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그인

  • 목록
  • 아래로
  • 위로
  • 쓰기
  • 검색

설교 4장이 기록된 까닭은? (욘 04:1-11)

첨부 1


1. 보내신 분과 보내심을 받은 사람

우리는 니느웨 사람들이 회개하고 그 성에 내리기로 했던 재앙이 취소된 것에 분노하는 요나를 보면서, 사명과 그것을 감당하는 사람의 태도에 관해서 생각해 보지 않을 수 없습니다. 요나는 우여곡절 끝에 마침내 하나님께 굴복하고 하나님의 명령을 순종하여 니느웨에 오게 되었습니다. 하나님께서 요나에게 두 번째로 사명을 주시고 요나는 순종하는 마음으로 그 사명을 감당하게 되었습니다. 여기까지는 모든 것이 잘 진행되어 온 것처럼 보입니다. 요나는 한때의 잘못을 뉘우치고 다시 충성스러운 종이 되어 돌아왔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이 시키시는 대로 열심히 일했습니다. 헌신했어요. 모든 위험과 불이익을 각오하고 주님의 명령에 순종했습니다. 아, 이제 우리는 이 요나의 극적인 순종과 헌신, 그리고 그 수고를 입이 마르도록 칭찬해야 할 것입니다. 그를 우리 삶의 모범으로 삼아도 좋을 것입니다. 만약 이 요나서가 3장까지만 기록되어 있다면 요나는 우리의 영웅이 되고도 남았을 것입니다.

그런데... 4장에 들어와서 요나의 본색이 드러나고 말았습니다. 요나는 하나님의 결정에 심히 분노했습니다. 그리고 자기가 감당해 온 사역을 발을 동동 구르며 후회했을 것입니다. '내가 정신이 나갔지, 뭐하러 하나님 말씀을 듣고 여기까지 와서 저놈들 좋은 일을 시켜주었단 말이야? 내가 다시는 하나님 말씀을 듣나 봐라!' 그래서 요나는 감히 하나님께 대꾸하고 막 대들었던 것입니다.

여기서 한 가지 감지되는 사실이 하나 있습니다. 하나님은 일을 계획하시고 그 일을 이루시기 위해서 요나를 부르시고 그 일을 수행하도록 보내셨습니다. 보내심을 받은 사람으로서 요나는 하나님이 행하고 계시는 그 일이 어떤 것인지 잘 파악하고 그 일에 동참했어야 할 사람입니다. 그런데 요나의 생각은 완전히 딴판이었던 것이지요. 다시 말해서 보내시는 분과 보냄받은 사람 사이에 전혀 공감대가 형성되어 있지 않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요나를 니느웨 성에 보내어 '40일이 지나면 이 성이 무너지리라'고 외치도록 하신 목적은 무엇입니까? 그들이 그 말을 듣고 자기들의 죄악을 깨달아 회개하도록 하기 위함이었습니다. 반면에 실제로 거리를 다니면서 '이 성이 무너지리라' 하고 목청을 돋우며 외치고 다녔던 요나는 무슨 생각을 하고 있었을까요? 요나가 하나님처럼 니느웨 사람들이 그 메시지를 듣고 회개하기를 바랐습니까? 천만의 말씀이지요. 그럼 요나는 무슨 생각을 하면서 그렇게 외치고 다녔겠습니까? '40일만 지나봐라. 너희놈들은 다 멸망하게 될 것이다. 이 호화롭고 거대한 성읍은 쑥대밭이 되겠지. 하늘 높은 줄 모르고 권력을 휘둘렀겠다? 흥, 너희는 이제 독 안에 든 쥐다. 아이구 고소하다. 망할 것이다! 빨리 망해라!' 이러지 않았겠어요? 하나님은 안타까운 심정으로 요나를 통해서 회개를 촉구하려고 하셨지만, 정작 요나는 고소한 마음으로 재앙과 멸망을 노래부르고 있었던 것입니다.

여러분, 요나는 하나님의 명령을 순종해서 시키시는 대로 정확하게 임무를 수행했습니다. 겉으로 보기에 요나는 충성을 다했습니다. 여기까지만이 우리의 모습은 아닙니까? 정작 하나님이 원하시는 목적, 하나님의 마음은 헤아리지 못하고, 오히려 하나님과는 전혀 딴 생각을 하면서 겉으로 드러나는 것만 하나님께 헌신하고 충성하는 것은 아닌가요?

2. 요나를 닮은 선교사들

제가 오래 전에 일본에 단기선교여행을 가려고 하던 일이 있었습니다. 몇 개월 전부터 이 선교여행을 준비하고 하나님의 인도하심을 구하기 위해 말씀을 공부했습니다. 또 일본 목사님을 초청해서 강연을 듣기도 했습니다. 몇 마디 일본말도 배웠습니다. 명분은 최고이지요. 일본에 복음을 전하러 간다는 것이 얼마나 의미있는 일인지 모릅니다. 우리를 짓밟고 괴롭힌 그들에게 우리는 그리스도의 사랑을 전하러 간다는 것, 얼마나 아름다운 일입니까? 베드로 사도는 말하기를 악을 악으로 갚지 말고 도리어 복을 빌라고 했습니다. 사도 바울은 악에게 지지 말고 선으로 악을 이기라고 했습니다. 비록 일본은 우리에게 악으로 대했고 고통을 가져다 주었지만, 우리가 그들에게 사랑으로 다가가 하나님의 생명의 말씀을 전한다면, 그야말로 선으로 악을 이기는 것 아니겠습니까? 악을 악으로 갚지 않고 오히려 복을 빎으로써 우리로 하여금 복을 유업으로 받게 하시려는 하나님의 부르심에 부응하는 것이 아니겠어요? 그래서 일본에 선교하러 간다는 것은 하나님께 가장 헌신하고 충성하는 것처럼 생각이 되었습니다.

그런데 이러한 대의명분에 의해서 우리 의식 깊이 뿌리박혀 있는 민족감정이 다 사그러질 수 있다면 얼마나 좋겠어요? 우리가 일본사람들을 말할 때는 기본적으로 '놈'자가 들어가게 돼요. 일본놈들이라고 말이지요. 우리가 근본적으로 일본을 미워합니다. 다른 나라하고 운동경기를 해서 졌을 때도 물론 섭섭하지만, 일본한테 졌을 때는 섭섭한 정도가 아니지요. 박이 터지고 코피가 나더라고 일본은 꼭 이겨야 속이 시원해요. 그래서 일본한테 지고 온 선수들은 욕을 얼마나 얻어먹는지 얼굴을 들고 다닐 수가 없습니다. 일본에 복음을 전하러 가는 것이 그렇게 대단하게 여겨진다는 사실 자체가 아직 우리가 그 미움을 극복하지 못하고 있다는 증거입니다. 그래서 너희는 우리에게 그렇게 했지만, 우리는 너희에게 이렇게 한다는 식의 일종의 영적인 교만이 싹틀 여지도 되는 것입니다.

일본에 복음을 전하는 것이 하나님의 명령이고 마땅히 해야 할 일이기 때문에 하기는 하는데, 정말 우리의 마음 속에 어떤 마음이 있는가 하는 것이 중요한 일이겠지요. '하나님이 하라고 하셔서 한다마는, 이놈들아! 우리가 너희를 위해서 이렇게까지 한다, 이놈들아!' 하는 감정이 남아 있다는 말입니다. 그렇다면 '40일이 지나면 이 니느웨가 무너지리라' 하고 외쳤던 요나와 다를 것이 무엇입니까? 비록 숭고한 이념과 취지에 따라 사역을 행한다 할지라도 우리 마음 속 깊은 곳에서 참 마음으로 우러나는 용서와 사랑이 아직 이루어지지 않았다면 하나님의 부르심에 온전히 응답한 것이라고 할 수 없을 것입니다.

이것은 꼭 일본에 선교하러 가는 일에만 국한된 일이 아닙니다. 제가 아프리카에서 선교사로 있으면서 가장 큰 고민이 바로 그것이었어요. 제가 겉으로는 아프리카 선교사입니다. 아프리카에서 교회를 세워 설교하고, 신학교에서 가르치기도 했습니다. 한국에서 선교사로 파송을 받았고 현지 정부에도 선교사로 등록이 되어 있습니다. 누가 보더라도 아프리카 선교사입니다. 그러나 아프리카에 가서 산다고 아프리카 선교사가 되는 것이 아닙니다. 아프리카에서 교회를 세운다고 선교사가 아니에요. 신학교에서 아프리카의 젊은이들에게 하나님 말씀 가르치는 그 일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아프리카 선교사로서 정말 중요한 것은 나를 아프리카에 선교사로 보내신 하나님의 마음을 가지고 있느냐 하는 것이지요.

하나님이 아프리카에 선교사들을 보내신 까닭은 하나님이 그들을 사랑하셨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사랑하신 것과 똑같이 그들도 사랑하십니다. 그 하나님의 마음으로 아프리카 사람들을 사랑하는 것이 바로 아프리카의 선교사가 되는 일입니다. 그런데 제가 해 보니까 그 사람들을 사랑하는 것이 잘 안되더라는 것입니다. 이것이 저의 고민이고 고통이었습니다. 선교사역을 하는 데 그것이 꼭 필요한 것은 아닙니다. 요나가 미워하는 마음으로 외친 결과 니느웨가 구원받게 된 것처럼, 사랑하는 마음 없이 선교사역을 하면서 열매를 거둘 수도 있습니다. 또 우리가 연약한 가운데 있기 때문에 많은 선교사들이 아직 그런 형편 가운데 있으면서 사역을 계속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하나님 앞에서 하나님의 부르심에 거짓으로 응답한 것밖에 되지 않을 것입니다.

말이 났으니 말이지 선교지에서 현지인들을 사랑하는 것은 생각만큼 쉬운 일이 아닙니다. 특히 젊은 초임 선교사들에게는 더욱 그렇습니다. 살아가면서 부대끼고 미운정 고운정이 들면서 차츰차츰 그들과 동화되고 그들의 가치를 발견하면서 그들을 사랑하게 됩니다. 그렇기 때문에 선교사가 장기사역을 하는 것이 필요한 것입니다.

3. 진짜 순종으로 가는 길

우리가 주님을 섬기고 하나님의 뜻에 따라 살아가는 모든 일에 있어서 생각해 보아야 할 문제가 바로 이것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부르심을 따라 각자의 위치에서 주님을 섬기고 교회를 받들며 하나님의 명령을 따라 살아가고 있습니다. 이것이 우리의 나타나는 모습입니다. 대체로 아름다운 모습이고 충성스러운 종의 모습이기도 합니다. 또 감동적이기도 합니다. 마치 요나서 3장까지에 나타난 요나의 모습처럼 말입니다.

그러나 우리의 진짜 모습은 3장에서 끝나는 것이 아니라 4장으로 이어집니다. 이 4장은 공개되지 않은 장입니다. 겉으로 나타나지 않는 모습이지요. 그래서 아무도 모릅니다. 때로는 나 자신도 모르고 지나칠 때가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 삶의 이 4장은 하나님이 보고 계시는 우리의 모습입니다. 그리고 우리가 반드시 점검해 보아야 할 우리의 모습이지요.

만약 제가 아프리카에 선교사로 있으면서 저의 3장까지만 보고 살았다면 늘 행복했을지 모릅니다. 내가 아프리카까지 와서 선교사로 하나님께 헌신했다는 그 겉모습만 가지고 내가 다 헌신하고 다 충성하는 것으로 생각했다면 자랑할 만했을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자비하심에 대해서 분노하는 것과 같은 요나의 못난 모습이 제 속에 있는 것을 보고 늘 괴로워하며 회개하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우리 모두가 직면해야 할 도전이 바로 이것입니다. 우리의 4장을 보자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섬기고 교회 안에서 신앙생활을 하는 데 있어서, 남들이 알지 못하는 내 속마음, 아무도 모르는 나의 동기, 공개할 수 없는 우리의 감정, 이런 것들이 어떤 모습입니까? 하나님이 우리를 부르실 때의 그 마음과 우리 삶의 4장에 그려지고 있는 우리의 마음이 얼마나 닮아 있습니까? 부르신 하나님과 부름받은 우리 사이에 얼마나 공감대가 형성되어 있습니까?

만약 우리의 4장에서 하나님의 마음과 동떨어진 우리의 모습이 발견된다면 그대로 두어서는 안됩니다. 그것들을 제거하고 정화시켜서 정말 하나님의 마음을 우리가 간직할 수 있도록 늘 힘써야 할 것입니다. 요나가 진정으로 니느웨 사람들을 사랑하고 그들의 구원을 기뻐하게 되었을 때 그의 수고가 그에게 면류관이 되는 것처럼, 우리의 헌신과 순종도 우리의 순수한 동기와 정직한 마음에서 우러나왔을 때 하나님이 받으실 만하기 때문입니다.
 
 

이런 글도 찾아보세요!

공유

facebooktwitterpinterestbandkakao story
퍼머링크

댓글 0

권한이 없습니다. 로그인

신고

"님의 댓글"

이 댓글을 신고 하시겠습니까?

삭제

"님의 댓글"

이 댓글을 삭제하시겠습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