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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선지자의 슬픈 노래 (미 01:8-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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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지자의 슬픈 노래(미 1:8∼16)

앞에서는 북이스라엘의 사마리아를 향한 심판의 예언이었습니다.
그러나 이 심판이 이제는 남유다의 예루살렘에까지 임하고 있다는 말씀을 전하면서 미가 선지자는 슬픈 마음을 감추지 못하고 토로하고 있습니다.
그의 모든 표현과 행동은 유다를 향하여 회개를 외치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백성들은 오히려 선지자를 향하여 반대의 반응을 나타내고 있습니다.
그것은 결코 여호와 하나님이 유다를 멸망시키지 않으실 것이라는 것입니다.
이것도 믿음입니다. 그러나 잘못된 믿음이요, 그들의 교만이었습니다.

1. 먼저는 그의 슬픈 표현입니다(8­9절).
“애통하며 애곡하고”라는 말은 인간적인 표현입니다.
사람은 슬픈 일이 있을 때 애통해 합니다.
이 말은 가슴이 아픈 표현입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가슴을 치고 또 쓰다듬기도 합니다. 가슴이 쓰리다는 표현도 합니다.
“애통하는 자는 복이 있다.”고 하신 예수님의 말씀과는 다른 표현입니다.
여기서 말하는 예수님의 말씀은 자신의 죄를 깨닫고 애통해 한다는 뜻입니다.
이것은 회개하는 사람의 표현입니다.
그러나 미가는 지금 자신의 민족이 죄를 깨닫지 못하고, 심판의 채찍에 맞을 것을 보면서 안타까워하는 장면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그는‘애곡’합니다.
이것은 소리를 내고 있습니다.
슬픈 사람은 슬픈 소리를 냅니다. 유
대인들은 사람이 죽었을 때 상주들과 함께 우는 사람들을 세웁니다.
그러므로 유대인들은 슬픈 일이 있을 때 우는 소리를 냅니다. 이 소리는 처절한 소리입니다. 그래서“들개같이 애곡하고 타조같이 애통하리니”라고 합니다.
들개의 우는 소리는 매우 흉하고, 타조의 울음소리는 매우 슬프게 들린다고 합니다.
미가의 슬픈 마음을 통하여 그 민족의 슬픔을 나타내고 있습니다.
이와 같은 미가의 마음은 눈물의 선지자 예레미야가 유다의 죄악과 그 징벌의 결과로 멸망할 예루살렘을 생각하며 통회하는 마음과 흡사합니다.
그리고“벌거벗은 몸으로”라고 했습니다.
이것은 맨발이라는 의미와 같습니다. 그는 이렇게 유다의 멸망을 내다보면서 몸과 마음과 소리로 슬픔을 표현했습니다.
그의 유다를 향한 애증이 얼마나 컸는지를 알 수 있습니다.
또한 그는 미래에 이루어질 하나님의 징벌에 대한 예언자적 통찰력을 확실하게 나타내고 있습니다.
그는 멸망이 임박했다고 말합니다.
북이스라엘을 지나서 남유다에까지 이르렀다는 것입니다.
2. 미가의 슬픔이 개인적인 것이 아니라 민족의 것이요, 모두의 것임을 나타내고 있습니다(10­13절).
그래서 대표적인 성읍들을 열거하고 있습니다.
사빌과 사아난, 그리고 벧에셀의 파멸을 예언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티끌에 굴러야 된다고 합니다.
이것은 너무 안타까운 나머지 몸을 대굴대굴 땅에 구르게 한다는 것입니다.
사빌이란‘단아하고 아름답다’는 뜻입니다.
그런 지방이 처참하게 침략으로 어지럽혀지고 더럽혀진다는 것입니다.
멸망은 가장 큰 비극입니다.
더욱이 전쟁으로 멸망한다는 것은 민족적 자존심을 송두리째 쏟아 버리는 것입니다.
민족 전체가 포로가 될 뿐 아니라 노예로 변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회개하지 않고 있습니다.
예언자는 이것이 안타까웠습니다.
오늘도 죄를 범하고 있는 사람들을 보면서 느끼는 감정입니다.
오히려 자신들의 생활이 정당하고 모든 일이 잘 되고 있다는 표정입니다.

예언자의 말씀이 백성들에게는 미친 사람의 넋두리로 들리고 있습니다.
노아의 전하는 말이 그러했습니다.
백성들은 모세가 들려준 말씀을 청종하지 않았으며, 선지자들이 하나님이 선택하신 백성들에게 외치는 말씀도 외면했습니다.
죄를 범하는 세상이나 사람들은 모두 듣기는 들어도 깨닫지 못하며, 보기는 보아도 무엇인지 알지 못하고 있습니다.

오늘의 사회상을 보면서 느끼는 것도 같은 것입니다.
세상이 좋다고 휴일이면 장사진을 치는 승용차들을 보면서, 너무나 육적이고 향락적이라는 생각을 떨칠 수 없습니다.
그들에게 무슨 영적인 눈이 있으며 감정이 있겠습니까?
그들을 향해서 외치는 영적 지도자들의 마음은 아프기만 합니다.
미가 선지자는 이런 면에서 슬픔을 금할 수가 없었습니다.

3. 유다에 대한 멸망 선포입니다(14­16절).
이처럼 미가 선지자는 성읍들의 멸망을 선포하고, 애통을 요구함으로써 장차 포로가 될 것을 예언한 것입니다.
“이스라엘의 영광이 아둘람까지 이를 것이라.”고 했습니다.
아둘람은 다윗과 그 추종자들이 사울을 피하여 도망쳤던 도피처를 가리킵니다(삼상 22:1­2).
그러므로 이 구절은 이스라엘 백성들이 아둘람 동굴과 같은 곳으로 피하여 도망갈 것을 의미합니다.
그 슬픔은 “네 머리털을 깎아 대머리 같게 할지어다.”로 표시됩니다.
머리를 깎는 것은 애통의 표시입니다.
모세의 율법에서는 이런 일을 금했습니다(레 19:27).
그럼에도 불구하고 애통의 표시로 행해진 이 관습은 아마도 바알 제의에서 유래된 것으로 여겨집니다.
더욱이 미가는 이 구절에서 유다가 멸망하게 되면, 그들이 비록 우상 앞에서 애통할 때 취했던 관습이지만, 그러한 애통마저도 행할 사람이 없을 것이라는 사실을 말합니다.
죄악은 죄악 스스로 멸망의 길을 갈 뿐만 아니라 죄악을 범하게 한 그 사회, 그 세대를 하나님으로부터 멀어지게 합니다.
그러므로 사회 구성원 모두는 죄악을 일소시키는 데 전력해야 합니다.

그들이 아무리 제물을 많이 드렸다 하더라도 이미 정해진 멸망을 피할 수는 없었습니다.
다윗시대의 영광도 없었던 것같이 이 멸망은 말살하고 맙니다.
그 잃어버린 영광을 안타까워하며 슬퍼할 것입니다.
결국 그들은 심판을 받게 됩니다.
그 슬픔은 이루 형용할 수 없습니다.
멸망 후에 일부는 포로로 잡혀갔습니다.
그들은 민족적 수모를 당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러나 남은 자들도 그 이상의 어려움을 겪으며 슬퍼하게 되었습니다.
남은 자들은 가난과 경멸, 그리고 좌절로 인해 고통당했습니다.

멸망은 심판이었습니다.
미가 선지자는 어려운 상황에서도 이 예언을 했습니다.
그런 예언을 할 수밖에 없었던 자신에 대해서 슬퍼했습니다.
사람은 역사적인 상황을 무시할 수 없습니다.
영광의 시대에 산 선지자도 있었습니다.
그러나 예레미야 같은 선지자는‘눈물의 선지자’라고 불리웠습니다.
그는 멸망의 때에 살았고, 외치는 예언자였기 때문입니다. 예언자의 사명은 하나님의 말씀을 받은 대로 외치는 것입니다.
슬픔을 외치는 선지자, 심판을 외치는 선지자는 그만큼 자신이 슬픔에 쌓여 있었습니다.
자신도 같은 운명이기 때문입니다. 머리털을 미는 부끄러움과 파멸의 증거를 보이고 있습니다.

선지자의 슬픈 노래는 끝나가고 있습니다.
죽음 앞에 선 사람의 심정을 자신이 느끼는 것으로 끝나지 않고 민족을 향해서 외치는 사람, 그는 미가였습니다.
그의 심정은 어떠했겠습니까?
그것도 회개를 외쳐 보아도 듣지 않고, 자기들의 생각이 옳고 정당하다고 고집을 부리는 사람들을 보면서 어떤 느낌이었겠습니까? 슬픔뿐이었습니다.

오늘의 세기를 사는 사람들은 21세기는 인류의 가장 좋은 시대가 된다고 희망에 부풀어 있고, 인간 복제를 해서 인간의 수명을 연장하겠다는 야심들이 보이고 있습니다.
현대판 바벨탑을 쌓는 그들을 보면서 미가 선지자와 같은 느낌이 듭니다.
이 시대를 보면서 “아! 희망이로다.”라는 것입니까?
‘밀레니엄’이라는 말을 많이 사용하고 있는데 그것이 희망입니까, 절망입니까?
이것은 상업적 희망입니다. 나에게 유익을 얻고자 하는 희망입니다.
그렇다고 그것이 진실로 희망이 될 수 있습니까?
현대의 문화는 인류를 살리는 것입니까, 아니면 멸망의 골로 끌고 들어가는 것입니까? 바로 판단해야 합니다.
여기서 신앙인들은 슬퍼합니다. 우리는 아픈 슬픔을 안고 기도할 수밖에 없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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