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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의인의 길 고독한 길 (단 03:8-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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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인의 길 고독한 길 (단 3:8-12)

느부갓네살은 고대 근동에서 천하를 제패하고 거대한 통일국가를 이루었습니다. 그렇지 않아도 어떻게 하면 자신의 위대한 업적과 이 통일국가를 지속시킬 수 있을까 궁리하던 끝에 느부갓네살은 말도 많고 탈도 많았던 그 꿈에서 힌트를 얻어 거대한 금신상을 만들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전국 각지의 고관대작들과 지방의 권력자들을 다 불러모았습니다. 교통과 통신이 발달하지 못했던 그 당시에 그렇게 큰 나라를 다스린다는 것은 보통 일이 아닙니다. 왕의 권력이 즉각적으로 미치지 않는 먼 변방에서 무슨 일이 일어날지 늘 걱정이 되지요. 그래서 온 나라의 벼슬아치들과 중간 권력자들, 그리고 언제 독립운동을 일으킬지 모르는 정복민들을 확실하게 장악하는 것이 왕으로서는 대단히 중요한 일입니다. 한편 저 멀리 시골에서 힘깨나 쓴다고 하던 사람도 서울의 번화한 거리와 눈부신 발전상을 보면 기가 죽어 꿀리지 않을 수 없습니다. 우리가 타우랑가에서 과수원과 바다만 보고 살다가 모처럼 오클랜드에 가서 스카이타워를 올려다보면 눈이 핑핑 돌아가지 않던가요? 시골사람이 서울에 가면 아무래도 촌티가 나고 기가 죽게 마련입니다.

느부갓네살이 노리는 게 바로 이것입니다. 시골에서 힘 좀 있다고 큰소리치는 녀석들, 또 어쩌면 독립운동의 기회만 노리고 있을 정복민들, 그리고 서울에 사는 온 백성을 다 불러모아놓고, 그들이 보지도 못했고 상상조차 할 수 없는 거대한 금신상을 짠! 보여주는 것입니다. 그것으로 게임은 끝나는 것이지요. 그렇게 대단한 왕의 위엄과 권세를 보여주는데 왕에게 복종하지 않을 만큼 주제파악을 못하는 사람이 어디 있겠어요? 그나마 왕의 금신상에 절하기를 거부하는 자가 있다면, 즉 딴 맘을 먹거나 왕에게 굴복하고 충성하기를 거절하는 자가 있다면 즉시 저 극렬히 타는 풀무불에 던져버리겠다고 위협까지 하는데 말이지요. 이 정도면 느부갓네살의 완벽한 성공입니다. 누가 감히 이 왕의 권위와 세력 앞에 무릎을 꿇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느부갓네살은 왕의 지위를 지나서 신과 같은 자리를 차지하게 되었습니다.

이렇게 해서 왕권을 강화하고 나라를 확실히 장악해서 그 나라가 영원토록 유지시키겠다는 발상은 좋았는지 모르지만, 지나치면 모자라는 것만 못하다는 말처럼 느부갓네살의 행위는 또 하나의 참담한 실패를 태동하고 있었습니다. 그것은 바벨론 제국 내의 모든 백성과 세력을 굴복시키는 것을 지나서 하늘의 하나님에게 도전하는 행위였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을 대적하고 훼방하는 일이 일어날 때 하나님의 백성들이 취해야 할 태도는 다른 것이 아닙니다. 거기에 대항하고 진리를 선포하는 것이지요. 악이 횡행할 때는 분연히 맞서서 싸워야 합니다. 기승을 부리는 악 앞에 굴복한다거나 못 본 척 눈을 감는다거나, 또는 적당히 타협해서 공존한다거나 하는 것은 의인의 행동양식이 아닙니다. 비록 느부갓네살이 다스리는 세상의 왕국에 살고 있지만, 하나님이 다스리시는 하늘의 왕국에 속한 자들이 거기에 있었습니다. 이들에게 세상의 왕국에 대한 의무를 요구했다면 아무런 탈이 없었을 것입니다. 이들은 느부갓네살 왕에게 충성하는 신하들이었습니다. 주님의 말씀처럼 우리가 가이사의 것은 가이사에게 바칠 수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것을 가이사에게 바칠 수는 결코 없습니다. 사드락과 메삭과 아벳느고는 하나님께 드려야 할 경배를 느부갓네살에게 바칠 수가 없었던 것입니다. 여기 등장하는 이 의인들이 하나님께 도전하는 느부갓네살의 절대권력 앞에서 어떻게 행동했는지 보세요.

이들은 바벨론에서 상당한 지위에 올랐고 왕의 명령에 복종하는 신하들이었지만, 그 금신상에게 절하라는 명령에는 결코 따를 수 없는 사람들이었습니다. 사실 이 세 사람뿐만은 아니지요. 이들보다 더 높은 지위에 있었던 다니엘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그런데 여기서는 이상하게 다니엘이 나타나지 않고 있군요. 멀리 출장을 갔는지, 아파서 병원에 입원을 했는지, 아니면 왕이 이 행사를 주관하는 동안 궁중에 남아서 사무를 관장하고 있었는지 모르겠지만, 어쨌든 이 금신상에게 절해야 하는 현장에는 없었던 것으로 보입니다.

이 사건의 현장에서 다니엘이 나타나지 않고 사드락, 메삭, 아벳느고만 나온다는 것은 이 세 사람의 믿음과 절개가 어떤 것인지를 알 수 있는 좋은 기회입니다. 왕의 진미와 포도주를 거부하고 채소와 물만 먹겠다고 했던 결단에서도 중심인물은 다니엘이었고, 왕의 잊어버린 꿈을 알아내고 해석한 일에서도 다니엘이 주인공이었습니다. 지금까지 이 세 사람은 늘 다니엘과 같은 길을 걸어왔지만 다니엘의 빛에 가려 그들의 순도 높은 믿음을 제대로 평가받을 수 있는 기회가 없었다고 할 수도 있겠네요. 그런데 마침내 이 사건에서 우리는 그들의 참모습을 볼 수 있게 되었습니다. 즉 지금까지 이들의 믿음의 행위가 그저 다니엘을 모방하고 따라간 것이었는지, 아니면 이들 역시 다니엘에 못지않은 참된 믿음을 소유한 사람들이었는지 판가름이 나게 될 것입니다.

믿음이 좋은 부모님 아래서 자란 아이들은 믿음이 좋은 것처럼 보입니다. 성경지식도 많고 교회활동에서도 열심이지요. 그런데 그런 아이들 중에서 철이 들고 머리가 커지면서 정말 어처구니없이 믿음을 떠나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그러니까 지금까지는 자신의 믿음으로 살아온 것이 아니라 부모의 믿음에 업혀서 살아온 것이지요. 믿음은 결코 다른 사람이 대신 해줄 수 없습니다. 부모가 자녀를 위해 대신 믿음을 가져줄 수 없고 아내가 남편을 위해 대신 믿음을 가져줄 수 없습니다. 물론 부모가 자녀들을 잘 가르치고 믿음으로 인도해야겠지요. 믿음 없는 남편을 위해서 아내가 늘 기도하면서 권면해야겠지요. 그러나 결국은 자기 자신이 스스로 성숙한 믿음의 분량에 이르게 되지 않으면 아무런 소용이 없는 것입니다. 여기에 학생들이 많이 있는데, 지금까지는 여러분이 부모님의 믿음에 기대어 살아왔는지 모릅니다. 그러나 이제부터는 자신의 믿음과 결단으로 하나님을 섬기고 올바른 선택을 할 수 있어야 합니다. 여러분의 믿음을 보여주세요. 당신의 능력을 보여주세요. 다니엘이라는 믿음 좋고 훌륭한 친구와 늘 행동을 같이 함으로써 충성되고 믿음 있는 사람이라는 평가를 받는 것은 사실 별 의미가 없습니다. 다니엘 때문이 아니라 바로 자신의 결단과 자신의 순종으로 믿음을 입증해야 진짜라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사드락과 메삭과 아벳느고가 결단코 금신상에 절할 수 없었던 이유는 그것이 곧 하나님을 배반하고 거짓 신인 우상을 섬기는 행위가 되기 때문입니다. 이것은 십계명에서 ‘나 외에는 다른 신들을 네게 있게 하지 말라’는 첫 번째 계명과 ‘아무 형상이든지 만들지 말고 거기 절하지 말라’는 두 번째 계명을 모두 위반하는 것이 될 것입니다. 따라서 이들이 하나님에 대한 참된 믿음을 가진 의인들이라면 어떤 일이 있어도 이 느부갓네살의 금신상에게 절할 수가 없는 것입니다.

그래서 할 수만 있으면 이 곤란한 자리에 참석하지 않는 것이 좋겠지요. 병이 들었다고 핑계를 대든지 아주 급한 용무가 있어서 참석할 수 없게 된다면 좋겠는데 그게 통할 수 없었는지 그 자리에 참석하게 되었습니다. 이들로서는 정말 난처한 일일 뿐만 아니라 억울하기도 한 일입니다. 도저히 받아들일 수 없는 요구로 충성의 여부를 가리겠다고 하니 기가 막힐 일이지요. 어쩔 수 없이 정말 본의 아니게 왕의 명령을 거역하지 않을 수 없는 상황입니다. 이들이 왕에게 반역을 하거나 충성을 거부할 의사가 있었던 것은 전혀 아니지요. 가만 놔뒀더라면 왕께 충성하고 갈고 닦은 지식과 출중한 지혜로 왕을 잘 보필할 사람들입니다. 느부갓네살은 자기 신하들에게 충성을 다짐받는다는 거창한 행사를 치루면서 오히려 이 성실하고 충실한 신하들을 잃을 짓만 하고 있는 것입니다. 정말 착잡한 심정으로 이 세 사람은 그 행사장에 나왔을 것입니다. 왕과 결별하고, 자신들의 벼슬도 포기하고, 더 나아가 붙잡혀 저 활활 타오르는 불꽃 속으로 던져지게 되는 순간이 째깍째깍 다가오고 있습니다. 그리고 마침내 장대한 오케스트라 연주가 시작되었습니다. 바로 그곳에 꼿꼿이 서 있는 세 사람이 있었습니다. 이들은 군중 속에 섞여 있을 때는 아무런 표시도 나지 않았습니다. 그러다가 모든 사람들이 오케스트라에 맞춰 절을 할 때 꼿꼿이 서 있는 이 사람들의 존재는 너무나 명확하게 드러나게 되었습니다. 우리가 평소에는 세상 사람들 속에 섞여서 전혀 드러나지 않고 구별도 되지 않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참과 거짓이 나뉠 때, 빛과 어둠이 나뉘는 순간, 의로운 결단이 요구되는 그곳에서 우리의 존재가 명백하게 드러날 것입니다.

다행스럽게 모든 사람들이 엎드려 절하느라 이 세 사람이 꼿꼿이 서서 절하지 않은 것을 보지 못했더라면 얼마나 좋을까요? 그렇게만 된다면 아무 일 없던 것처럼 이 세 사람도 다시 자기 자리로 돌아가 열심히 왕과 나라를 위해 일하게 될 수 있을 것입니다. 정말 그랬으면 좋겠습니다. 그렇다면 이들은 하나님을 배반하지 않아서 좋고, 시끄러운 문제를 만들지 않아서 좋고, 아무 일 없던 것처럼 잠정적인 평화가 유지될 것입니다. 세상을 조용히 살고 싶은 사람은 이런 식으로 문제를 해결하는 것을 좋아할지도 모르겠습니다. 꼭 문제를 만들고 요란스럽게 떠들어야 하는 것은 아닙니다. 그러나 조용히 해결될 수 있는 문제가 있고, 또 그렇지 않은 상황이 있을 수 있겠지요.

여기서 이들이 절하지 않은 것을 발견하고 왕에게 고발을 하는 사람들은 어떤 갈대아 사람들이라고 나옵니다. 아브라함의 원래 고향이 갈대아 우르 아닙니까? 갈대아는 큰 지역이고 우르는 갈대아에 있는 도시쯤 되겠군요. 이 바벨론 제국을 건설한 사람들이 바로 갈대아 족속입니다. 그러니까 바벨론 제국의 본줄기가 되겠습니다. 그런데 여기서 갈대아 사람들이라는 말은 2장에서 언급된 갈대아 술사들이라는 말과 같은 단어입니다. 즉 일반적인 갈대아 족속을 지칭하는 것이 아니라 왕의 주변에서 주요한 직책을 도맡았던 부류를 의미하는 말입니다. 이 갈대아 술사들은 사실 왕의 분노에 의해 다 죽을 뻔했던 사람들인데, 다니엘과 이 세 사람이 왕의 꿈을 알아내는 바람에 살았던 사람들이지요. 그렇지만 이 갈대아 사람들의 눈에는 이들이 목숨을 구해준 은인이라기보다 자기들이 차지해야 할 고위직을 차지하고 있는 눈엣가시처럼 보였습니다. 그러다가 이 사람들이 금신상에 절하지 않는 것을 발견하고는 얼씨구나 하고 왕에게 달려와 고발하고 있는 것입니다. 은혜를 원수로 갚고 생명을 죽음으로 갚는 사람들이군요.

그런데 이들이 누구를 고발했다고 하는가 하면 유다 사람들을 고발했다고 했어요. 사드락과 메삭과 아벳느고만 유다에서 잡혀온 유다사람이 아니지요. 많은 유다의 젊은이들이 왕실 장학생으로 발탁되어 고위관직에 진출했고, 또 많은 백성들이 거기에 있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들이 모두 금신상에 절하기를 거부한 것은 아니었습니다. 다른 유다 사람들 중에서도 절하지 않은 사람들이 있었는지는 우리가 알 수 없는 일이지만, 여기서 이 세 사람이 유다 사람으로 기록되었다는 것은 대단히 큰 의미가 있습니다. 즉 이 사건을 기록한 사람은 갈대아 사람과 유다 사람을 의도적으로 이렇게 대비시키고 있는 것입니다. 이 세상에는 하나님께 속한 의인들과 그 의인들을 미워하고 박해하는 세상에 속한 악인들이 있다는 것입니다. 갈대아 사람들이 끊임없이 유다 사람들을 참소하고 핍박하고 미워하고 죽여온 것이 오늘까지 이어지고 있는 기독교 역사입니다. 의인의 길이 험하고 어려운 이유가 바로 그것입니다. 마귀는 우는 사자와 같이 두루 다니며 삼킬 자를 찾고 있기 때문입니다(벧전 5:8).

모든 사람들이 절하는 순간에 꼿꼿이 서 있어야 한다는 것은 절대적인 고독과 완벽한 분리를 의미합니다. 그리고 스스로 위험 속으로 뛰어드는 일이기도 했습니다. 그러나 그 길이 참된 길이라면 수모와 위험을 무릅쓰고라도 가야 하는 것이 의인의 길입니다. 옳다고 생각되면 다른 사람 눈치를 살필 것이 아니라 행동으로 옮기는 것이 용기있는 일입니다. 다른 사람들로부터 따돌림을 당하고 손가락질을 받는다 해도 옳은 일을 결단하고 의를 실행하는 데는 주저함이 있어서는 안됩니다. 사드락과 메삭과 아벳느고는 쉽게 오를 수 없는 높은 지위를 포기해야 했습니다. 물론 더 소중한 목숨까지도 포기해야 했지요. 만약 이들이 남들 눈에 띄는 것이 두려워서, 바벨론의 상류층에서 이탈되는 것이 두려워서, 그리고 불속에 던져지는 것이 두려워서 의로운 행동을 주춤거렸거나 실행에 옮기지 못하고 땅바닥에 대충 주저앉는 시늉이라도 했다면 이들의 이름이 여기에 나오지도 않았을 것이고, 우리가 지금 이 사람들을 살펴볼 필요도 없을 것입니다.

우리는 지금 남의 얘기를 하는 것이 아닙니다. 물론 우리가 살아가면서 우리의 결단 여부에 따라 불속에 던져지게 될 일은 거의 일어나지 않을 것입니다. 아니, 일어나지 않기를 바랍니다. 모르지요, 혹시 여러분 가운데서 나중에 기독교에 대한 극단적인 박해가 시행되는 곳에 복음을 전하러 갔다가 그런 유사한 위험에 처하게 될 지도 모르는 일이니까요. 그러나 최소한 가까운 미래에 여기 타우랑가에서는 그런 일이 일어나지 않을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드락과 메삭과 아벳느고의 행동은 바로 오늘 우리의 삶 속에서 늘 재현되고 반복될 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우리에게도 손해와 손가락질을 감수하면서라도 옳은 결정을 해야 할 상황이 얼마든지 일어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어제 날짜 Bay of Plenty Times에 타우랑가의 기독교 인구가 빠른 속도로 감소하고 있다는 특집기사가 실렸더군요. 많은 사람들이 하나님을 선택하기보다 다른 뭔가를 찾아 떠난다는 것입니다. 타우랑가에 느부갓네살같은 하나님의 대적자는 없지만, 하나님을 포기하도록 유혹하고 우리의 마음을 빼앗는 것들이 그만큼 많다는 증거가 되겠지요. 이처럼 하나님에게 등을 돌리는 추세와 환경 속에서 우리가 하나님께 더 충실하고 믿음을 지킨다는 것은 그만큼 스스로 고립되고 불이익을 감수해야 한다는 것을 의미할 수 있습니다. 우리도 사드락과 메삭과 아벳느고가 걸었던 그 길을 걸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염려하지 마십시오. 두려워하지 마십시오. 그 길이 얼마나 아름다운 길이었습니까? 얼마나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행동이었습니까? 왕의 절대권력 앞에서도 담대히 믿음을 지키고 의연하게 하나님을 선택했던 사드락과 메삭과 아벳느고의 모습이 오늘 우리의 삶 속에 살아 있다면 하나님께서 우리를 얼마나 기뻐하실까요? 오늘 우리가 그 의인의 길에 참여할 수 있다면 참으로 영광스럽고 감사한 일이 아닌가요? 사드락과 메삭과 아벳느고는 수천년 전 바벨론에서 살았던 사람들이 아닙니다. 바로 오늘 여러분의 마음 속에 살아 있습니다. 여러분의 행동과 선택 속에서 사드락과 메삭과 아벳느고의 모습을 보여주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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