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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주님이 원하시는 길 (마 16:21-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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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떤 행동이 진행되고 있는 도중이나 그 행동이 끝났을 때 주어지기도 하고, 가까운 장래에 좋은 행동으로 변화되기 위한 확률을 높이기 위해 <강화(强化:reinforcement)의 원리>를 사용하는데 대부분 많은 사람들이 <긍정적인 것>보다는 부정적인 방법을 택하고 있다. 그런데 강화의 원리가운데 부정적인 방법으로는 사람을 변화시키기가 어렵다는 것이다. 행동수정 이론, 강화 이론, 행동 심리학, 그리고 행동분석학, 교육학 등 다양한 분야에서도 부정적 방법은 힘의 원리에 의해서 일시적으로 나나타나는 변화라는 본다. 부정적인 행동 때문에 아이를 꾸짖어 보고, 직원의 임금을 삭감해보고, 이교도의 잘못된 신앙을 버리게 하기위해 엄지손가락을 비틀고 팔다리를 잡아 늘리고, 반체제 인사를 고문해도 그 효과는 일시적이다.

스포츠에서 운동선수를 강화하기 위해 코치가, 학교에서 학생을 가르치는 교사가, 가정교육에서 부모가, 직장생활에서 경영진이, 야생동물의 행동을 조형하는 조련사가, 인간사에서 사람이 사람을 강화시키는 방법 중에 가장 훌륭한 방법은 긍정적인 강화 기법을 잘 활용하는 것이다. 예를 들어 델타 항공은 지난 1981년 경기불황 때 상당한 적자를 보았음에도 불구하고, 전체 직원 3만 7000여 명 가운데 단 한명도 감원을 하지 않고 오히려 직원들의 임금을 8%나 인상시켜 주었다. 긍정적인 강화를 기반으로 한 회사의 파격적인 조치에 똑같이 파격적인 방법으로 화답을 했다. 직원들 스스로 분위기를 완전히 바꾼 것은 물론, 사내 모금을 통해 모은 돈으로 3000만 달러짜리 보잉 767한 대를 구입해 회사에 기증한 것이다. (빌4:13) “내게 능력 주시는 자 안에서 내가 모든 것을 할 수 있느니라”

개가 밤만 되면 자꾸 짖을 때 나가서 때려주거나, 아이들이 차 안에서 떠들 때 소리를 꽥지르거나 협박하거나 한 대 후려갈긴다고 해서 해결되는 것이 아니다. 개가 짖어대는 것은 외롭거나 겁이 나거나 지루하기 때문인 것을 이해하고 낮 시간에 충분한 운동을 시키면 밤에는 피곤한 나머지 잠을 잘 자거나 개를 한 마리 더 구해서 같이 자게하면 된다. 아이가 차안에서 떠들고 칭얼거릴 때는 배가 고프거나 피곤하면 징징거릴 수 있기에 음료수나 과자, 과일을 주거나 한 시간 운행 후 10분정도 차를 세우고 밖으로 나가 온 식구가 맨손체조라도 하는 게 좋으며 노래를 부르거나 옛날이야기를 해주거나 재미있는 놀이를 해준다. 남편이 집안에 들어올 때 우거지상을 할 때 싸움을 걸거나 밥을 태우거나 뾰루퉁한 표정을 짓거나, 왜 그 모양이냐고 나무라거나, 그것도 안 되면 울어버린다고 해결되는 것이 아니라 수입이 좀 적더라도 직업을 바꿔 보라고 권면해보든지 배가 고프거나 피곤해서 그런 거라면, 남편이 집에 들어오자마자 치즈 크래커나 따끈한 차 한 잔을 내 놓는 것도 좋다. 스트레스라면 남편과 함께 가벼운 운동을 하는 것도 좋다.

직원이 게으름을 피울 때 그 직원을 나무라거나 비판하고 월급을 깎아 버리겠다고 협박한다고 변화되는 것이 아니다. 근무시간이 아니라 일의 결과를 기준으로 월급을 준다. 도급제나 성과급제로 도입하면 조금이라도 더 빨리 더 잘하기 위해 열심히 일하게 된다. 할리우드 영화는 이런 방식으로 제작된다. 고양이가 주방 테이블에 자꾸 올라갈 때 때려주거나 밖으로 &51922;아 낸다고 해서 해결 되는 것이 아니다. 고양이가 테이블에 올라가는 이유가 먹을 것이라면 치워주고 고양이는 높은 곳에 올라가 사방을 내려다보는 것을 좋아하기 때문에 테이블보다 조금 높은 선반이나 받침대를 만든다음그 위에서 주방 쪽으로 내려다보게 해주면 주인이나 고양이도 맘 편한 하루를 보내게 될 것이다.

믿음의 사람들이 걸어가야 할 길이 있습니다. 바로 그 길은 예수님께서 걸어가신 길입니다. 만왕의 왕되신 예수께서는 좋은 길, 평탄한 길, 풍요로운 길을 걸어가야만 당연한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이러한 길을 마다하지 않으시고 인류를 구원하시기 위해서 고난의 길, 사명의 길, 죽음의 길을 택하셨습니다.

1. 우리들은 사랑하셨던 주님이 가신 십자가의 길을 걸어야 합니다.

장기를 둘 때 장기알은 저마다 특이한 길을 가도록 되어 있습니다. 포에는 포의 길이 있으며, 차에는 차길이 있으며, 마에는 마길이 있으며, 상에는 상길이 있으며, 사에는 사의 길이 있습니다. 우리 인간도 진리를 향해서 걸어가야 할 길이 있습니다. 오직 예수만이 인생의 길을 걸어가는데 바른 길로 가장 빠르게 참된 길로 인도하는 것입니다. 세상의 철학사상이나 세상의 헛된 종교는 이리 저리 시간만 끌다가 인생을 참된 길로 인도하지 못하는 것입니다.

유명한 근대 신학자인 칼 바르트라고 하는 교수가 어느날 시카고 대학에 방문하여 젊은이들에게 신학 특강을 하게 되었습니다. 강의가 끝난 다음에 젊은 친구 하나가 따라오면서 집요하게 질문을 했습니다. '저는 교수님께서 쓰신 책을 다는 못 읽었습니다만 몇 권을 읽었는데 감동적이었습니다. 교수님의 해박한 지식에 저는 늘 놀라곤 했습니다. 한 평생 저술 생활을 하고 가르치고 또 연구하고 그러면서 깨달은 진리의 핵심이 무엇입니까? 한 평생 연구하고 깨달은 가장 중요한 진리가 무엇입니까?' 라고 한마디로 말해달라고 했습니다.

교수님은 껄걸 웃으면서 말했습니다. 어렸을 때 주일학교를 다닐때에 부른 찬송 한 구절을 외웠습니다. '예수 사랑하심은 거룩하신 말일세. 우리들은 약하나 예수 권세 많도다. 날 사랑하심 날 사랑하심 날 사랑하심 성경에 써 있네. (Jesus loves me bible said so.....)'
<예수사랑 하심은...> '그것이 핵심이요 이것이 나의 간증이요 이것이 중심이라'고 말했습니다. 여러분, 많은 복잡한 문제가 있지만 다 잊어버리세요. Jesus loves me. <예수께서 나를 사랑한다>고 하는 딱 한마디만 똑바로 알고 똑바로 느끼면 모든 문제는 다 안개처럼 사라집니다. 문제될 것이 하나도 없습니다. 그가 나를 사랑한다는 문제, 그것이 마스터키요 그것이 생명선이요 모든 것을 이기는 힘입니다.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참된 길을 걸을 때 우리들에게 주께서 다가 오셔서 <사랑하신다>고 말씀하심을 믿어야 합니다. 내 자신 혼자만이 누리기에는 주변에 있는 많은 사람들이 어려움을 당하기 때문에 받은 복을 나눌때 주께서는 다가 오셔서 <내가 너를 사랑한다>고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예수께서 날 사랑하신다면 모든 문제는 해결되어지는 것입니다.” “주께서 날 기억하신다면 우리에게 문제 될 것이 없습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주목하신다면 우리에게는 두려움이 없는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 이후 가장 위대한 복음전도자를 들라면 사도바울을 들 수 있습니다. 기독교 역사상 가장 큰 은총을 받은 사도바울이 그의 삶에 종말을 고하게 되었을 때, 그는 자신의 생애를 돌이켜 보면서 이렇게 외쳤습니다. 내게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외에 결코 자랑할 것이 없다&985171;(갈6:14). 사실 사도바울에게는 자랑거리가 많이 있습니다. 훌륭한 전통과 가계를 자랑할 수 있고, 놀라운 지성과 학문을 자랑할 수 있습니다. 많은 글을 썼기에 기록을 자랑할 수 있고, 선교하면서 나타난 이적과 기적들을 자랑할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그는 그의 모든 마음을 기울여 &985170;내가 자랑할 것은 오직 주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밖에 없다&985171;고 외쳤습니다.

“무엇 때문에 사도바울은 십자가를 소중히 여겼을까?” 하는 질문을 해 볼 수 있습니다. 십자가의 치욕적인 죽음은 인간의 죄가 얼마나 큰지를 알 수 있고, 죄가 지닌 무섭고도 엄청난 깊이를 알 수 있기 때문입니다. 형틀에 죽어가는 자들을 보았다면 ‘죄의 결과가 이렇구나’하는 것을 느낄 수 있듯이, 십자가의 죽음은 죄를 깨달을 수 있습니다. 또 다른 십자가의 자랑은 하늘과 땅에 있어서 가장 고귀한 사랑이 무엇인가를 잘 알 수 있습니다. 십자가 밑에 나아갈 때 사람이 죄악 속에 얼마나 깊이 떨어질 수 있는가 하는 것 뿐 아니라 하나님께서 그 지루한 사랑에서 얼마나 높이 오르실 수 있는가를 깨닫게 됩니다.

2. 자기를 부인하는 십자가의 길을 걸어야 합니다.

기독교의 진리는 자기를 부인하면 자기를 긍정하게 되는 것이며, 잃으면 모든 것을 찾게 된다는 것입니다. 고난의 길을 걸으면 오히려 평안의 길을 얻게 됩니다. 사회적 환경에 역류하는 자만이 진리안에 거할 수 있습니다.

인류의 역사는 고난의 역사라고 할 수 있습니다. 고난 없는 인간 생활은 생각할 수 없습니다. 가정이나 사회나 나라나 어느 곳에서도 이 고난과 불행과 비극은 있습니다. 그런데 고난과 시련을 당할 때 많은 사람들의 공통적인 태도는 그 고난에 대해서 부정적으로 반응한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 믿음의 사람들은 고난을 부정적으로만 생각하지 말고 그 고난속에 파 뭍혀있는 보화를 발견해 낼 수 있어야 합니다.

“십자가의 도가 멸망하는 자들에게는 미련한 것이요 구원을 얻은 우리에게는 하나님의 능력이라”(고전1:18)고 말씀하신 것을 우리들은 기억해야 할 것입니다. 살아계신 하나님을 믿는 우리들에게는 고통의 십자가를 구원을 주시는 하나님의 능력으로 보아야 합니다. 고통과 고난은 우리들을 견고케 할 수 있는 좋은 기회가 됩니다. 조개속에 모래 한 알이 들어가 아픔과 통증을 가져다 줍니다. 그러나 조개는 그 특유의 액체를 내어 모래를 싸고 또 싸서 나중에는 그것이 진주가 됩니다. 고통중에 생겨나는 것이 진주라는 보화입니다. 영롱한 다이아몬드도 수없는 깍임의 아픔을 통과해야지만 만들어 집니다.

동방의 의인이였던 욥이 하루아침에 재산을 몽땅 빼앗기고 10남매가 죽고 자신의 몸은 문둥병으로 만신창이가 되어 버리고 부인도 떠나가 버립니다. 친구들도 그를 구박하면서 힐난했습니다. 그러나 그는 “주신자도 여호와시오 취하신 자도 여호와시오니 여호와의 이름이 찬송을 받으실찌니이다”(욥1:21)라고 고백하면서 고통을 이기도 나니 그 고통은 갑절의 축복을 변화되었던 것입니다. 요셉도 형들의 미움을 받아 애급으로 팔리고 보디발 집에서 종살이를 하다가 누명을 쓰고 감옥에서 13년간이나 고생을 하였습니다. 그러나 그가 이러한 아픔 때문에 후에 총리대신이 되어서 고통가운데 있던 자들을 구원하는 사명을 감당하게 되었습니다.

강철왕 카네기에게 기자들이 와서 성공한 비결을 물었습니다. 기자들의 질문에 그는 “나는 가난한 집에서 태어났기 때문이다”라고 대답하면서 “나는 가난하고 무식하므로 하나님께 생명걸고 간절히 기도하다가 지혜의 선물을 받았기 때문이라” 고 하였습니다. 카네기는 가난이라는 고통 때문에 성공자가 되었던 것입니다. 미국의 축구선수로서 올림픽 결승전에서 2초전에 25m전방에서 골인을 시켜 미국을 승리하게 한 유명한 선수가 있었습니다. 『노만필』이란 이 축구선수는 어렸을 때 소아마비였습니다. 그러나 “할 수 있거든이 무슨 말이냐 믿는 자에게는 능치 못할 일이 없느니라”하는 마가복음 9장 23절 말씀과 “내게 능력주시는 자 안에서 내가 모든 것을 할 수 있느니라”는 빌립보서 4장 13절의 말씀에 사로잡힌 후 그는 “나도 걸을 수 있다”라는 믿음을 가지고 노력하다가 걷게 되었고, 후에는 “나도 뛸 수 있다”라는 믿음을 가지고 난 후 그는 뛰게 되었다고 합니다.

믿는 사람들에게는 약함과 고난과 실패, 그리고 고통이 능력이 될 수 있는 것입니다. 우리들에게도 여러 가지 어려운 십자가가 있습니다. 사람과의 관계에서 오는 사람의 십자가가 있으며, 우리의 육체를 찌르는 질병의 십자가가 있고, 경제적으로 고통을 주는 경제의 십자가가 있습니다. 그러나 십자가를 내가 잘지고 나가게 되면 십자가가 변하여 부활의 영광을 맛보게 되는 것입니다. 경제적으로 당하는 어려움이라든지, 가정적인 문제로 인하여 어려움을 당하는 문제들과 예수님을 믿는다는 사실때문에 핍박을 당하는 고통의 십자가를 믿음으로 지고 나가시면 언젠가는 우리들에게 부활의 날이 오게 될 것입니다. 개인에게 있는 십자가를 잘 지고 나갈 수 있기를 바랍니다.

3. 사명의 십자가를 지고 걸어야 합니다.
세베데의 어머니가 두 아들을 데리고 주님께 와서 하나는 주의 우편에 하나는 주의 좌편에 앉게 하소서 할 때 예수님은 “나의 마시려는 잔을 너희가 마실수 있느냐”(마20:22)라는 질문을 하였습니다. 예수님께서 세베데의 어머니와 자녀들에게 하신 말씀은 사명을 확인하고자 하신 말씀입니다. 예수님을 따르려는 사람들에게는 사명의 십자가를 지어야 합니다. 사도바울은 골로새서 1장24절에서 “내가 이제 너희를 위하여 받는 괴로움을 기뻐하고 그리스도의 남은 고난을 그의 몸된 교회를 위하여 내 육체에 채우노라”고 고백합니다. “너희를 위하여 받는 괴로움을 기뻐한다”고 고백한 것은 사명때문에 와지는 고난을 감수한다는 뜻입니다.

고난은 “십자가”를 뜻한다고 하였습니다. 십자가는 라틴어 ‘크룩스(crux)’라는 말에서 온 것인데 ‘고문대’라는 의미를 가지고 있습니다. 고문대라는 것은 인간이 만든 형벌가운데 가장 참혹한 형벌입니다. 십자가의 형벌은 고대 여러 민족들 사이에서 이미 통용되어 왔던 사형법입니다. 알렉산더 왕도 그가 점령한 지역에서 반기를 드는 사람들을 즐겨 십자가에 매달았습니다. 그는 드로사람 일천명을 십자가에서 처형을 하였다고 합니다.

예수님이 십자가에 매달려 돌아 가셨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십자가에 매달릴 죄인이 아니었습니다. 다만 하나님의 구속 사업을 성취하기 위하여 그 참혹한 십자가의 고난을 당하신 것입니다. 예수님은 고난의 십자가 상에서 완전한 사랑을 이루셨습니다. 죄악가운데 있던 우리들을 구원하신 것입니다. 우리 믿음의 사람들에게도 고난이 사랑을 실천할 수 있는 좋은 기회가 되시기를 바랍니다. 고난은 사랑의 사명때문에 하나님께서 더욱 훈련하고자 주시는 것입니다. 고난은 우리 믿음의 사람들에게 있어서 무서운 것이 아닙니다. 고난은 사랑을 실천할 수 있도록 우리 성도들에게 주시는 하나님의 선물입니다.

십자가를 통해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아름다운 삶을 살아야 합니다. 고난의 현장에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아름다운 삶을 살아야 합니다. 그리고 복된 삶 가운데서 하나님께 영광을 돌려야 합니다. 기독교인에게 가장 위대한 면은 고난가운데서도 하나님께 영광을돌리며 아름다운 삶을 살아가는 것이며, 복되고 풍요로운 삶속에서도 교만하지 않고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삶을 살아가는 것입니다.

고통의 십자가를 지고 있을 때 주님을 바라보아야 합니다. 성 프랜시스코는 성당에서 십자가를 보고 큰 은혜를 받아 평생을 십자가만 생각하며 생활하였고 마침내 성자의 칭호를 받았습니다. 우리 자신들도 고난가운데서라도 하나님을 바라볼 수 있기를 바랍니다. 구원을 향한 구원의 십자가를 잘지게 되면 우리들의 모습을 통하여 많은 사람들이 쉼을 얻게 될 것이며, 구원의 반열에 서게 될 것입니다.

“나를 따라 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좇을 것이니라”고 하신 것처럼 우리 자신들이 정말로 하나님 앞에서 우리 자신들을 부정하고 하나님을 향한 뜨거운 열정이 있다고 하면 우리들은 하나님 앞에서 크게 쓰임을 받을 것이며 고난에서 승리 할 수 있게 될 것입니다. 고난의 십자가가 여러 성도들에게는 능력이 될 수 있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예수는 나의 죄와 수치를 대신 짊어지고 십자가에서 고통을 당했습니다. 그 십자가의 고통을 이 땅에 살아가면서 사명을 감당하기 위해 내가 질 수 있다면 가장 복될 것입니다. 때로은 힘들고 어려워도 사명의 십자가, 자기가 지고 가는 십자가를 잘 지고 갈 수 있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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