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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잠 못 이루는 왕궁, 단잠에 빠진 사자굴 (단 06:18-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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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러분, 잠 못 이루는 밤을 경험해 보셨나요? 아무리 자려고 애를 써도 잠은 오지 않고 이리 저리 뒤척거리다가 밤을 꼬박 새우는 경우가 있습니다. 정말 큰 고민이 있거나 마음속에 아주 깊은 상처를 입었을 때 우리는 이렇게 잠을 이루지 못하며 뜬 눈으로 밤을 지새우게 되지요. 이처럼 잠을 잘 수 없다는 것은 그만큼 큰 고통을 당하고 있다는 의미입니다. 그래서 시편 기자는 말하기를 여호와께서 그 사랑하시는 자에게 잠을 주신다고 했어요(시 127:2).

여기 나오는 다리우스 왕은 간밤에 한 숨도 잠을 이룰 수가 없었습니다. 이 왕의 심리상태를 분석해 보면 잠을 잔다는 것이 불가능하다는 것을 금방 알 수 있습니다. 우선 얼마나 분노하고 있었을까요? 신하들이 자기를 속이고 이런 못된 음모를 꾸몄다는 것은 그만큼 왕권을 만만하게 보았다는 의미이기도 합니다. 분노는 영혼을 갉아먹고 인간성을 파괴하는 매우 강력한 내적 충동입니다. 여러분 자신의 경험을 돌이켜 생각해 보세요. 사람이 분노하게 될 때 얼마나 딴 사람으로 변하게 되던가요? 아무리 온유하고 인내심 많은 사람도 극단적인 분노에 사로잡히게 되면 전혀 다른 사람이 되고 맙니다. 물론 이러한 분노에 의해 촉발되는 행동은 나중에 후회의 대상이 되는 수가 많습니다. 그래서 성경은 분을 내어도 죄를 짓지 말고 해가 지기까지 분노를 품지 말라고 충고하지요(엡 4:26). 어쨌든 우리는 다리우스 왕이 극단적인 분노에 사로잡혀 있으리라는 것을 쉽게 짐작할 수 있습니다. 이 분노만 가지고도 그는 잠을 이룰 수가 없었을 것입니다.

또 다니엘을 잃게 되었다는 슬픔도 그의 정신세계를 황폐하게 만들고 있었을 것입니다. 왕궁에서는 늘 아름다운 음악이 연주되고 있었을 것인데, 그날 밤 그는 모든 기악을 그치게 했습니다. 말하자면 모든 오락을 금했다는 말입니다. 슬픔과 오락은 결코 양립할 수 없는 것 아닙니까? 셰익스피어는 햄릿에서 슬픔처럼 아름다운 것은 없다고 말합니다. 이루어질 수 없는 사랑 때문에 겪게 되는 슬픔은 작가의 상상력과 언어구사능력을 동원해서 아름답게 묘사되기에 좋은 소재일지는 모르겠습니다. 그리고 제 삼자에게는 그것이 아름답게 감상될 수 있을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러나 슬픔을 겪고 있는 당사자에게 있어서 그것은 죽음으로도 해소될 수 없는 고통인 것입니다. 가장 사랑했던 아들 요셉이 악한 짐승에게 잡아먹혔다는 보고를 듣던 야곱의 심정과 그 슬픔이 어찌 아름다울 수 있습니까? 아들을 빼앗긴 라헬은 위로받기를 거절할 만큼 슬퍼했습니다(마 2:18). 가장 유능하고 충성스러운 신하 다니엘을 잃게 되었다는 이 슬픔 하나만 가지고도 다리우스 왕은 그날 밤 잠을 이룰 수가 없었을 것입니다.

그뿐이겠어요? 그 음모에 속아 넘어간 자신이 얼마나 바보스럽게 여겨졌을까요? 자기 자신을 용서할 수 없다는 것 역시 작은 고통이 아닙니다. 아무리 후회하고 가슴을 쳐도 돌이킬 방법이 없습니다. 이처럼 자신을 미워하고 용서할 수 없는 지경에 이르면 사람은 존재의 이유를 상실하게 되지요. 그래서 삶을 자포자기로 내몰고 갑니다. 될 대로 되라는 식으로 살게 돼요. 자신을 더 이상 믿고 신뢰할 수 없으니까 의미 있는 삶을 영위하는 것도 불가능하게 됩니다. 거기다가 왕으로서 사자굴에 던져지는 다니엘을 구하기 위해 손을 쓸 수도 없이 그냥 바라만 보아야 했다는 무기력감은 다리우스 왕의 자존심에 큰 상처를 입히고 그의 분노와 슬픔을 더욱 부채질했을 것입니다. 이런 상황에서 왕은 결코 잠을 이룰 수가 없지 않았겠어요?

반면에 사자굴에 던져진 다니엘은 그 밤을 어떻게 보냈을까요? 사자굴이란 가장 잔인하고 끔찍한 처형장소입니다. 산 사람이 사자들의 날카로운 발톱과 이빨에 찢겨져 먹힌다는 것은 생각만 해도 소름이 끼치는 광경이군요. 어쩌면 인간이 고안해 낸 처형방법 중에서 가장 비인간적이고 참혹한 것인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러한 극단적인 위험과 공포의 사자굴에 다니엘이 던져졌습니다. 그런 사자굴에서 밤을 지새운다는 것은 논리적으로 성립되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그런 사자굴에 체류하는 시간이란 불과 몇 초도 되지 않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굶주린 사자들이 달려들어 던져진 사람을 먹어치우는 데 얼마나 걸리겠어요? 그런데 우리는 지금 다니엘이 그 사자굴에서 어떻게 밤을 보냈을까를 논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튿날 새벽에 일찍 일어난 왕이 급히 사자굴로 가서 다니엘이 어떻게 되었는지를 확인했습니다. 슬피 소리 질러 다니엘을 부릅니다. 즉 다니엘은 이미 사자들의 밥이 되어 버렸을 거라고 생각하며 다니엘의 이름을 부르는 것입니다. 그리고 다니엘이 사자들의 밥이 된 것을 확인하는 순간 왕은 대성통곡을 터뜨릴 것입니다. 그런데 놀랍게도 저 아래 사자굴에서 다니엘의 대답이 울려나왔습니다. “왕이여, 만세수를 하옵소서.” 왕이 한숨도 잠을 이룰 수 없었던 그 밤을 다니엘은 사자들 틈에서 아무 일 없이 보냈다는 것입니다. 따라서 우리는 다니엘이 그 사자굴에서 어떻게 그 밤을 보냈을까 논하지 않을 수 없는 것입니다.

다니엘은 말하기를 하나님이 천사를 보내어 사자들의 입을 봉하셨기 때문에 사자들이 그를 전혀 상해치 못했다고 합니다. 사자의 입만 묶는다고 안전할 수 있나요? 날카로운 발톱으로 한번 할퀴어버리면 목숨 날아가는 것은 한 순간일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들 중 아무도 다니엘이 밤새 사자들 속에서 불안하게 지냈을 것이라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하나님이 천사를 보내어 사자들의 입을 봉하셨다는 것은 사자들이 다니엘을 해칠 의도가 완전히 없게 하셨다는 것입니다. 아무리 날카로운 이빨과 발톱을 가지고 있다 하더라도 해칠 의사가 없으면 그것은 전혀 위험한 것이 아닙니다. 그래서 그날 밤 다니엘은 사자들과 함께 빙빙 돌며 춤을 추었는지, 혹은 둘러앉아 이야기꽃을 피웠는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리고 사자들의 푹신한 털을 이불삼아 가장 편안하고 따뜻하게 잠을 잤을지도 모릅니다.

저는 이 광경을 그려보면서 이사야 선지자가 전했던 예언을 떠올리지 않을 수 없습니다.

그 때에 이리가 어린 양과 함께 거하며 표범이 어린 염소와 함께 누우며 송아지와 어린 사자와 살찐 짐승이 함께 있어 어린 아이에게 끌리며 암소와 곰이 함께 먹으며 그것들의 새끼가 함께 엎드리며 사자가 소처럼 풀을 먹을 것이며 젖 먹는 아이가 독사의 구멍에서 장난하며 젖 뗀 어린 아이가 독사의 굴에 손을 넣을 것이라 나의 거룩한 산 모든 곳에서 해됨도 없고 상함도 없을 것이니 이는 물이 바다를 덮음 같이 여호와를 아는 지식이 세상에 충만할 것임이니라(사 11:6-9).

이사야의 이 예언은 메시야가 오셔서 이루실 궁극적인 메시야 왕국의 모습을 상징적으로 묘사하고 있습니다. 그분이 왕으로서 다스리시는 곳에는 우리가 살면서 겪어야 했던 위험과 고통이 사라지고 참 평화와 기쁨만 있을 것입니다. 이 세상의 수고와 슬픔을 내려놓고 하나님의 영광을 찬양하며 영원히 즐거워하게 될 것입니다. 그런데 놀랍게도 가장 끔찍한 처형장소에서 다니엘은 그 메시야 왕국의 모습을 맛보게 된 것입니다. 그야말로 사막에서 샘이 솟아나게 하시는 은혜 아닌가요? 사막에 꽃이 피게 하시는 은총 아닙니까? 가장 절망적이고 가장 위험한 곳에서 가장 안전하고 가장 아름다운 순간을 보낼 수 있게 하시는 그 하나님의 은총을 맛볼 수 있었던 이유는 무엇이었을까요? 맹수의 등을 베개로 삼고 사자의 머리털을 이불처럼 끌어안고 단잠을 잘 수 있었던 비결은 무엇이었을까요?

그것은 다니엘의 대답 속에 들어 있습니다. 그는 자신의 무죄함이 하나님 앞에 명백했기 때문이라고 합니다. 사자굴에 던져져야 했던 것은 크나큰 죄를 지었다는 가정에 의한 것입니다. 큰 잘못을 해서 사자굴에 던져져야 했다면 자신의 죄값을 치룬 것에 불과합니다. 그러나 사자굴에 던져질 만한 잘못이 없다면 사자굴에 던져진 것도 무효가 되어야 합니다. 하나님은 다니엘의 무죄함을 보시고 사자들로 하여금 다니엘을 해치지 못하도록 하셨던 것입니다. 사람을 가장 당당하고 자신있게 하는 것은 바로 무죄함입니다. 무슨 회유와 협박과 심지어는 억울한 일을 당한다 하더라도 내가 잘못한 것이 없으면 꿀릴 것이 없고 당당한 것이지요. 무죄함, 바로 이것이 우리를 지키고 보호해 주는 무기인 것입니다.

또한 다니엘은 왕에게도 해를 끼친 적이 없다고 말합니다. 왕의 신하로서 왕에게 해야 할 도리를 다 했으며 왕을 배반하거나 왕의 분부를 실행하는 데 실패한 적도 없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여기서는 자신의 종교적 신념과 행위가 왕에게 누가 되거나 해로운 것이 아니었다는 항변이기도 합니다. 그래서 하나님께 기도했다는 행위로 사자굴에 들어오게 된 것은 결단코 정당한 것이 아니며, 앞으로도 하나님을 섬기는 일에 대한 자유가 보장되어야 한다는 주장이기도 합니다.

하나님을 섬긴다는 이유 때문에 다른 사람들에게 피해를 끼치는 것은 그래서 옳지 않습니다. 예수 믿고 신앙생활하다 보면 당연히 직장에서나 혹은 이웃과의 사이에서 부딪치게 되는 일들이 있습니다. 그럴 때 우리가 손해를 감수하면서 하나님 섬기는 사람의 모범을 보여야지, 상대방의 양보만 요구해서는 좋은 그리스도인 되기에 성공할 수 없습니다. 자기는 많은 반대와 시련 속에서도 믿음을 지켰다고 주장할지 모르겠지만, 다른 사람들은 예수 믿는 사람들의 이기주의와 독선에 치를 떨고 하나님까지 멀리하게 될 것입니다. 그건 하나님을 제대로 섬기는 방법이 아닙니다. 다니엘이 사자굴에 던져지게 되기까지 하나님 섬기는 데 충실했지만, 언제 다니엘이 하나님 섬긴다는 이유로 다른 사람들에게 피해를 입힌 적이 있던가요?

오늘 우리는 왕궁의 밤과 사자굴의 밤을 비교해 보았습니다. 가장 안전하고 화려하고 안락한 왕궁의 밤은 분노와 슬픔, 그리고 무기력감에 사로잡혀 한숨도 잠을 이룰 수 없는 불면의 밤이었습니다. 반면에 공포스럽고 끔찍한 사자굴의 밤은 메시야 왕국의 평화와 안전이 깃든 참으로 편안하고 꿈같은 밤이었습니다.

여러분의 밤은 어떤 밤입니까? 풍족하고 안전한 왕궁에 거하면서도 잠 못 이루는 밤입니까? 아니면 비록 힘들고 수고로운 삶일지언정 단잠을 자는 밤입니까? 만일 여러분의 삶이 잠 못 이루는 밤으로 점철되고 있다면, 하나님께서 여러분의 고통을 제하시고 상처를 치유해 주시기를 소원합니다. 그래서 그 사랑하시는 자에게 주시는 단잠의 축복을 경험할 수 있게 되기를 바랍니다. 또한 우리로 하여금 단잠을 이룰 수 있도록 해 주는 것은 하나님 앞에서 무죄함이라는 것도 기억해야 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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