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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어찌 합당치 아니하냐? (욘 04:1-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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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찌 합당치 아니하냐?(욘 4:1-11)

어떤 분은 왜 자꾸 요나 4장만 가지고 설교를 하느냐고 할지 모르겠습니다. 그렇지만 이 요나 4장을 읽으면 읽을수록 새로운 도전이 다가옵니다. 저는 이 요나 4장을 가지고 앞으로 몇 번이나 더 설교를 하고 싶지만, 또 너무하면 지나친다는 말처럼 될까 봐서 오늘로 요나서 강해를 마치려고 합니다. 그동안 우리가 이 주인공 요나에 대해서 분노도 하고 동정심이나 동질감을 느끼기도 하고 칭찬도 하고 책망도 해 오면서, 이 요나라는 한 인간 속에서 우리 자신을 발견하고 우리의 믿음과 자세를 점검해 보았습니다. 그러면서 하나님의 크신 뜻, 우리 인간이 미처 파악하고 깨닫지 못했던 하나님의 계획과 섭리를 발견해 가는 일에 대해서 생각해 보았습니다. 이 요나서가 기록된 목적은 요나라는 한 인간의 이야기를 전해 주기 위한 것이 아닙니다. 옛날에 있었던 전설같은 이야기로 우리의 흥미와 관심을 끌기 위한 것도 아닙니다. 그 악독한 니느웨 사람들이 회개함으로써 파멸을 면했다는 교훈을 남기기 위한 것도 아닙니다. 그러면 무엇 때문에 이 요나서가 우리에게 의미가 있습니까? 이 요나서의 결론이 무엇입니까?

1. 네 아끼는 것이 무엇이냐?

제가 아프리카에 있을 때의 일입니다. 어디서인지 모르지만 들깨 씨를 조금 얻어왔습니다. 여기서도 깻잎이 귀한데, 아프리카에서 깻잎을 먹을 수 있다면 얼마나 감사한 일입니까? 그래서 텃밭 한 두둑에 씨를 뿌렸습니다. 그리고 다른 두둑에는 음치차를 심었습니다. 이 음치차라는 것은 탄자니아에서 가장 흔하고 많이 먹는 채소인데 맛이 시금치와 똑같습니다. 자라기는 상추처럼 높이 자라지만 잎 모양도 시금치와 비슷해요. 여러 가지 영양소도 풍부하게 들어있는 좋은 채소입니다. 하지만 흔해 빠진 것이 음치차이기 때문에 귀한 것은 아니지요. 그렇게 들깨와 음치차를 심었는데 좀 지나면서 보니 음치차는 잘 자라는 반면에 들깨는 크지를 않는 거예요. 처음에는 풍토에 맞지 않아서 그런가 했는데 알고 보니 이유가 있었어요. 비가 안오는 계절이라서 채소밭에 날마다 물을 주어야 했는데 우리집에서 일하던 젊은이가 들깨에는 물을 대충 주는 시늉만 하고 음치차에다만 물을 많이 준 것입니다. 생전 보지도 못하고 알지도 못하는 것을 심어 놓았으니 관심이 없는 거였어요. 그렇지만 다른 쪽에서 나고 있는 음치차는 자기가 좋아하는 맛있는 채소이기 때문에 물을 많이 주었구요.

그래서 들깨는 제가 물을 주어야 했습니다. 저에게는 들깨가 귀한 것이지 음치차는 아무것도 아니에요. 아무데서나 쉽게 볼 수 있는 것이 음치차이고, 시장에 가면 몇 백원 주지 않아도 많이 살 수 있습니다. 그렇지만 들깨는 몇 만원을 줘도 구할 수 없을 만큼 귀한 것입니다. 그래서 제가 물을 주면 음치차에 주겠어요? 당연히 들깨에다 주지요. 무엇을 아끼느냐, 무엇을 가치있는 것으로 여기느냐에 따라서 사람의 사는 모양이 달라집니다. 그래서 어떤 가치관을 가졌느냐 하는 것은 우리 인생에서 매우 중요한 문제가 되는 것이지요.

오늘 이 본문에서 요나는 뜨거운 햇볕을 가려주는 박넝쿨을 무척 아꼈습니다. 이 박넝쿨은 요나가 찾아낸 것도 아니고 심은 것도 아니었습니다. 그저 요나가 있던 곳에서 갑자기 자라 하루만에 시원한 그늘을 만들어 주었습니다. 그러니 얼마나 고마운 박넝쿨입니까? 그런데 하룻밤 지나고 났더니 그만 벌레가 그 박넝쿨 밑둥을 갉아먹어버렸습니다. 그리고 그 무성했던 박넝쿨이 금방 시들어버리고 말았습니다. 그날도 요나는 이 니느웨 놈들이 어떻게 망하나 보자 하고 그 성을 지켜볼 셈이었습니다. 하늘에서 불이 쏟아지든지 땅이 갈라지든지 해서 니느웨가 순식간에 없어져버리는 그림만 그리고 있습니다. 이제 해가 떠올라 요나의 머리에 내리쬡니다. 어제는 그 박넝쿨이 무성해서 시원했었는데, 오늘은 보니 박넝쿨은 다 시들어버리고 햇볕은 왜 그렇게 뜨거운지... 그날따라 하나님이 뜨거운 동풍까지 몰아오셨으니 요나가 더 이상 견딜 수 없는 지경에 이르게 되었습니다.

요나는 그 박넝쿨이 시들어버린 것을 너무 애석해했습니다. 더위를 피하게 해 주었던 그 박넝쿨이 없어지자 당장 고통이 다가왔기 때문입니다. 그만큼 그는 박넝쿨을 아꼈지만 니느웨라는 성과 그 사람들을 아끼는 마음은 전혀 없었습니다. 요나에게는 박넝쿨이 필요하고 귀했지만, 하나님은 니느웨의 십이만 목숨이 귀중하고 그것을 아끼시신다고 했습니다. 하룻밤에 났다가 그 다음날 시들어버린 박넝쿨을 아낀다면 십이만이나 되는 목숨과 그에 부속되는 수많은 짐승들을 아끼는 것이 어찌 합당하지 않느냐는 것입니다. 박넝쿨을 더 아꼈던 요나와 십이만 목숨을 아끼는 하나님 사이에 이처럼 의견충돌이 일어나는 것은 당연한 일이었겠지요. 이처럼 가치관이 충돌될 때 다툼이 일어납니다. 가치관이 서로 다른 사람들과 함께 살아간다는 것은 보통 힘든 일이 아닙니다.

여러분의 삶에서 가장 아끼는 것이 무엇입니까? 가장 우선순위를 점하고 있는 것이 무엇인가요? 누구에게나 아끼는 것이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것이 얼마나 합당한 것인지는 스스로 살펴보아야 할 문제입니다. 그것이 당장 우리를 이롭게 하고 시원하게 하는 요나의 박넝쿨인지, 아니면 당장은 나에게 손해나 고통을 가져다 주는 것이지만 하나님 보시기에 정말 가치있는 십이만 목숨의 니느웨 성인지 살펴봐야겠지요? 정직하게 행하고 자기 분수에 따라 겸손하게 살아가는 것은 당장 우리에게 아무런 이익도 보장하지 않습니다. 반면에 쉽게 출세하고 성공하기 위해서는 아부를 하거나 줄서기를 하거나 또는 자신과 다른 사람들을 속이는 일이 필요하기도 합니다. 우리에게 가치있는 일이 요나의 박넝쿨인지 하나님의 니느웨 성인지 늘 살피며 살아가야 하겠지요?

2. 요나의 분노

그렇지 않아도 이 니느웨 놈들이 망하지 않고 멀쩡하게 살아있는 것에 분통이 터지는데, 그 시원한 그늘을 만들어 주었던 박넝쿨마저 시들어버리고 뜨거운 햇볕과 뜨거운 동풍에 시달리다 보니 분노가 치솟습니다. 지금 요나를 보면 분노라는 것이 얼마나 인간을 파괴할 수 있는가를 알 수 있지요? 사람이 성을 내게 되면 첫째로 이성을 잃게 됩니다. 즉 앞뒤를 재지 않게 되고 사리판단을 올바로 할 수 없게 된다는 것이지요. 그래서 분노했을 때는 반드시 일을 그르치게 됩니다. 그러다가 분노가 가라앉았을 때는 꼭 후회를 하게 되지요. 두 사람이 서로 싸울 때도 먼저 화를 내는 사람이 지게 됩니다. 화를 냈다는 것은 그만큼 자신의 약점을 드러낸 것이 되고 맙니다. 그래서 분노를 다스릴 줄 아는 사람이 사람을 다스리고 세상을 다스리게 됩니다.

엊그제 인터넷 뉴스를 보니까 기자가 18살짜리 살인범을 취재한 이야기가 나왔더군요. 대학생을 칼로 찔러 죽였다니까 분명히 험상궂게 생긴 조직폭력배일 것이라고 생각했는데, 막상 만나보니까 여리게 생긴 소년이더라는 거예요. 그날따라 부모님이 심하게 싸우는 것을 보고 속상한 나머지 칼을 들고 집을 나온 것이 화근이었습니다. 친구들을 만나서 술을 마시고 있었는데, 옆자리에 앉아 술을 마시던 대학생들과 시비가 붙었어요. 그렇지 않아도 속이 상해 있었는데 그 시비 중에 대학생에게 한 대 얻어맞았습니다. 그 순간 정신이 확 돌아버린 거지요. 그럴 때를 보고 피가 거꾸로 솟는다고 하더군요. 그러나 그 순간은 자신의 파멸을 불러올 수도 있는 순간이라는 것을 명심해야 합니다. 바로 그 소년이 그랬습니다. 그래서 숨겨 가지고 있던 칼을 빼서 찔러버린 것입니다. 면회를 마치고 나오는데 교도관이 그러더랍니다. '젊은 녀석이 한 순간의 실수로 인생 망친 거지 뭐.'

요나는 지금 분노가 머리 끝까지 솟아나서 하나님께 따지고 대드는 것입니다. '날 차라리 죽여주시오. 니느웨 놈들 저렇게 멀쩡한 것도 못 봐줄 노릇인데, 이 더위 때문에 더 미치겠습니다. 저 악한 니느웨 놈들은 살려 주시면서 왜 그렇게 고맙고 유익한 박넝쿨은 살려두지 않으십니까? 도대체 하나님 하시는 일도 마음에 안들고, 세상 사는 일도 너무 힘들어서 차라리 죽는 게 낫겠습니다.'

어떤 분은 이 사회를 가리켜 '술 권하는 사회' 즉 술 마시게 하는 사회라고 했거니와, 이 세상은 우리로 분노케 하는 세상이라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우리에게 좋은 일만 일어난다면 분노할 일이 없겠지요. 그러나 우리에게 닥치는 일들은 너무나 힘들고 짜증스러운 일이 많습니다.

저도 여러분이 살아가면서 닥치는 일들 중에 참 분노할 일들이 많은 것을 봅니다. 한 마디로 말해서 일이 자꾸만 꼬이고 안 풀리는 거지요. 그러나 그런 일들에 분노하는 것은 그것들에게 지는 일입니다. 더욱이 하나님께 분노를 터뜨린다는 것은 있을 수도 없는 일이지요. 자신에게 닥치는 일들 때문에 하나님을 원망하고 마음이 상해서 하나님과 교회를 멀리하는 경우도 종종 우리가 봅니다.

여러분에게 닥친 일 때문에 분노하고 계십니까? 분노하기에 앞서 하나님께서 왜 그런 일을 허락하셨는지, 그리고 이것이 분노할 일인지 잘 살펴보시기 바랍니다. 요나의 경우에는 왜 그런 일이 일어나게 되었습니까? 요나의 편협한 생각을 고치시려고, 그리고 더 큰 하나님의 뜻을 깨닫게 하시려고 하나님께서 박넝쿨을 시들게 하셨습니다. 그리고 요나가 분노를 터뜨린 것은 그의 못된 성격 탓도 있습니다. 그는 전혀 분노를 다스릴 줄 모르는 사람이었지요. 분노해서 일을 그르치는 사람이었습니다. 만약 우리에게 분노할 일이 있다면, 분명히 하나님의 메시지가 거기에 담겨져 있을 것입니다. 그것을 찾아내는 것은 믿음의 눈입니다. 믿음으로 모든 일을 볼 때 그 배후에 있는 하나님의 계획을 발견할 수 있는 것입니다.

3. 하나님이 아끼시는 것

다시 이 요나서의 결론으로 돌아가 봅시다. 이 요나서가 기록된 것은 하나님의 자비하심과 구원을 선포하기 위한 것입니다. 그 악독한 니느웨 사람들이 멸망당하는 것보다 회개하고 구원받는 것을 기뻐하신 하나님이십니다. 하나님이 바로 그런 분이시기 때문에 오늘 우리가 멸망당하지 않고 구원을 받은 것이지요. 그리고 그 하나님의 구원은 요나가 생각했던 것처럼 편협한 것이 아니라 이방인까지 포함하는 넓은 것이었습니다. 그것은 물론 하나님이 온 인류를 사랑하시고 천지의 주재이심을 말해 주는 것입니다. 결국 이 요나서는 하나님이 한 지역의 신이나 한 민족의 신이 아니라 오직 한 분이신 만군의 여호와, 만왕의 왕이시라는 것을 선포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아끼시는 것이 인간의 영혼이라면 우리 역시 그것을 아끼고 가치있게 생각해야 하지 않겠습니까? 한 영혼이 천하보다 귀합니다. 그리고 천국에서는 회개할 것 없는 백 명의 의인보다 회개한 한 사람의 죄인으로 인한 기쁨이 크다고 하신 주님의 말씀을 기억합니다. 영혼을 구원하는 일, 궁극적으로 가치있는 일에 우리가 관심을 갖도록 하는 것이 이 요나서가 기록된 목적입니다. 요나서를 읽으면서 이것을 깨닫지 못한다면 그저 단편소설 읽는 것과 다를 바가 없겠지요. 오늘 우리에게 이 요나서를 주신 하나님을 찬양합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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