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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지배자들에 대한 심판 (미 03: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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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배자들에 대한 심판(미 3:1∼4)

백성의 지도자들은 백성들을 위하는 사람이요, 그들을 지도할 책임이 있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와는 반대로 백성을 먹는 자들이요, 백성들은 그들의 밥이라고 여겼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백성들을 착취하고, 그들을 괴롭히고, 또한 그들을 억압했습니다.
이것을 보는 선지자 미가는 2장에 이어서 계속 책망의 소리를 늦추지 않고 있습니다.

1. 처음에 “내가 또 이르노니”라는 말이 어떤 사역에는 “이것은 내 말이다.”라고 표현되었습니다(1절).

이런 면에서 볼 때 개인적인 말이 아니요, 또 어떤 한 사람 앞에서 한 말이 아니라 공개석상에서 했다고 여겨집니다.
중반절에 “들으라”고 했습니다. 이것도 역시 공개적 요청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말씀임을 가리키는 것입니다.
그리고 1절에서 중요한 것은 “족속의 치리자들아” 하신 본인은 누구냐 하는 것입니다.
그들은 지도층을 지적한 것으로 그들은 정치인이요, 경제인들이며 보다 많이 지적된 사람들은 종교지도자들이라는 것입니다.
이들은“공의는 너희의 알 것이 아니냐?” 했을 때 두 가지로 말할 수 있습니다.
하나는 너희가 이미 알고 있는 내용이라는 사실입니다.
그리고 또 하나는 너희가 잘 알고 있어야 할 것이 아니냐 하는 것입니다.
이렇게 본다면 그들이 저지르고 있는 죄악을 분명히 알고 있음을, 즉 잘못된 줄 알면서 범하는 죄인임을 지적합니다.
이렇게 볼 때, 그들의 죄는 변명의 여지도 없고 분명히 형벌을 받을 수밖에 없습니다.
지도자는 그 선 자리가 중요합니다.
그 책임은 일을 하지 않을 때 뿐만 아니라 잘못했을 때 엄청난 결과를 가져옵니다.

오늘의 지도자들에게도 해당되는 말입니다.
정치인들이나 경제인들은 정경유착하지 말고, 분명히 국가와 민족을 위하여 일해야 합니다. 그리고 신앙지도자들도 여기에 해당됩니다.
미가와 같은 지도자형과, 정치에 아부하는 지도자형, 이단사설로 잘못된 지도자들이 있습니다.
독일교회는 1930∼1940년대에 둘로 나뉘었습니다. 히틀러를 하나님이 내린 지도자라고 추앙하는 그룹인 ‘민족교회’와 히틀러는 미친 사람과 같이 방향도 모르고 많은 사람을 죽이며 잘못된 길로 가고 있다고 규탄하는‘고백교회’가 있었습니다. 고백교회에 속한 사람들은 말할 수 없는 고통과 박해를 받았습니다. 그러나 끝까지 순교를 각오하고 외쳤습니다. 그 그룹에는 디트리히 본회퍼 목사가 있었습니다. 참 선지자는 항상 고통을 겪게 됩니다. 본회퍼는 결국 순교하고 말았습니다.

2. 백성의 지도자들을 도살장의 백정처럼 비유하고 있습니다(2­3절).
인간을 인간으로 취급하지 않고 짐승으로, 마치 식용 짐승으로 대했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인간의 사상이 아니며 더욱이 동족간의 교류도 아닙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선택된 같은 백성이라는 점에서 하나님의 뜻을 거역했다는 것입니다.
유대교의 근본신앙은 하나님의 같은 피조물이라는 점에서, 동족에 대한 신앙은 고아와 과부를 보살피고 나그네를 대접하는 것이 본래의 신앙인데, 그런 것은 고사하고 고아와 과부를 착취하고 그들을 짐승 취급한다는 것입니다.

“가죽을 벗기며 그 뼈를 꺾어”라는 말은 백성들에게 있는 존경심을 말살하고, 그들의 인격을 탈취하는 것입니다.
뼈를 꺾는 것은 죽음을 확인하는 행위였습니다.
예수님은 이미 운명하셨기 때문에 그의 뼈를 꺾지 않았다고 했습니다(요 19:33).
이것은 산 자를 죽게 하는 살인행위입니다.
그리고 이것으로 부족해서 그들의 살을 먹었다고 했습니다.
이것은 약한 자들이 갖고 있는 모든 것을 탈취했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하나도 남김없이 빼앗은 것입니다. 옛날에도 이렇게 착취의 행위는 강하게 진행되었습니다.

착취는 크고 작은 것을 가리지 않습니다.
그래서 적은 수의 사람들이 많은 수의 사람들의 것을 빼앗아 나누어 갖습니다.
이런 점에 대해서 당시 지도자들은 조금도 양심의 가책이 없었습니다.
마치 강하고 권력을 가진 자들을 위해서 가난하고 약한 자들이 존재하는 것으로 생각했습니다.

현재도 그런 사고를 가진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래서 고용주가 고용인들의 임금을 착취합니다.
그리고는 아무런 가책 없이 그것을 정치자금으로 이용합니다.
그렇게 얻는 권력을 기득권으로 이용합니다.
그래서 사회에서 어디를 가든지 특권자로 행세합니다.
마치 사회의 저명인사로 말입니다.
이런 사람들이 사회에서 사라져야만, 그 사회는 안정되고 모든 사람들이 평안하게 살 수 있습니다.
빈부의 격차가 심해진다는 것은 어떤 의미에서도 바람직한 것이 못 됩니다.
가진 자가 소수이고 못 가진 자가 다수일 경우, 민주주의 원칙에 의하면 많은 수의 가난한 자가 발언권이나 영향력이 더 강할 것으로 여겨지지만, 실제로는 그와 반대입니다.
가진 소수가 절대권력을 행사합니다. 따라서 재물이 힘이라는 말을 합니다.

3. 하나님의 심판을 선언하십니다(4절).
제일 먼저 하시는 말씀이 기도를 받지 않으신다는 것입니다.
그 지도자들은 분명히 기도합니다.
착취해서 얻는 것을 결과론적으로 하나님의 축복으로 인정하고 하나님께 감사합니다.
그리고 제물도 드립니다.
분명히 알아야 할 것은 현실적으로 물질을 드려 제사를 한다고 해서, 모두가 하나님께 드리는 제사가 되는 것이 아닙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가인의 제사를 열랍지 않으신 것입니다.
똑같은 자리에서, 같은 순서에 의하여, 같은 설교를 들으며 예배를 드려도 하나님께서 어떤 사람의 예배는 받으시고, 어떤 사람의 예배는 받지 않으실 것입니다.
기도를 한다고 모두 하나님이 받으시고 응답하시는 것이 결코 아닙니다.

찬송가 405장을 작시한 존 뉴톤은 본래 노예 상인이었다고 합니다. 아프리카에 가서 흑인들을 생포하여 배에 싣고 돌아오면서 선장실에서 성경을 읽으며, 흑인이 많이 생포되어 감사의 기도를 드렸다는 것입니다. 그것이 죄인 줄 몰랐습니다. 그러나 결국 큰 죄임을 깨닫고, 바른 신앙으로 살게 되었으며 목사가 되었습니다. 그래서 “나 같은 죄인 살리신 주 은혜 놀라워”라고 찬송한 것입니다. 흑인을 생포해서 돌아올 때 기도했다고 해도, 그 기도를 하나님이 들어주시지 않으신 것입니다. 그가 진정 회개할 때 들어주신 것입니다.
하나님은 유다의 지도자들의 기도를 결코 응답하시지 않으신다고 단언하고 계십니다.

하나님이 응답하지 않으신다는 것은 결국 관계가 끊어졌다는 말입니다.
이것을 본문에서는 “그들 앞에 얼굴을 가리우시리라.”고 했습니다.
얼굴을 대면하지 않겠다는 것입니다.
사람들도 절교 선언을 할 때 “나와 얼굴을 대하지 말자.”라고 말합니다.
시편 기자는“주께서 낯을 숨기신즉……”(시 104:29)이라고 했습니다.
인간의 삶은 하나님의 면전에서, 그가 보시는 가운데 있다는 사실을 기억해야만 합니다.
임마누엘의 신앙이 곧 이것입니다.
밤중에 길을 가는 사람이 그 어두움 중에서도 하나님의 눈이 나를 지키고 계시다는 것을 믿는 것처럼 말입니다.

유다의 지도자들은 하나님의 심판대 앞에 섰습니다.
이것은 그 당시만을 지시하는 것이 아닙니다. 오늘도 같은 의미로 우리에게 들려집니다. “이 시대의 지도자들이여, 무엇을 생각합니까?”
이것은 하나님의 분명하신 말씀이 선지자를 통해서 들려준 것입니다.
그렇다면 듣고 깨달아야 합니다.
기독교 신앙인이 아니니까 해당되지 않는다고 안도하는 지도자도 있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선지자는 이스라엘이나 유다를 향해서만 심판을 예언하지 않았습니다.
그러므로 이방인을 향해서도 심판을 선언하신 하나님의 말씀은 오늘 비기독교인 정치인이나 경제인들에게도 해당됩니다.
현실적으로 지도자의 위치에 있는 사람은 백성을 두려워할 줄 알아야 합니다.
그 사람은 하나님을 두려워하는 사람입니다.
그럴 때 겸손하게 자신의 할 일을 성실히 감당할 수 있습니다.
백성을 두려워하지 않는 지도자는 교만한 사람이요, 누구 앞에서든지 교만한 말을 하고, 겸손한 자세를 갖지 않을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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