 다시 말해서 하나님의 바른 말씀이 없으면 제대로 된 회개도 있을 수 없다는 뜻입니다. 말씀이 없는 기도는 예를 들면 병들었을 때 민간 요법과 같습니다. 제대로 진단을 해 보지도 않고 여기가 좋지 않겠다 생각되면 자기 마음대로 호박도 삶아먹고 이 약 저 약도 먹어보는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말씀은 나의 형편과 처지에 대한 정확한 진단입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 나에게 하신 그 말씀을 붙들고 기도하는 것은 지금 내가 하나님의 보좌 바로 앞에 있는 것이며 하나님께서는 긍휼의 눈으로 나를 보고 계시며 나를 불쌍히 여기시고 계신 것입니다. 그러니까 하나님의 말씀이 들린다는 것 자체가 하나님은 나를 고치시고 계신 것이며 나를 부르고 계신 것입니다.

‘모든 불의를 제하시고 선한 바를 받으소서’

여기서 모든 불의라고 하는 것은 하나님을 떠나서 이루어진 삶을 말합니다. 도저히 내 힘으로 수습할 수 없는 죄의 결과들을 말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보니까 도대체 어디서부터 손을 써야 할지 알 수가 없습니다.

우리가 흔히 하는 말이 ‘첫단추 부터 잘못 꿰어졌다’고 하는데 단추야 다시 꿰면 되겠지만 사람이야 어떻게 그렇게 할 수가 있습니까? 그럴 때에는 엉만진창이 된 삶을 그대로 하나님 앞에 가지고 가서 ‘하나님 저는 어떻게 할 수가 없습니다. 저는 하나님의 도우심이 너무나도 필요합니다’라고 기도하라는 것입니다. 여기서 ‘선한 바를 받으소서’라는 말이 무슨 뜻일까요?

지금 하나님의 은혜로 회개하려고 하는 사람이 무슨 선한 일을 많이 했겠습니까? 그러나 다른 것은 다 거짓되고 엉터리이지면 지금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바르게 살아보려고 애쓰는 마음 이것만은 진실한데 이 마음을 받아 달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무엇이라고 말씀하고 있습니까? ‘우리가 입술로 수송아지를 대신하여 주께 드리리이다’ 하나님 앞에서는 말씀을 붙들고 회개하는 이 입술보다 더 아름다운 것이 없다는 것입니다. 다른 어떤 거창한 예물이나 헌금보다 이제는 정말 하나님의 말씀을 붙들고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삶을 살기 위하여 입술을 꼼지락거리면서 기도하는 그 기도보다 더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것이 없고 그 어려운 가운데도 하나님을 신뢰하여 믿음으로 일어서는 그 마음보다 더 귀한 제사가 없다는 것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망한 이유가 어디에 있습니까? 이상하게 하나님의 율법이 싫더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뭐든지 하지 말라고 합니다. 이것도 죄고 저것도 죄입니다. 그러니까 하나님은 나에게 아무 것도 하지 못하는 분이라는 생각이 듭니다. 그런데 자기 마음대로 세상 욕심을 따라 가보니까 어떻습니까? 완전히 프로판 가스통이 폭발한 것 같습니다. 모두 다 날아가 버리고 아무 것도 남은 것이 없습니다. 그때 비로소 깨닫는 것이 무엇인가 하면 하나님의 말씀이 얼마나 아름다운가 하는 것입니다. 이제는 오로지 하나님의 말씀 듣고 사는 것이 최대의 기쁨이 되어버립니다. 그런 경우에는 망하려고 해서 망할 수가 없습니다. 왜냐하면 우리가 망하는 것은 우리 속에 있는 욕심 때문에 망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나를 아프게 할 때 그냥 넘어가면 안됩니다. 지금 하나님께서 나를 부르고 계신 것입니다. 그때 세상 욕심 다 포기하고 빈 손으로 하나님께 돌아가는 것입니다. 이제는 욕심대로 살지 않고 말씀대로 굶으라 하면 굶고 여기 저기 떠돌아다니라고 하면 떠돌아다니겠습니다 라는 각오로 나아오는 것이 하나님께로 돌아오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어떻게 회개하라고 말씀하십니까?

3절, “우리가 앗수르의 구원을 의지하지 아니하며 말을 타지 아니하며 다시는 우리의 손으로 지은 것을 향하여 너희는 우리 신이다 하지 아니하오리니 이는 고아가 주께로 말미암아 긍휼을 얻음이니이다 할지니라.”

그들이 진정으로 회개한다면 버려야 할 것이 세 가지가 있습니다.

하나는 앗수르라는 다른 나라를 의지하는 것입니다.원래 이스라엘은 자기 힘으로 존재할 수 없는 나라였습니다. 주위에는 모두 강대국들이고 이스라엘은 무슨 힘이나 세력이 없었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늘 불안했습니다. 마치 주인은 매일 집을 비워내라고 재촉을 하는데 갈 곳이 없는 가난한 사람들과 같습니다. 그때 누군가가 나쁜 제안을 하면서 자기 집에 있으라고 하면 얼마나 귀가 솔깃하겠습니까? 이스라엘은 늘 불안했습니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 세상적인 방법을 쓰지 못하게 하셨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앗수르가 지켜주고 도움이 되어주겠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우리를 불안하게 하시는 것은 훈련입니다. 언제나 불안해야 하는 것은 아닙니다. 그러나 불안하게 하실 때 그것을 피하면 안됩니다. 하나님께서 직장을 안주시면 그냥 있어야 하고 결혼이 안 될 때도 그대로 있어야 합니다. 그렇지 않고 앗수르를 끌어들이면 하나님의 계획은 엉망이 되어버립니다. 가장 안타까운 사람이 어떤 사람입니까? 실컷 믿음의 연단을 받아 놓고 세상적인 방법에 빠져서 참 신앙을 잃어버리는 사람입니다. 그런 사람은 고생만 하고 얻는 것은 없는 사람입니다.

두번째는 말을 의지하지 않는 것입니다.&985168;말을 타지 아니하며’라는 것은 말과 같은 군사력을 의지하지 않는다는 뜻입니다. 처음에 이스라엘 백성들이 가나안 땅에 들어왔을 때 하나님께서는 여호수아로 하여금 모든 말의 힘줄을 끊게 하셨습니다. 그것은 군사력으로 이 땅을 지키려고 하지 말라는 뜻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면 하나님께서 지켜주신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하나 더 버려야 할 것은 헛된 우상입니다.&985170;우리의 손으로 지은 것을 향하여 우리 신이라 하지 아니하며”라고 말씀합니다.‘우상’이라는 것이 무엇입니까? 실제로 존재하지 않는 것인데 사람이 상상하여 만들어낸 것입니다. 우리는 사실이 아니면서도 마치 그것이 사실인 것처럼 생각해낸 것이 너무나도 많습니다. 그런 것들이 우리 삶에 영향을 준다면 그것은 우상입니다. 우리의 손이 만들어낸 것이 아니라 우리 머리와 상상력이 만들어낸 것입니다.

하나님의 백성들은 어떤 사람들입니까? 위기 가운데 사는 사람들입니다. 하루 하루 사는 것 자체가 맹수에 에워싸여 있고 자기 힘으로는 도저히 극복할 수 없는 상황에 처한 것과 같습니다. 그런 가운데 안정된 힘이나 군사력이나 상상력을 의지한 것이 이스라엘의 죄입니다. 오직 살아계신 하나님만 의지해야 합니다. 뭐라고 말씀합니까?&985170;이는 고아가 주께로 말미암아 긍휼을 얻음이니이다.” 자기들을 ‘고아’라고 부릅니다.‘고아’라는 말은 어느 누구도 도와주거나 불쌍히 여겨 줄자가 없는 사람입니다. 하나님께서 블쌍히 여겨주시지 않으면 당장 망할 수밖에 없는 자들이 고아입니다.

우리가 알 수 있는 것이 무엇입니까? 정말 하나님을 믿는 것은 세상적인 생각과 정반대가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믿는 것은 뭐라고 할까요? 위기 상황을 스스로 만들어가는 것 같습니다. 사실 하나님을 믿는 것은 완전히 모험입니다. 고아가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도와주시면 다행이지만 도와주시지 않으면 이것도 아니고 저것도 아닌 상태에 망할 수밖에 없습니다.

저에게도 그런 순간들이 많이 있었습니다. 분명히 인간적인 방법으로 나가면 살 것은 같은데 가만히 앉아서 굶어죽는 것 같은 형편이었습니다. 얼마나 바보스럽고 얼마나 어리석은지 알 수가 없었습니다. 그때 제 마음에 어떤 생각이 들었는가 하면 그대로 하나님 바로 알고 죽어버리자. 사람들은 아무도 알아주지 않고 가장 어리석은 바보로 알겠지만 하나님을 바로 안다는 것 하나만 해도 얼마나 복된 것인가 그래 하나님 한 분 바로 알고 죽어 버리자라고 결심했더니 그 모진 목숨이 아직까지 죽지 않고 살아 있습니다.

만약 하나님이 안계시면 우리는 고아들입니다. 하나님의 고아인 셈입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이 고아들을 얼마나 사랑하시는지 모릅니다.

2. 기질을 고치심.

이스라엘 백성들이 하나님의 말씀대로 바로 회개할 때 하나님께서는 어떻게 하겠다고 말씀하십니까?

4절,&985170;내가 저희의 패역을 고치고 즐거이 저희를 사랑하리니 나의 진노가 저희에게서 떠났음이니라.”

가장 중요한 것이 이스라엘 백성들의 기질을 고치는 것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의 기질이 무엇입니까? ‘패역’입니다. 여기서 ‘패역’이라는 것는 반항하는 기질을 말합니다. 자기 생각과 하나님의 생각이 맞지 않으면 반발부터 하고 보는 것입니다. 그리고 자기 고집대로 나갔다가 언제나 두들겨 맞고는 돌아오는 것이 이스라엘 백성들의 기질이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무엇보다 그들의 기질을 고치십니다. 이것이 복입니다.

원래 우리는 일단 자기가 한번 생각을 하면 가고 싶은데까지 가야 돌아옵니다. 그러나 그 동안 얼마나 많은 시간이 낭비되며 얼마나 많은 물질이 허비가 됩니까? 그리고 하나님이 징계를 받느라고 허비한 정력이 얼마나 많습니까? 가장 복받은 사람이 일단 하나님의 말씀이 아니라고 하면 돌이킬 수 있는 자세를 가진 사람입니다. 아말렉 사람들의 특징이 무엇인가 하면 남의 말은 절대로 듣지 않는 것입니다. 그리고 옳은 말이라고 생각되면 더 반항하는 것이 그 사람들의 기질이었습니다. 그러나 새로 돌아온 하나님의 백성들은 일단 맞을 짓을 덜합니다. 왜냐하면 고집스럽게 나가다가도 하나님의 뜻이 아니라고 생각되면 멈추어서기 때문입니다. 이것보다 더 위대한 것이 없습니다. 저는 이렇게 하는 젊은이들을 많이 봅니다. 은혜를 받은 청년들의 특징이 아무리 자기 생각이나 계획을 세워놓았다 하더라도 하나님의 뜻인지 자신이 없으면 망설이라는 것입니다. 젊은 사람들 중에서 그렇게 하는 사람이 얼마나 있습니까? 거저 자기 생각대로 다 해야 직성이 풀리지요. 그러나 나의 힘으로 아무 것도 할 수 없으며 하나님이 도우셔야 한다는 것을 알고 있는 사람은 망설이고 멈칫멈칫합니다. 그러니까 불필요한 시행착오를 겪을 기회가 훨씬 적은 것입니다. 시행착오를 한번 겪으면 십년 이상을 허비하게 되는데 그런 사람은 한번 멈칫함으로 십년을 버는 것입니다.

그리고는 어떻게 하십니까?&985168;즐거이 저희를 사랑하신다’고 하십니다.즐거이 사랑한다고 하는 것은 아무 댓가없이 한없는 사랑을 부어 주신다는 뜻입니다. 하나님이 주시려고 하는 것이 바로 이것입니다.

롬 8:32,&985170;자기 아들을 아끼지 아니하시고 우리 모든 사람을 위하여 내어 주신 이가 어찌 그 아들과 함께 모든 것을 우리에게 은사로 주지 아니하시겠느뇨?”

우리에게 무엇을 아끼겠느냐는 말씀입니다. 아들을 아끼지 아니하시고 우리를 위하여 주신 분이 무엇을 아끼겠습니까? 하나님은 우리에게 완전히 두 팔을 벌리고 있습니다. 무엇이든지 구하기만 하면 주실 것입니다. 그런데 옛날에는 쓸데 없는 세상 욕심으로 잔뜩 구하더니 이제는 너무 쉽게 포기해버리는 것입니다. 사실 우리 인간들만큼 까다롭고 상대하기 어려운 존재도 없을 것입니다. 좀 사랑하면 온 세상이 자기 것인처럼 까불다가 어려움이 오고 환란이 오면 완전히 절망하고 침체되어서 마땅히 구해야 할 것도 구하지 않습니다. 만약 우리의 구하는 것이 하나님의 뜻에 맞으면 어떻게 됩니까? 기적같은 하나님의 축복이 이루어질 것입니다.

우리가 구해야 할 가장 귀한 것이 무엇입니까? 이 세상에 없는 것입니다.

하늘에 있는 모든 신령한 축복들입니다. 야고보 사도는 지혜를 구하라고 했습니다. 사도 바울은 사랑이 최고라고 했습니다. 베드로의 은사의 목록중에는 인내도 있고 형제 사랑도 있습니다. 우리는 자꾸 돈이나 이 세상에 있는 것들을 구합니다. 그런데 이 세상에 있는 것들은 쌓아 놓으면 기분은 좋지만 제대로 써먹을 줄 모릅니다. 하나님의 은사는 이 세상에 있는 모든 것들을 제대로 사용하게 할 뿐 아니라 무한한 하나님의 능력을 끌고 오는 견인차 역할을 합니다.

우리의 기질이 고쳐지면 어떻게 됩니까? 맞을 일이 없습니다. 같이 믿어도 징계를 당하지 않고 믿는 비결이 무엇입니까? 바로 이렇게 반항적인 기질을 고침받는 것입니다.

3. 하나님의 축복

회개하는 자들에 대한 하나님의 축복이 무엇입니까?

5-7절,&985170;내가 이스라엘에게 이슬과 같으리니 저가 백합화같이 피겠고 레바논 백향목같이 뿌리가 박힐 것이라. 그 가지는 퍼지며 그 아름다움은 감람나무와 같고 그 향기는 레바논 백향목같으리니 그 그늘 아래 거하는 자가 돌아올지라. 저희는 곡식같이 소성할 것이며 포도나무같이 꽃이 필 것이며 그 향기는 레바논의 포도주같이 되리라.”

마치 하나님의 은혜와 축복이 폭포같이 쏟아지는 것 같습니다. 모든 것이 다 아름답게 회복됩니다. 망하기 전보다 훨씬 더 영광스럽고 풍성한 모습니다.

우선 하나님은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이슬같이 찾아오십니다. 그들이 전혀 느끼지 못하는 가운데 조용히 찾아오십니다. 회복되는 것을 잘 느끼지 못합니다. 너무나도 조용히 찾아오셔서 모든 것을 회복시키시는데, 회복의 속도가 그렇게 빠를 수 없습니다. 그리고 그 결과는 이전보다 말할 수 없이 아름다운 모습니다. 회복된 이스라엘의 모습은 꽃으로 말하면 백합화와 같고 그 안정성은 레바논 백향목의 뿌리와 같습니다. 가지는 감람나무와 같습니다. 가장 무성하기 때문입니다. 열매는 곡식처럼 많이 열립니다. 아마 포도주 중에는 레바논 포도주가 가장 진했던 것 같습니다. 레바논 포도주와 같은 향기를 낼 것이라고 말씀하십니다.

이런 비유들이 무엇을 말씀합니까? 결국 이스라엘 백성들은 하나님의 말씀 그대로 살아야 가장 위대하고 가자으 영향력이 있는 백성이 된다는 뜻입니다. 하나님을 믿는 자들이 하나님을 믿으면서 세상적인 방법대로 살면 둘 다 가질 수 있을 것 같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둘 다 잃어버리는 방법입니다. 하나님의 백성들은 이 세상을 보면 안됩니다. 오직 하나님만 바라 보아야 합니다. 그래야 이런 아름다운 삶을 살 수 있습니다. 그런 삶이 레바논 백향목처럼 뿌리가 든든한 삶의 방식입니다. 그런 삶은 반드시 향기가 나게 됩니다. 이 세상도 그 향기로 기쁨을 얻게 됩니다.

다시 말해서 하나님께서 우리들에게 원하시는 것은 바로 철저하게 하나님을 의지하는 신앙입니다. 그렇게 되지 않으면 될 수 밖에 없도록 만들어져 있습니다. 우리는 어쩔 수 없는 사람들입니다. 그래서 처음부터 작은 것으로 만족하고 기뻐하는 삶을 사십시오. 우리 속담에 젊어서 고생은 사서라고 하라는 말이 있습니다. 아직 젊었을 때 말씀대로 살기 위해서 많은 고생을 하십시오. 요셉처럼 애굽으로 노예로 끌려가기도 하고 어떤 경우에는 감옥의 노예가 되기도 할지 모릅니다. 그러나 그것이 바로 영원히 하나님 앞에서 떠나지 않는 길이고 자기도 살고 다른 많은 사람들도 살리는 길입니다.

신약 시대에 하나님은 우리가 탈선하지 않도록 미리 고난을 주시고 연단을 주십니다. 이것이 얼마나 감사한 일이며 특별한 축복인지 모릅니다. 그래서 그리스도인의 연단은 ‘전공 필수’ 과목입니다. 아직 노예 자리까지 내려가지 않은 사람은 전공 과목을 이수하지 못한 것입니다. 언젠가는 이수하게 될 것입니다.

또한 무엇이라고 고백합니까? 8절, “에브라임의 말이&985168;내가 다시 우상과 무슨 상관이 있으리요?’할지라. 내가 저를 돌아보아 대답하기를&985168;나는 푸른 잣나무 같으니 네가 나로 말미암아 열매를 얻으리라.’ 하리라.”

에브라임이 다시는 우상을 찾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우상은 그들의 상상력의 산물이며 일시적으로 정신적인 호기심을 만족시켜 주었을 뿐입니다. 그러나 그런 정신적인 만족은 하나님을 잃게 만들었고 그 허망한 욕심이 이방땅에서 견딜 수 없는 고생을 하게 했습니다. 요즘 우리 주위에 사실이 아닌 공상들 많이 있습니다. 텔레비젼 드라마도 그렇고 컴퓨터 게임도 그렇고 영화나 예술 가운데도 사람의 눈을 속이는 것들이 얼마나 많은지 모릅니다. 얼마나 많은 젊은이들이 고시 공부의 환상에 빠져 있는지 모릅니다. 그런 것들의 실체를 보아야 합니다. 빨리 환상을 버리고 실체를 파악해야 합니다. 인정할 것은 인정하고 버릴 것은 버려야 합니다. 그래야 그때부터 열매를 맺을 수 있습니다. 가장 중요한 것이 현실을 현실로 인정하는 것입니다. 주어진 현실에서 나에게 주어진 일을 충실하게 해 나갈 때 주님이 나의 앞 길에 대하여 계획을 세우시고 나의 길을 열어주시고 인도해 주셔서 잣나무 같이 열매맺게 하시는 것입니다.

호세아의 마지막 결론이 무엇입니까?

9절, “누가 지혜가 있어 이런 일을 깨달으며 누가 총명이 있어 이런 일을 알겠느냐? 여호와의 도는 정직하니 의인이라야 그 도에 행하리라. 그러나 죄인은 그 도에 거쳐 넘어지리라.”

여기서 말씀하는 것이 무엇입니까?&985168;도대체 우리가 어떻게 하나님께서 하시는 일을 다 알 수 있겠느냐?’는 것입니다. 결국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 백성들을 만들어 내십니다.결국은 하나님은 많은 연단을 통해서 눈에 보이지 않는 하나님을 마치 옆에 계신 것처럼 믿고 사는 백성을 만들어내는데 사실 모든 것이 그들의 믿음대로 되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을 보면 ‘의인이라야 그 도에 행한다’고 말씀합니다. 여기서 ‘의인’이라는 것은 도덕적으로 완전한 사람을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존귀하게 생각하는 사람입니다. 결국 그런 자들만이 하나님의 말씀대로 살 수 있고 그런 자들을 하나님께서 축복하십니다.

하나님은 어떤 하나님입니까? 말씀대로 모든 것을 행하시는 하나님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하나님을 믿는다고 하면서도 결국은 세상을 믿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그런 자들을 완전하게 멸망시키셨습니다. 그리고 완전히 파멸시킨 가운데 그들을 다시 부르셔서 하나님 말씀대로 사는 자들을 만들어 놓으십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지혜요 하나님의 사랑입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 하시는 일은 한 두 해의 짧은 기간에 모든 것을 다 안다는 것이 불가능합니다.

하나님은 우리에게는 어떻게 하십니까? 우리는 몇백년씩이나 기다릴 수 있는 시간이 없습니다. 단지 하나님께서는 세상의 실패를 통하여 내 자신의 모습을 보게 하십니다. 나의 욕심이라고 하는 것이 얼마나 엉터리이며 허황된 것인지 깨닫게 하십니다. 그리고는 하나님을 알고 하나님의 말씀대로 사는 것이 기쁨이 되게 하십니다. 그것이 아무리 이 세상에서는 늦고 인정받지 못하는 길이라고 하더라도 이제는 더 이상 자기 욕심대로 살지 않고 단 하루를 살아도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삶을 살려고 합니다.

신약시대 우리들의 고백이 무엇입니까? ‘이제는 더 이상!’입니다. 이제는 남은 기간을 더 이상 방황하거나 육체의 정욕대로 살지 않겠다는 것입니다.

결국 하나님께서 구원하시는 사람은 어떤 사람입니까? 종교적인 형식을 가진 자들이 아닙니다.실제로 하나님을 전적으로 의지해서 사는 사람이며, 하나님께서 주시는 것이 아니면 아무 것도 가지지 않겠다고 결단한 사람입니다.그런 사람은 되는 것이 아무 것도 없는 것 같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그 사람의 삶을 만들어 가기 시작하십니다. 결국 가장 아름답고 가장 향기로우며 가장 많은 열매를 맺는 삶을 살도록 하십니다.

사도 바울은 로마서 9장 이후에서 유대인들 다수가 구원에서 제외되고 대신 이방인들이 하나님의 구원에 참여한 것을 설명하면서 바로 이 호세아 말씀을 결론으로 인용하고 있습니다.

롬 11:33-36, “깊도다! 하나님의 지혜와 지식의 부요함이여, 그의 판단은 측량치 못할 것이며 그의 길은 찾지 못할 것이로다. 누가 주의 마음을 알았느뇨? 누가 그의 모사가 되었느뇨? 누가 주께 먼저 드려서 갚으심을 받겠느뇨? 이는 만물이 주에게서 나오고 주로 말미암고 주에게로 돌아감이라. 영광이 그에게 세세에 있으리로다. 아멘.”

하나님께서는 애써 우리를 구원하시고 나서 그 영광을 다른 사람이나 피조물에게 돌아가도록 하시지 않습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변화시키시는 분입니다. 그것도 적당하게 바꾸시는 분이 아닙니다. 완전하게 변하기 전에는 아무 것도 주시지 않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하나님을 전적으로 의지하는 신앙으로 바뀌었을 때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아낌없이 은혜를 주십니다. 우리가 완전히 변하기까지 우리는 하루라도 편할 수가 없습니다. 우리 빨리 하나님이 원하시는 모습으로 만들어집시다.

이것이 하나님의 지혜요 능력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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