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그인

  • 목록
  • 아래로
  • 위로
  • 쓰기
  • 검색

설교 영광스러운 평화의 나라 (미 04:1-8)

첨부 1



영광스러운 평화의 나라(미 4:1∼8)

선지자는 무조건 비판하는 사람이 아닙니다.
때가 되면 하나님의 영광의 나라, 즉 하나님이 다스리시는 나라가 온다는 것을 선언합니다. 사실 이것을 위한 심판의 경고를 합니다.
그러니까 “종말에는 하나님의 나라가 임하신다. 그와 같은 영원한 나라가 오기까지는 인간의 나라, 즉 인간의 힘으로 되는 나라들은 흥망성쇠를 반복한다.”는 것입니다.
본문은 미가 선지자가 처음 외치는 메시야 왕국의 영광을 말합니다.
메시야의 왕국으로 예표되는 여호와의 전의 산이 세계의 중심이 될 것이라는 뜻입니다.

1. 여호와의 장소입니다.
‘말일’(4:1)이라는 말은 ‘그 날들의 마지막에’라는 뜻입니다.
그 날은 최종의 날, 주님이 재림하시는 날입니다.
구약에서 때로는 “여호와의 날”이라고 표현하기도 했습니다.
여하튼 이 날은 심판의 날로, 모든 것이 적라나하게 드러나는 날입니다. 이것은 종말론적 표현입니다.

그런데 “여호와의 전의 산”이라는 표현이 나옵니다.
이것은 하나님이 계시는 곳입니다.
하나님이 계시는 장소는 인간들이 싸우고, 미워하고, 착취하는 곳이 아닙니다.
서로 사랑하고, 이웃을 돕고, 위로하고, 나눠 주는 곳입니다. 그 나라는 정의의 나라입니다. 모든 불공평이 없고, 불평등이 없는 나라입니다.
서로 겸손하고, 상대방을 높여 주는 곳에는 불평이 있을 수 없습니다.
소외당하는 사람도 없고, 무시당하는 일도 없는, 평화의 나라입니다.
이 세상에 가장 필요한 것은 평화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평화가 없다는 것이 이 세상의 특징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장소, 그분이 다스리시는 곳은 평화가 확실한 곳입니다.
‘평화’란 소극적으로 전쟁이 없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러나 적극적으로 평화는 가장 안정된 곳이며, 그야말로 평안한 곳입니다.
이런 신앙을 가진 신앙인들은 이 세상에서도 정의와 사랑과 평화가 있는 곳이 되도록 노력해야 합니다.
그런 곳으로 사람들이 몰려올 것이라는 말은 종말에 주님이 재림하실 곳이 중심이 된다는 뜻입니다.

2. 여호와께서 통치하시는 곳입니다(3­5절).
여호와께서 통치하시는 나라는 정의와 평화의 나라입니다. 어떤 정의입니까?
바로 하나님의 정의입니다.
인간들이 부르짖는 정의는 자신의 이익을 위한 정의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정의는 모두를 위한 정의이며,
평화입니다. 전쟁이 없는 인간의 평화가 아니라 하나님의 평화입니다.
많은 민족과 강대국들이 하나님의 통치를 받는데, 이 통치를 내적으로나 외적으로 제한할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습니다.
민족들의 무기가 아닌 하나님의 정의가 다스리시기 때문에, 그의 나라는 지상에서 평화가 이룩되는 나라인 것입니다.
전쟁과 분쟁의 인간 세계가 하나님의 평화의 나라로 바뀐 것입니다.
파괴와 파멸로 사용되었던 무기는 이제 건설의 도구로 개조되었고, 평화에 대한 하나님의 의지로 인해서 민족들 간의 전쟁과 전쟁 욕구가 종식되었습니다.

하나님의 전원적인 풍경으로 이 단원이 끝맺고 있습니다.
여러 민족들의 낙원신화에서가 아니라 이스라엘 농민들의 이상형에서 나온 것입니다.
가령 “포도나무와 무화과나무”(왕하 18:31)라는 속담적인 용어 사용에서 더욱 쉽게 드러납니다.
사실 이것은 전쟁시대의 꿈이 아니라 능동적인 하나님 신앙에서부터 터져 나온 강렬한 희망입니다.
이 신앙은 하나님의 최후 목적지를 바라보면서, 현재의 고난을 하나님에 대한 신뢰로서 극복하려는 것입니다.
5절은 예배공동체의 응답으로 여겨집니다.
그러므로 여호와의 이름을 부르는 찬양을 의미합니다.
오늘도 그리스도인들이 소리 높여 부르는 찬송이 있습니다.
그것은 여호와의 이름을 부르는 것입니다. 이 찬양은 신앙인들의 최대 기쁨이며,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것입니다.

3. 평화는 승리로부터 옵니다(6­9절).
이 때의 가장 큰 원수는 앗수르로 나타납니다.
그 이유는 당시에 가장 강대국이었으며, 북이스라엘을 멸망시켰고, 또 남유다를 침략하여 내려오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눈앞의 원수를 향한 승리감은 가장 큰 평화입니다.
여기에 나타나는 짐승은 사자입니다.
사자는 힘의 상징이며 승리의 힘입니다.
여기서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구원받은 백성들이 그리스도가 승리한 것처럼 그들도 승리할 것을 보여 줍니다.
사자는 승리의 표상입니다. 요한 계시록 5:5에 “유대 지파의 사자 다윗의 뿌리가 이기었으니”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성도들은 첫째, 죄를 이길 수 있으며 엎드러질지라도 다시 일어납니다.

둘째, 또한 성도는 세상을 이길 수 있습니다.
“대저 하나님께로서 난 자마다 세상을 이기느니라. 세상을 이긴 이김은 이것이니 우리의 믿음이니라”(요일 5:4).
셋째, 성도는 마귀를 이길 수 있습니다(요일 2:13).
넷째, 성도는 사망을 이깁니다. “사망의 쏘는 것은 죄요, 죄의 권능은 율법이라.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우리에게 이김을 주시는 하나님께 감사하노니”(고전 15:56­57). 결국 성도들은 이 땅에서 하나님 나라의 복음으로 승리하는 삶을 살아야 합니다.
이것이 하나님께 영광돌리는 최선의 길이며 하나님을 향한 성도의 최고의 목표입니다.

선지자 미가의 외침은 매우 강합니다.
민족을 향한 정죄나 경고의 말씀을 외칠 때보다 더욱 용기 있고 힘차게 발휘하고 있습니다. 이것이 목적이었기 때문입니다.
회개를 외칠 때의 그 힘과 하나님의 능력과 정의, 평화를 외칠 때의 소리는 전혀 다른 것이라고 여겨집니다.
죄와 형벌을 외칠 때의 큰 소리는 마음으로부터 안타까운 심정으로 외치는 소리이기 때문에 소리는 커도 아픔의 소리였습니다.
그러나 이제 선지자의 소리가 커진 것은 감사와 기쁨의 소리가 되었습니다. 원통한 사람의 큰 소리와 기쁨이 넘치는 사람의 큰 소리는 멀리서 들어도 큰 차이를 느낄 수 있습니다.

그러나 선지자의 소리는 지금 성취된 것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오늘의 고통을 참고 견디어 하나님의 뜻을 성취할 미래에 올 것을 말하는 것입니다.
이럴 때의 외침은 매우 의아하게 들릴 것입니다. 아직 오지 않은 것을 이미 온 것으로 여기고 말하는 선지자의 외침은 지금 성취된 것으로 알고 외치는 것입니다.
그러나 듣는 사람들은 그렇지 못합니다. 믿음이 부족한 까닭입니다.

오늘 우리들의 믿음은 어떤 자리에 있습니까?
선지자의 외침처럼 이미 받은 줄로 알고 외치는 사람입니까?
아직도 실감을 느끼지 못한 상태에 있습니까? 이것은 믿음입니다.
믿음이 부족한 사람은 항상 의심 중에 있습니다.
구하는 사람이 받은 줄로 알고 믿는 것은 응답의 비결입니다.
예수님에게 병 고치러 온 사람이 나은 줄로 믿는 것은 곧 치유를 의미합니다.
하나님의 정의와 평화의 나라는 이미 우리들 속에 와 있습니다.
그렇게 믿고 사는 사람은 이미 하나님이 통치하시는 나라에 살고 있는 것입니다.

이스라엘 민족에게는 매우 큰 희망이 있었습니다.
이것은 하나님의 바람 그대로 이루어질 것입니다. 하나님의 승리입니다.

다윗은 전쟁에 나갈 때 하나님께 묻고 나아갔습니다.
하나님이 승리를 약속하시면 반드시 승리했습니다. 그 이유는 다윗이 믿었기 때문입니다. “믿음은 바라는 것들의 실상이요, 보지 못하는 것들의 증거니”(히 11:1)라고 하셨습니다.

오늘 내 눈에 보이지 않고 내 손에 들어오지 않았다고 믿지 못하는 것은 믿음이 아닙니다. 아브라함은 하나님의 약속을 믿었습니다.
100세에 아들을 낳을 것을 믿었기 때문에 그대로 성취된 것입니다.
이삭은 그의 아들이었습니다. 그로 인하여 이스라엘 민족이 형성되었습니다.

하나님의 성취는 오늘도 나타나고 있습니다.
영광스러운 하나님의 나라는 반드시 나의 마음에서부터 성취되어야 합니다.
믿음은 항상 하나님을 바라는 사람들의 가장 강한 무기입니다. 이것을 소유한 사람만이 오늘의 고난을 극복할 수 있습니다.

 

이런 글도 찾아보세요!

공유

facebooktwitterpinterestbandkakao story
퍼머링크

댓글 0

권한이 없습니다. 로그인

신고

"님의 댓글"

이 댓글을 신고 하시겠습니까?

삭제

"님의 댓글"

이 댓글을 삭제하시겠습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