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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맞고 변할래? 안 맞고 변할래? (단 04:1-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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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부분은 느부갓네살 왕이 내린 조서의 내용을 그대로 옮겨적은 것입니다. 지금까지는 일어나고 있는 사건들을 필자가 자신의 관점에서 기록한 글이었지만, 이 4장은 왕의 조서를 가감없이 그대로 인용하고 있습니다. 즉 다니엘의 주관으로 쓰여진 글이 아니라 느부갓네살 자신의 육성고백이라고 할 수 있겠군요.

그런데 첫 문장부터 난폭하고 무자비했던 과거의 느부갓네살의 성격과는 전혀 다른 분위기가 감지되고 있습니다. ‘원하노니 너희에게 많은 평강이 있을지어다.’ 바로 이 문장입니다. 이것이 왕의 조서에 통상적으로 사용되는 문구인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러나 지금까지 느부갓네살의 행동양식에서는 찾아볼 수 없었던 변화된 모습이 아닌가요? 만약 이것이 조서에 통상적으로 사용되는 문구였다면, 앞서 내린 조서들에도 당연히 들어 있었을 것입니다. 그렇지만 전에 내린 조서에서 느부갓네살은 몸을 쪼개고 집을 거름터로 삼겠다는 위협과 폭언을 하고 있었습니다. 백성들에게 평강을 기원한다는 뉘앙스는 찾아보기 어려웠다는 것입니다. 물론 앞에 나오는 조서는 전문이 인용된 것 같지는 않습니다. 그래서 인사말에 해당되는 부분이 생략되었을 수도 있겠지요. 만약 그렇다면 저자의 의도가 더 분명하게 드러나는 것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앞의 조서에도 있었을지도 모르지만 거기서는 생략을 했고, 여기서는 일부러 생략하지 않고 평강을 기원하는 왕의 마음을 굳이 표현했다는 것은 이 책의 저자가 생각하기에도 지금의 느부갓네살은 과거의 느부갓네살이 아니라는 것을 의도적으로 나타내고 있다는 뜻이 될 것입니다.

어쨌든 난폭하고 거칠었던 느부갓네살이 변한 것만은 틀림없는 것 같습니다. 아무도 알아내지 못했던 자신의 잊어버린 꿈을 유다에서 잡혀온 다니엘이라는 젊은이가 알아내고 해석하는 것을 보고도 변하지 않았던 느부갓네살이었습니다. 자기가 불속에 던진 사드락과 메삭과 아벳느고가 불에 타죽지 않고 살아나오는 것을 보고도 느부갓네살의 거칠고 난폭한 성격은 변하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무엇이 그 느부갓네살을 이처럼 변하게 만들었을까요? 여기서 우리는 하나님께서 매우 강력한 처방으로 느부갓네살을 변화시키셨다는 것을 짐작할 수 있습니다.

사람이 변한다는 것은 정말 쉽지 않은 일입니다. 몇 년 전에 대도(大盜)라는 별명을 가진 조세형이라는 사람이 감옥에서 나왔습니다. 어려서부터 소년원을 안방 드나들 듯 하면서 자라온 이 사람이 15년 감옥생활을 마치고 나왔을 때는 완전히 다른 사람으로 변해 있었습니다. 감옥 안에서 예수 그리스도를 영접하고 거듭난 그리스도인이 된 것입니다. 거기에는 물론 많은 사람들의 희생적인 노력이 있었습니다. 그래서 조세형은 여러 곳을 다니면서 변화된 모습을 보여주며 간증을 했습니다. 그리고 신학교에 들어가 하나님 말씀을 깊이 공부하기로 했고, 또 한 헌신적인 자매와 결혼을 해서 가정을 이루기까지 했습니다. 선교회를 조직해서 불쌍한 사람들을 돕는 일에 발벗고 나서기도 했습니다. 그야말로 전 국민을 감동시킨 참으로 감동적인 드라마였습니다.

그리고 대법원은 ‘조씨의 범행동기나 범행 후의 정황, 반성의 뜻을 종합해 볼 때 이전의 절도전과만으로는 재범 가능성을 인정할 수 없다’며 검찰의 보호감호를 받아야 한다는 검찰의 상고를 기각함으로써 완전한 자유인으로 만들어 주었습니다.

그런데 얼마 후에 조세형이 일본에서 고급주택가를 털다가 붙잡혔다는 뉴스가 사람들을 놀라게 했습니다. 그것도 흉기를 가지고 경찰관에게 저항하다가 총을 맞고서야 붙잡혔다는 것입니다. 처음에는 딴 사람일 것이다, 무슨 오해가 있었을 것이다, 어떤 음모나 계략에 빠진 것이 아닐까 하는 억측들도 나왔습니다. 그만큼 한 변화된 영혼에 대한 기대가 무너지는 것이 두려웠던 것입니다. 어쨌든 조세형은 다시 감옥으로 들어갔고, 사람들의 실망과 분노 속에서 그는 차츰 잊혀지고 말았습니다. 지금은 어떻게 되었는지 모르겠습니다.

저는 조세형이 변화된 척 꾸미고 쇼를 했다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그는 참으로 자신의 잘못과 죄를 뉘우치고 거듭난 그리스도인으로 다시 태어났습니다. 그리고 착하고 성실하게 살아가려고 무척 노력했습니다. 그런데 어떻게 해서 무엇 때문에 일본에 갔는지는 모르겠지만, 거기서 억제되어 있던 그의 죄악성과 옛버릇, 옛사람이 되살아나 그의 인생을 또다시 파멸의 구렁텅이로 몰아넣고 말았던 것입니다. 물론 저는 그가 그렇게 범죄한 후에 다시 뼈를 깎는 회개와 변화의 과정을 다시 겪었으리라고 짐작합니다. 어쨌든 이것은 한 사람이 변화한다는 것이 얼마나 쉽지 않은 일인가를 단적으로 보여주는 사건이라고 할 수 있겠습니다.

교육의 목표는 인간을 변화시키는 것입니다. 거친 성품을 부드럽게 만들고, 남을 미워하고 싫어하는 성품을 바꾸어서 남을 사랑하게 만들고, 욕심쟁이는 양보하고 희생할 줄 아는 사람으로 만들고, 그래서 민주사회의 성숙한 구성원으로 만들자는 것입니다. 그러나 현장의 많은 교육자들이 비관하고 실망합니다. 인간을 잘 교육하면 변화될 것 같은데, 그리고 이론에 의하면 꼭 그렇게 되어야 하는데, 실제로는 잘 안 되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모두 변화되어야 할 사람들입니다. 죄악된 성품으로 하나님을 훼방하고 스스로 높아져서 하나님을 대적하는 우리들이 하나님 앞에 무릎꿇고 예수 그리스도의 의를 힘입어 거룩한 하나님의 백성으로 변화되어야 하는 것입니다. 물론 교육의 영향으로 우리가 어느 정도 양심적이고 예의바른 삶을 살아가고 있는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의 온전하심과 같이 너희도 온전하라.’(마 5:48)고 하신 주님의 말씀에 비추어보면 우리는 얼마나 더 변화되어야 할지 모릅니다. 사실은 우리가 그리스도인이라는 것이 부끄러울 정도로 때로는 세상 사람들보다 더 악하고 비열한 모습을 가지고 있을 때도 많습니다. 오늘도 우리 주님은 우리를 변화시키시려고 얼마나 안타까워하시며 애쓰고 계실까요?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도대체 어떻게 하셨길래 느부갓네살이 이렇게 확 변했을까요? 하나님의 방법은 한 마디로 ‘원인 제거하기’라고 할 수 있겠습니다. 느부갓네살이 그렇게 기고만장하고 난폭하게 굴 수 있었던 근거는 그의 업적과 권력이었습니다. 세계 최초로 세계제국을 건설했고, 그의 힘은 신처럼 떠받들릴 만큼 강력했습니다. 가는 곳마다 정복을 했습니다. 말하자면 느부갓네살은 세상의 어떤 왕보다도 유능하고 잘났다는 결론을 내릴 수 있겠지요. 지금까지 느부갓네살의 바벨론 제국만큼 강력하고 큰 나라가 존재해본 적이 없었습니다. 그러니까 역사상 최고의 권력자가 된 것입니다. 그가 소유할 수 있는 부귀와 영화는 얼마나 대단했을까요? 그가 동원할 수 있는 군대의 힘은 얼마나 컸을까요? 이처럼 자기가 이룩한 업적을 과시하려니 겸손할 수가 없고, 가지고 있는 힘을 행사하려다 보니 폭력적이고 난폭해지지 않을 수가 없는 것입니다. 말하자면 눈에 뵈는 것이 없는 것이지요. 백성도 눈에 보이지 않고 다니엘과 사드락, 메삭, 아벳느고의 하나님도 사건만 끝나면 잊혀질 뿐입니다.

이런 느부갓네살을 변화시키기 위해서 그에게 겸손을 가르치고 자비함을 연습시키는 것으로는 불가능합니다. 그렇게 해서는 느부갓네살이 변하지 않습니다. 왕의 진미를 거부했던 다니엘과 사드락, 메삭, 아벳느고가 채소와 물만 먹고도 다른 젊은이들보다 훨씬 건강하고 공부도 잘했던 것을 아무리 보여줬어도 느부갓네살에게는 소귀에 경읽기였습니다. 잊어버린 꿈을 다니엘이 알아내고 해석하는 것을 보고 여호와 앞에 무릎을 꿇긴 했지만, 그것도 잠시였습니다. 아무리 강력하고 거대한 세계제국이라 한들 영원할 수는 없는 것이고, 오히려 이 세상나라들을 부숴뜨리고 온 세상에 가득하게 되는 하나님의 나라를 아무리 꿈으로 가르쳐 주었어도, 느부갓네살은 겸손하기는커녕 오히려 금신상을 만들어 더욱 기고만장했습니다. 자기 명령에 따르지 않는 사드락과 메삭과 아벳느고를 활활 타오르는 불속에 던져버릴 정도로 느부갓네살은 더 악랄해져갔습니다. 그리고 그 불속으로 찾아오신 하나님을 자기 눈으로 보았으면서도 느부갓네살은 그 하나님을 단지 예우나 좀 해 주면 될 하나의 신 정도로 보았습니다. 아직도 그는 여호와의 성전과 그의 나라 유다를 정복한 오만과 자존심에 사로잡혀 있는 것입니다.

이런 느부갓네살을 변화시키자면 그의 교만과 포악함의 근원이 되고 있는 것, 그가 가지고 있는 업적과 권력을 제거하는 수밖에 없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다시 한번 느부갓네살에게 꿈을 꾸게 하십니다. 땅의 중앙에 커다란 나무가 있습니다. 얼마나 견고하고 큰 나무인지, 높이가 하늘에 닿았고 땅끝에서도 보입니다. 그 잎사귀는 아름답고 열매는 많아서 만민의 식물이 될 만하고, 들짐승과 새들이 깃들이고 둥지를 틀었습니다. 느부갓네살의 권력과 바벨론 제국의 영광을 표현하는 것이겠지요?

그런데 하늘에서 내려온 순찰자가 그 나무를 베어버리겠다는 것입니다. 가지도 찍어버리고 잎사귀도 떨어버려서 짐승들, 새들이 모두 떠나게 한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나무의 그루터기를 쇠줄로 묶어서 들판에 내버려두면 하늘 이슬에 젖고 짐승들이 와서 똥이나 싸고 가는 장소가 될 것입니다.

빛나는 갑옷에 보석 박은 칼을 찬 왕자가 졸지에 쪽박을 찬 거지로 변한 형국이군요. 느부갓네살이 변화할 수 있는 여러 차례의 기회들을 조금이라도 붙잡았더라면 이 모양이 되지는 않았을 것입니다. 하나님은 느부갓네살을 변화시키려고 여러 번 시도한 끝에 결국은 마지막 방법까지 동원하셔야 했군요. 그러나 이 방법은 확실한 효과가 있었습니다.

하나님은 느부갓네살 뿐만 아니라 오늘 우리도 변화시키려고 하십니다. 어떻게 하면 우리가 하나님이 기뻐하실 만큼 변화될 수 있을까요? 하나님의 눈빛만 보고도 우리가 척 알아서 변화한다면 하나님이 무척 흡족해하실 것입니다. 그런데 아무리 말로 해도 변화가 없으면 꿀밤이든 회초리든 좀더 강경한 방법이 나오지 않겠어요? 그래도 하나님이 기대하시는 변화가 없을 때는 어떻게 되겠습니까? 그 변화를 가로막고 있는 근본적인 원인을 제거하지 않을 수 없을 것입니다. 우리가 뭔가 믿는 구석이 있을 때 하나님을 찾거나 의지하는 믿음이 수준 이하로 떨어집니다. 그렇다면 하나님은 우리 믿음의 수준을 상향조정하시기 위해서 우리가 의지하는 것을 빼앗아 가셔야만 하겠군요. 글쎄 그것이 우리의 재산일 수도 있고, 개인의 기술이나 능력일 수도 있겠지요.

전 재산을 잃고 겸손을 배웠다면 그래도 남는 장사입니다. 그러나 고생은 좀 될 것입니다. 건강을 잃고 다른 사람들을 사랑할 줄 알게 되었다면 훨씬 좋은 결과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불편한 점도 많겠지요. 직장은 잃었지만 더욱 하나님을 의지하는 믿음을 얻었다면 더 값진 것을 얻은 것이 분명합니다. 세상 사람들 생각에는 안 그렇겠지만 말입니다.

하나님의 목표는 느부갓네살을 왕위에서 쫓아내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하나님이 원하셨던 것은 ‘지극히 높으신 자가 인간 나라를 다스리시며, 자기의 뜻대로 그것을 누구에게든지 주시며, 또 지극히 천한 자로 그 위에 세우시는 줄을 깨닫는 것’(17절)이었습니다.

우리가 아이들을 키우면서 늘 느끼는 일입니다. 종종 아이들이 부모의 말을 듣지 않는 수가 있지요. 한번 말해서 바로 하면 얼마나 좋아요? 시키는 사람도 기분좋고, 하는 사람도 즐거운 마음으로 해서 좋고. 그런데 싫다고 안할 때가 있어요. 그렇다고 하지 말라고 할 수 있는 일이 아니라면 억지로라도 시켜야겠지요? 그러면 한 대 쥐어박든지 회초리로 종아리를 때리든지 해서 하게 만듭니다. 어차피 해야 할 일인데 얻어맞지 않고 기분좋게 할 수도 있는 것을 얻어터지면서 억지로 하면 얼마나 낭비가 많습니까?

우리가 날마다 변화되어가는 것, 이것은 주님 오실 때까지 계속되어야 할 우리의 숙제입니다. 우리의 입술이 깨끗해지고, 우리의 마음이 청결해지고, 우리의 행동이 아름답게 변하는 것, 어차피 해야 할 일인데, 떼를 쓰고 버티며 변화를 거부하다가는 느부갓네살처럼 고생을 좀 하게 될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모신 마음이 변하여 새사람이 되는 놀랍고 아름다운 사건들이 날마다 순간마다 우리의 삶 속에서 현재진행형으로 일어나게 되기를 진심으로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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