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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참 예언자 대 거짓 예언자 (미 03:5-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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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 예언자 대(對) 거짓 예언자(미 3:5∼8)
참예언자와 거짓예언자를 무엇으로 분간할 수 있습니까?
미가 선지자는 적대적인 예언자들을 향해서 하나님의 계시를 받지 않았다고 말하지는 않았습니다.
이 계시 없이는 저들이 백성들 앞에서 권위를 가질 수 없었을 것입니다.
저들을 잘못된 인도자들이라고 말했습니다.
그러면 미가 선지자가 그들을 고발하는 것은 무엇입니까?
그들이 자신들의 권위를 오용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하나님께로부터 받은 그들의 소명보다도 자신들의 이기주의적 권익을 더 크게 생각했다는 것입니다. 그들의 예언과 영향력을 그릇된 이득에 이용했습니다.

1. 거짓선지자들을 향하여 “내 백성을 유혹하는 선지자”라고 지적하고 있습니다(5절).
유혹이 무엇입니까?
직선적으로 말하면 유혹이란 진리를 말하지 않고 거짓을 말해서 그것에 현혹되게 한다는 것입니다.
결국 유혹하는 자도 자신이 말하는 것이 거짓임을 알고 있는 것입니다.
하와를 유혹한 뱀이 “너희가 결코 죽지 아니하리라.”(창 3:4)고 한 것은 이미 뱀에게 들어가 있는 사단이 그렇게 하면 죽는다는 사실을 알고 있으면서도 하와에게 그렇게 되지 않으리라고 거짓을 말한 것입니다.
유혹이란 속임수입니다. 사실 유혹에 넘어가는 자가 바보입니다.
그러나 유혹자는 더 큰 범죄자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유혹한 뱀이 벌을 받았고, 유혹당한 하와와 아담도 벌을 받아 에덴동산에서 쫓겨났습니다.

유혹한 선지자가 무엇을 말했습니까? 그것은‘평강’이었습니다. 왜 평강이 거짓입니까?
이스라엘 사람들은 만날 때나 헤어질 때 ‘샬롬’, 즉 평안을 말합니다.
그렇게 그들은 평안을 좋아하고 원합니다.
선지자가 평강을 외치는데, 그것이 잘못되었다고 하는 것은 좀 의아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중요한 것은 항상 평강할 수는 없다는 사실입니다.

사무엘이 베들레헴에 들어오자 장로들은 떨며 “평강을 위하여 오시나이까?”라고 물었고, 이에 사무엘은“평강을 위함이니라.”고 대답했습니다(삼상 16:4­5).
그러나 누구에게나 평강이 있는 것은 아닙니다.
유다는 죄값으로 망할 것인데, 그들 앞에서 선지자가 ‘평강’을 말한다는 것은 거짓입니다. 분명히 그들에게도 하나님의 말씀이 들려졌을 것입니다.
그런데 하나님께 들려진 말씀을 전하지 않고, 그 반대의 내용을 외쳤을 때 그것은 거짓입니다.
그러면 왜 거짓을 말했습니까?
먼저 그것은 불행이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다음은 백성들에게 듣기 싫은 말을 들려주지 않으려고 하기 때문입니다.

이렇게 본다면 현실적으로도 거짓을 말하는 설교자들을 볼 수 있습니다.
그들은 누구입니까? 어떤 말을 하는 사람들입니까?
지금 필요한 것이 아니요, 비현실적인 말을 하는 사람들입니다. 시한부 재림설은 거짓입니다.
이것은 성경에서 말씀하지 않았지만, 더욱이 현재 살고 있는 세상을 전혀 부정하라는 명령이기 때문입니다.
주님은 십자가를 지시면서 옆에 있는 강도들을 생각하셨습니다. 가장 현실을 직시하시며 판단하셨습니다. 현실부정론은 거짓입니다.

선지자의 입에는 하나님의 말씀이 채워져 있어야 합니다.
그런데 선지자의 입에 무엇을 채워 주지 않으면 전쟁을 준비한다고 말씀하였습니다.
이것은 저주를 의미합니다.
입에 무엇을 채워 준다는 것입니까? 물질이며 칭찬이고 존경입니다. 이것은 인간적인 것이요, 세속적인 욕망입니다. 거짓은 여기서 나타납니다.
그래서 사람에게 대접을 받으려고 하는 사람은 하나님의 진실한 선지자가 되지 못했습니다. 사무엘은 훌륭한 예언자였습니다.
그는 왕인 사울 앞에서도 하나님의 말씀을 정직하게 외쳤습니다.

2. 거짓예언자들을 향하신 말씀입니다(6절).
“너희가 밤을 만나리니 이상을 보지 못할 것이요.” 이것으로 보아 예언자들은 밤에 하나님의 이상을 많이 보았다고 여겨집니다.
그러나 이제는 그 밤이 그들에게 이상을 보는 시간이 아니라, 반대로 그들의 멸망을 의미하는 것이 된다는 뜻입니다.
신비한 방법으로 앞을 내다보고 점치는 사람들에게 밤과 어두움이 이제 더 이상 환상을 보거나 예언할 수 있는 힘을 갖게 하지 못하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해가 져서 캄캄할 것이라고 했습니다. 이것은 활동할 수 없는 때가 됨을 가리킵니다.
거짓예언자들에게 반드시 활동이 정지되는 시기가 온다고 말하는 것입니다.

그 이유는 그들의 예언이 거짓임이 알려지기 때문입니다. 거짓이었다는 것이 만천하에 알려집니다.
그러므로 자연히 예언자의 권위가 떨어지고, 다시는 그들의 예언이 인정되지 못하고, 자신이 거짓예언자였다는 것을 깨닫게 될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거짓을 말하는 자들이 있습니다.
이것은 그를 따르는 사람이 있기 때문입니다. 그 때에는 하나님이 직접 심판하실 것입니다. 그 심판은 다름이 아니라 그들에게 하나님이 응답하지 않으시기 때문입니다.

3. 참예언자인 미가는 자신의 사명이 무엇인가를 천명하고 있습니다(8절).
미가는“여호와의 신으로 말미암아”라고 했습니다. 이것은 성령의 충만함을 받았다는 뜻입니다.
그것은“권능과 공의와 재능으로 채움을 얻고”라고 했습니다.
은사를 받은 사람입니다.
하나님은 예언자에게 각기 필요한 능력을 주십니다. 권능은 하나님의 권위를 의미합니다.
공의는 그에게 하나님의 눈과 같은 공정함이 있다는 것입니다.
재능은 미가 선지자에게 하나님의 말씀을 바로 전할 수 있는 말의 재능을 주셨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리고 전하는 내용은 “야곱의 허물과 이스라엘의 죄를 그들에게 보이리라.”고 한 것입니다.
이것은 하나님의 능력이 아니면 결코 전할 수 없습니다.
선지자의 사명을 감당하지 못하면 거짓선지자가 됩니다. 미가 선지자는 그가 받은 대로 감당했습니다.
성령의 은사도 마찬가지입니다. 내가 받은 대로 행해야만 합니다.
그리고 받은 만큼 실행해야 합니다.
그런데 받지도 못한 것을 분수에 넘치게 행하려고 하면 그것은 거짓입니다.
미가 선지자는 당시의 지도자, 즉 선지자들을 향해서 외칩니다.
이것은 같은 선지자라는 이름의 위치에서 매우 어려운 일입니다.

오늘 목사가 목사를 비판한다는 것은 그만큼 어렵습니다.
얼핏 교만한 목사로 지적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사실 교만한 사람들은 많이 있습니다.
그런 중에도 진정한 비판이 있습니다.
오늘 목사들과 설교자들에게 바른 비판이 필요합니다.
목사는 스스로 깨달을 수 있어야 합니다.
사회적 비판이 나올 때도 있습니다.
기독교인의 비판은 항상 있습니다.
그러나 비판하는 사람들에게 공격하지 말고, 스스로를 살필 수 있는 사람이 될 때 가장 바른 신앙인이 될 수 있습니다.
따라서 현대적 미가가 필요합니다.
그런 역할을 할 수 있는 사람은 진실로 바른 신앙인이어야 합니다.
새로운 신앙의 길을 제시할 수 있어야 합니다.
천주교가 타락했을 때 마틴 루터는 그야말로 훌륭한 선지자였습니다.
그러나 역시 참선지자는 대접을 받지 못했습니다. 그는 재판받고 출교되었습니다.

시대의 청신호는 그 시대를 밝게 합니다.
이 역할을 기독교인들이 항상 감당해야 합니다. 회개를 외치는 것은 선지자의 사명입니다. 요나는 이를 거절했기 때문에 큰 물고기 뱃속에 들어갔었습니다.
교회는 항상 개혁되어야만 합니다.
개혁자들은 외롭고 고통을 겪습니다.
그러나 사명을 갖고 진행하면 교회가 개혁될 것이며, 세상에서 진정한 교회적 사명을 감당할 것입니다.
한국교회는 1975년 후 10년 동안 성령운동의 결과 많은 부흥을 이루었습니다.
그러나 예언자적 사명을 감당하지는 못했습니다.
1919년 기독교인이 1천분의 1밖에 안 되었지만, 외치는 사명을 감당했었습니다.
오늘의 한국교회는 통일을 기도하고 있지만, 하나님이 아직 들어주지 않으시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감당해야 할 사명을 하지 못했기 때문이라고 여겨야 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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