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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눈에 콩깍지가 씌웠을 때 (단 03:13-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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눈에 콩깍지가 씌웠을 때 (단 3:13-18)

눈에 콩깍지 씌웠다는 말이 있어요. 콩깍지를 눈에 덮어씌우면 콩이 보일까요? 콩만 보이겠네요. 다른 사람들은 하늘도 보고 꽃도 보고 바다도 보는데, 이 사람은 다른 사람들 눈에 보이는 하늘이나 꽃은 전혀 보이지 않고 무조건 그 콩깍지에 붙어있는 콩만 보이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 사람에게는 콩이라는 소우주(小宇宙)가 형성됩니다. 그러니까 콩이라는 자신의 소우주 밖의 어떠한 가치나 사실은 존재하지 않게 되고, 오로지 콩만 보고 콩만 알고 콩의 지배만 받게 됩니다.

눈에 콩깍지가 씌워서 좋은 일도 있어요. 결혼하신 분들은 대부분 콩깍지 덕분 아닙니까? 눈에 콩깍지가 씌우지 않았더라면 상대방의 허물도 보이고 마음에 안 드는 모습도 많이 보여서 결혼을 못 했을지도 모르죠. 그러나 일반적으로 콩깍지가 씌웠을 때 일어나는 일들은 심각한 실수가 될 것입니다. (그렇다고 결혼한 것이 심각한 실수였다는 것은 아닙니다만...)

대통령 선거가 한 달도 남지 않았는데요, 대통령 후보 유세하는 데 가보면 열기가 대단합니다. 물론 아주 인기가 없는 후보 같으면 유세장도 썰렁해서 자기가 대통령에 당선될 것으로 생각한다는 것이 불가능하겠지요. 그러나 소위 유력 후보들의 유세장은 지지자들의 성원이 하늘을 찌릅니다. 그 현장에서는 마치 대통령이 다 된 것 같아요. 그래서 다른 후보는 어떻게 하고 있는지, 또 지지할 후보를 아직 결정하지 않은 국민들은 얼마나 되는지 보이지 않게 됩니다. 보이는 것은 유세장에서의 그 뜨거운 지지세력 뿐이지요. 그래서 누가 뭐라고 해도 곧이들리지 않습니다. 그리고 무슨 일이 있어도 자신이 대통령에 당선될 것이라고 믿게 됩니다. 이게 바로 콩깍지가 씌운 현상입니다.

오늘 콩깍지가 씌운 주인공은 느부갓네살이 되겠습니다. 거대한 금신상을 세워놓고 전국 각지에서 내로라하는 사람들을 다 불러모았습니다. 그리고 각종 악기로 구성된 장대한 오케스트라에 맞춰 모두가 그 신상에 절하고 있는 그 현장에서 느부갓네살은 완전히 눈에 콩깍지가 씌워버린 것입니다. 그의 눈에는 다른 나라도 없고, 다른 신도 없습니다. 오로지 바벨론 제국의 영원한 미래만 있고, 신의 반열에서 숭배되는 자신의 무한한 능력과 권세만 있을 뿐입니다. 자신의 말 한 마디에 세상이 바뀝니다. 그가 가리키는 손가락을 따라 만인이 움직입니다. 얼마나 황홀한 느낌일까요?

그런데 사드락과 메삭과 아벳느고가 자신의 명령에 불복종하여 금신상에게 절하지 않았다는 보고가 들어왔습니다. 그 보고에 느부갓네살은 완전히 기분이 잡쳐버렸습니다. 잔치 기분이 날아갈 판입니다. 온 세상을 지배하고 불가능이 없는 자신의 권위와 자존심에 심한 상처를 입었기 때문이지요. 그래서 당장 그 놈들을 잡아오라고 명령을 내립니다.

그러나 느부갓네살은 그렇게 끌려온 사드락과 메삭과 아벳느고를 당장 처형시키지는 않습니다. 지금이라도 마음을 바꿔 다음 번 오케스트라의 음악에 맞춰 절을 하면 없던 일로 하겠다고 회유합니다. 마지막으로 한 번 더 기회를 주는 것입니다. 어쩌면 느부갓네살도 이 세 사람을 꽤 사랑하고 그들의 재능을 아꼈는지 모르겠습니다. 그들이 자신의 명령을 거역했다는 것이 믿어지지 않은지 다시 한번 확인합니다. 그리고 설령 그것이 사실이라 하더라도 다시 한번 기회를 주어서 이 아까운 인재들을 잃지 않으려고 하는 것처럼 보입니다. 또 일말의 이탈세력이라도 다시 돌이켜 소위 국민통합을 이루려는 노력처럼 보이기도 합니다. 만약 그런 이탈세력을 돌이키게 되면 왕의 능력과 권위가 더욱 빛을 발하게 될 것입니다.

그러나 이 마지막으로 주는 기회라는 것이 정말 사람을 죽이는 술책입니다. 굳게 마음을 정하고 실행에 옮기려던 사람도 마지막으로 다시 한번 생각하게 되면 마음이 흔들리게 되는 수가 많아요. 같이 죽기로 맹세하고 일을 꾸민 동지들 중에서 배신자가 나오는 것도 처음부터 배신할 생각을 가졌던 것이 아니라 마지막 순간에 마음이 흔들려서 넘어가기 때문입니다.

이것은 사탄이 우리를 유혹하는 매우 효과적인 방법이기도 합니다. 느부갓네살의 질문을 보세요. “너희가 내 신을 섬기지 않고 그 신상에게 절하지 않았다고 하는데, 짐짓 그리하였느냐?” 일부러 그랬단 말이냐? 아니면 음악에 박자를 못 맞춰서 절하는 타이밍을 놓친 것이냐? 설마 일부러 그러지는 않았겠지? 잠깐 딴 생각을 하다가 타이밍을 놓쳤지? 우리나라 음악이 너희 나라 음악과 달라서 박자 맞추기가 힘들었지? 그러니까 이번에는 마음속에 준비를 잘 하고 있다가 실수하지 말고 맞춰서 절을 하란 말이다. 그런데 만약에 혹시라도 너희가 알면서도 일부러 절하지 않았다면 저 극렬히 타는 풀무불에 던져진다는 것 알고 있지?

자, 금신상에게 절을 하지 않으면 불속에 던져진다는 것을 잘 알면서도, 차라리 죽을지언정 절하지 않겠다는 결단은 정말 힘들고 고통스러운 것입니다. 이 세 사람은 그 어려운 결단의 순간을 지나왔습니다. 그런데 지금 느부갓네살은 이 세 사람에게 그 고통스러운 과정과 순간을 다시 되풀이하게 하는 것입니다. 처음에는 독한 마음을 먹고 결정을 했던 사람도 다시 그 과정을 되풀이하게 되면 마음이 약해져서 포기하는 일이 있을 수 있단 말이지요.

제가 오래 전에 보았던 코미디 한 토막입니다. 너무 인상적이어서 10년이 훨씬 지났어도 기억을 하고 있어요. 김형곤이 나오는 ‘회장님 우리 회장님’이라는 코너가 있었는데, 거기서 엄용수는 그 비열하고 막무가내인 회장님 옆에서 늘 알랑방귀를 뀌며 아부를 해서 전무인가 하는 자리를 유지하고 생존해 갑니다. 그러다가 한번은 도무지 그 회장님이 못마땅해서 한번 받아버렸습니다. 회의 도중 회장님의 비인간적인 처사에 “회장님은 인간도 아닙니다!” 이렇게 소리를 질러버린 것입니다. 이 정도면 아예 이판사판 끝장이 난 거지요. 그런데 너무나도 당돌한 이 말이 아직도 이해가 되지 않은 회장님은 오히려 어리둥절해서 다시 묻습니다. “내가 인간도 아니라고? 그럼 내가 뭐야?” 당장 불벼락이 떨어질 줄 알았는데 아까의 실수를 만회할 수 있는 기회가 온 것입니다. 얼른 정신을 차린 엄용수는 다시 평소의 모습으로 돌아가 이렇게 회장님을 추켜세웁니다. “네, 회장님은 인간이 아니라 신이십니다.” 그러니까 회장님은 기분이 좋아서 이렇게 말하지요. “뭘 이 사람아. 허허, 역시 자네밖에 없어.”

우리가 하나님께 헌신하고 믿음을 지키기 위해 애쓸 때, 사탄은 반드시 우리 마음에 찾아와 회유를 시도합니다. 꼭 그렇게까지 해야 하나? 너 정말 그렇게 할 거야? 내일부터 새벽기도 나간다구? 정말 좋은 생각이야. 그런데 새벽기도에 열심히 나오는 사람들 보니까 상당히 교만하더라니까. 새벽기도 열심히 하면 그렇게 되나? 십일조를 하겠다구? 와, 정말 잘 생각했어. 당장 생활이 약간 쪼들리긴 하겠지만 말이야. 그런데 십일조 낼 그 돈이면 딸내미 자전거를 사줄 수 있는데... 언제부터 사달라고 했는데 못 사줬잖아? 이번에는 자전거 사주고 십일조는 다음 달부터 하면 안 될까? 다시 한번 잘 생각해 봐... 이렇게 사소한 것들에도 사탄의 회유에 우리의 마음이 약해지기 쉬워요. 그런데 하물며 목숨이 달린 문제, 또는 전 재산이 달린 문제 같으면 다시 한번 생각해 볼 기회라는 것이 얼마나 쉽게 우리의 믿음과 행동을 좌우할 수 있겠어요?

그런데 여기서 느부갓네살이 아주 큰 실수를 하나 저지르고 말았습니다. “너희가 만일 절하지 아니하면 즉시 너희를 극렬히 타는 풀무 가운데 던져 넣을 것이니 능히 너희를 내 손에서 건져낼 신이 어떤 신이겠느냐?” 이렇게 해서 느부갓네살은 공개적으로 여호와 하나님께 결투 신청을 한 것입니다. 다니엘의 하나님, 사드락과 메삭과 아벳느고가 섬기는 신 여호와가 자신의 잃어버린 꿈을 되찾고 해석까지 해 주었던 것을 잘 알고 있는 느부갓네살입니다. 그러나 그 여호와라 할지라도 지금 자기 손에서 이들의 목숨을 구해낼 수는 없을 것이라는 말이지요. 명령만 내리면 이 세 사람은 당장 불속으로 던져질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 여호와가 옛날에는 전쟁에 능했고 지금은 꿈을 해석하는 데 탁월한지 모르지만, 최소한 이 순간만큼은 느부갓네살 자신의 권세와 힘이 훨씬 크다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지금 당장 여호와가 자신의 입에 반창고를 발라 말을 못하게 한다거나 저렇게 활활 타오르는 불길이 순식간에 꺼져버린다는 것은 일어나지 않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온 백성이 자기가 만든 금신상에게 절하고 있는 이 현실이라는 콩깍지가 느부갓네살의 눈에 씌워서 다른 것은 보이지도 않고 인정하지도 못하게 된 것입니다. 이렇게 되면 하나님께서 어쩔 수 없이 느부갓네살의 결투신청에 응하셔야 하겠네요.

이 사건에서 무엇보다도 중요한 테마는 물론 사드락과 메삭과 아벳느고의 순도높은 믿음과 용기있는 행동입니다. 믿음과 행동은 동전의 양면과도 같습니다. 믿음은 있는데 행동이 뒤따르지 않는다면, 그 믿음은 가짜입니다. 행동은 하는데 믿음에 근거한 것이 아니라면, 그 행동은 아무런 의미가 없지요. 이들의 대답은 명확합니다. “우리가 이 일에 대하여 왕에게 대답할 필요가 없나이다.” 왕의 회유를 단칼에 거부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이들의 믿음을 선언합니다. 왕의 신을 섬기지도 않고 절하지도 않겠다고 합니다. 그리고 자기들이 섬기는 하나님을 대신해서 느부갓네살의 결투신청에 대답합니다. 왕이 그들을 불속에 던진다 해도 더 능력이 많으신 하나님이 불속에서 건져내실 거라고 주장합니다. 또 설령 하나님이 그들을 불속에서 구원하지 않으신다 해도 왕의 금신상에게 절할 수 없다고 말합니다.

여기서 만일 누부갓네살이 자신의 권력과 위세라는 콩깍지에 씌우지 않았더라면 이 세 사람의 말을 귀담아 들었을지도 모릅니다. 지금까지 이들의 말이 틀린 적이 없었고, 또 여호와의 능력과 실체를 경험한 적도 있었으니까요. 그러나 지금 느부갓네살에게 여호와는 자신의 영화와 권위에 딴죽을 거는 정복민들의 오기 정도로밖에 보이지 않습니다. 사드락과 메삭과 아벳느고의 위대한 믿음은 정신나간 철부지들의 치기어린 실수로밖에 생각되지 않습니다. 그러나 과연 그랬을까요? 느부갓네살은 절대적인 확신을 가지고 있을지 모르지만, 이 책을 기록한 필자의 입장에서 보면 느부갓네살이야말로 콩깍지가 눈에 씌워 똥과 황금을 구별하지 못하고 있는 어리석은 인간의 표본일 뿐입니다.

우리가 인생을 살아가면서 자기 확신을 갖는다는 것은 매우 중요한 일입니다. 매사에 자신감이 없고 우유부단한 사람과 확신에 찬 사람 가운데 누가 더 성공적인 삶을 살 수 있을 것 같습니까? 예를 들어 같은 사업을 시작하면서도 이번 사업이 잘 될지 망할지 걱정하면서 하는 사람과 분명히 잘 될 거라는 확신과 잘 할 수 있다는 자신감에 넘치는 사람 가운데 누가 사업에 성공할 확률이 더 많겠어요? 우리 그리스도인들에게는 참된 믿음을 갖는다는 것이 비슷한 얘기가 되겠습니다. 지금이라도 내가 죽는다거나 세상의 종말이 온다면 영광스러운 하늘나라에 들어가 영원한 삶을 살게 된다는 확신을 가진 사람과 글쎄 하늘나라라는 것이 있는지 없는지, 죽으면 사후세계라는 것이 있는지 없는지 별로 관심도 없고 믿어지지도 않는 사람 가운데서 누가 담대하고 자신있는 그리스도인의 모습으로 살 수 있을 것 같습니까? 사드락과 메삭과 아벳느고의 담대한 행동을 가능하게 했던 것이 바로 그런 믿음 아닙니까?

그런데 자기 확신이라고 다 같은 것이 아니고 다 좋은 것이 아니란 말이지요. 느부갓네살의 자기 확신, 그것은 어떤 것이었습니까? 그것은 건전하고 발전적인 확신이 아니라 거짓정보와 판단착오에 의해 형성된 콩깍지일 뿐이었습니다. 우리가 때때로 자기 확신이라고 가지고 있는 믿음이 콩깍지일 경우는 없을까요? 어떤 사람은 자신이 무척 착한 사람이라고 생각할 수 있습니다. 법 없이도 살 사람이라고 말이죠. 그러나 자신이 믿고 있는 것과 상관없이 얼마든지 다른 사람들에게 피해와 상처를 주는 사람일 수 있습니다. 수십 년 신앙생활을 하면서 자신이야말로 거룩한 성도의 표본이라고 확신하는 분들이 있을지 모르지만, 사실은 교만과 독선으로 교회 안에서는 암적인 존재가 되어 있고, 교회 밖에서는 믿음이라는 구실로 양보도 할 줄 모르고 자기만 아는 이기적이고 꽉 막힌 사람으로 치부되는 사람들이 많이 있더란 말입니다. 자기는 교회에서 열심히 봉사하고 헌신적이라고 생각할지 모르겠지만, 사실은 사사건건 감 놔라 배 놔라 간섭해서 자기 뜻대로 되지 않으면 잠도 안 오고, 여기저기 약방의 감초처럼 끼어들어 주인공 행세만 하려고 하는 분에 넘치는 사람들도 많더라는 말입니다.

이런 콩깍지, 정말 대책이 없습니다. 그리고 또 하나의 문제는 이런 콩깍지를 스스로 벗는다는 것이 거의 불가능하다는 것입니다. 주님 말씀처럼 다른 사람의 눈에 있는 작은 티끌은 쉽게 보이지만 자기 눈 속의 커다란 통나무는 보이지 않기 때문입니다. 성경말씀을 읽다가 성령의 감화로 콩깍지가 벗겨진다면 얼마나 좋겠습니까? 콩깍지 벗으라고 이런 설교도 하는 것인데, 설교를 듣고 콩깍지를 벗어던지게 된다면 얼마나 다행스러운 일입니까? 저는 저 자신에게도 편견과 착각이라는 콩깍지가 씌워 있는 것을 종종 봅니다. 그것을 볼 수 있다면 다행이지요. 문제는 제가 알지도 못하고 인정하지도 않는 커다란 콩깍지가 있을 거란 사실입니다.

오늘 우리에게는 어떤 콩깍지가 씌워서 하나님을 섬기고 이웃을 사랑하는 일에 장애가 되고 있는지 깨닫고 그것을 벗어버릴 수 있도록 성령께서 우리 마음을 감동하시고 고쳐주시기를 바랍니다. 아나니아가 기도했을 때 사울의 눈에서 비늘 같은 것이 벗겨지면서 그의 마음을 덮고 있던 영적 어두움의 콩깍지가 벗겨지고 메시야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발견해서 그를 위해 인생을 바친 변화가 일어났듯이, 오늘 이 말씀을 통해서 우리의 눈과 마음을 덮고 있는 콩깍지이든 비늘이든 다 벗겨지고 정말 겸손하고 순전한 믿음을 가진 하나님의 자녀로 변화되는 은혜가 오늘 우리 모두에게 임하시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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