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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심판받을 죄 (미 02:1-5)

첨부 1


1장에서 선지자는 민족의 죄를 탄식하며 슬퍼했습니다.
그것은 어떤 면에서 객관적인 판단으로 보였을지 모릅니다.
그러나 2장에서는 구체적인 그 슬픔의 내용이 나오고 있습니다.
한 나라가 흥하고 망하는 것은 지도층과 부유층의 생활이 가장 큰 원인이 된다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본 장에서는 주로 그 가장 큰 원인이 지적되고 있습니다.

1. 그 죄목을 말합니다(1­2절).
이들은 편안히 잠을 자야 할 잠자리에서 악을 계획하고 있습니다.
이 것은 그들이 밤에도 쉬지 않고 악을 도모하고 있다는 뜻입니다.
그리고 날이 밝으면 그것을 실천하는 것입니다.
이렇게 본다면 한 사람의 개인적인 것이 아니라 집단적으로 계획하고 실천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권력과 재력이 있는 자들이 집단적으로 계획한다는 것은 정책을 자신들의 유익한 편으로 했고, 그것을 실천했다는 것입니다.
이들에게 이웃을 생각하는 마음은 조금도 없고, 이기주의적인 발상만이 실천목록입니다.
“손에 힘이 있으므로”란 육체적인 뜻이 아니라 정책적으로 많은 사람의 재물을 쟁탈하는 데에 도구를 의미합니다. 이런 악은 고대 정치에서도 이용되었습니다.

현실적으로도 그렇습니다.
모든 정치인들은 경제인들과 결탁하여 편파적인 정책을 통과시킴으로, 경제인들에게 그것도 일부 사람에게 혜택을 주는 것입니다.
이것이 정경유착입니다.
이것으로 인해 한국은 말할 수 없는 부패가 있었고, 이로 인한 국민들의 피해는 이루 형용할 수 없었습니다.
그 결과 세계적으로 오는 손해는 더할 수 없는 고통을 가져왔습니다.
그것이 IMF입니다. 여기서 가장 개혁되어야 할 것이 재벌의 구조조정이라는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것이 가장 실시되지 못하고 있습니다.
이것은 그들의 권력이 아직도 정치권에 행사하고 있다는 증거입니다.

2절에서 그들이 직접 탐하고 탈취하는 것들을 열거하고 있습니다.
제일 먼저 나오는 것이‘밭’이라고 했습니다.
농경사회에서 밭이란 하층민들에게 있어서는 가장 중요한 재산입니다.
그것은 갖고 있는 재산으로서만이 아니라 그 밭에서 자신들의 먹을 것을 얻게 되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남겨서 또 다른 것을 구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권력자들은 그들의 밭을 탐한다고 했습니다.
이것은 근본적인 문제입니다.
가난한 자들의 생존문제를 흔드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그들의 양심은 어떤 것입니까?
다른 사람들의 재산이나 생명은 자신들의 욕구의 도구라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잔인한 사람들이요, 그들의 재물에 대한 욕심은 아무것도 막을 수 없는 상태에 이르렀습니다.
“욕심이 잉태한즉 죄를 낳고 죄가 장성한즉 사망을 낳느니라.”(약 1:15)고 사도 야고보가 말씀했습니다.

2. 그들이 탐한 것은 ‘집’이었습니다.
먹을 것과 거할 곳, 그것은 당시의 평민들에게 있어서는 생의 전체였습니다.
그런데 집을 탐했다는 것은 전재산을 송두리째 빼앗는 것입니다.
그것도 정당한 법을 만들어서 빼앗기는 사람들이 호소할 수 없도록 조직적으로 제도화한 것입니다.
그러니까 무식한 민중을 탈취하는 자들은 지식과 권력을 갖춘 자들입니다.
무엇을 위해서 배웁니까?
자신에게만 유익하게 하려는 것이 아니라 다른 사람들에게도 유익하게 할 수 있어야 합니다.
유명한 발명왕인 에디슨은 자신의 발명품이 많은 돈을 받을 수 있다고 해도 그것을 원하지 않았습니다.
그것보다는 더 많은 사람들이 편리하고 유익하게 사용할 수 있기를 바랬습니다.

권력이 있다고 그것을 살해하는 칼로 사용하면, 그것은 결국 자신에게 돌아오는 무기가 되고 말 것입니다.
이런 것을 보면서 선지자들은 그냥 넘길 수 없었습니다.
그러므로 신랄한 말로서 그들을 비판하고, 경고하고, 정죄한 것입니다.
선지자는 이렇게 악을 행하는 자들을 향하여 ‘하나님의 선포’를 알리는 것입니다.

이들의 죄를 아모스 선지자도 “여호와께서 가라사대 이스라엘의 서너 가지 죄로 인하여 내가 그 벌을 돌이키지 아니하리니 이는 저희가 은을 받고 의인을 팔며 신 한 켤레를 받고 궁핍한 자를 팔며 가난한 자의 머리에 있는 티끌을 탐내며 겸손한 자의 길을 굽게 하며 부자가 한 젊은 여인에게 다녀서 나의 거룩한 이름을 더럽히며”(암 2:6­7)라고 지적했습니다.
그들의 죄악은 폭력과 압박이었고, 탐욕 때문이었습니다.
그러므로 그 결과 형벌이 임하게 되었습니다.

본문 2:3은 형벌을 경고합니다.
재물과 권력자들이 밤잠을 자지 않으며 계획한 악은 결국 하나님이 그들에게 형벌하실 것을 계획하게 했습니다.
하나님은 이스라엘 백성을 목이 곧은 백성이라고 책망하신 일이 있습니다.
그것은 교만이었습니다.
그런데 이제 그 교만을 꺾으신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그들의 교만한 걸음이 끊어질 것이라고 했습니다.
이것은 교만의 반대로 수치를 당할 것이며, 많은 사람들에게 아니 이방인들에게 말할 수 없는 굴욕을 당할 것이라는 뜻입니다.
사람들은 자존심 상하는 일을 참기 어려워합니다.
더욱이 민족적 자존심은 혼자 겪는 것이 아닙니다.
민족적으로 수치를 당하는 것입니다.
더욱이 이스라엘 민족은 여호와 선민이라는 최고의 자존심이 있었습니다.
이 자존심은 여호와의 자존심이었습니다.
그런데 이것을 빼앗기고 말았습니다.
이 경고는 그들에게 있어서 가장 큰 손실이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회개하지 못했습니다.

3. 빼앗기는 아픔이 얼마나 큰가를 경험하게 합니다(4­5절).
욕심스런 권력자와 부자들이 이방인에게 완전히 멸망하여 가난한 자들에게서 빼앗았던 것들을 모두 그들에게 빼앗기는 쓰라린 경험을 하게 합니다.
그러므로 북이스라엘이 멸망했을 때 미가 선지자는 남유다를 향해서 경고했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회개하지 않았고, 자기들은 결코 멸망하지 않는다고 믿었습니다.
미가는 그들에게‘풍사’를 지을 것이라고 했습니다.
풍사란‘조롱하는 시’를 의미합니다. 그리고 애가를 지을 것이라고 했습니다.
이것은‘슬픈 노래’입니다. 조롱과 슬픈 노래로 그들의 생활이 이어질 것입니다. 하나님의 경고는 그대로 성취됩니다.
그들이 여호와를 믿는 백성이요, 그 보호를 받는 백성임을 모두 아는데, 이제 이렇게 멸망당하게 되었으니 많은 백성들로부터 조롱을 당할 것입니다.
실제로 역사를 보면 이스라엘은 앗수르에, 유다는 바벨론에 의해 멸망했고, 그들의 조롱거리가 되었으며, 옆에서 이를 지켜본 에돔 백성들도 이스라엘을 보고 조롱했습니다. 그들은 이때 얼마나 슬펐겠습니까? 죽고 싶은 슬픔이었습니다.
“온전히 망하게 되었도다.”라는 말은 이제 모든 것이 끝났다는 것입니다.
즉, 이제는 회생할 소망마저도 없어졌다는 것입니다.
미래의 꿈이 상실된다는 것입니다.
절망입니다.
죄렌 케르케가드는‘죽음에 이르는 병’은 절망이라고 했습니다.
이렇게 본다면 유다는 생명을 잃은 것입니다.

이것을 실제적으로 표현합니다.
“내 백성의 산업을 옮겨 내게서 떠나게 하시며”라고 했습니다.
하나님께서 생명을 이어오게 한 것을 빼앗기면 잃을 수밖에 없습니다.
그것은 산업이었습니다.
가나안 땅에 들어왔을 때 지파를 따라서 그 산업을 나누어 주셨습니다.
그런데 이제 그 산업을 모두 빼앗아서 다시 이방인들에게 주어, 가나안 땅에 들어오기 전으로 돌아가게 했습니다. 이것은 멸망입니다. 그보다 더 흉하게 하셨습니다. 멸망이란 모든 것을 빼앗았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유다에게 주셨던 복을 탈취하신 것입니다.
이것은 형벌입니다. 하나님을 떠나는 형벌이 얼마나 큰가를 깨달아야 합니다.

5절에서 결정적인 선언이 나옵니다.
“여호와의 회중에서” 끊어지라는 것입니다. 완전한 상실입니다.
이것으로 미가 선지자는 그들에게 끝까지 회개를 외칩니다.
그러나 그들은 듣지 않았으며, 선지자의 말대로 멸망하고 말았습니다.
거역은 멸망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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