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그인

  • 목록
  • 아래로
  • 위로
  • 쓰기
  • 검색

설교 불 속으로 찾아오신 하나님 (단 03:24-30)

첨부 1



불 속으로 찾아오신 하나님 (단 3:24-30)

사드락과 메삭과 아벳느고는 꽁꽁 묶인 채 불속에 던져지고 말았습니다. 불이 얼마나 뜨거웠던지 이 사람들을 들어서 던진 힘센 군인들이 그만 타죽고 말았습니다. 그 정도의 불이라면 그 속에서는 즉시 재로 변해야 하겠지요. 왕과 갈대아 술사들, 그리고 거기 모인 모든 백성들은 숨을 죽이고 이 광경을 지켜보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갑자기 느부갓네이 벌떡 일어서서 외쳤습니다. '우리가 불속에 던진 것은 세 명 아니야?' '맞습니다.' '그런데 왜 네 명이 저 불 속에서 돌아다니고 있는 거냐?'

불속에 던졌으면 타죽어야지 어떻게 그 불속에서 걸어다닐 수가 있단 말입니까? 사람이 물속에 들어가서 걸어다닐 수도 있고 연기 속에서 걸어다닐 수도 있지만, 불속에서 걸어다닐 수는 없습니다. 작두를 타는 사람도 있고 별 희한한 마술을 하는 사람들도 있지만, 불속에서 걸어다니는 마술을 한다는 얘기는 들어보지 못했습니다. 바로 조금 전에 자기 명령에 따라 불속에 던져진 사드락과 메삭과 아벳느고가 활활 타오르는 풀무 속에서 걸어다니는 모습을 보게 된 느부갓네살의 놀라움을 어떻게 설명할 수 있을까요?

그런데 그 놀라움 속에 또 한 가지 이상한 일은 불 속에서 걸어다니는 것이 네 사람이라는 사실입니다. 사실은 그것이 이 놀라운 사건을 푸는 열쇠입니다. 느부갓네살은 놀라서 이렇게 외칩니다. '저 네 번째 사람의 모습은 신들의 아들과 같구나!' 바로 이 네 번째 사람이야말로 사드락과 메삭과 아벳느고로 하여금 불속에서 타죽지 않고 함께 불놀이를 즐길 수 있게 해 주고 있는 주인공인 것입니다. 느부갓네살이 말한 신들의 아들이라는 말은 신적인 존재를 의미하지요. 구약시대에는 이 네 번째 사람을 하나님이 보내신 천사로 해석하는 경향이 많았습니다. 그러다가 초대교회에서부터는 성자 하나님의 현현(顯現)으로 해석하기 시작했습니다. 구약성경에 제시되는 하나님의 모습 가운데 하나는 범죄한 인간이 그 얼굴을 보고 생존할 수 없는 분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여러 차례 하나님, 혹은 하나님의 대리인으로 여겨지는 분이 사람들에게 나타나십니다. 아브라함에게도 나타나셨고, 모세는 하나님과 대면하여 이야기를 나누었습니다. 기드온과 삼손의 부모에게도 하나님의 사자가 나타났습니다. 성자 하나님의 개념이 발전하지 못했던 구약에서는 당연히 천사로 해석을 할 수밖에 없었겠지요. 그러나 예수 그리스도로 성육신하신 성자 하나님을 경험한 신약시대 이후에는 구약시대에 인간에게 나타나신 하나님을 성자 하나님으로 자연스럽게 해석할 수 있는 길이 열린 것입니다.

어쨌든 하나님이 보내신 천사였든, 하나님 자신이 직접 그렇게 내려오셨든, 여기서 중요한 것은 하나님을 위해 불속에 던져진 사드락과 메삭과 아벳느고를 위해 하나님이 개입하셨고 거기에 찾아오셨다는 사실입니다.

우리는 종종 광야 한가운데 홀로 버려진 듯한 느낌을 받을 때가 있습니다. 아주 곤란한 지경에 처했거나 심한 고통을 당하고 있는데, 아무도 나서서 도와주거나 위로해 주는 사람도 없고, 설령 누군가가 동정심을 가지고 있을망정 도와줄 수 없는 경우입니다. 정말 막다른 골목으로 몰려왔습니다. 빠져나갈 구멍도 없고 문제를 해결할 방법도, 능력도 없습니다. 하나님마저도 우리를 잊으셨는지 버리셨는지 아무런 대답도 없으십니다.

이럴 때 우리가 하나님의 약속을 의지하고 그 하나님께 매달릴 수 있다는 것은 큰 위로와 힘이 될 것입니다. '너는 내게 부르짖으라. 내가 네게 응답하겠고 네가 알지 못하는 크고 비밀한 일을 네게 보이리라'(렘 33:3). 이것은 하나님의 계시를 전달했지만 오히려 매국노로 몰려서 인민재판을 받다시피 하고 감옥에 갇혀 있던 예레미야에게 임한 하나님의 말씀이었습니다. 하나님에게조차 버림받아 멸망하게 되어 낙심하고 두려워하고 있을 이스라엘에게 이사야를 통해서 주신 말씀 역시 위로와 용기를 북돋아주는 말씀이었습니다. '두려워 말라. 내가 너와 함께 함이니라. 놀라지 말라. 나는 네 하나님이 됨이니라. 내가 너를 굳세게 하리라. 참으로 너를 도와주리라. 참으로 나의 의로운 오른손으로 너를 붙들리라'(사 41:10). 여기 저기 다니면서 온갖 험한 일을 다 당했던 야곱은 '나의 환난 날에 내게 응답하시는 하나님'(창 35:3)이라고 고백합니다.

물론 우리가 당하는 환난에도 여러 가지가 있을 수 있습니다. 자기가 정말 잘못해서 거기에 합당한 징계를 받는 수도 있다는 것입니다. 베드로 사도는 이런 경우를 두고 '애매히 고난을 받아도 하나님을 생각함으로 슬픔을 참으면 이는 아름다우나 죄가 있어 매를 맞고 참으면 무슨 칭찬이 있으리요 오직 선을 행함으로 고난을 받고 참으면 이는 하나님 앞에 아름다우니라'(벧전 2:19-20)고 말씀합니다. 즉 자기가 잘못한 대가로 고난을 받으면서도 마치 의를 위하여 핍박을 받는 것처럼 착각하는 것은 아무런 유익이 없다는 말이지요. 자기 잘못으로 당하는 고통 속에서는 할 말이 없습니다. 그러나 의와 믿음을 지키느라 당하는 고통 속에서 우리는 하나님의 보호와 위로를 얻을 수 있는 정당한 명분이 있겠지요.

그렇다고 해서 '하나님, 내가 이렇게 의를 위해서 억울하게 핍박받고 있는데 왜 빨리 도와주지 않으십니까?' 하는 식으로 하나님의 보호를 당연한 듯이 요구한다는 것은 의를 위해 핍박받는다는 그 대의명분을 스스로 파괴하는 처사가 될 것입니다. 마찬가지로 자기 잘못으로 고난을 당한다고 해서 '아이고, 나는 할 말도 없어. 그냥 이렇게 당하고 죽겠습니다.' 하는 식으로 하나님의 도움을 구해서는 안 된다는 것은 결코 아닙니다. 의를 위해 핍박을 당하고 있든, 자기 잘못으로 고통을 당하고 있든, 우리는 하나님의 자비에 호소해서 도움을 요청할 수 있습니다. 예레미야에게 하신 말씀은 의를 위해 억울하게 고난을 당하고 있는 경우에 해당하고, 이사야를 통해서 주신 말씀은 자기 죄로 멸망한 사람들에게 해당되는 경우가 되겠습니다. 사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오셔서 십자가에 달리신 것은 억울한 의인들을 위해서가 아니라 비참하게 멸망해가는 죄인들을 위한 것이 아니었습니까? 어쨌든 우리가 고난을 당할 때 우리 곁에 하나님의 도우심의 손길이 임한다는 것은 우리가 붙잡고 의지해야 할 사실입니다.

사드락과 메삭과 아벳느고가 불속에 던져졌을 때 모든 사람들은 그것으로 끝이 났다고 생각했습니다. 요즘 유행하는 말로 '하늘이 두 쪽 나도' 이들이 살아날 가능성은 없는 것처럼 보였습니다. 그러나 이들이 그 불속에 떨어졌을 때 그곳에 하나님이 그들을 기다리고 계셨습니다. 하나님에 대한 충성을 포기하지 않은 대가로 활활 타오르는 풀무 속에 던져졌기 때문에, 그 풀무 속에서 그들이 만날 수 있는 분은 다름 아닌 하나님인 것입니다. 우리가 지난번에 종교개혁자 얀 후스 얘기를 했습니다만, 후스가 묶인 채 서 있던 발밑에서 불이 타오르기 시작했을 때, 그 불속에서 후스는 누구를 만났을까요? 저는 주저없이 그곳에 하나님이 계셨으리라고 믿습니다. 비록 그는 고통 속에서 그대로 타죽어야 했지만, 바로 그 자리에 하나님이 찾아오셨을 것입니다. 그리고 그것은 그에게 무엇보다도 큰 위로와 기쁨이 되었을 것입니다.

사드락과 메삭과 아벳느고가 불속에서 타죽지 않고 살아나온 것과 후스가 불에 타죽은 차이와는 상관없이, 그 불속에는 하나님이 계셨습니다. 왜냐하면 그들이 하나님을 위해서 선택한 곳이 바로 그 불속이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당연히 그 불속에서 그들을 만나주셨을 것입니다. 불속이라는 극단적인 상황에서, 즉 인간의 노력과 지혜가 전혀 작동될 수 없는 곳에서, 오직 하나님의 간섭하심만이 유효한 그곳에 하나님이 계십니다. 그것은 우리에게 가장 고통스러운 순간, 가장 어두운 순간이겠지만, 바로 그 순간에 하나님은 우리의 곁에 계신다는 사실입니다.

우리에게 잘 알려진 시입니다.

모래 위의 발자국

어떤 사람이 꿈을 꾸었습니다.
예수님과 함께 바닷가를 거니는 꿈이었는데,
바닷가 모래 위에는 두 사람의 발자국이 찍혀 있었습니다.
하나는 그 사람의 것이었고
또 하나는 예수님의 것이었습니다.
그 발자국은 그 사람이 지금까지 살아온 인생의 발자국이었는데,
나란히 찍혀있던 두 사람의 발자국이
어느 때는
한 사람의 발자국만 찍혀 있기도 했습니다.
그 때는 그 사람이 가장 비참하고 슬플 때였습니다.

그 사람이 예수님께 물었습니다.
'예수님, 제가 예수님을 따르기로 했을 때,
예수님은 저와 항상 같이 계시겠다고 약속하셨지요?
그런데 제가 가장 비참하고 슬플 때
왜 저 혼자만 버려두셨습니까?'

예수님이 대답했습니다.
'얘야, 나는 널 사랑했고 너를 떠난 적은 한번도 없었단다.
네가 슬플 때나
외로울 때나
고통 당할 때에도...
네가 본 한 사람의 발자국은 바로 내 발자국이란다.
네가 어려움을 당할 때에
내가 너를 등에 업고 걸었단다.'

하나님은 사랑하는 자녀들이 위험과 고통에 처해 있을 때 그대로 모르는 체 내버려두시지 않습니다. 문제는 불속이라도 들어갈 수 있는 우리의 믿음과 용기입니다. 사드락과 메삭과 아벳느고는 목숨을 포기하기로 하고 하나님께 지조를 지켰습니다. 그리고 불속에 던져졌습니다. 그들의 용기로 하나님의 살아계심을 증거하였고, 그토록 강퍅하던 느부갓네살을 굴복시킬 수 있었습니다. 그야말로 죽음으로 생명을 얻었고, 포기함으로 승리를 얻게 된 것입니다. 이들이 불속에서 걸어나왔을 때 머리카락 하나도 그슬리지 않았고 불에 탄 냄새도 없었습니다.

당장 느부갓네살은 자신의 패배와 실수를 인정하고 여호와 하나님을 높입니다. 그리고 전국에 조서를 내려 누구든지 여호와 하나님을 대적하거나 조롱하는 사람은 그 몸을 쪼개고 집을 거름터로 삼겠다고 합니다. 그런데 여기서 가만히 생각해 보면, 역시 제 버릇 개 못 준다는 말이 생각나는군요. 이 사건은 느부갓네살이 참으로 회개하고 여호와 하나님을 섬길 수 있는 좋은 기회입니다. 그러나 그는 끝내 여호와 섬기기를 거부합니다. 느부갓네살은 결코 여호와를 나의 하나님이라고 부르지 않습니다. 처음부터 마지막까지 사드락과 메삭과 아벳느고의 하나님일 뿐입니다. 그에게 있어서 여호와는 많은 신들 중에서 꽤나 능력이 있는 하나의 신에 불과할 뿐입니다. 오늘 대단한 능력을 보여준 여호와를 섬기고 따르는 사람들에게 약간의 선심을 베푸는 것으로 그동안 자신과 여호와 사이에 조성되었던 긴장관계가 해소되기를 바랄 뿐입니다. 그러나 그가 사용하고 있는 방법 역시 매우 악한 그의 평소의 습관일 뿐입니다. 여호와께 설만히 말하는 자는 몸을 쪼개고 집을 거름터로 삼겠다고 합니다. 자기 꿈을 알아내지 못하는 갈대아 술사들에게 했던 말과 똑같습니다. 이 악랄한 수법은 느부갓네살의 습관이었던 것처럼 보입니다. 그것이 여호와를 위하는 일입니까?

기독교 역사에서 이와 유사한 오류들이 많이 발생했습니다. 초대교회는 이교도들로부터 극심한 박해를 받으면서 생존하는 것이 급선무였습니다. 그러다가 기독교가 로마제국의 통치 이데올로기가 되면서 이제는 반대로 이교도들을 극심하게 박해하기 시작했습니다. 예수의 이름으로 수많은 이교도들이 무참하게 죽어갔습니다. 십자군운동은 또 어땠습니까? 이교도들로부터 성지 예루살렘을 탈환한다는 명분으로 시작된 이 끔찍한 전쟁에서 기독교의 본질과 신앙은 상실되고 말았습니다. 오로지 종교간의 증오와 복수만을 무제한으로 재생산하게 만들었을 뿐입니다. 19세기의 서구 제국주의자들은 선교사들을 앞세우고 정복민들의 문화와 종교를 파괴했습니다. 그렇게 해서라도 위협과 강제로 예수를 믿게 하는 것이 복음화라고 생각했는지 모르지만, 그렇게 무늬만 기독교인이 된 사람들 중에서 누가 사드락과 메삭과 아벳느고와 같은 믿음을 가질 수 있겠습니까?

하나님은 그의 자녀들이 고통 속에서 신음하고 어려움에 봉착했을 때 구원하시는 하나님이십니다. 하나님은 이스라엘의 회복을 약속하시면서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너는 두려워 말라 내가 너를 구속하였고 내가 너를 지명하여 불렀나니 너는 내 것이라 네가 물 가운데로 지날 때에 내가 함께할 것이라 강을 건널 때에 물이 너를 침몰치 못할 것이며 네가 불 가운데로 행할 때에 타지도 아니할 것이요 불꽃이 너를 사르지도 못하리니...”(사 43:1b-2). 이 약속의 말씀이 정확히 이루어졌지 않습니까?

우리의 괴로움, 여러분의 슬픔, 하나님이 다 아십니다. 오직 하나님만이 우리의 위로가 되십니다. 사드락과 메삭과 아벳느고의 하나님은 바로 오늘 나의 하나님이고 여러분의 하나님입니다. 불속으로 그들을 찾아오셨던 하나님은 오늘 우리의 눈물 속으로, 우리의 한숨과 신음 사이로 찾아오십니다. 그 하나님으로 인하여 위로와 평강이 여러분의 가정과 삶 속에 임하시기를 바랍니다.

 

이런 글도 찾아보세요!

공유

facebooktwitterpinterestbandkakao story
퍼머링크

댓글 0

권한이 없습니다. 로그인

신고

"님의 댓글"

이 댓글을 신고 하시겠습니까?

삭제

"님의 댓글"

이 댓글을 삭제하시겠습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