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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미래의 왕 메시야 (미 05: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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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래의 왕 메시야(미 5:1∼5)

어떤 사람은 인생을 살면서 민족이나, 가정 또는 개인의 흥망성쇠를 목격합니다.
사람이라면 누구나 다 어느 경우 예외 없이 흥하는 역사보다 망하는 역사를 목격할 때 그 광경을 그리 편안히 볼 수만은 없을 것입니다.
우리 민족의 역사 가운데도 일제강점(日帝强占)을 경험했거나 6·25 민족동란의 참상을 목격한 사람들에게서 볼 수 있는 뚜렷한 현상은 그 기억을 가슴 아프게 간직하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미가는 북왕국 이스라엘이 앗수르에게 멸망당한 이후에 활동하던 선지자입니다.
선지자가 하나님께로부터 받은 소임은 유다에 임박한 심판을 전하는 일이었습니다.
미가 3:12에서 미가는 하나님의 말씀을 받아 예루살렘의 철저한 멸망을 예고했습니다.
그런데 이러한 예언은 급전하여 미가 4:2에서는 예루살렘의 회복이 선언됩니다.
그리고 이스라엘을 회복하여 다윗 왕통을 이어갈 새로운 왕이 탄생할 곳으로 베들레헴이 선택됩니다.
베들레헴에서 미래의 왕 메시야가 탄생하게 됩니다.
그러나 이 예고가 있기 전까지의 어두운 이야기를 우리는 먼저 새겨 보지 않을 수 없습니다.

1. 예루살렘이 버림받았습니다.
버림받은 이유가 무엇입니까?
본문 1절은 예루살렘이 하나님으로부터 버림받는 사실을 소개한 장면입니다.
미가 3:12과 병행구라고 할 수 있습니다.
미가에 의하면 예루살렘은 하나님으로부터 철저히 버림받음을 당합니다.
심판의 내용은 세 가지입니다.

첫째, 시온은 예루살렘이 밭같이 갊을 당할 것이라고 했습니다.
봄날 농부가 트랙터를 몰고 밭에 나가 온 땅을 갈아엎는 장면을 떠올려 보시기 바랍니다. 밭갈이 이전의 겉모습은 그 어느 곳에서도 찾아볼 수 없습니다.
심판은 그렇게 철저하게 진행될 것입니다.

둘째, 예루살렘은 무더기가 될 것이라고 했습니다.
이것은 파괴된 도시의 모습을 충분히 연상하게 해주는 장면입니다.
미군기에 의해 폭격당한 유고슬라비아의 파괴된 도시를 신문이나 TV에서 보았을 것입니다. 폐허가 된 채 잔해만 무더기로 남아 있습니다.

셋째, 성전의 산은 수풀의 높은 곳같이 될 것이라고 했습니다.
성전을 돌보는 사람도 없고, 성전에 대한 백성들의 관심이 떠난 자리에 수풀만 무성하게 남은 모습입니다.
왜 이런 일이 벌어졌을까요?
선지자는 그 이유를 타락 때문이라고 보고 있습니다.
타락이 무엇입니까?
성경은 타락의 기원을 아담이 하나님의 금령을 어기고 금단의 열매를 따먹은 일로부터 시작되었다고 소개해 주고 있습니다.
그로 인해 하나님의 형상을 상실했고, 인간에게는 벌이 주어졌으며, 자연계에 저주가 뒤따랐습니다.

모든 사람은 죄책감에 시달리게 되었고, 오염된 마음으로 삶을 살아갈 수밖에 없었습니다. 이런 현상은 아담 이후로 계속 이어졌습니다.
당시 유다의 타락은 보편적이고 일상적인 것이었습니다.
그들은 밤의 잠자리에서는 사악한 일을 꾀했으며, 낮에는 그것을 실천에 옮겼습니다(미 2:1).
전쟁을 위해 백성들에게서 거둔 세금을 모아 칼과 창을 만들었지만 그것을 도리어 백성들의 재물을 탈취하는 데 사용했습니다.
왕은 왕대로, 제사장은 제사장대로, 선지자는 선지자대로 타락해 있었습니다(미 3:11).
또 당시 예루살렘의 영화와 사치는 극에 달해 있었는데, 그것은 다 일반 백성들에게서 짜낸 고혈에 의해 이루어진 것이었습니다(미 3:10).
이것이 바로 예루살렘이 하나님으로부터 버림받은 이유입니다.

버림받은 결과는 무엇입니까?
본문 1절에는 그들이 극도의 두려움과 수치를 당하게 될 장면을 그대로 묘사하고 있습니다. 당시 그들의 문화양식으로 이해하면‘뺨을 치는 행위’는 가장 모욕적인 것이었습니다(욥 16:10).
하나님으로부터 버림받은 자들이 당하는 것은 이처럼 극도의 두려움과 수치일 수밖에 없습니다.
함께하시며 복을 주시겠다는 하나님의 약속은 그들의 몫이 될 수 없습니다(창 26:24).
위험 중에 보호하여 주시겠다는 하나님의 약속도 그들의 몫이 아니었습니다(왕하 6:16).

하나님은 성도들을 위해서는 약할 때 힘을 주시고(사 41:10),
고난 중에 동행하시고(사 43:1­3),
염려를 제거해 주시고(마 10:30­31),
영원한 삶을 주시지만(계 1:17­18) 하나님으로부터 버림받는 사람들에게는 그 약속을 거두십니다.

2. 베들레헴이 선택되었습니다.

1) 볼품없는 시작“베들레헴 에브라다야, 너는 유다 족속 중에 가장 작을지라도…….” 이 표현이 보여 주고 있듯이 베들레헴은 유다 성읍 가운데 열거되지 못할 정도로 작고 볼품없는 성읍이었습니다(수 15장).
그러나 하나님은 베들레헴을 선택하셨습니다.
따라서 진정한 하나님 나라는 하나님의 뜻이 머무는 곳에서부터 시작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비록 지금은 보잘것없으나 그 나중은 더욱 창대할 것입니다(욥 8:7).
그래서 번화하고 사치한 도시, 퇴색해 버린 도시, 종교 의식에나 연연하는 거대한 도시인 예루살렘을 무색하게 만들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오심으로 이것은 사실대로 성취되었습니다.

성도 여러분의 가정에 하나님의 뜻이 머물게 하십시오.
여러분의 삶 가운데 하나님의 뜻이 머물게 하십시오.
그렇게 된다면 비록 볼품없는 연약한 삶일지라도 하나님께서 축복하심으로 말미암아 창대해질 것입니다.

2) 신실한 종의 선택“그가 여호와의 능력과 그 하나님 여호와의 이름의 위엄을 의지하고 서서 그 떼에게 먹여서 그들로 안연히 거하게 할 것이라.

이제 그가 창대하여 땅 끝까지 미치리라”(4절). 그러면 왜 하나님께서는 다윗의 왕통을 이을 메시야를 예루살렘 궁전에서 선택하지 않고 굳이 이름도 없는 조그마한 시골 베들레헴에서 선택하셨을까요?
그 이유는 베들레헴에서 탄생할 새로운 통치자는 이제까지 예루살렘을 통치한 자들처럼 백성들을 억압하고 착취하며 멸망으로 몰아넣지 않을 것이라는 사실에 있습니다.
마치 다윗처럼 이스라엘의 목자가 되어 그들을 사랑으로 돌볼 것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사람은 이처럼 충성스러운 자입니다.
높은 자리에 올라서도 사리사욕에 급급하지 않고 하나님의 뜻을 먼저 살피며 백성들을 우선할 줄 아는 사람입니다.

3. 미래 왕 메시야
1) 오시기까지“그러므로 임신한 여인이 해산하기까지 그들을 붙여 두시겠고……”(3절).
이 말씀은 두 가지 의미를 담고 있습니다.
즉,‘임신한 여인’은 메시야의 오시기 직전을 의미함과 동시에 메시야를 기다리는 백성의 고통을 암시하는 것입니다.
따라서 전체적인 맥락은 성도들에게 그 때까지 고통스러워도 참고 인내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사실 경건한 이스라엘인들은 메시야가 오시기까지 잘 참고 기다렸습니다.
마찬가지로 오늘날 예수 그리스도의 재림을 기다리는 우리 역시 잘 참고 인내해야 합니다.

2) 오심의 결과“그 형제 남은 자가 이스라엘 자손에게 돌아오리니……”(3절).

이스라엘 백성의 완전한 회복을 의미하는 말씀입니다.
이 말씀 그대로 예수 그리스도께서 오심으로 이스라엘 백성들은 순수 신앙으로 회복되었고 온전한 하나님 나라의 백성으로 회복되었으며, 수없이 많은 사람들의 병든 육체까지도 온전히 회복되었습니다.
3) 오신 후의 성도의 의무“이제 그가 창대하여 땅끝까지 미치리라”(4절).

예수 그리스도께서 오신 후 이스라엘 백성들에게는 율법 외에 새로운 의무가 생겼습니다.
곧 복음 전파의 의무입니다.
그리고 끝내 그들은 이 사역을 잘 감당하였으므로 오늘날 세계 도처에서 사람들은 복음을 쉽게 접하고 있습니다.

우리가 절망 가운데서도 쓰러지지 아니하고 일어설 수 있는 것은 이 절망을 희망으로 전환시키시는 하나님의 계획하심을 믿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미래의 왕 메시야를 우리에게 보내 주심으로 우리를 죄와 두려움에서 구원하여 주셨습니다.
오늘 우리는 여전히 고통의 날을 보내고 있지만, 우리의 영원한 왕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바라면 우리는 버린 바 되지 않습니다.
오히려 볼품없는 모습이 변화되어 온전한 하나님 나라의 백성으로 회복될 것입니다.
이런 소망 가운데서 살아가시길 간절히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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