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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구원 그 이후 (단 06:24-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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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이전에 사드락과 메삭과 아벳느고가 어떻게 불속에서 구원받았는지를 살펴보았습니다. 밖에 있는 사람까지 태워버릴 만큼 맹렬한 불속에 던져졌지만, 그 세 사람은 불속을 빙빙 돌며 춤을 추었습니다. 거기에는 그들을 구원하러 내려오신 하나님이 계셨기 때문입니다. 마찬가지로 사자굴에 던져진 다니엘 역시 그 맹수들 사이에서 푹신하고 따뜻한 밤을 보냈습니다. 거기에도 그를 구원하러 내려오신 하나님이 계셨기 때문이지요. 이처럼 우리는 의인의 고난 속에 찾아오시는 하나님을 발견할 수 있었습니다. 그리고 하나님과 함께하는 삶은 이처럼 구원과 놀라움을 동반한다는 사실도 보았습니다.

사드락과 메삭과 아벳느고가 불속에서 구원함을 받았을 때는 그 후속조치로 다른 사람들이 불속에 던져지는 일 같은 것이 없었습니다. 그들을 불속에 던져넣은 주체가 왕 자신이었기 때문입니다. 왕이 잘못했다고 스스로 불속에 들어가는 일은 없을 테니까요. 그러나 다니엘이 사자굴에서 살아온 사건에서는 그 후속조치로 많은 사람들이 사자굴에 던져져야 했습니다. 옳지 않은 사람들이 옳은 사람을 옳지 않은 방법으로 사자굴에 던져넣은 것에 대한 보응입니다. 이들이야말로 자신들의 죄값을 받게 된 것입니다. 의롭고 정직했던 다니엘을 참소하고 죽이려 했던 악행이 처벌을 받게 된 것입니다. 물론 이것은 악행에 대한 처벌이라는 관점에서 볼 수도 있지만, 왕의 복수이기도 합니다. 다니엘이 복수하는 것이 아니라 다리우스 왕이 복수를 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왕의 복수 역시 상당히 옳지 못한 요소를 내포하고 있습니다. 다니엘을 참소한 사람들뿐만 아니라 그 처자들까지 모두 사자굴에 던져버렸기 때문입니다. 그들의 가족들이 이 음모에 가담했었는지는 우리가 확인할 길이 없습니다. 그러나 그 가족들 중에는 어린 아이들도 있었을 터이고, 이런 일로 특히 어린 아이들이 희생된다는 것은 정당화될 수 없는 일입니다.

악한 남편이나 아버지 때문이 아내나 자녀들이 죽어야 하는 것은 옳은 방법이 아니지요. 이것이 당시에 행해지던 법이나 관습일 수도 있겠지만, 옳은 것은 아닙니다. 성경에서도 아버지가 신 포도를 먹었는데 아들의 이빨이 시다고 해서는 안 된다고 했어요(렘 31:29). 그러나 무슨 일이 있을 때 가장 먼저 희생을 당하는 것은 아이들입니다. 요즘 전쟁에서 희생되는 어린 아이들이 적지 않습니다. 조지 부시가 이라크의 어린 아이들과 전쟁을 하는 것은 아니지만 결과적으로 조지 부시는 수많은 이라크의 어린 아이들을 학살하고 있습니다. 폭격으로 집이 파괴되고 부모가 죽어 갈 곳이 없고 의지할 곳도 없는 아이들이 속출하고 있고, 병원은 부상당한 아이들로 가득합니다. 물론 아이들만 희생되는 것은 아니지만, 이 재앙으로 죄없는 아이들이 죽어가는 것을 보는 것은 너무나 슬픈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다니엘이 사자굴에서 구원되었다는 사건은 세상의 주목을 받는 일이었습니다. 사자굴에서 하룻밤을 보내고 거뜬하게 살아 돌아온 다니엘을 보고 세상은 얼마나 놀랐겠습니까? 이처럼 성도의 구원은 세상을 놀라게 하는 사건입니다. 사드락과 메삭과 아벳느고의 구원 역시 바벨론 제국에 커다란 파장을 일으켰었지요. 즉 여호와의 구원을 체험하고 하나님이 살아 계시다는 것을 증거한 사람들은 그 이후에도 계속해서 그러한 수준의 믿음의 삶을 살아야 할 기대를 짊어지게 됩니다. 그렇게 많은 사람들을 놀라게 하고 관심을 집중시켰는데, 만약 그 이후에 기대치에 미달되는 행동을 한다면 처음의 구원의 진정성까지 의심받게 될 것입니다. 다니엘은 사자굴에서 살아 돌아올 만큼 그의 의로움과 정직함이 입증되었습니다. 그런데 그 후에 다니엘이 무슨 비리나 부정에 연루된다면, 애초에 사자굴에서 살아 돌아온 것도 무슨 사기극이 아니었을까 하는 의심을 받게 된다는 것입니다.

우리 그리스도인들의 삶이란 구원 이후를 살아가는 과정입니다. 우리가 다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죄사함을 받고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놀라운 구원의 사건을 경험했습니다. 그래서 이제 우리의 삶은 하나님의 거룩하심을 반영하고 예수 그리스도께서 내 안에 살아 계심을 나타내는 것이란 말이죠. 그런데 만약 우리가 예수 믿고 구원받았다고 해 놓고도 우리 모습이 구원받기 전과 다를 것이 없는 것으로 나타난다면, 그 구원이란 것도 가짜가 아닌가, 더 나아가 하나님의 구원이란 것이 실체가 불분명한 허상 아닌가 하는 의심과 오해를 사게 됩니다. 그만큼 우리 그리스도인의 삶은 책임있는 삶인 것입니다.

요즘 많은 기독교인들이 상당히 곤란해하는 일이 있습니다. 바로 조지 부시의 기독교와 그의 믿음이란 것은 과연 어떤 것일까 하는 의문 때문입니다. 왜냐하면 그는 매우 믿음이 독실한 것으로 스스로 주장하고 있고, 또 이라크 침공도 마치 하나님의 계시를 받아서 수행하는 선한 싸움으로 몰아가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같은 기독교인으로서 매우 곤혹스럽지 않을 수가 없는 것입니다. 그러나 기독교적 시각으로 볼 때 부시가 일으키고 있는 전쟁은 결코 정당화될 수 없는 악한 전쟁일 뿐입니다. 그는 젊은 시절에 매우 방탕한 사람이었는데 40세가 되었을 때 거듭남의 체험을 하고 술도 끊고 새사람이 되었다고 합니다. 그런데 문제는 자신의 방탕했던 젊은 시절의 삶과 변화된 현재의 삶을 단절시키는 데 너무 집착한 나머지 매우 광신적인 행태를 보이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모든 것을 선과 악으로 구별하고 자신은 늘 선에 속한 것으로 믿어버립니다. 이것은 근본주의자들의 전형적인 모습입니다.

이것은 기독교 근본주의자들이나 이슬람 근본주의자들에게서 공통적으로 나타나는 현상입니다. 이슬람 근본주의자들은 테러라는 극단적인 행동으로 자신들의 종교적 정열과 믿음을 증명하려고 합니다. 악한 상대와 싸우는 데 있어서 테러라는 악한 방식은 오히려 미화되기까지 합니다. 마찬가지로 조지 부시 역시 악의 축을 자기 마음대로 지정하고 그 악을 제거하기 위한 전쟁을 벌이게 된 것입니다. 그 악을 제거해야 할 자신은 선이기 때문에 하나님과 한 편이라고 믿습니다. 그리고 그 전쟁에 반대하거나 동참하지 않는 세력은 모조리 악한 편이 되고 맙니다. 이것이 바로 근본주의자들의 극단적인 흑백논리입니다.

결국 우리는 조지 부시의 전혀 기독교적이지 못한 악한 행동과 사고를 보면서 그의 구원의 체험을 인정하기가 매우 어려워지는 것이지요. 그가 과거에는 망나니였을망정 지금은 카터 대통령처럼 기독교적 이상을 실천하려는 행동으로 일관하고 있다면, 그의 구원의 체험이 진실된 것이었다고 누구나 인정하고, 젊은 시절의 망나니로부터 완전히 단절되었다고 볼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말끝마다 하나님을 들먹거리며 정의의 이름으로 더 큰 악행을 자행하는 것을 볼 때 그는 경건과 믿음으로 가장했을 뿐 옛날 망나니의 모습을 그대로 답습하고 있다고 결론을 내릴 수밖에 없습니다.

기독교의 이름으로 행해지는 모든 행위가 기독교적인 것은 아닙니다. 유명한 목사님들이 앞장서서 주장하는 일이라고 해서 늘 기독교적인 것은 아니라는 말이지요. 그것이 얼마나 기독교적 이상을 실천하는 것인지, 얼마나 하나님의 말씀을 제대로 이해하고 실행하려는 노력인지 그것이 중요한 것입니다. 지금 한국에서는 이라크 전쟁에 군대를 보내는 문제를 놓고 온 나라가 시끄럽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이라크 파병을 반대하고 그래서 국회에서는 여론에 밀려서 두 번씩이나 파병 결의를 연기하는 데 이르렀습니다. 그런데 일부 교회들은 파병찬성 시위를 하고 있어서 사람들을 헷갈리게 만들고 있습니다. 마치 기독교라는 집단이 이라크의 침공을 지지하고 찬성하는 것으로 보일 수 있단 말이죠. 유명한 목사, 유명한 교회도 기독교의 이상과 성경말씀의 가르침으로부터 동떨어진 행위를 종종 할 수 있습니다. 구원받은 이후의 성도의 책임있는 삶이라는 관점에서 보면 가도 한참 잘못가고 있는 것입니다. 그 유명하다는 몇몇 목사들과 교회들 때문에 기독교 자체의 진정성마저 의심을 받을 수 있기 때문입니다.

여기 보면 다니엘이 사자굴에서 구원받은 사건의 후속조치로 왕의 특별조서가 선포됩니다. 사드락과 메삭과 아벳느고가 불속에서 구원받은 후에도 마찬가지로 느부갓네살 왕의 조서가 선포되었었지요? 그것은 사드락과 메삭과 아벳느고의 하나님, 또는 다니엘의 하나님을 높이고 함부로 하지 말라는 내용입니다. 즉 느부갓네살이나 다리우스나 동일하게 하나님의 큰 구원을 목격했기 때문에 여호와 하나님의 실체를 인정하고 복종하지 않을 수 없게 된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하나님은 여전히 사드락과 메삭과 아벳느고의 하나님이고, 다니엘의 하나님일 뿐입니다. 왜 이 다리우스 왕은 여호와 하나님이 다니엘을 사자굴에서 구원하신 것을 목격하고도 나의 하나님이라고 부르지 못하고 여전히 너의 하나님, 다니엘의 하나님이라고 부르는 것일까요? 만약 이 왕들이 여호와 하나님을 자신들의 하나님으로 믿고 받아들였더라면 여호와 신앙이 바벨론 제국, 또는 페르시아 제국의 종교로 확장되었을 것입니다. 그런데 왜 그러한 놀라운 사건들이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하나의 소수민족의 종교로 인정을 받는 데 그치고 말았을까요?

이것은 구약과 신약의 관점 차이에서 설명될 수 있습니다. 신약의 예루살렘 교회는 박해를 피해 온 세상으로 흩어지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흩어져 가는 곳마다 또 교회가 생겨나고 믿는 사람들이 늘어나 결국 교회는 온 세상으로 확장되었습니다. 그러한 공식에 따른다면 여호와 신앙의 공동체인 이스라엘 민족이 집단으로 바벨론에 이주한 것은 여호와 신앙의 지리적 확장을 도모할 수 있는 절호의 기회가 아닐 수 없습니다. 그러나 바벨론 제국도, 페르시아 제국도 여호와 신앙으로 정복되지 않았습니다. 하나님이 그렇게 하지 않으셨어요.

구약에서 하나님의 관심은 바로 이스라엘에 집중됩니다. 이스라엘의 순종과 거룩이 하나님의 일차적인 관심사입니다. 그 이유는 바로 이 이스라엘을 통해서 메시야이신 그리스도가 오실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신약에서 이미 메시야가 오셨기 때문에, 하나님의 관심은 그렇게 오신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온 세상을 구원하는 것이었습니다. 하나님께서 사드락과 메삭과 아벳느고를 불속에서 구원하시고 다니엘을 사자굴에서 구원하셨던 일차적인 이유는 그것으로 바벨론과 페르시아 제국으로 하여금 하나님을 믿고 받아들이게 하는 것이 아니라, 거기 포로로 잡혀와 있는 이스라엘 민족, 즉 메시야를 잉태할 모체로서의 이스라엘 민족공동체를 성숙한 신앙공동체로 양육하고 보호하는 것이었습니다.

이처럼 구약의 관점과 신약의 관점이 다릅니다. 만약 어떤 사람이 믿음도 좋고 성실하게 하나님을 잘 섬기고 있으면서도 다른 사람의 구원에는 별 관심이 없다면 구약의 이스라엘처럼 사는 사람입니다. 신약의 관점에서는 땅끝까지 이르러 그리스도의 구원을 선포하는 것입니다. 듣든지 안 듣든지 복음을 선포하는 것입니다. 어떤 사람이 다른 사람들에게 임하는 하나님의 구원을 목격하고도 그것을 인정할 뿐 스스로 그 구원에 들어오기를 주저하고 있다면 구약의 이방인이나 다를 바 없습니다. 신약에서는 하나님의 구원을 목격한 사람들이 주저없이 세례를 받고 그리스도인의 공동체에 합류합니다. 구약의 관점과 신약의 관점이 다른 것처럼, 우리가 어떤 관점으로 사느냐 하는 것도 이처럼 커다란 차이를 가져옵니다. 신약의 시대에 산다는 것은 말로 할 수 없는 축복인데, 아직도 구약처럼 산다는 것은 얼마나 큰 불행입니까?

구원받은 이후에도 마치 구원받지 못한 것처럼 사는 것은 논리적으로 모순입니다. 그러나 그것은 우리 삶 속에서 종종 일어나고 있는 현실입니다. 우리의 구원이 하나님의 구원하심을 온 세상에 선포하는 것이 되게 하려면 그 구원에 합당한 모습이 계속해서 이어져야 합니다. 또한 그것은 우리 스스로 그 구원을 이루어가는 과정이기도 합니다(빌 2:12). 왕년에 은혜 체험하지 않은 사람 어디 있나요? 다들 뜨거웠던 시절이 있었고, 주님을 향한 열정에 온 몸과 마음이 타오르는 듯한 시절이 있었습니다. 하지만 옛날에는 그랬는데 지금은 그 순수함과 열정이 사라졌다면, 옛날의 그 열정이 무슨 효력이 있습니까? 오히려 가짜가 아니었을까 의심이나 받겠지요. 한번 구원받았다고 끝나는 것이 아니라 구원받은 이후에 더욱 아름답고 성숙된 믿음의 삶으로 여러분의 구원이 참된 것이었음을 증명해 주세요. 그래서 세상으로 하여금 하나님의 구원하심을 인정하고 그 안에 들어오도록 인도하는 삶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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