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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손해 보는 장사꾼이 돼 볼까? (단 03:16-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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손해 보는 장사꾼이 돼 볼까? (단 3:16-23)

3대 거짓말 가운데 장사꾼이 밑지고 판다고 하는 말이 들어갑니다. 물론 어쩌다가 재고처리를 하거나 긴급히 자금을 마련하기 위해서, 또는 소비자들의 관심을 끌기 위한 깜짝 세일 같은 이벤트 등으로 일시적인 밑지고 파는 상행위가 있을 수 있겠지요. 그러나 이것 역시 장기적인 시각으로 보면 더 많은 이윤을 남기기 위한 상술일 뿐입니다. 결국 장사꾼은 절대로 밑지고 팔 수가 없습니다. 밑지고 판다는 것은 장사를 하는 목적에 위배되는 행위이기 때문입니다. 즉, 장사꾼이 밑지고 판다는 것은 사회적인 통념과 합의에 부합하지 않는 행위라고 할 수 있겠습니다. 그러니 장사꾼이 아무리 밑지고 판다고 선전을 해도 믿을 사람이 없는 것입니다.

그런데 여기 밑지고 파는 장사가 있습니다. 바로 사드락과 메삭과 아벳느고입니다. 느부갓네살은 바벨론 제국의 모든 역량을 총동원한 자리에서 거대한 금신상의 낙성식을 거행합니다. 그리고 사드락과 메삭과 아벳느고에게 거기 절하라고 합니다. 만약 절하지 않으면 저 활활 타오르는 풀무 속에 던져버리겠다고 위협합니다. 그러나 사드락과 메삭과 아벳느고는 느부갓네살의 회유와 협박을 단칼에 거부해버립니다. 왜냐하면 왕이 그들을 불 속에 던진다 해도 그들이 섬기는 하나님이 그들을 불 속에서 건져내실 것이기 때문입니다.

자, 여기까지는 전혀 손해보는 장사가 아니지요? 아무리 왕이 불 속에 던진다 해도 하나님이 거기서 건져내 주신다는데 왕에게 굴복할 사람이 어디 있겠습니까? 하나님이 축복해 주신다는데 하나님 믿지 않을 사람이 어디 있겠어요? 하는 일마다 성공하고 자녀의 축복, 사업의 축복, 물질의 축복, 있는 축복 없는 축복 다 내려주신다는데 열심히 기도원 쫓아다니며 안수기도 받고 헌금내고 하지 않을 사람 어디 있겠어요?

오늘날 많은 기독교인들은 손해보지 않는 장사로 하나님을 믿고 있습니다. 그래서 축복을 유난히 강조하는 교회에 사람들이 몰려듭니다. 또 사람들이 그렇게 몰려들기 때문에 교회에서는 바람직하지 않은 줄 알면서도 축복이라는 공수표를 남발하게 됩니다. 반면에 희생을 가르치고 양보를 요구하는 목소리는 찾아보기 어렵습니다. 왜냐하면 그런 곳에는 찾아오는 사람이 없기 때문이지요. 손해보는 장사 하겠다는 사람이 없기 때문입니다.

만약 왕이 이 세 사람을 불 속에 던졌는데, 하나님이 즉시 이 사람들을 구원해 주신다면 이것은 엄청나게 남는 장사가 될 것입니다. 그러나 이들은 하나님이 그들을 구원해 주실 것이기 때문에 그것을 믿고 왕의 명령에 따르지 않겠다고 하는 것이 아닙니다. 설령 하나님이 그렇게 구원해 주시지 않는다 할지라고 왕의 명령에 따라 금신상에게 절하는 것은 할 수 없다고 분명히 잘라 말하고 있지 않습니까? “그리 아니하실지라도 왕이여 우리가 왕의 신들을 섬기지도 아니하고 왕의 세우신 금 신상에게 절하지도 아니할 줄을 아옵소서”(18절). 그리 아니하신다는 것은 이들이 불 속에서 그대로 바베큐가 된다는 뜻입니다. 이들이 하나님을 배반하지 않고 금신상에게 끝내 절하지 않았는데도 하나님이 그들을 불 속에서 건져주시지 않는다면, 이것은 손해보는 정도가 아니라 완전히 망해버리는 장사가 되겠군요. 그러나 이 세 사람은 하나님이 불 속에서라도 건져내실 것이기 때문에, 즉 그것이 남는 장사이기 때문에 금신상에게 절하지 않겠다는 것이 아니라, 절하지 않는 것이 옳은 일이기 때문에 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설령 그렇게 불 속에 타죽는 한이 있어도 못하겠다는 것입니다. 금신상에게 절하지 않는 것은 불에 타죽는 것보다 훨씬 가치있는 일이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왜 예수를 믿습니까? 예수를 믿으면 하나님이 축복해 주시기 때문입니까? 그렇다면 하나님이 축복을 안 해주시면 예수를 믿을 필요도 없는 것입니까? 아니지요. 설령 우리가 쫄딱 망하고 거지가 된다 해도 예수를 믿어야 합니다. 예수를 믿는다는 것은 눈에 보이는 축복 같은 것에 비교할 수 없는 훨씬 중요하고 가치있는 일이기 때문입니다.

욥은 하나님이 자랑하실 만큼 ‘순전하고 정직하여 하나님을 경외하며 악에서 떠난 사람’(욥 1:8)이었습니다. 그런데 그것을 아주 못마땅하게 생각하는 놈이 있었습니다. 바로 사탄이죠. 이 사탄이 와서 시비를 겁니다. ‘뭐, 욥이란 놈이 괜히 하나님을 경외하는 줄 아십니까? 천만의 말씀입니다. 그게 엄청 남는 장사니까 그러는 거 아니냐구요? 동방에서 가장 재산도 많겠다, 세력도 막강하겠다, 자녀들도 다 예쁘고 똑똑하고... 보세요, 하나님이 얼마나 퍼주셨습니까? 그러니 하나님 경외한다고 하지 않을 수 있습니까? 욥이란 놈이 하나님 경외하는 것은 엄청 남는 장사란 말입니다. 지금이라도 하나님이 그에게 주셨던 것들을 빼앗아 보세요. 당장 하나님을 욕하고 배반할 것입니다. 글쎄 손해보는 장사 할 놈이 아니라니까요.’

그 말을 듣고 하나님의 마음이 흔들렸을까요? 욥이 하나님을 경외했던 것만큼 하나님 역시 욥을 신뢰하고 계셨습니다. 하나님의 신뢰를 받는다는 것처럼 기쁜 일이 어디 있을까요? 우리의 믿음이 하나님의 인정을 받는다면 얼마나 행복한 일입니까? 우리가 손해보는 장사는 못할 정도의 믿음을 가지고 있으면서 하나님의 인정과 신뢰를 기대한다는 것은 주제를 너무나 모르는 행동이 되겠습니다만...

욥을 사랑하시고 신뢰하셨던 하나님은 사탄과 내기를 하셨습니다. 사탄은 얼씨구나 하고 내려가서 욥의 잘나고 똑똑한 자녀들을 모조리 죽이고 모든 재산을 한 순간에 날려버렸습니다. 욥은 졸지에 알거지가 된 것입니다. 이제 사탄은 욥의 입에서 나올 말만 기다리고 있습니다. 그런데 무슨 말이 나왔을까요? “주신 자도 여호와시요 취하신 자도 여호와시오니 여호와의 이름이 찬송을 받으실찌니이다”(욥 1:21). 사탄이 기절을 했겠지요?

욥이 말하고 있는 것처럼, 하나님을 경외한다는 것은 하나님이 재산을 많이 주신 것이나 다시 빼앗아 가시는 것과 아무런 상관도 없는 독립적인 가치인 것입니다. 이것을 축복이라는 부수적인 가치로부터 독립시킬 줄 아는 것이 참된 믿음인 거예요. 욥이 그랬던 것처럼 말이지요. 우리는 여기서 실패하는 수가 많습니다. 하나님을 경외하는 것과 가시적인 축복을 인과관계로 묶어두려는 어떠한 시도도 사실은 바람직하지 못한 것입니다. 어떤 분들은 이것을 자신의 경험에 근거해서 매우 자랑스럽게 주장하기도 합니다만, 사실은 수준이 낮은 믿음일 뿐입니다.

내기에서 완전히 묵사발이 된 사탄은 다시 억지를 씁니다. 협상에서 억지를 쓰는 사람은 자신의 주장에 도덕적 정당성이 결여되었거나 궁지에 몰려 초조감이 나타난 결과지요. 이번에 대통령 후보 단일화 협상하는 것을 보니까 그게 잘 나타났더군요. 그렇게 되면 상대방은 도리가 없습니다. 설득을 해서 될 일이 아니죠. 판을 깨버릴 게 아니라면 어쩔 수 없이 손해를 보더라도 양보하는 수밖에 없습니다. 미운 놈은 꿀밤을 한 대 줘야 하는데 어쩔 수 없이 떡을 하나 더 줘야겠네요. 떡 하나 더 얻었다고 좋아할 게 아니죠. 사실은 그게 미운 놈이라는 증명서가 되겠습니다.

하나님은 억지를 부리는 사탄에게 양보하셔서 목숨만은 해하지 않는 조건으로 욥을 사탄에게 내어주셨습니다. 그러니 욥의 꼴이 뭐가 되겠습니까? 머리끝에서 발바닥까지 악창이 나서 재 가운데 앉아 기와 조각을 가져다가 몸을 긁고 있습니다. 하나님을 경외하는 것이 손해보는 장사는 아니라고 생각했던 그의 아내가 그 꼴을 보고 기가 막혀 퍼붓습니다. “그래도 당신이 순전을 지키겠다는 거요? 하나님을 욕하고 죽어버리시오.” 그러자 욥이 대답합니다. “우리가 하나님께 복을 받았으면 재앙을 받는 것도 당연하지 않소?”

이건 망한 정도가 아니라 끌려가서 고문을 당하고 병신이 되어 폐인의 지경에까지 이르게 된 것입니다. 그래도 욥은 하나님을 경외한다는 독립적인 가치를 포기하지 않고 있습니다. 금신상에게 절하지 않는다는 것은 하나님이 불 속에서 건져주실 것인지의 여부와 아무런 상관이 없는 독립적인 가치였기 때문에 사드락과 메삭과 아벳느고는 그것을 끝까지 고수하고 있는 것입니다.

사실, 욥의 이야기나 사드락, 메삭, 아벳느고의 이야기에서 결국은 그들이 손해보지 않은 장사를 하게 된 것으로 결론이 납니다. 그 모진 시험을 견딘 후 욥은 더 예쁘고 똑똑한 자녀들을 다시 낳았고, 재산은 배나 생겼기 때문입니다. 고생은 했지만 남은 장사였습니다. 사드락과 메삭과 아벳느고는 마침내 풀무 속에 던져졌지만, 불 속에서 바베큐가 되는 대신 하나님과 함께 불놀이를 즐기며 춤을 추었습니다. 그리고 보란 듯이 불 속에서 걸어나왔습니다. 기가 질린 왕은 이 세 사람을 더욱 높은 자리로 승진을 시키지 않을 수가 없었겠죠. 역시 남는 장사였습니다.

그러나 모든 현장과 사건에서 남는 장사가 될 수는 없습니다. 오히려 그 진리와 가치를 포기하지 않는 대가로 손해보고 망하는 수가 훨씬 더 많습니다. 보헤미아의 종교개혁자 얀 후스가 불에 타 죽는 것을 하나님을 구해주지 않으셨습니다. 썩을 대로 썩은 중세 교회의 오류를 지적하고 참된 성경의 가르침으로 돌아가야 한다고 외쳤는데 하나님이 크게 상을 주신 것이 아니라 오히려 화형을 당하고 말았단 말입니다. 정직하게 세금 제대로 내고 투명하게 경영한다고 각광을 받던 몇몇 크리스찬 기업들이 혼탁한 기업풍토에서 견디지 못하고 결국 망하고 말더군요.

우리는 어떻던가요? 여러분이 원칙을 지키고 믿음에 따라 정직하고 성실하게 살아갈 때 항상 보상이 주어지던가요? 당연히 그래야 하고 또 그럴 때도 있지만, 그렇지 않을 때도 있습니다. 정직하고 깨끗한 선택을 하게 될 때, 오히려 양보를 해야 하고, 손해를 보고, 가난하게 살아야 하고, 불편을 겪게 되는 경우가 더 많지 않던가요? 그렇다고 해서 우리가 정직하고 깨끗한 길을 포기할 수 있습니까? 그럴 수는 없습니다. 왜냐하면 정직하다는 것이 많은 이익을 얻는 것보다 더 큰 가치이기 때문입니다. 성실하게 살아간다는 것은 많은 쾌락과 즐거움을 누리는 것보다 훨씬 더 중요하고 아름다운 일이기 때문입니다. 잠언 기자는 ‘적은 소득이 의를 겸하면 많은 소득이 불의를 겸한 것보다 낫다’(잠 16:8)고 설파합니다. 떡 하나 더 얻은 것이 미운 놈이라는 증명서가 되는 것처럼, 손해보고 양보한다는 것은 사랑하고 용서하는 더 고귀한 가치를 추구하는 사람들의 증명서일 수 있겠습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섬기는 일에서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가 뭔가 눈에 보이는 이익을 기대하면서 하나님을 믿는다는 것은 아직 성숙하지 못한 초보적인 믿음이라고밖에 할 수 없습니다. 하박국 선지자는 ‘비록 무화과나무가 무성치 못하며 포도나무에 열매가 없으며 감람나무에 소출이 없으며 밭에 식물이 없으며 우리에 양이 없으며 외양간에 소가 없을지라도 나는 여호와를 인하여 즐거워하며 나의 구원의 하나님을 인하여 기뻐하리로다’(합 3:17-19)라고 노래했습니다. 하나님 자신이 우리의 구원이 되시고 우리 기쁨의 근원이 되시는 것인데, 그 하나님이 축복해 주시지 않는다고 불평하고 떼를 쓰는 것은 마치 사탕 안 준다고 떼쓰고 우는 아이와 다를 것이 없는 행태인 것입니다. 물질적인 축복은 하나님이 주실 수도 있고 안 주실 수도 있습니다. 주시면 감사한 일이고, 안 주셔도 할 말이 없습니다. 욥의 고백처럼 주신 자도 하나님이요 취하시는 자도 하나님이시니, 우리가 해야 할 일은 그 하나님을 찬양하고 섬기는 일일 뿐입니다. 그 하나님이 우리의 구원이시고 우리의 생명이시기 때문입니다.

사드락과 메삭과 아벳느고가 그리 아니하실지라도 금신상에게 절하지 않겠다고 했던 믿음은 우리의 모든 일상생활 속에서 적용될 수 있습니다. 조금 늦더라도 새치기를 하지 않는다는 작은 행위 하나도 손해보는 장사를 하더라도 더 중요한 가치를 포기하지 않는다는 믿음의 한 표현입니다. 그렇다고 해서 저는 극단적인 원칙주의를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어떤 사람들은 원칙을 중시한다고 하면서 정말 사소한 원칙에 목이 매여 더 큰 원칙을 깨뜨리거나 다른 사람들에게 많은 불편을 초래하는 경우도 있습니다. 원칙의 의미보다 문구 자체에 집착하면 그런 결과가 나오게 됩니다. 우리의 일상생활에서는 합리와 상식이라는 허용치가 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얼마든지 꽉 막힌 융통성도 없는 사람이 되지 않으면서 원칙과 정도를 걷는 사람이 될 수 있습니다.

손해볼 줄 아는 사람, 양보할 줄 알고 눈앞의 이익에 급급하지 않는 사람, 괜찮은 사람이죠. 멋있는 사람입니다. 설령 하나님이 눈에 보이는 축복을 안 해 주신다 하더라도 그 하나님을 원망하거나 배반하지 않는 사람, 성숙한 믿음을 가진 사람입니다. 왜 하나님은 사드락과 메삭과 아벳느고는 불속에서 구해주셨으면서 얀 후스는 구해주지 않으셨을까요? 그럼 사드락과 메삭과 아벳느고는 남는 장사로 성공한 사람들이고, 얀 후스는 손해보는 장사로 실패한 사람입니까? 불속에서 살아나왔건 타죽었건, 물론 그것도 중요한 일이겠지만, 그것보다 훨씬 더 중요하고 본질적인 가치는 그들이 모두 하나님께 신실하고 믿음을 지켰다는 사실입니다. 그 본질적인 가치 앞에서 불속에서 살았다는 것이나 죽었다는 것은 부차적인 것에 불과하게 됩니다. 오늘 우리의 행동양식을 지배해야 할 또 하나의 원칙은 ‘그리 아니하실지라도’입니다. 그것은 손해보는 장사일지라도 원칙과 믿음을 지키겠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것이 참으로 승리하는 길이고 진정으로 남는 장사인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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