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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철새와 다니엘 사이에서 (단 04:19-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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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즘 미국은 이라크를 침공하기 위해서 애를 많이 쓰고 있습니다. 많은 군대와 전폭기, 군함 등을 현지로 급파하고 있고, 다른 나라들을 전쟁에 동참시키려고 어르거나 겁을 주기도 합니다. 미국이 이라크를 침략하려고 하는 이유는 자존심과 석유입니다. 눈에 가시처럼 겁도 없이 자꾸만 반항하는 이라크를 정복함으로써 국제사회의 유일한 초강대국의 면모를 과시할 수 있고 또 석유의 안정적인 공급을 확보할 수도 있기 때문에, 미국으로서는 온갖 비난과 부작용을 감수하면서라도 이라크를 침략하려고 하는 것입니다.

냉전구조가 무너지고 소련이 붕괴된 이후로 감히 미국의 권위에 머리를 조아리지 않는 나라는 거의 없어졌습니다. 언젠가 리비아의 가다피가 한번 배짱을 내밀었다가 죽도록 얻어맞은 적이 있었습니다. 아프가니스탄의 탈레반 정권은 의리를 내세워 빈 라덴을 숨겨주는 모험을 했다가 나라가 절딴 나고 권력도 붕괴되고 말았습니다. 아직까지 미국에 고분고분하지 않고 있는 것이 이라크의 후세인과 북한의 김정일 정도 되겠습니다. 그런데 미국이 저렇게 막가파식으로 나가니까 실수를 많이 하게 되고 인심을 잃게 됩니다. 작년 연말에는 그동안 저 아래 쫄다구 정도로나 취급했던 한국의 김대중 대통령에게 한방 얻어맞고 한참을 휘청거려야 했고, 새로 대통령에 당선된 노무현 당선자 역시 앞으로는 미국과 맞상대를 하겠다고 나서는 판국이니 신경이 쓰이지 않을 수가 없겠군요.

자, 그런데 이라크의 후세인이 그렇게 미국에게 당하고 나라가 황폐화되면서도 고개를 숙이지 않고 덤비는 이유는 뭔가 하면 자기가 느부갓네살이라고 착각을 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최초로 세계제국을 건설했던 조상 느부갓네살의 영광을 재현하겠다는 것입니다. 미국과 대립각을 세움으로써 아랍권의 맹주가 되고 국제사회의 주도권을 잡으려는 것입니다. 이라크에 매장되어 있는 석유만 가지고도 그 재정적인 뒷감당은 될 수 있습니다. 그러나 후세인의 욕심과 착각으로 느부갓네살의 영광은커녕 머지않아 이라크에서는 후세인이 제거되고 미국의 꼭두각시 정권이 들어서게 될 전망입니다.

물론 이 후세인은 느부갓네살에 훨씬 미치지 못할 뿐만 아니라 비교도 할 수 없는 인물이지요. 비록 느부갓네살이 포악하고 무자비한 사람이었지만, 누구나 감탄할 만한 업적을 세웠고, 더욱이 하나님이 끝까지 그를 포기하지 않으시고 그의 삶에 관여하셨습니다. 하나님이 후세인을 포기하지 않으신다는 흔적을 찾아볼 수는 없습니다만... 어쨌든 느부갓네살을 하나님이 포기하지 않으신 것은 느부갓네살이 예뻐서가 아니라 그의 관할 하에 놓인 이스라엘 때문이었다고 볼 수도 있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이 느부갓네살을 포기하지 않으셨다는 것은 하나님의 선지자인 다니엘이 충성스럽게 느부갓네살을 섬겼다는 것으로 설명할 수 있겠습니다.

제가 여기서 주목하고 싶은 것은 다니엘의 충성심입니다. 느부갓네살 왕의 꿈 이야기를 듣자 다니엘은 너무 충격을 먹은 나머지 얼마 동안 놀라 벙벙하며 마음이 번민했다고 나오는군요. 느부갓네살의 꿈은 그가 왕위에서 쫓겨난다는 것이었습니다. 그의 영광과 권세가 하루아침에 물거품 녹듯이 사라져버린다는 내용입니다. 거기다가 인간성마저 상실하고 들짐승과 같은 비참한 상태로 떨어진다는 경고였습니다. 너무나 기가 막힌 내용에 다니엘은 정신을 못차리고 있다가, 빨리 해석하라는 왕의 요구에 이런 일은 왕을 미워하는 자와 왕의 대적에게나 일어났으면 좋겠다고 말합니다. 여기서 분명한 것은 다니엘이 느부갓네살을 충심으로 섬기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다니엘이 자기 나라를 정복하고 파괴한 느부갓네살에게 충성하는 것은 조선 사람이 침략자 일제에 충성한 것과 다를 것이 없지 않느냐고 이의를 제기할 수도 있는 일이지만, 이것은 우리가 이미 전에 살펴본 바 있습니다. 다니엘은 이완용과 같은 매국노의 부류는 결코 아니라는 것이 우리가 살펴본 내용이었습니다. 왜냐하면 유다가 망한 것은 하나님의 심판이었고, 느부갓네살은 그 하나님의 심판의 도구였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다니엘의 소명은 정복자 느부갓네살을 반대하고 독립운동을 일으키는 것이 아니라, 바벨론과 페르시아로 이어지는 지배권력들과 그 아래 놓인 하나님의 백성 이스라엘에게 하나님의 여전히 왕되심을 선포하고 증거하는 역할이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하나님은 민중의 각성과 자기해방 운동을 통해서가 아니라, 심판의 날이 다 찬 후 하나님의 능력과 방법으로 그 백성을 해방시킬 계획을 가지고 계셨기 때문입니다. 어쨌든 느부갓네살은 다니엘의 능력과 자질을 높이 사서 중용했습니다. 다니엘은 바벨론 본국 사람들을 제치고 왕의 총애를 받는 최측근이 되었습니다. 왕이 총애한 것만큼이나 다니엘 역시 충성을 했던 것으로 생각됩니다.

그런데 그 왕이 이제 쫓겨난다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왕의 총애를 받던 신하로서 왕의 비극적인 몰락에 충격을 받고 놀라는 것은 지극히 당연한 일입니다. 자기가 섬기는 왕에 대한 사랑과 충성의 마음이 다니엘의 말과 행동에 묻어나는 것을 보면서, 오늘을 살아가는 우리 그리스도인의 모습과 비교해 볼만하다는 생각이 드는 것입니다. 특히 제가 여기에 초점을 맞추려고 하는 것은 최근에 우리가 배신과 변절의 계절을 막 지나왔기 때문입니다. 대통령 선거를 치루는 과정에서 정말 엽기적이고 몰상식한 일들을 너무나 많이 보았기 때문입니다.

어제까지만 해도 생사를 같이 하던 동지의 등 뒤에 비수를 꽂는 배신행각, 이것은 인류의 역사만큼이나 오래된 인간의 행태입니다. 로마의 영웅 시저는 가장 신임하고 사랑했던 부하 부르투스의 칼을 맞고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졌습니다. 우리 현대사에서 박정희는 어떻게 죽었던가요? 죽을 때까지 대통령 자리를 독차지하려고 했던 그는 심복 김재규의 총에 맞아 죽음으로써 대통령 자리에서 내려왔습니다. 꼭 같은 케이스라고 할 수는 없지만, 우리 주님도 제자 중 하나인 유다의 밀고에 의해 체포와 처형을 당하는 수모를 겪으셔야 했습니다. 큰 뜻을 위해 목숨까지 걸고 나섰던 동지들 중에 배신자가 생겨나 뜻을 이루지 못하고 모조리 목숨을 잃거나 또는 조직이 와해되는 일도 많이 있습니다. 이처럼 신뢰하고 사랑하던 사람일수록 그 배신의 충격과 파장은 크게 마련입니다. 배신이라는 것이 믿음을 저버린다는 것이기 때문에 믿는 사람이 아니었다면 배신도 성립되지 않습니다.

배신이 일어나는 이유는 여러 가지가 있겠지만, 가장 근본적인 이유는 이기적인 욕심 때문입니다. 그래서 돈을 받고 사랑하는 동지들의 목숨을 팔아넘기는 일이 일어납니다. 모시고 있던 상급자가 몰락하게 되면 자신의 운명도 그와 같게 될 것이 뻔하기 때문에 재빨리 몸을 움직이고 변신하게 되면서 배신이 발생합니다. 현재 누리고 있는 지위나 대우보다 더 좋은 것을 보장하겠다는 사탕발림에 귀중한 정보를 빼내 상대방의 진영에 합류하는 배신행각이 횡행하고 있습니다. 대통령 선거를 앞두고 한때 공무원 사회의 행정조직이 거의 마비상태였다고 합니다. 이회창 후보의 당선이 거의 확실해 보였기 때문에 고위 공무원들이 모두 한나라당에 줄을 섰고, 그래서 업무는 마비되고 고급 정보는 모조리 한나라당에서 독차지했습니다. 지금은 어떻습니까? 모두들 대통령직인수위원회에 줄을 대려고 얼마나 발버둥을 치고 있는지 모릅니다.

우리는 지난 대통령 선거 기간 중에 너무나 많은 배신행각을 보았기 때문에 배신행위에 대한 염증이 나고 있는지 아니면 오히려 반대로 배신에 대한 면역성이 강화되고 있는지 헷갈릴 지경입니다. 날이 갈수록 그 배신의 강도가 커지고 충격적이어서 처음에 일어났던 배신들은 아주 작은 일처럼 치부되기까지 했기 때문입니다. 이런 면에서라도 저는 소신과 원칙을 끝까지 관철했던 후보가 당선된 것이 큰 의미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시류에 따라 이리저리 휩쓸려 다니고 이익과 욕망을 따라 이리저리 날아다닌 소위 철새들의 배신행각을 근절시킬 수 있는 논리적인 근거와 도덕적인 힘이 될 수 있기 때문입니다. 만약에 ‘큰바다정책’이라고 해서 변절과 배신을 밥먹듯이 하던 철새들을 모조리 받아들여 세력을 키웠던 진영에서 승리했더라면, 배신과 변절은 매우 지혜롭고 현명한 선택이라는 새로운 가치와 도덕으로 자리를 잡게 되었을지도 모르기 때문입니다.

투표일 1시간 30분을 남겨놓고 지지철회라는 폭탄선언으로 변절과 배신행각들의 대미를 장식했던 정몽준은 서울의 소망교회에 출석하는 것으로 알려지고 있습니다. 말하자면 그도 기독교인이라는 것이지요. 그가 예배에 참석해서 간절히 기도하는 사진을 어느 신문에서 본 기억이 있습니다. 월드컵을 성공적으로 마치고 대선 예비주자로 최고의 인기를 구가하고 있을 때, 부산의 고신대학교는 발 빠르게 그에게 명예박사학위를 수여했습니다. 김영삼에 이은 또 다른 기독교인 대통령을 꿈꾸는 사람들이 많았을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진정한 그리스도인은 그런 배신을 때리는 것이 가능하지 않습니다. 이름만 기독교인인 그런 사람을 기독교가 이용하려 했다면 그것은 하나님 앞에서 또 하나의 범죄행위일 뿐입니다.

다른 사람들은 배신하고 변절했어도 그러려니 할 수 있었지만, 정말 뒤통수를 때린 충격적인 배신자는 김민석이라고 할 수 있겠습니다. 김민석 역시 교회활동에 열심인 것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그의 형이 그 유명한 김민웅 목사 아닙니까? 정말 한국 기독교인의 수준이 이런 것입니까? 이번에 소위 철새들의 명단에 들어 있는 사람들 중에서 기독교인들이 얼마나 더 있는지는 모르겠습니다. 조금만 자료를 검색해 보면 금방 알 수 있는 일이지만 또 충격을 먹을까 봐 알아보고 싶은 생각도 없습니다.

사도 바울은 에베소서 6장에서 우리 그리스도인들이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를 가르쳐 주는데, 특히 상전을 섬기는 사람들에게 주시는 말씀은 이렇습니다. “종들아 두려워하고 떨며 성실한 마음으로 육체의 상전에게 순종하기를 그리스도께 하듯 하여 눈가림만 하여 사람을 기쁘게 하는 자처럼 하지 말고 그리스도의 종들처럼 마음으로 하나님의 뜻을 행하여 단 마음으로 섬기기를 주께 하듯 하고 사람들에게 하듯 하지 말라”(엡 6:5-7).

사도는 육체의 상전에게 순종하기를 그리스도께 하듯 하라고 하시는데, 그리스도인이 자기가 모시던 상전의 앞날이 불투명하다고 그렇게 등 뒤에 칼을 꽂고 떠날 수 있습니까? 이 육체의 상전은 독재자일 수도 있고, 악덕 기업주일 수도 있습니다. 그런 악한 권력자의 비위를 맞추면서 권력에 기생하라는 말이 아니지요. 저라도 악덕 기업주를 그리스도께 하듯 순종하기는 쉽지 않을 것 같습니다. 그러나 사도의 말씀의 본질은 그리스도인으로서 정직하고 성실하게 일하라는 것입니다. 눈가림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하물며 악덕 기업주나 포악한 독재자가 아닌 신뢰와 사랑으로 맺어진 상전을 물먹이고, 같은 뜻과 정신을 공유하고 함께 싸워온 동지를 자기 살겠다고 배신하고 변절하는 행위를 어떻게 설명하고 용납할 수 있습니까?

이제 늙어서 힘도 예전 같지 않은 느부갓네살이 왕위에서 쫓겨나고 들짐승처럼 풀을 먹게 된다는 사실을 알고 다니엘은 그저 놀라고 슬퍼했습니다. 재빨리 자기 살 길을 찾아 변절하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어떻게 하면 이 왕을 구할 수 있을까 궁리합니다. 그래서 ‘공의를 행함으로 죄를 속하고 가난한 자를 긍휼히 여김으로 죄악을 속하십시오. 그리하시면 왕의 평안함이 혹시 장구할 지도 모르겠습니다.’ 이렇게 충언합니다. 하나님을 믿는 신하로서 얼마나 아름다운 모습입니까?

어제 민주당의 신기남 의원 인터뷰 기사를 보았습니다. 외롭게 시작했던 노무현이 국민경선에서 승리하고 노풍이 불 때는 마치 밀물 들어오듯이 지원세력이 몰려들더랍니다. 그러다가 노무현 인기가 바닥으로 떨어지자 정말 썰물처럼 빠져나가더라는 거예요. 그러면서 소위 철새들의 대이동과 후보 흔들기가 시작되었습니다. 그러다가 다시 노무현으로 단일화가 이루어지고 대선에서 승리하니까 빠져나갔던 썰물이 다시 몰려들어 마치 자기들이 다 싸워 승리한 것처럼 떠드는 것을 보니 마음이 씁쓸하더라는 겁니다. 그 철새들, 그 밀물과 썰물들 가운데 예수 믿는다는 사람들, 얼마나 많았을까요? 만약 노풍이 수그러들지 않고 끝까지 강세를 유지했더라면 배신자, 변절자도 나오지 않았고, 철새들도 이동할 일이 없었을 것입니다. 참 시사하는 바가 많지 않습니까?

우리가 누군가를 상전으로 모시고 있다면, 우리는 사도 바울의 말씀처럼 그리스도께 하듯이 단 마음으로 기쁘게 충성할 수 있을까요? 그저 눈가림만 하고 시간이나 때우는 것이 솔직한 우리의 모습 아닌가요? 그렇다면 배신을 때리고 변절을 지혜로 삼는 철새들을 나무랄 입장이 아닙니다. 우리는 지금 철새와 다니엘의 사이에서 갈등하고 있습니다. 판단의 실수였다느니, 그 상황에서의 선이었다느니, 최악을 방지하기 위한 차악의 선택이라느니, 목구멍이 포도청이라느니... 할 말은 많을 수 있습니다. 핑계 없는 무덤이란 없으니까요. 그러나 문제는 우리가 얼마나 진실하고 정직한가 하는 것입니다. 얼마나 원칙에 충실하고 소신을 굽히지 않았느냐 하는 것입니다. 사람 앞에서 눈가림만 하느냐 하나님께 하듯이 하느냐의 차이입니다.

자기 사업하는 사람 아니면 우리는 대부분 다른 사람을 위해 일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또 자기 사업을 하더라도 다른 사람들과의 관계가 없을 수 없습니다. 거기서 우리는 눈가림하면서 처세를 잘할 수도 있고, 우직하고 바보스럽게 원칙을 지키며 성실하게 일할 수도 있습니다. 직장에서 일하는 것, 이것은 먹고 사는 문제가 아니라 우리 믿음의 문제, 그리스도인으로서의 정체성의 문제입니다. 배신과 변절로 믿음의 파산을 초래한 정몽준과 김민석을 우리가 제대로 된 그리스도인이라고 인정할 수 없는 것처럼, 직장에서 성실하지 못하고 자기 욕심을 따라 자신을 속이고 다른 사람 앞에서 눈가림하는 사람을 우리는 올바른 그리스도인이라고 인정할 수 없습니다. 결국 직장에서 정직하고 성실하지 못한 사람은 배신과 변절을 일삼는 철새와 다를 것이 하나도 없다는 것입니다.

비록 자기 민족도 아닌 타국의 왕을 주군으로 모셔야 했지만, 일단 섬기게 된 왕을 끝까지 충성으로 보필했던 다니엘의 모습은 육체의 상전에게 순종하기를 마치 그리스도께 하듯 하라는 사도의 말씀의 구현으로서 오늘 배신과 변절의 시대를 살아가는 우리에게 아름다운 귀감이 되고 있습니다. 이제 우리 차례입니다. 다니엘의 모습도 보았고 철새들의 행각도 보았습니다. 이제 우리가 살아가는 현장에서 다니엘처럼, 사도 바울의 말씀처럼, 그리스도인으로서 정직하고 성실하게, 그리고 원칙을 지키며 살 수 있도록 하나님이 은혜 주시기를 바라고, 또 우리도 그렇게 살기 위해 다시 한번 마음속에 다짐을 해 봅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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