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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예언자의 적들 (미 02:6-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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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가 선지자가 백성을 향하여 멸망을 예언했을 때, 이것을 듣고 회개하지 않는 백성들은 몹시 듣기 싫었습니다.
양심에 가책을 받을 때에는 그 말씀이 가시같이 아프지만 깨달음이 있을 터인데, 회개할 마음이 없을 때에는 그 선지자가 얼마나 밉고 싫었겠습니까?
이러한 일은 이스라엘 역사에서 얼마든지 볼 수 있는 일입니다.
그러므로 미가 선지자 때도 예외는 아니었습니다.

1. 너희는 예언하지 말라고 거절합니다(6­7절).
예언은 하나님의 사람으로서 하나님이 주시는 말씀을 전하는 것인데, 이것을 금지하면 이것은 결국 하나님의 사역을 거절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큰 죄입니다. 백성들은 이런 소리를 듣기 싫어서 예언자들을 부정합니다.
자신들은 벌거벗은 몸으로 취하고, 춤추며, 타락한 모습으로 한참 뛰놀고 있는데, 이 모습을 지적하는 사람이 싫으므로 예언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이들은 술취한 사람과 같습니다.
타락한 사람은 다음을 생각하지 않습니다.
지금이 좋아서가 아니라 현실을 벗어날 수가 없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예언자는 대답합니다.
“왜 하나님이 성급하시다고 하느냐?”고 말합니다.
자신들은 말할 수 없는 죄악을 범하고, 하나님이 선포하실 때는 너무 급하다고 오히려 불평하는 형편입니다.
아모스 선지자에게도“이제 너는 여호와의 말씀을 들을지니라. 네가 이르기를 이스라엘에 대하여 예언하지 말며 이삭의 집을 향하여 경계하지 말라.”(암 7:16)고 했습니다.
사도들도 그런 금지를 당했었습니다.
“도무지 예수의 이름으로 말하지도 말고 가르치지도 말라.”(행 4:18)고 했었습니다.

진리는 항상 사람들의 마음을 찌르는 가시입니다.
예언자는 하나님의 진리를 전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선지자의 외침을 꺾으려고 하는 것은 자신들의 양심에 위로를 받고자 함이지만, 그렇다고 그 가시는 결코 꺾이지 않았습니다. 그들을 찔렀습니다.
그것은 그들의 죄로 곪아 버린 상처를 치료하기 위함이었습니다. 선지자는 외칩니다.
“행위 정직한 자에게 유익되지 아니하냐?”라고 합니다.
정직한 사람은 자신의 죄를 지적하는 말씀을 들을 때에 그대로 순종하는 사람입니다.
이 선지자의 말씀을 듣지 않고 거부하는 백성은 진실로 정직하지 못합니다.
사람에게 죄를 지적할 때가 있습니다.
실수를 인정하고 회개하는 사람은 진실로 정직한 사람입니다.
그러나 그것을 부정하고 변명하는 사람은 거짓된 사람입니다.
죄인을 심문할 때‘거짓말 탐지기’를 사용할 때가 있습니다.
정직과 거짓을 가리기 위함입니다.

2. 다시 그들의 죄악상을 폭로하고 있습니다(8­9절).
이것은 가정 파괴를 의미합니다.
겉옷을 벗긴다고 했습니다.
그 당시의 생활상을 보면 겉옷이란 매우 중요한 것입니다. 겉옷은 가장 좋은 옷입니다.
화려하기도 하고, 옷 중에서 가장 비싼 옷입니다.
그것은 좀 두터운 것입니다.
왜냐하면 밤이면 그 겉옷은 이불이 되기 때문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겉옷이란 그 사람에게 있어서는 없어서는 안 될 소유입니다.
그래서 율법에서도 옷을 저당잡거든 날이 어둡기 전에 돌려 주라고 했습니다(출 22:26).

부녀자들을 즐거운 집에서 쫓아냈다는 것은 가정에서 살지 못하게 했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악한 의미로 해석할 수 있습니다.
자신들의 창녀로 삼았다는 것과, 또는 노예로 삼았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가정에서 주부들을 내쫓는 행위는 사회적으로 혼란을 가져옵니다.
한국에 경제적 위기가 닥쳤을 때 많은 주부들이 가정을 버리고 떠났습니다.
이것은 가정의 파괴이며, 사회적 혼란을 가져옵니다.
그 결과 자녀들의 먹을 것이 없어지고, 배우지 못하게 되며, 부모 없는 고아가 되어 버립니다.
이것은 인간사회의 파괴입니다.
유다의 악한 자들은 이렇게 가정을 파괴했습니다.
오늘도 가정을 파괴하는 죄악은 가장 큰 형벌을 받게 됩니다.
부녀자 유괴나 어린이 유괴범은 큰 형벌에 처하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3. 거짓예언자들을 향한 말씀입니다(10­11절).
참예언자와 거짓예언자를 분간할 수 있는 믿음이 마비된 자들은 결국 미가의 말씀을 듣지 않았고, 그 반대인 거짓예언자들의 말에 귀를 기울였습니다.
그렇게 되는 이유가 있습니다.
거짓예언자들은 죄를 지적하지 않습니다.
형벌은 없다는 것입니다.
여호와는 이스라엘을 선민으로 삼은 분이신데 왜 우리를 버리시겠느냐고 말합니다.
따라서 하나님은 자비로우시고 인내력이 많으신 분이기 때문에 우리가 죄를 범했을지라도 끝까지 참으시고, 결국은 이스라엘에게 복을 주셔서 이방인들에게 부끄러움을 당하지 않게 하신다고 말합니다.
백성들은 이런 말에 현혹되고 맙니다.

시대적으로 항상 거짓선지자는 있었습니다.
기독교 2천년 역사에서도 이단과 사설은 항상 있었습니다. 어떻게 거짓을 알 수 있습니까? 예수님께서도 알곡과 쭉정이를 가리는 방법을 자랄 때에는 알 수 없다고 하셨습니다.
결과적으로 나중에 알 수 있습니다.
그러니까 거짓선지자들이 행동할 때에는 어찌할 도리가 없다는 것입니다.
그들에게 구름떼처럼 몰려갑니다.
진리는 외면을 당합니다.
현실적으로 얼마나 많은 피해를 보고 있습니까?
그 집단은 단기간에 부흥됩니다. 많은 사람들이 병을 고치며 “기적을 보고도 못 믿느냐?”라고 합니다.
그러나 사단도 이적을 행합니다.
그 진실을 가릴 수 있어야 합니다.
이것은 오직 믿음으로 가능합니다. 우리는 성령의 은사를 받아야 합니다.

거짓선지자를 가리는 방법을 몇 가지로 말할 수 있습니다.
첫째로, 달콤한 미끼를 던집니다.
이것은 처음에는 알 수 없습니다. 너무나 좋다는 것입니다. 그 좋은 것은 일시적입니다.
달콤하다는 것은 입에서만 달다는 것입니다.
이단의 유혹도 이것입니다.
내가 다니는 교회에서 들어보지 못한 말을 합니다.
그러니까 우리 목사님보다 더 훌륭한 성경해석자라고 인정됩니다.

둘째로, 성경을 골라서 해석합니다.
성경은 66권입니다. 모두가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그런데 어떤 구절만 골라서 해석하고, 다른 구절들은 전혀 말하지 않습니다.
이런 해석법은 있을 수 없습니다.
구약과 신약을 함께 읽고 해석해야 합니다. 그 해석도 편협됩니다.
가장 중요한 창조론과 구원론에서 문제가 생깁니다.
그들은 지금까지 교회에서 또는 신학자들이 모르는 말을 합니다.
그것이 특별한 해석이라고 현혹합니다.

셋째로, 개인을 높입니다.
한국에는 자신이 예수라는 사람이 27명이 있다고 합니다.
또는 자신을 하나님이라고 말하는 사람도 있습니다.
그러면 그것을 믿을 사람이 있겠습니까?
믿음이 약한 사람들은 그것을 믿습니다.
성경말씀에 의하면 이것은 말세의 증거라고 합니다. 말세에는 이단이 많을 것입니다.
그것을 따르는 사람들이 또한 많을 것입니다.
미가 선지자 때에도 거짓예언자들로 인해서 백성들이 유혹되어 미가의 예언은 배반당하고, 거짓예언자들의 말이 오히려 인정되었습니다. 이것이 말세입니다.
그래서 유다는 바벨론에게 멸망했고 포로생활을 70년 동안 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는 사람에게는 항상 적이 있습니다.
그들은 멀리 있는 것이 아닙니다.
선지자에게는 같은 말을 전하는 거짓선지자들이 있습니다.
그래서 예레미야는 거짓선지자였던 하나냐에게 뺨을 얻어 맞았습니다.
그래서 선지자는 하나님 앞에 서서“왜 내가 전해야 합니까?”라고 불만을 토로할 때도 있습니다.
원수가 집 안에 있습니다.
그리고 선지자의 말을 들어야 할 백성들이 있습니다.
말씀을 외쳐야 할 선지자의 적이 그 말씀을 들어야 할 백성이라면, 선지자의 설 자리가 없다는 것입니다.
목사의 적이 교인이라면 이것은 목사가 목회를 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멸망의 징조입니다.
오늘의 강단은 어떠합니까?
설교자들의 말씀이 얼마나 능력이 있습니까?
성령에 의한 말씀이 전파되어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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