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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교회가 세상을 책망할 수 있으려면 (단 05:17-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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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의 것으로 인심 쓴다는 말이 있습니다. 그럴 경우에는 그 기부행위 자체가 효력이 없어서 원인무효로 끝날 가능성이 많습니다. 그런데 그것도 모르고 좋다고 그것을 받는 사람은 어떻게 될까요? 현명한 사람이라면 받아도 되는 것과 받아서는 안 되는 것을 구별할 줄 알아야겠지요. 준다고 무턱대고 받았다가 나중에 속 쓰리게 물어내야 하는 수도 있고, 뇌물수수에 해당되어 망신을 당하는 수도 있습니다. 여기서 벨사살 왕이 다니엘에게 자주옷을 입히고 금사슬을 목에 드리우고 나라의 권력서열 3위에 임명하겠다는 것도 말짱 꽝이 될 것입니다. 바로 몇 시간 후면 나라가 망하고 벨사살도 붙잡혀 죽을 것이기 때문이지요. 말하자면 벨사살이 내리겠다는 상급은 유효기간이 지난 복권 같은 것이라고 할 수 있을지 모르겠네요. 그래서 다니엘은 왕이 내리겠다는 상급을 매몰차게 거절하고 있습니다.

사실 왕이 상급을 내리겠다는데 이렇게 거절한다는 것은 ‘나 죽여주시오’ 하는 것과 다름없는 일입니다. 왕의 선물을 거부하는 것은 왕명을 거역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지금 벨사살은 이미 왕이라고 할 것도 없습니다. 이미 죽은 목숨이나 다름없습니다. 벌써 사망선고를 받았습니다. 그래서 넓적다리 마디가 녹아내리는 듯한 공포에 빠져 있습니다. 이런 왕이 내리겠다는 상급과 포상이 무슨 의미가 있고 무슨 효력이 있겠어요?

그래서 다니엘이 말합니다. ‘그런 상급은 다 필요 없소. 왕이나 가지시오. 그래도 내가 벽에 쓰인 이 글을 읽고 해석해 드리겠소.’ 다니엘이 그 글을 읽고 해석하는 것은 왕의 상급을 받으려고 하는 일이 아니라 하나님의 메시지를 전달하기 위한 일입니다. 이것은 상을 안 준다 해도 해야 할 일이고, 심지어는 벌을 받고 핍박을 당한다 할지라도 해야 할 일인 것이지요.

이 상황에서 벽에 쓰인 글을 읽고 해석한다는 것처럼 큰 권위와 힘은 없습니다. 지금 이 순간은 다니엘의 권력이 벨사살 왕의 권력보다 훨씬 큰 상태입니다. 마치 다니엘이 벨사살 왕을 포로로 잡은 것 같은 형국이군요. 그렇기 때문에 다니엘은 지금 무슨 말이든지 하고 싶은 대로 얼마든지 할 수 있습니다. 다니엘은 떳떳하고 당당한 반면에 벨사살은 주눅이 들고 두려움에 떨고 있습니다. 그러니 다니엘이 무슨 말을 하든 벨사살은 듣지 않을 수가 없는 상황인 것입니다. 이것은 굉장히 중요한 공식을 내포하고 있습니다.

교회가 가져야 할 권위

교회는 하나님께서 세상에 설치하신 나팔입니다. 스피커라고 할 수도 있겠군요. 하나님께서는 이 스피커를 통해서 세상에 하고 싶으신 말씀을 하십니다. 그런데 교회가 아무리 외치고 떠들어도 세상은 눈 하나 깜빡하지 않고 들은 척도 하지 않습니다. 왜 그럴까요? 교회의 권위가 없기 때문입니다. 속말로 말발이 안 서는 거예요. 그렇다고 교회가 옛날 중세시대의 교황처럼 세속적인 권력을 가지고 행사해야 한다는 것은 물론 아닙니다. 교회의 권위는 권력에서 나오는 것이 아니니까요.

교회, 혹은 우리 그리스도인은 우선 도덕적인 권위를 확보해야 합니다. 도덕적인 권위가 없이는 아무리 교회가 소리를 쳐도 아무도 귀를 기울이지 않을 뿐만 아니라 오히려 위선과 가식의 탈을 쓰고 있다고 비난과 손가락질만 받게 될 것입니다. 그래도 한국사회에서 아직은 천주교 신부님들에 대한 도덕적 권위는 상당히 인정되고 있습니다. 그러나 개신교 목사님들에 대한 평가는 가혹할 정도입니다. 저 자신도 목사의 한 사람으로서 큰 책임이 있습니다만, 정말 우리가 변하고 개혁되지 않으면 하나님의 메시지를 전달하는 역할을 아주 못하고 고장난 스피커처럼 아무 쓸 짝에도 없는 쓰레기밖에 되지 못할 것입니다.

뿐만 아니라 교회가 사회적인 책임을 충분히 수행해야만 권위를 가질 수 있습니다. 자기 할 일도 못하는 사람의 말발이 통하지 않는 것과 같은 이치입니다. 사회의 공익에 부합하고 선도하는 역할을 교회가 해야 합니다. 작년에 여중생 두 명이 미군의 장갑차에 깔려 죽은 후 촛불시위니, 소파개정이니 하는 문제가 사회적인 이슈가 되었습니다. 그리고 그동안 매우 희망적이고 건설적이던 남북관계가 미국의 패권주의와 세계 지배야욕 때문에 위기를 맞게 되었습니다. 북한은 핵이라도 개발하겠다고 배수진을 칩니다. 그런데 기독교 일각에서 미군철수반대 대규모 집회를 여는가 하면, 유명한 목사님들을 중심으로 해서 북한이 파놓은 땅굴 찾는다고 난리를 치고 있습니다. 지금이 어느 세상인데 목사들이 그런 쓸개빠진 짓을 한단 말입니까? 그러니 목사들이 무슨 존경을 받고 권위를 인정받을 수 있겠어요?

어떻게 해서라도 망나니 같은 아우를 잘 달래서 전쟁의 위협을 제거하고 더 나아가 민족의 통일을 이루어야겠다는 민족적인 꿈과 보편적인 가치를 부정하고, 미국의 자국이기주의에 편승하고 기대는 행위로 국민들의 분노를 사고 있는 교회, 터무니없는 땅굴발굴 작업 같은 엽기적인 행각으로 전쟁의 공포를 조장해서 국민을 위협하고 눈살을 찌푸리게 하는 교회가 어떻게 이 나라 이 민족 앞에 도덕적인 권위를 내세울 수 있고 어떻게 사회적인 존경을 받을 수 있겠어요? 기껏해야 자기 밥그릇 챙기기에나 바쁘고 냉전과 수구적 행태로 기득권을 유지하려는 부도덕하고 무책임한 집단으로 보일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그렇게 교회가 욕을 얻어먹을 짓을 하는데 누가 교회의 외침에 귀를 기울일 것이라고 기대를 할 수 있겠습니까? 오히려 정신 차리라는 핀잔이나 듣고 있는 실정입니다.

우리 그리스도인 각자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가 그리스도의 편지요 하나님의 메시지로 이 세상을 살기 위해서는 먼저 세상으로부터 인정을 받아야 합니다. 세상에 대해서 권위를 가져야 해요. 아, 역시 예수 믿는 사람은 다르구나. 이런 말을 듣고 살아야 우리가 무슨 한 마디를 해도 세상이 귀를 기울일 것 아닙니까? 반대로 예수 믿는 놈들이 왜 저 모양이야? 이런 말을 듣는다면 우리가 아무리 좋은 말, 아름다운 말을 외쳐도 귀 기울일 사람은 아무도 없을 것입니다. 우리가 세상을 가르치고 변화시키려고 나서기 전에 먼저 우리가 변화되고 올바로 가르침을 받아야 합니다. 일의 순서가 거꾸로 되었다가는 망신만 당하게 될 테니까요. 우리만 망신당하고 말면 괜찮지요. 하나님의 이름까지 더럽히게 돼요.

과거에서 배우지 못하면 미래가 없다

다니엘이 벨사살을 단단히 꾸중하고 있는데, 그 내용은 느부갓네살의 교훈을 깨닫지 못했다는 것입니다. 느부갓네살이 어떻게 했으며 그에게 어떤 일이 일어났었는지를 잘 알면서도 정신을 못차리고 그렇게 똑같은 죄악을 범했다는 것은 정상을 참작할 여지가 없다는 것이지요. 역사에서 배운다는 말이 있습니다. 역사는 반복되는 것은 아니지만, 어차피 인간의 성품과 성향이라는 것이 시대를 막론하고 대동소이하기 때문에 유사한 사건들이 반복되지 않을 수 없습니다. 따라서 과거에 일어난 일은 오늘 우리의 행동을 지배하고 미래를 예측할 수 있게 해 주는 매우 귀중한 자산이 되는 것입니다. 따라서 역사에서 배우지 못한 사람에게는 미래가 없다고 말해도 좋을 것입니다.

바로 벨사살이 그랬습니다. 느부갓네살이 하나님께 반항하고 거역하다가 얼마나 많은 일들이 일어났었습니까? 결국은 모진 고난을 겪은 후에야 하나님께 굴복하고 그 권세를 인정하게 되었습니다. 다니엘에 의하면 벨사살도 그 사실을 잘 알았다는 것입니다. 몰라서 그랬다면 정상의 참작이 있을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알면서도 그랬다면 죄질이 나쁘다고 할 수밖에 없지요. 그 과거에서 교훈을 얻지 못한 벨사살에게는 회개의 기회도 주어지지 않았습니다.

선조들의 귀중한 체험과 결단을 계승하지 못한 이스라엘은 사사시대의 혼란을 겪게 되었습니다. 여호와께서 이스라엘을 위하여 행하신 모든 일을 아는 사람들이 사는 동안에는 그들이 여호와를 섬겼다고 했습니다. 그런데 그 세대가 지나고 여호와께서 행하셨던 일들의 경험이 공유되거나 전달되지 못한 세대는 어두운 혼란의 시대를 살아야 했습니다. 우리 개인의 삶 속에서도 과거의 교훈에서 오늘의 지혜를 배우는 것이 매우 중요한 일입니다. 실수를 통해서 배운다고 하지 않습니까? 우리가 살면서 얼마나 많은 실수와 시행착오를 겪게 되던가요? 그렇게 실수를 하고 혼이 났으면 그 다음에는 똑같은 실수를 할 명분이 없지 않아요? 똑같은 실수를 반복한다는 것은 과거에서 교훈을 얻지 못했다는 증거가 되겠군요. 우리가 하나님께 범죄하고 형제를 노엽게 했던 과거의 일들이 자꾸 반복되지 않도록 살아야 한다는 말입니다.

구원받은 자와 버림받은 자

여기서 잠깐 느부갓네살과 벨사살을 비교해 봅시다. 느부갓네살이 하나님께 대항했던 행위들 역시 벨사살의 잘못에 비해 작은 것이 아닙니다. 그러나 느부갓네살을 대했던 다니엘의 태도와 지금 벨사살을 대하는 태도는 180도 다릅니다. 느부갓네살이 하나님의 심판에 처하게 되었을 때, 다니엘은 마치 자기가 벌을 받는 것처럼 마음 아파하면서 그의 회개를 촉구했습니다. 그러나 여기서는 벨사살에게 매우 냉정하고 쌀쌀하게 책망과 심판을 선포하고 있을 뿐입니다. 느부갓네살은 우여곡절을 지나서 결국 하나님께 굴복할 사람이었고, 벨사살은 이미 심판이 확정된 사람이기 때문입니다. 이미 심판이 확정된 사람에게 회개를 촉구하는 것은 아무런 의미도 없는 일인 것이지요. 느부갓네살은 희망과 가능성이라는 코드를 내재한 사람이었기 때문에 끊임없이 회개와 변화를 촉구했었습니다. 그러나 벨사살에게 회개를 촉구하는 것은 죽은 사람 얼굴에 화장하는 것과 다를 바 없습니다.

당장 하는 짓은 천하의 망나니라 할지라도 사람 될 가능성이 있으면 실패와 수고를 무릅쓰고라도 끊임없이 가르치고 바로잡아서 사람을 만들어야 하는 것입니다. 지금은 하나님을 알지 못하고 예수를 믿지 않지만, 하나님께서 자기 백성으로 선택하신 사람들이 우리 주변에 있을 수 있습니다. 이런 사람들은 우리가 기어이 하나님께로 이끌어야 하는 것입니다. 물론 벨사살처럼 전혀 가능성이 없는 사람도 있습니다. 이런 사람에게 한 번 말하는 것은 한 번 헛수고하는 것이고 백 번 말하면 백 번의 헛수고가 될 것입니다. 언젠가 우리 교회에 나올 사람은 우리가 계속해서 권면하고 설득해서 나오게 해야 하겠지요. 그러나 아무리 해도 안 나올 사람에게는 쓸데없이 헛수고할 필요가 없습니다. 그런데 문제는 누가 구원받을 사람이고 누가 버림받은 사람인지, 누가 우리 교회에 나올 사람이고 누가 절대로 나오지 않을 사람인지를 우리는 알 수가 없다는 것입니다. 우리에게는 그것을 아는 것이 허락되지 않았어요. 그래서 우리는 할 수 없이 모든 사람을 일단 구원받을 가능성이 있는 사람으로, 우리 교회에도 나올 수 있는 사람으로 가정하고 접근하는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다니엘이 벨사살에게 선포하는 메시지는 실상 느부갓네살에게 누차 선포되었던 메시지와 동일한 것입니다. 그것은 하나님이 다스리신다는 것이고, 그 하나님의 다스리심에 거역하는 자는 온전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나라를 잃고 이 먼 곳까지 포로로 붙잡혀 온 하나님의 백성 이스라엘에게 있어서 이보다 큰 위로가 어디 있었겠습니까? 이국땅에서 힘들고 슬프게 살아가는 사람들에게 얼마나 큰 힘이 되었을까요? 물론 우리야 전쟁에 져서 포로로 끌려온 것도 아니라 우리가 좋아서 온 경우가 대부분이지만, 그래도 이국땅에서 사는 비애와 남모를 고통이 우리에게도 있을 것인데, 바벨론 땅의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위로와 힘을 주셨던 하나님께서, 또한 동일하게 오늘 우리의 왕이 되시고 우리를 다스리시는 그 하나님께서 여러분의 힘들고 답답한 속마음을 만져 주시고 평안과 기쁨으로 채워 주시기를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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