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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분노를 쉬게 하는 유순한 대답 (단 02:1-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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분노를 쉬게 하는 유순한 대답 (단 2:1-16)

힘이나 권력을 가지고 있다는 것은 그것을 마음대로 써도 된다는 뜻이 아닙니다. 예를 들어 힘이 좀 세다고 다른 아이들을 막 때리는 아이가 있다고 생각해 봅시다. 그러면 이 아이는 사회의 악으로 존재하게 됩니다. 똑같이 힘있는 다른 아이가 있습니다. 그런데 이 아이는 자신의 힘을 어떻게 쓰는가 하면 힘없는 아이들을 불량배들로부터 보호해 주는가 하면, 힘들고 궂은일도 도맡아서 합니다. 그러면 이 아이는 많은 사람들에게 기쁨과 행복을 선물하는 사람이 될 것입니다. 힘이라는 것은 이처럼 다른 사람들에게 고통을 주거나 또는 기쁨을 줄 수 있는 도구가 될 수 있습니다.

그런데 힘을 가진 사람이 첫 번째 아이처럼 힘을 쓰기가 쉬울까요? 아니면 두 번째 아이처럼 쓰는 경우가 많을까요? 두말할 것도 없이 힘은 나쁜 방향으로 사용되는 수가 훨씬 많지요. 그것이 바로 우리 인간의 딜레마요 고민입니다. 그래서 그것을 방지하고 좋은 방향으로 사용되도록 유도하기 위해서 많은 노력과 장치들이 시행되고 있습니다. 엊그제 노벨평화상 수상자로 지미 카터 전 미국대통령이 선정되었습니다. 현재 세계에서 가장 권위있고 명예로운 상이 바로 노벨평화상입니다. 세계의 평화를 위해서 노력하고 공헌한 사람에게 주는 상이지요. 우리 주님께서도 화평케 하는 자는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일컬음을 받을 것이라는 복을 약속하셨습니다. 그런데 우스운 것은 지금 자기가 가지고 있는 힘으로 이라크를 침략해서 전쟁 일으킬 궁리만 하고 있는 조지 부시 미국대통령도 이번에 노벨평화상 후보로 신청을 했었다고 하더군요.

이런 노벨평화상도 힘이 나쁘게 사용되는 것을 방지하기 위한 장치입니다. 만약 조지 부시가 노벨평화상을 받으려면 국제사회에서 또라이, 또는 깡패 소리를 들을 만한 행동을 해서는 안되겠지요. 한반도에서 모처럼 남북관계가 부드러워지고 있는데 거기다 재를 뿌리는 것이 세계평화를 위한 일입니까? 분쟁이 있으면 없애려고 애를 써야 할 것인데, 오히려 전쟁을 벌일 궁리만 하면서 무슨 노벨평화상을 꿈이나 꿀 수 있겠어요? 없는 분쟁도 만들어서 무기나 팔아먹으려는 수작이 다른 사람들에게 기쁨을 주는 것입니까, 고통을 주는 것입니까? 지미 카터처럼 집없는 사람 집지어주러 쫓아다니고, 여기저기 분쟁이 있는 곳마다 뛰어다니면서 화해시키고 하는 데 자기 힘을 써야 노벨평화상 근처에라도 갈 수 있을 것입니다.

만약 이라크의 사담 후세인이 세계에서 가장 영예로운 상인 노벨평화상을 받고 싶은 마음이 있다면 당장이라도 무기사찰을 받아들이고 테러양성소도 폐지하고 다른 나라들과 사이좋게 지내도록 해야겠지요. 사담 후세인의 원조가 누구인가 하면 바로 이 바벨론의 느부갓네살입니다. 사담 후세인이야말로 느부갓네살의 영광을 되찾겠다면서 이란과 한판 전쟁을 벌였었죠? 이란은 페르시아의 후예 아닙니까? 또 땅덩어리가 돈덩어리인 쿠웨이트도 삼켰다가 걸프전에서 그만 죽도록 얻어맞고 말았습니다.

하여튼 이 느부갓네살이라는 인물은 인간이 권력을 얼마나 악하게 사용할 수 있는지를 시범적으로 보여주고 있네요. 자기가 꾸고 잊어버린 꿈을 말하고 해석하라는 명령을 내리면서, 그렇게 하지 못하면 모조리 죽여버리겠다는 그런 억지가 세상에 어디 있습니까? 박사들이 하는 말은 왕께서 그 꿈을 말씀해 주시면 해석해 드리겠다는 것입니다. 맞는 말이지요? 그런데 이 왕은 자기 꿈이 무엇이었는지 몰라요. 그러니까 말이 막히고 말발에서 딸리는 것입니다. 그러면 변명을 하거나 사과를 하거나 취소를 하거나 해야 할 텐데, 그건 체면도 상하고 또 한번 뱉은 말을 주워담기가 그렇게 쉽지가 않거든요. 그렇게 말이 막히니까 뭐라고 하는가 하면 모조리 죽여버리겠다는 거예요.

사실은 이것이 느부갓네살만의 행동양식이 아니지요? 우리가 흔히 볼 수 있는 우리의 익숙한 습관이기도 합니다. 말이 막히면 목소리가 높아지지요? 말로 못 당할 것 같으면 주먹이 나가잖아요? 부모님들이 아이들과 의견충돌이 있을 때 말이나 논리에서 딸리면 뭐라고 합니까? “이것이 어른한테 대들고 있어. 너 혼날래?” 정당한 게임에서 밀리면 비정상적인 방법을 동원해서라도 만회를 하려는 것이 우리가 흔히 볼 수 있는 인간의 습성입니다. 가령 대통령 후보를 뽑는 경선을 했는데 떨어졌단 말이지요. 그러면 그 경선 무효다, 음모가 있었다, 이런 식으로 판을 깨려고 하는 사람들 있잖아요? 만약 이런 것을 방지하기 위한 장치들, 즉 법과 도덕적 강요, 사회적 압력, 이런 것들이 없으면 그야말로 난장판이 될 것입니다. 우리나라 국회를 보면 정말 난장판이지요? 그 이유는 그 사람들이 법을 만드는 사람들이라서 법이 그들을 통제하고 제약을 가하는 역할을 못하기 때문입니다. 국회의원에게는 면책특권이란 게 있어서 무슨 말을 해도 법에 저촉되지 않습니다. 이처럼 어떤 통제와 견제가 없는 권력은 악하게 사용될 확률이 엄청 높아집니다. 절대적인 권력은 절대적으로 부패한다는 말이 그래서 생긴 것입니다.

우리가 느부갓네살의 행동에 대해서는 지난번에도 많이 살펴보았으니까, 이번에는 그 느부갓네살의 기가 막힌 억지에 느닷없이 떼죽음을 당하게 된 바벨론 최고 두뇌집단의 억울한 사정을 한번 생각해 봅시다. 이 사람들은 권력의 최측근에서 그 권력의 단물을 잘 빨아먹으며 살던 사람들입니다. 또 최고의 지성인이라는 자부심도 대단했겠지요. 바벨론이라는 대제국이 자기들의 머리에서 나온 아이디어로 굴러간다는 보람도 있었을 것입니다. 바벨론 제국이 건재하고 느부갓네살의 왕권이 흔들리지 않는 한 자신들의 미래도 안전할 것입니다. 그런데 이게 웬 날벼락입니까? 왕이 자기가 꾸고 잊어버린 꿈을 재생시키라니 도대체 뭘 어쩌자는 것입니까? ‘배 째라!’ 할 수도 없는 일이고...

본문에서 그 정확한 배경은 찾아볼 수 없지만, 왕이 이런 요구까지 하게 된 것은 이 박사들이 자초한 일일 수도 있습니다. 이들은 자기들의 능력으로 무엇이든지 알 수 있고 해결할 수 있는 것처럼 행세해 왔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웬만큼 할 줄 아는 것과 모든 것을 다 할 줄 안다는 것은 전혀 다른 일입니다. 이 박사들은 웬만큼 할 줄 아는 능력으로 모든 것을 할 줄 아는 행세를 했단 말이지요. 호랑이 없는 굴에서 여우가 대장노릇을 합니다. 토끼, 개구리, 참새, 다 모아놓고 하는 말이 자기가 세상에서 힘이 가장 세고, 호랑이도 얼마든지 이길 수 있다고 합니다. 올 테면 오라고 큰소리를 치지요. 그러다가 정작 호랑이가 나타나면 참 입장이 난처하겠네요. 자기들이 모두 아는 문제만 있을 때는 모르는 것이 없다고 큰소리를 탕탕 칠 수 있었습니다. 어떤 어려운 문제라도 얼마든지 가져오라고 말이죠. 그런데 정말 모르는 문제가 나타났습니다. 이럴 때 어떻게 해야 합니까?

그렇다고 박사들이 그렇게 호락호락하지만은 않습니다. 왕은 꿈을 잊어버렸다고 하는데 박사들은 꿈을 얘기하라고 합니다. 이것이 박사들의 유일한 무기입니다. 왕의 약점은 꿈을 잊어버렸다는 사실입니다. 그래서 그 약점을 찌릅니다. 꿈을 말씀만 해 주십시오. 그러면 해석해 드리겠습니다. 흥, 네가 꿈을 잊어버렸지? 잊어버렸으면서 뭘 잘했다고 큰소리야? 한번 말해봐, 말해보라니까. 그래야 해석을 하든지 말든지 할 거 아냐? 맞는 말이긴 하지만, 왕은 그렇지 않아도 미칠 지경인데 약점을 자꾸 공격당하니까 더 화가 치솟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는 말이 “너희가 지금 시간을 끌려고 하는 거지? 이 사기꾼들아!” 이것도 일리가 있는 말입니다. 박사들이 지금 당장은 왕의 꿈을 섣불리 말해 줄 수가 없습니다. 왜냐하면 왕이 잊어버리기는 했지만 박사들이 꿈 이야기를 지어내서 해주면 그것이 자기가 꾼 꿈인지 아닌지를 알 수가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시간을 끌어가지고 왕이 그 꿈을 완전히 잊어버린 후에는 무슨 이야기라도 꾸며내서 그것이 왕의 꿈이었다고 주장할 수도 있을 것입니다. 그래서 왕은 박사들을 사기꾼으로 몰아서 모조리 죽여버리겠다고 나오는 것입니다.

자, 일이 여기까지 이르게 되니까 이 박사들이 마침내 자신들의 한계를 인정하고 자기들은 할 수 없다고 한발 물러섭니다. 육체와 함께 거하지 아니하는 신들 외에는 그런 것을 알 수가 없다는 것입니다. 여기서 육체와 함께 거하지 않는 신이라는 표현은 고대의 철학적 사고입니다. 영혼은 맑고 지혜로운데, 그 영혼이 육체에 갇혀 있기 때문에 어두워서 지혜를 깨닫지 못하고 욕망에 사로잡히고, 그것이 인간의 불행과 비극인 반면에, 신들은 육체가 없기 때문에 그런 신적인 능력을 손상없이 가지고 있다는 그런 의미지요. 고대철학의 신과 인간에 대한 이해는 황당무계한 것이라고 할 수 있겠군요.

그러니까 그런 신들이나 알 수 있는 일을 어떻게 우리한테 알아내라는 말입니까, 그런 얘기입니다. 그러면서도 이 박사들은 그 와중에도 왕에 대한 공격을 늦추지 않고 있습니다. 왕이 물으신 것은 희한한 일입니다. 말하자면 말도 안 되는 얘기라는 것이지요. 그리고 지금까지 훌륭한 왕들 중에는 그런 말도 안 되는 요구를 한 사람은 없었다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결국은 일이 이렇게 된 것은 자기들 책임이 아니라 왕의 책임이고 잘못이라는 얘기지요. 바보짓 하지 말라는 얘기지요. 네가 왕이라고 별 억지를 다 쓰는데, 사실 이 나라를 움직이는 게 우리의 지혜 아니고 뭐야? 우리가 없으면 뭐 이 나라가 굴러갈 수나 있을 것 같아? 이런 박사들의 주장이 틀린 것은 아닙니다. 다 맞는 소리지요. 그러나 이미 이성을 잃어버린 왕에게는 이렇게 조목조목 사리에 맞는 말이 귀에 들어올 리가 없고 오히려 자기를 몰아세우는 것으로 들려 더 분노를 촉발시킬 뿐입니다. 그래서 마침내 이들을 모조리 멸하라는 명령이 떨어지고 말았습니다.

그런데 바벨론의 지성인 그룹에는 다니엘과 그 친구들도 포함되어 있습니다. 그러나 여러분, 염려하지 마십시오. 주인공은 영화가 끝날 때까지 절대로 죽지 않습니다. 명령을 받은 시위대장관이 다니엘도 죽이려고 잡으러 왔네요. 영문도 모르고 있던 다니엘이 그 까닭을 묻습니다. 도대체 무슨 일이오? 사건의 진상을 파악한 다니엘이 급히 왕에게 들어가서 시간을 좀 주시면 반드시 그 꿈과 해석을 왕께 알려드리겠다고 했습니다. 그리고 허락을 받아냈습니다. 참 이상한 일이지요? 다른 박사들에게는 시간을 끌려고 한다면서 분노하고 죽이려고 했던 왕이, 시간을 달라는 다니엘의 요청에는 순순히 응하고 허락했다는 것입니다. 사실 다니엘은 시위대장관의 칼날에 진즉 목이 떨어졌어야 할 것입니다. 그런데 여기 뭐라고 나오는가 하면 다니엘이 명철하고 슬기로운 말로 왕의 장관에게 물었다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왕에게도 역시 명철하고 슬기로운 말로 요청을 했을 것입니다.

괜히 바른 소리 한다고 그렇지 않아도 미칠 지경인 왕의 마음을 더 미치게 한 박사들이 그렇게 지혜로웠던 것 같지는 않군요. 반면에 일단 위기를 모면하고 진정시킨 다니엘의 지혜가 두드러지지 않습니까? 잠언에서는 “유순한 대답은 분노를 쉬게 하여도 과격한 말은 노를 격동하느니라”(잠 15:1)고 말씀합니다. 박사들과 다니엘의 경우를 꼭 말하고 있는 것 같군요.

부모들이 논리에서 밀려 말발이 떨어지면 부모의 권위가 손상되는 줄 알고 화를 내고 큰소리를 칠 때, 자녀들이 자기 말이 맞다고 덤비다가는 무슨 일을 당하던가요? 하여튼 무슨 사건이 터지겠지요? 물론 부모들도 말발이 딸리면 큰소리를 칠 것이 아니라 승복을 하거나 사과를 해야지요. 우리가 살아가는 터전은 바로 인간관계입니다. 부모와의 관계, 자녀와의 관계, 부부간의 관계, 교사와 학생의 관계, 친구관계, 형제관계, 직장에서의 동료관계, 이러한 다양한 인간관계들이 얽히고 설켜서 우리 사회를 구성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이 관계가 깨뜨려지면 그 사회가 무너지게 됩니다. 부부관계나 부모와 자녀의 관계가 깨뜨려지면 가정이 무너지게 돼요. 목사와 교인들의 관계가 깨뜨려지면 교회가 무너지겠지요. 어떤 관계든 그 관계를 깨뜨릴 수 있는 위기는 늘 발생할 수 있습니다. 그런 위기 속에서 좋은 인간관계를 유지하고 지켜나가는 것은 매우 중요한 기술입니다. 명색이 최고의 지성인 집단이었던 이 박사들은 이 가장 기본적인 기술도 터득하지 못한 지혜롭지 못한 사람들이 되고 말았습니다. 반면에 나이도 어리고 경험도 적지만 왕의 분노를 가라앉히고 많은 목숨을 구한 다니엘은 얼마나 지혜로운 사람이었습니까?

여기서 우리는 다니엘 개인의 지혜를 칭송할 수도 있겠지만, 이 다니엘서의 기조에 흐르는 사상에 근거하면 이 다니엘의 지혜야말로 하나님으로부터 온 것임을 금방 짐작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을 경외하고 신뢰하는 사람은 이처럼 인간관계에서도 성공하고 지혜로운 사람입니다. 하나님을 잘 믿고 하나님과 좋은 관계를 가지고 있다고 하는 사람들이 가족과 친구들, 또 직장이나 교회에서 다른 사람들과 원만한 인간관계를 가지고 있지 못하다면 그 믿음은 가짜일 확률이 많습니다. 물론 믿음을 지키느라 불의와 타협하지 않고 악한 세력들로부터 따돌림을 당하는 경우도 있겠지만, 저는 지금 그런 상황을 얘기하는 것이 아닙니다. 지혜롭지 못한 처사나 상대방의 사정을 고려하지 못하는 이기적인 속성과 습관으로 우리가 서로에게 상처를 주고받으며 서로의 신뢰가 깨뜨려지고 인간관계가 금이 가는 일들이 우리의 가정이나 교회나 주변에서 없어야 할 것입니다. 우리가 교회에서 그리스도인으로서 배우고 연습해야 할 일 가운데 하나가 바로 이것입니다.

저는 우리 교회가 이 지역의 한인사회에서 참으로 형제가 연합하여 동거하는 아름다운 사랑의 공동체가 되기를 바라는 마음을 가지고 이 교회를 시작했습니다. 오늘 우리는 이 다니엘의 이야기에서 말 한마디가 얼마나 큰 힘을 발휘할 수 있는지를 보았습니다. 우리 속담에도 말 한마디로 천냥 빚을 갚는다는 말이 있지 않습니까? 저는 우선 우리의 언어생활이 달라지기를 바랍니다. 다른 사람의 분노를 촉발하는 과격한 말이 아니라 그 분노를 가라앉히는 유순한 언어습관을 갖게 되기를 바랍니다. 그렇게 되기 위해서는 먼저 상대방을 이해하고 또 사랑하는 마음이 있어야 할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우리가 성숙한 그리스도인으로 변해가는 과정이 아닙니까? 물론 쉽지 않은 일이지만 성령 하나님께서 우리 마음을 다스리시고 주관하셔서 이처럼 아름답게 변화되어가는 여러분의 삶이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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