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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하나님께 항변한 선지자 (합 01: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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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절은 이 하박국서 전체의 제목입니다. 선지자 하박국이 하나님으로부터 계시를 받았는데 그 계시의 내용이 유다 백성들과 통치자들에 대한 무서운 심판울 선언하는 것이기 때문에 경고라는 표현이 사용된 것입니다. 1절에 우리가 결코 간과할 수 없는 한 가지 사실이 있습니다. 그것은 여기에서 말하고자 하는 주제가 그것을 말하는 사람보다 크고 중요하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여기에는 그 사람의 이름이 가장 간단하게 언급되었습니다. '선지자 하박국' 성경의 다른 책에서 사람의 이름을 언급할 경우에는 누구의 손자, 누구의 아들 아무개, 심지어는 그의 4대, 5대 할아버지의 이름까지 언급되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그러나 여기서는 하박국이 선지자라는 것 외에 그의 가문이나 출신지역 등 그에 관한 것을 전혀 말하고 있지 않습니다. 어차피 하박국은 여기서 하나님의 묵시를 받아서 전달하고 있을 뿐 자신의 사상이나 주장을 펴고 있지 않습니다. 그리고 말하고자 하는 내용이 중요한 것이지 자신을 드러내는 것이 중요한 것이 아님을 잘 알고 있습니다. 바로 이것이 우리의 자세가 되어야 합니다. 우리는 무슨 일을 할 때 크게 벌여놓기를 좋아하며 자신의 이름이 빛나게 되기를 원합니다. 어떤 중요한 일을 한 만큼의 보상을 받아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우리의 하는 일이 하나님의 위대하신 이름과 그분의 크신 뜻을 나타내는 것이라면 거기에 우리의 이름과 우리의 영광이 전혀 들어갈 자리가 없다는 것을 깨달아야 합니다. 하나님께 돌려야 할 영광을 가로챘다가 헤롯 왕은 벌레가 먹어 죽었습니다.

I. 하나님께 항변한 선지자

하박국은 이스라엘 백성을 책망하지 않고 하나님께 항변한 최초의 선지자였습니다. 그는 하나님을 향하여 그의 불만을 토로합니다. 그로 하여금 깊은 좌절에 빠지게 한 것은 계시와 경험 사이의 심각한 불일치였습니다. 분명히 하나님은 공의로우신 분이시며 악을 미워하시는 분이신데 실제로 하박국이 접하고 경험하는 현실은 말할 수 없는 불의와 죄악이 자행되는 것이었습니다. 도무지 하나님의 공의나 그의 선하심을 찾아볼 수 없는 땅 위의 현실에서 하박국은 고민하고 괴로워하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그것은 하박국이 전능하시고 선하신 하나님을 분명히 알고 있었기 때문이었습니다. 성숙한 성도라면, 진실로 의로우시며 유일하신 하나님을 믿는 사람이라면 이러한 고민을 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그런데 우리는 이런 문제를 가지고 씨름하다가 결국에는 해결책을 찾지 못하고 넘어져 버리고 맙니다. 한두 번 하나님께 부르짖다가 아무런 응답이 없을 때 그만 포기하고 그런 문제에서 관심을 거두어들이는 것이 보통입니다. 심지어는 그런 문제 때문에 고민하다가 결국에는 하나님을 부정해 버림으로써 문제를 해결하려는 사람도 종종 볼 수 있습니다. '하나님이 계신다면 세상도 선해야 한다. 그런데 세상은 선하지 않다. 그러므로 하나님은 없다'라는 것입니다. 논리적으로 맞는 말이지만 우리의 논리에 의해서 하나님의 존재가 결정되는 것은 아닙니다.

하박국은 여기서 이 문제에 어떻게 대처하고 있습니까? (2절) 하박국은 한두 번 부르짖다가 포기하거나 그만두지 않았습니다. '언제까지 나의 부르짖음을 듣지 않으시렵니까?' 하는 그의 절규 속에서 그가 지금까지 오랜 세월동안 계속해서 부르짖어 왔으며 앞으로도 계속 하나님의 응답이 있을 때까지 부르짖겠다는 강한 의지를 발견할 수 있습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부정해 버림으로써 문제를 해결하려는 사람이 아닌 이상 이 문제의 해결 방법은 오직 하나님께로부터 얻어낼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므로 계속해서 하나님께 부르짖지 않을 수 없는 것입니다. 응답하시지 않는 하나님께 불만을 토로하면서도 하박국은 다른 방법으로 문제의 해답을 얻으려 하지 않습니다. 오늘 우리에게 결핍된 것이 바로 이 점입니다. 분명히 하나님이 살아계시고 오직 그분만이 해결하실 수 있는 분이라는 것을 우리가 확신한다면 우리가 어찌 하나님께 부르짖는 것을 포기할 수 있겠습니까? 열쇠를 갖고 있는 사람이 누구라는 것을 알면서 왜 다른 사람에게 문을 열어달라고 하겠습니까?

그러면서 하박국은 자신이 보고 경험하는 죄악들을 낱낱히 하나님께 보고하고 있습니다. (3절) 간악, 패역, 겁탈과 강포, 변론과 분쟁. 얼마나 무시무시한 단어들입니까? 이러한 것들은 인간사회에서 저질러질 수 있는 극단의 죄악상들입니다. 통치지가 백성들을 압제하고 폭력이 난무하는 세상, 힘있는 자는 약한 자를 괴롭히는 것을 낙으로 삼으며 가진 자가 가난한 자의 것을 빼앗고 착취하는 사회, 재판은 뇌물에 의해 굽어지고 모든 것이 비정상적인 방법을 통해서만 해결되는 사회풍조, 그야말로 타락할 대로 타락한 현실을 하박국은 상세하게 하나님께 고해 바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하박국이 정작 고통스러워하고 있는 것은 그 죄악들로 인해 하나님의 공의가 시행되지 못하는 것입니다. (4절) 율법은 하나님에 의해 주어진 최고의 절대적 규범이었습니다. 그런데 타락한 생활에 빠진 사람들에 의해 율법의 권위가 땅에 떨어지고 사실상 그 법적, 도덕적 효력이 상실되어 버렸던 것입니다. 하박국이 이해할 수 없었고 원통했던 것은 바로 그것이었습니다. 왜 선하신 하나님의 공의가 이토록 짓밟혀야 하는가? 왜 하나님은 자신의 공의가 그토록 처참하게 짓밟히는 것을 보고도 가만히 계시는가?

II. 당시의 상황과 배경

이 하박국의 울부짖음을 이해하려면 당시의 배경과 상황을 알아야 합니다. 먼저 유다의 역사와 당시의 주변정세를 잠깐 살펴봅시다. BC 930년에 왕국이 남북으로 분열되었습니다. 그리고 BC 722년에 북왕국 이스라엘은 앗시리아에게 멸망당하고 말았습니다. 이스라엘을 멸망시킨 앗수르는 유다에게도 커다란 위협이 되었습니다. 앗수르의 침공에 유다의 운명이 풍전등화와 같았을 때 그 유명한 히스기야 왕의 기도에 의해 기적적인 방법으로 구원을 받기도 했습니다. 이때를 즈음하여 북방에서는 바벨론이라는 나라가 새로 일어났습니다. 그래서 유다는 앗수르와 바벨론, 그리고 남쪽 애굽의 세 강대국들의 세력다툼 속에서 이리 물리고 저리 찢기는 지경에 이르게 되었습니다. 신흥세력인 바벨론이 점점 강성해지자 애굽과 앗수르는 동맹을 맺어 바벨론에 대항했으나 BC 605년 갈그미스 전투에서 바벨론은 앗수르와 애굽의 동맹군을 격파하고 단번에 세계를 제패했습니다. 그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 BC 586년 바벨론에 의해 예루살렘이 함락됨으로써 유다 왕국도 멸망했습니다.

하박국은 바로 갈그미스 전투를 전후한 시대에 활동했는데 이때는 여호야김 왕이 다스리고 있었습니다. 이 여호야김은 예레미야의 두루마리를 태워 버렸던 바로 그 악한 왕입니다. 이 여호야김에 대해서 좀 알아봅시다. 히스기야 왕을 계승한 므낫세와 그 뒤의 아몬은 아주 악한 왕이었습니다. 그러나 그 다음에 왕이 된 요시야는 최후의 개혁왕이라고 불리울만큼 선한 왕이었습니다. 이때 바벨론과 앗수르가 전쟁중에 있었는데 애굽의 바로 느고가 앗수르를 돕기 위해 군대를 출정시켰습니다. 요시야 왕은 앗수르가 망하는 것을 원했기 때문에 애굽 군대의 길목을 차단하고 전쟁을 치렀습니다. 이 전쟁이 므깃도 전투인데 여기서 요시야 왕은 그만 전사하고 말았습니다. 요시야 왕이 죽자 백성들은 그의 둘째 아들인 여호아하스를 왕으로 삼았습니다. 그러자 바로 느고가 와서 여호아하스를 애굽으로 포로로 잡아가고 그의 형인 엘리야김을 왕으로 삼고 이름을 여호야김으로 바꾼 것입니다. 여호야김이 느고에 의해 이름이 바뀌었다는 사실은 그는 느고의 꼭두각시에 불과하다는 것을 말해 줍니다. 여호야김은 바로에 의해 왕이 되었기 때문에 애굽에 조공을 바쳐야 했는데 이를 위해서 백성들에게서 많은 세금을 거둬들였습니다. 또 그는 궁전을 크게 짓고 사치를 일삼았습니다. 그리고 백성들을 압박하여 무죄한 피를 많이 흘렸는데 아마 자기를 왕으로 세우지 않은 반대자들에게 보복하느라 더욱 많은 피를 흘렸을 것이라고 생각됩니다. 그런 여호야김의 통치 아래서 자행되는 죄악과 그 타락상을 하박국이 지금 접하고 있는 것입니다.

역사를 보면 어느 나라에서나 공통적으로 나타나는 현상이 있는데 소위 말기적 현상이라는 것입니다. 한 나라의 왕조가 망하거나 어느 권력자가 실각하기 직전에는 반드시 권력이 부패하고 사회가 타락하게 됩니다. 통치자는 자신의 힘으로 권력을 유지해 갈 수 없기 때문에 다른 강대국에게 나라를 내주다시피 하고 그 대신 자신의 권력을 보장받습니다. 그 나라의 군대는 강대국의 침략을 막는 데는 아무런 힘을 쓰지 못하지만 자기 나라의 백성을 억압하고 굴복시키는 데는 매우 막강한 힘을 발휘합니다. 이럴 때의 권력자는 자기 개인의 권력과 영달을 위해 나라와 백성을 팔아먹을 만큼 타락했기 때문에 그가 자행하는 악은 이루 말할 수 없을 정도입니다. 그럴수록 그의 권력에 빌붙어서 아부해가며 자기들의 배를 채우는 무리들이 있게 마련입니다. 그래서 백성은 도탄에 빠지고 사회는 혼란해집니다. 이때 약간의개혁이 시도되지만 결국 그 개혁은 성공하지 못하고 어떤 혁명이나 외세의 침역을 초래하게 되는 것입니다. 청나가가 망하기 직전 청나라는 영국이 인도에서 갖다 파는 아편에 온 나라가 썩어가고 있었고, 임칙서 같은 개혁자가 영국 상선들에게서 아편을 몰수하여 모두 태워 버리는 등 개혁을 시도하지만 결국 그것은 아편전쟁을 유발시켰고 전쟁에서 참패한 청나라의 군대는 이제 영국의 앞잡이로서 백성들을 진압하는 군대로 변합니다. 군대가 다른 나라와 전쟁을 하는 것은 그래도 희망을 가질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 군대가 자기 나라의 백성들과 싸우는 현상이 벌여졌을 때는 아무런 희망이나 기대를 가질 수 없습니다. 고려 말엽에는 정권을 유지하기 위하여 원나라를 등에 업은 고려왕실과 기씨 일가가 얼마나 부패했었습니까? 비록 공민왕이 개혁을 시도했지만 실패로 끝나고 원나라의 쇠망과 함께 고려도 망해 버렸습니다. 조선 말기의 현상은 여기 하박국 당시의 유댜와 비슷합니다. 밀려드는 제국주의 열강들의 이권 다툼 속에서 왕실이 러시아와 일본, 청나라 등에게 업혀 그 목숨을 부지하는 동안 나라 꼴은 말이 아니었습니다. 결국은 세력다툼에서 승리한 일본에게 나라가 완전히 먹혀 버리고 말았습니다.

멸망을 얼마 앞두지 않은 유다에 이러한 말기적 현상이 벌어진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유다에서는 이것이 정치적이고 도덕적인 차원에서만 거론될 성질의 것이 아니었습니다. 이러한 정치적 부패와 도덕적 타락은 곧바로 하나님의 율법을 파괴하는 행위로서 하나님께 반역하는 것이며 하나님의 이름이 더럽혀지는 것을 의미했습니다. 그래서 우리의 선지자는 이렇게도 쓰라린 심정으로 절규하고 있는 것입니다.

III. 오늘 우리의 현실

하박국의 외침은 지금으로부터 2600여년 전의 옛날 이야기가 결코 아닙니다. 살아 역사하시는 하나님의 말씀으로서 우리는 이 말씀으로 오늘 우리의 현실을 판단하고 지침을 얻을 수 있습니다. 우리나라의 현대사를 보면 마치 수레바퀴가 돌아가듯이 똑같은 일이 반복되어 일어났습니다. 그것은 한결같이 악한 정권들에 의해 자행된 간악과 패역이었습니다. 그리고 대부분의 사람들이 반복해서 그 악한 정권의 시녀 노릇을 했습니다. 가장 두드러진 충성을 바친 것이 교육이었습니다. 박정희 정권이 하루아침에 무너지고 모든 교과서에서 유신과업을 찬양하는 내용이 삭제될 때, 학교의 선생님들은 부끄러워서 더 이상 교단에 설 수 없다며 깊은 참회의 모습을 보여 주었습니다. 그러나 불과 몇 달만에 그들은 과거와 똑같이 제5공화국의 찬란한 업적을 앵무새처럼 노래하더니 지금은 5공 비리를 성토하는 데 열을 올리고 있습니다. 국가의 백년대계라는 교육이 이처럼 정권의 유지수단으로 사용되고 있다는 게 얼마나 한심스러운지 모르겠습니다. 그래도 지금은 양심있는 선생님들이 권력의 시녀가 되기를 거부하고 그래서 탄압받고 있다는 것이 오히려 고무적이라고 생각됩니다. 그런데 어떤 학부모들은 자녀들을 의식화시킨다고 교사를 처벌해 주기를 요구하는 시위를 벌이기도 하는 모양입니다. 개혁을 반대하는 사람들이 내세우는 논리는 안정이라는 것입니다. 안정이 절대적으로 필요한 것은 사실입니다. 그러나 그 사람들이 안정 자체를 좋아해서 안정을 바라는 것은 아닙니다. 그들은 지금 누리고 있는 지위와 가지고 있는 것들이 그대로 유지되기를 바랄 뿐입니다. 그래서 안정을 바라는 사람들은 거의가 가진 자들입니다. 그러나 가지지 못한 자들은 절대로 그런 의미에서의 안정을 바라지 않습니다. 오히려 혁명을 원합니다. 프랑스 대혁명이 일어났을 때 창밖으로시위군중을 바라보던 그 유명한 앙리와네뜨 왕비가 시녀에게 혁명이 도대체 무엇이냐고 물었습니다. 그러자 그 시녀는 '내가 왕비가 되고 당신이 내 시녀가 되는 것입니다'라고 대답했다는 일화가 있습니다. 가진 자들은 결코 자기들의 이익을 포기하려 하지 않기 때문에 개혁이라는 것이 쉽게 이루어지지 않습니다. 우리가 종교개혁이라는 말을 사용하지만 종교혁명이라는 말이 더 맞는 것 같습니다. 만일 종교혁명이 아니라 정말 종교개혁이 시행되었더라면 지금 카톨릭과 개신교가 이렇게 나뉘어 있는 비극은 초래하지 않았을 것입니다.

또 역대 독재정권에 크게 기여한 것이 바로 교회입니다. '한국교회는 아름다운 것을 보고 아름답다고 말할 줄은 알았으나 악한 것을 보고 악하다고 말할 줄은 몰랐다'고 누군가가 말했습니다. 예레미야 6장 14절에 보면 '그들이 내 백성의 상처를 심상히 교쳐주며 말하기를 평강하다 평강하다 하나 평강이 없도다'라고 말합니다. 이것이 거짓 선지자들의 특징입니다. 과거에 한국교회는 평강의 메시지를 선포하면서 그들의 악에 눈감고 지내왔습니다. 여기의 하박국 선지자와는 얼마나 대조적입니까?

6.25 이후 우리나라에 일어난 가장 큰 사건은 5.18입니다. 물론 6.25를 체험하고 공산당에게 짓밟힌 경험이 있는 전쟁세대는 공산당이라면 이가 갈리겠지만 전후세대가 체험한 5.18에서는 민중의 원수가 공산당이 아니라 군사독재정권이었습니다. 그래서 그들에게는 더 이상 반공논리가 먹혀들어가지 않습니다. 가진 자의 안정논리와 가지지 못한 자의 개혁논리의 대립, 전쟁세대의 반공논리와 전후세대의 반독재논리의 대립 속에서 우리는 교회는 너무나 쉽게 안정논리와 반공논리의 편에 서고 말았습니다. 하박국 선지자의 고민과 부르짖음을 찾아볼 수 없었습니다. 저는 9년 전 5월 대학 2학년생의 눈으로 광주에서 저질러진 그 참극을 보아야 했습니다. 한 사람의 권력장악을 위해서 이 나라의 군대가 자기 백성에게 총부리를 겨누었고 한 사람 때문에 많은 사람이 죽어야 했습니다. 그러나 그것이 전부가 아닙니다. 9년의 세월이 지난 지금 그 문제가 조금도 해결되지 못하고 있다는 현실은 그 사건보다 더 악한 것입니다. 우리는 지금 그런 세상을 살고 있습니다.

왜 우리는 간악과 패역을 보면서 고민하지 못합니까? 겁탈과 강포가 우리 앞에 있는데도 왜 우리는 하나님께 부르짖지 않고 있습니까? 변론과 분쟁이 일어날 때에 우리는 하나님의 공의보다 자신의 이익을 보호하기 위하여 어느 한 편에 가담하지는 않습니까?

사랑하는 청년 여러분! 여러분의 가슴은 뜨겁지요? 그렇다면 그 뜨거운 가슴을 하나님을 향하여 쏟아 놓으십시오. 왜 이 땅에서 하나님의 공의가 짓밟히는 것을 보고만 계십니까? '어찌하여 악인이 의인을 에워싸도록 내버려 두십니까? 나로 하여금 간악과 패역을 보지 않도록 하옵소서.' 여러분이 이와 같이 하나님께 항변하는 선지자의 마음을 갖는다면 우리나라의 장래와 한국교회의 앞날은 밝을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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