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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회개의 결과 (욘 03:5-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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회개의 결과(욘 3:5-10)

1. 멸망이 임박한 땅

어느 사회에 위기가 임박했고, 그 사회 자체가 해체되려는 위험수위에까지 이르렀을 때 그 구성원들이 겪게 되는 비애와 좌절은 이루 말할 수 없습니다. 지금 니느웨 성을 압도하고 있는 분위기가 바로 그런 것이었습니다. 임박한 멸망 앞에서 온 백성이 슬퍼하며 마지막 남은 희망에 모든 것을 걸고 있습니다.

니느웨라는 거대한 사회집단에 위기가 닥쳐왔습니다. 이 니느웨는 무소불위의 힘을 휘두르던 집단이었습니다. 근방의 모든 세력들을 정복하고 그 위에 군림하게 되었습니다. 세상에 무서운 것이 없는 사람들이었습니다. 이들에게 위기란 없었습니다. 무엇이나 자기 하고 싶은 대로 할 수가 있었습니다. 그래서 높아질 대로 높아졌고, 교만해질 대로 교만해졌습니다. 이러한 환경은 인간의 죄악성이 가장 왕성하게 꽃을 피울 수 있는 토양이 되지 않겠습니까? 그야말로 니느웨의 죄악은 하늘 높은 줄 모르고 솟아오르게 된 것입니다. 그래서 결국 하나님의 진노를 건드리게 되었습니다. 도저히 그대로 둘 수 없는 상태에 이르렀고, 마침내 하나님은 과거에 소돔과 고모라를 멸망시키셨던 것처럼 니느웨도 멸망시키기로 작정하셨습니다.

자, 이제 니느웨의 멸망은 시간문제입니다. 니느웨가 직면한 최대의 위기입니다. 만약 니느웨 사람들이 요나의 말을 듣고도 무시해 버리고 관심을 기울이지 않았다면 임박한 멸망은 그들의 위기가 되지도 않았을 것입니다. 위기를 느끼지도 못하고 그저 소돔과 고모라처럼 한 순간에 불에 타 없어져버리고 말았을지 모릅니다. 그러나 이 니느웨 사람들은 요나의 말을 듣고 자기들에게 재앙이 임하고 있다는 것을 받아들였습니다. 위기를 인정하고 깨달았다는 것이지요. 위기를 깨달았다는 것은 그 위기를 극복할 수 있는 첫 번째 관문을 통과했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개구리를 솥에 넣고 밑에서 불을 조금씩 피우면 따뜻한 물 속에서 자기 몸이 익는 줄도 모르고 있다가 죽는다고 하지요? 만약 갑자기 뜨거운 물에 집어넣으면 깜짝 놀라서 튀어 나와 죽음을 면할 수 있을 것입니다. 자기들에게 멸망이 다가오고 있다는 것을 깨닫고 인정하는 것이 문제해결의 첫 번째 열쇠인 셈입니다.

니느웨 사람들이 그 위기를 인정했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합니까? 자기들이 그렇게 천벌을 받을 만큼 악했고 많은 죄악을 범했다는 것을 인정하는 것이지요. '우리가 잘못하기는 뭘 잘못했다는 거야?' 이런 식이었다면 자기들에게 닥치고 있는 재앙을 인정하려고 하지도 않았을 것입니다. 잘못을 인정하는 것은 용서를 가져옵니다. 재판할 때에도 개전의 정이 현저하면 형량이 감소됩니다. 이번에 고문기술자 이근안 경감에게 7년 징역의 중형이 선고되었더군요. 이근안 씨의 주요 죄목은 김근태 고문사건과 납북어부 고문 사건인데, 김근태 고문 사건은 시효가 말소되어 처벌할 수가 없게 되었고 납북어부 고문 사건만으로 형량을 가리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재판과정에서 이근안 씨가 김근태 고문 사건에 대해서는 모두 잘못을 시인한 반면에, 납북어부 사건에 대해서는 철저하게 부인했다는 것입니다. 그러니 재판부가 볼 때 얼마나 밉겠어요? 7년의 중형을 선고한 이유 가운데 하나가 이처럼 개전의 정이 없고 교활하게 재판에 임했기 때문이라고 판결사유를 말했더군요.

2. 회개가 정답

니느웨 사람들이 위기를 깨닫고 그에 대처한 방법은 다름아닌 회개였습니다. 아무리 위기를 깨닫고 대처를 했어도 올바른 대처를 하지 못하면 위기를 극복할 수 없습니다. 만약 니느웨 사람들이 성이 곧 멸망한다니까 그 성을 버리고 피난을 가거나 방공호를 파고 지하 벙커로 숨는 방법으로 대처했다면 어떻게 되었을까요? 그 성을 버리고 다른 곳에 가서 성을 재건하기로 했다면 어떻게 되었겠습니까? 멸망이라는 재앙이 오게 된 원인을 파악하고 그 원인을 제거하는 것이 올바른 위기 대처방법이었고, 니느웨 사람들은 그 올바른 방법을 선택했기 때문에 멸망을 면할 수가 있었던 것입니다.

이 본문말씀이 말하고자 하는 메시지가 무엇입니까? 니느웨 백성들이 회개했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얼마나 지독하게 회개했는지 한번 보세요. 금식을 선포했습니다. 지금 온 성이 멸망하게 되었는데 밥이 목구멍으로 넘어가겠습니까? 밥 먹을 정신과 여유가 있겠어요? 우리가 회개할 때는 항상 금식을 해야 한다는 것은 아닙니다. 상황에 따라 금식할 때가 있고 밥을 먹어야 할 때가 있지 않겠어요? 또 개인의 체력이나 건강상태에 따라 금식을 할 것인지 안 할 것인지도 생각해 보아야 할 것입니다. 예를 들면 저는 금식체질이 아니에요. 금식을 몇 번 해 보았는데, 할 때마다 하루쯤 지나면 뼈가 아파서 견딜 수가 없어요. 살이 아픈 것은 좀 참겠는데 뼈가 아픈 것은 참을 수가 없더군요. 또 한번은 아프리카에서 1주일에 한번씩 아침 점심을 금식한 적이 있었습니다. 그런데 그 더운 지방에서 아침 점심을 안 먹으니까 탈진이 일어나더군요. 40일 금식한 분들이 종종 계세요. 40일 작정하고 금식하다가 돌아가신 분들도 계십니다. 그런데 그렇게 성공적으로 40일 금식을 마친 분들은 그것이 하나의 경력이 되더군요. 그렇다고 옆에 의사 대기시켜놓고 후송준비까지 해 놓고 금식을 한다는 것도 좀 우습지요? 금식 그 자체가 목적이 아니지 않습니까?

지금 이 니느웨 사람들은 그렇게 한가한 마음으로 금식을 한 것이 아닙니다. 금식을 하면 뼈가 아픈 사람들도 있었을 것이고, 그때 날씨가 아프리카처럼 더웠을 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그 사람들에게 그런 것은 아무것도 아니었습니다. 왜냐하면 죽고 사는 문제가 걸려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대로 있다가는 모두 멸망을 당하게 될 것인데, 금식하다 죽는 한이 있더라도 살려달라고 애원을 해야 할 것 아닙니까? 그런 절박한 상황에서 정말 금식이 필요한 것이지요. 한번은 바리새인들이 예수님께 따졌습니다. '당신과 당신의 제자들은 왜 금식을 하지 않습니까?' 예수님이 뭐라고 하셨지요? '뭐하러 금식을 하니? 지금 결혼식 파티하고 있는데.' 그러나 신랑이 납치 당했을 때는 금식을 해야겠지요.

니느웨 사람들은 마치 부모가 죽기라도 한 것처럼 상복을 입고 물도 입에 대지 않고 통곡을 하면서 부르짖고 있는데, 그것으로도 부족했다고 생각했던가 봅니다. 집에서 기르는 소나 양에게까지 상복을 입혔습니다. 상당히 우스꽝스러운 일이기도 합니다. 우리가 가끔 애완견에게 옷 입힌 것을 보긴 합니다만, 동물에게 옷을 입힌 시초는 이 니느웨 사람들인 것 같군요. 거기다가 그 짐승들에게마저 강제로 금식을 시켰습니다. 짐승들 금식시킨 것도 이 니느웨 사람들이 처음이 아니지 모르겠어요. 어쨌든 영문도 모르고 짐승들은 불편한 상복을 입고 쫄쫄 굶는 신세가 되고 말았습니다. 짐승들이 무슨 죄가 있습니까? 잘못을 했으면 니느웨 사람들이 했지 왜 짐승들까지 고생을 시키는 것입니까?

짐승들까지 같이 회개에 동참시킨다는 것이 불합리한 일이긴 하지만, 이것은 그만큼 그들의 회개가 철저했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조그마한 죄악이라도 남기지 않고 모두 회개하겠다는 의도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그리고 회개운동에도 함께 동참하는 사람들이 많을 때 이 운동이 더 힘을 얻게 됩니다. 한쪽에서는 회개의 눈물을 흘리고 있는데 다른 쪽에서는 희희낙락거리고 있으면 회개하는 사람들도 맥이 빠지겠지요? 1917년에 한국에서 일어난 성령의 역사는 세계적으로도 손가락에 꼽을 수 있는 부흥운동이었는데, 그 원동력은 바로 회개운동이었습니다. 한 사람이 자신의 죄를 자복하고 회개할 때 그것을 듣고 있던 사람들의 마음이 녹아졌고 너도나도 나와서 죄를 고백했습니다. 그래서 예배당이 금방 울음바다로 변했습니다. 이런 운동이 전국으로 퍼져나가 그 유명한 부흥운동이 된 것입니다. 회개운동에 특히 이처럼 함께 동참하는 동역자들이 필요합니다. 지금 니느웨 사람들은 온 백성으로도 모자라서 짐승들까지 그 회개운동의 동역자로 동참시키면서 대대적인 회개를 하고 있는 것입니다.

3. 회개의 결과

그 니느웨 성에서 일어나고 있는 모습을 한번 상상해 보세요. 왕으로부터 시작해서 모든 백성이 상복을 입고 잿더미 위에 앉아 울부짖고 있습니다. 지금까지 자기들이 행했던 모든 악한 일을 낱낱이 내어놓고 용서를 빌고 있는 것입니다. 또 소떼 양떼는 먹을 것을 안주니까 배고프다고 얼마나 소리를 지르겠어요? 사람들이 지르는 소리, 짐승들이 지르는 소리로 온 성이 떠들썩하지 않겠습니까? 그야말로 온 성이 초상집이 되었습니다. 만약 멋모르는 사람이 보았다면 정말 우스꽝스러운 모습이었을 것입니다. 어디서 갑자기 나타난 떠돌이가 한 마디 한 것에 온 성이 이렇게 벌벌 떨며 초상집 분위기가 되었다는 것도 우스운 일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이 이 광경을 보셨습니다. 니느웨의 죄악에 분노하시던 하나님은 그 모습을 어떻게 보셨을까요? 놀라운 사실은 그 우스꽝스러운 니느웨 사람들의 모습에 하나님의 불같던 노여움이 눈 녹듯이 사라져버린 것입니다. 그래서 그 성에 내리려고 하셨던 재앙을 취소하셨습니다. 이것이 바로 회개의 능력입니다.

이스라엘 백성이 미스바에 모여 회개운동을 일으켰을 때 하나님이 그들의 부르짖음을 들으셨습니다. 그리고 그날 이스라엘은 수십년 동안 그들을 짓밟았던 블레셋을 무찌르고 빼앗겼던 성들을 되찾았습니다. 이처럼 회개운동이 크게 성공할 때 하나님이 그들을 용서하시고 구원하십니다. 제2차 세계대전이 끝난 후 독일교회는 히틀러를 지지한 죄악을 공개적으로 시인하고 크게 회개했습니다. 회개하는 데도 용기가 필요한 것이 사실입니다. 해방 후에 부산의 고려파를 중심으로 한 신사참배 회개운동이 크게 일어났습니다. 그러나 불행하게도 이 운동에 전국교회가 동참하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회개운동하는 사람들을 분리주의자라고 정죄하기까지 했습니다. 우리 한국의 문화가 체면문화이라서 그런지 회개하는 것이 참 어렵습니다.

회개는 부끄러운 일이 아닙니다. 우리가 하나님 앞에 범죄했을 때 마땅히 해야 할 일이 바로 회개입니다. 그리고 회개할 때 놀라운 일이 일어납니다. 바로 하나님의 용서를 받게 된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용서를 받는다는 것이 얼마나 감사한 일입니까? 시편 기자는 말하기를 '허물의 사함을 얻고 그 죄의 가리움을 받은 자는 복이 있도다'(시 32:1)고 했습니다. 아무리 큰 죄악이라도 회개함으로 용서받을 수 있습니다. 당장 멸망을 당해야 할 만큼 악독했던 니느웨 성도 회개함으로 용서를 받지 않았습니까? 하나님이 가장 미워하시는 것이 죄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하나님이 가장 기뻐하실 일은 그 죄를 회개하고 하나님께로 돌아오는 일일 것입니다.

그러나 회개에 실패한 사람들의 운명은 어떻습니까? 회개할 기회가 여러 번 있었지만 끝내 회개하기를 거부하고 망한 사람들이 있습니다. 가룟유다가 그랬고, 사울왕이 그랬습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회개의 영을 부어주셔서 회개해야 할 것 철저하게 하나님 앞에 내어놓고 회개해서 용서받는 기쁨을 더하여 주시기를 소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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