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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화 에디슨 말년의 특유의 외고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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축음기 영사기 전구 등 무려 1천3백건이 넘는 발명품을 내놓은 에디슨(1847~1931)도 생애의 말년에는 특유의 외고집으로 인해 실패를 거듭하다가 세상을 뜨고 말았다. 그는 '몸은 머리를 여기 저기 옮겨 주는데 만 필요하다.'고 입버릇처럼 말할 정도로 스포츠에는 전혀 관심이 없었다. 70세가 넘어서도 잠자는 시간이 하루 4시간에서 5시간으로 늘었을 뿐 여전히 일에 열중했다. 그러나 자신의 축음기 회사에 과도한 애착을 느낀 나머지 라디오방송이나 전기식 레코드 플레이어의 시장성을 무시한 것이 그의 실책이었다. 에디슨은 '사람들은 라디오국이 일방적으로 내보내는 프로그램에 곧 싫증내고 우리 회사의 축음기로 자신이 좋아하는 음악을 듣고 싶어 할 것'이라고 우겼다. 세 아들이 아버지를 설득하다 끝내 고집을 꺾지 않자 몰래 전기식 코드 플레이어 제조에 나셨다가 에디슨의 격분을 사기도 했다. 70대 후반이 돼서야 에디슨은 주변의 충고를 받아들여 축음기 생산을 그만두고 라디오 제조에 나셨으나 2년 후 2백만 달러의 손해를 보고 공장 문을 닫고 말았다. 80세가 되자 에디슨은 이번에는 고무 제조에 호기심을 발휘하기 시작했다. 미국 내에 자생하는 식물들에서 고무성분을 추출하는 일이었다. 에디슨의 부인은 회고하기를 '그는 고무 생각만 하고 고무 이야기만 하고 고무 꿈을 꾸었다'고 했으며 '미국은 5년 내에 고무생산국이 된다.'고 자신했다. 그러나 그가 만든 고무는 천연 고무에 비해 제조과정이 복잡하고 무엇보다도 질이 형편없었다. 무엇하나 제대로 풀리는 일 없이 노년을 보내던 에디슨은 결국 1931년 10월 18일 향년 84세로 눈을 감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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