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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새 포도주는 새 부대에 (마 09:14-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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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그리스도인의 삶은 일생동안 개인의 보혁의 갈등 속에 놓여진 삶이다.
세계적으로 테러가 발생할 때마다 학자들 사이에서 그 원인으로 거론되는 이론이 문명 충돌론입니다. “문명 충돌”은 헌팅턴이 80년대 중반에 “문명의 충돌”이라는 책에서 주장한 이론입니다. 그의 주장에 따르면 앞으로의 갈등은 경제적인 것도 아니고, 정치적인 것도 아니며, 식민지 영토 분쟁도 아니고, 이념도 아니라, 문화라고 하였습니다. 문화가 나라와 나라 사이, 지역과 지역 사이의 갈등을 일으킬 것이라고 주장했습니다.

이러한 충돌은 나라와 나라 사이뿐만 아니라 집단 대 집단, 가정 대 가정, 개인 대 개인 간에도 나타나는 문제입니다. 문명의 충돌, 곧 문화의 충돌은 전통적인 가치관 사이의 충돌입니다. 한 남자와 한 여자가 만나 결혼하여 한 가정을 이룰 때 나타나는 문제도 이러한 전통적인 가치관 사이의 충돌입니다. 이러한 전통적인 가치관은 그 존재의 정체성을 나타내기 때문에 타협이나 양보가 어려워서 충돌로 이어집니다.

그러나 이러한 문명 충돌보다 더 오랜 기원을 갖는 것이 보혁 충돌입니다. 하나의 문명권 자체 내에서도 충돌이 빈번하게 나타납니다. 한 국가나 민족, 한 가정이나 한 개인 자체 내에서도 빈번하게 나타납니다. 그동안 자신의 모습을 지탱해 오던 전통적인 문화가 새로운 문화를 수용하도록 압박을 받을 때마다 충돌이 일어납니다. 동일 문화권 내에서 발생하는 이러한 문화충돌은 진보와 보수의 충돌로서 “보혁 충돌”입니다.

이러한 보혁 충돌은 하나의 문화권을 진리에 가까이 이르게 할 수도 있고, 진리로부터 더 멀어지게 할 수도 있기에 싸움은 끊임이 없습니다. 그 문화권의 정체성이 분명하다면 보혁의 갈등은 쉽게 해결될 수 있지만, 그 정체성이 모호할 때는 갈등의 해결이 어렵습니다. 그 문화권의 절대적인 정체성과 진리를 알고, 인정하는 존재들은 그 갈등과 충돌을 쉽게 해결하지만, 그렇지 못한 존재들은 갈등과 충돌 속에 살아갑니다.

그런데 우리 그리스도인의 삶은 일생동안 이러한 보혁의 갈등 속에 놓여진 삶입니다. 하나님의 절대적인 진리 안에서 우리의 삶을 돌아보아야 하기 때문입니다. 그동안 자신의 정체성과 삶을 지탱해 오선 전통적인 가치관과 삶의 양식들을 하나님의 절대적인 진리에 비추어 보며, 그 진리에 합당한 가치관과 문화 양식으로 바꿔 가야 하기 때문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주로 섬기는 성도들은 일생동안 이러한 문제 앞에 섭니다.

우리에게 가장 힘든 것 중의 하나는 우리들이 입고 있는 “전통”이라는 옷을 벗는 일입니다. 예수님을 만난 이후에도 그동안 우리가 입어 왔던 “전통”이라는 옷은 좀처럼 벗지 못합니다. 우리는 옛 전통이라는 옷을 입은 상태에서 예수님을 만났습니다. 옛 전통이라는 옷을 입은 상태에서 예수님의 새로운 말씀을 받습니다. 예수님의 말씀을 우리를 향한 유일한 진리로 받아들일 때는 우리의 전통을 벗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 유일성을 받아들이지 못할 때는 옛 전통 속에 예수님의 말씀을 담습니다.

진리 되시는 예수님께서는 우리들이 새로운 말씀을 받을 수 있는 새로운 전통의 옷을 입기 원하시지만 우리 스스로 새로운 안목 속에서 새로운 옷으로 갈아입지 못합니다. 이럴 때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옷을 강제로 벗겨 주십니다. 하지만 우리의 마음이 옛 전통에 익숙해 있기 때문에 하나님의 그러한 작업에 순수하게 동의하지 못합니다. 여전히 우리의 개인적인 옛 전통을 고수하면서 예수님의 말씀을 받기 때문에 옛 전통도 그 기능이 상실되고, 예수님의 말씀도 잃습니다.

우리들이 문화 충돌의 상황에서는 보수적인 힘으로 이겨내며 견딜 수 있습니다. 하지만 자신의 내부에서 발생하는 보혁의 충돌은 자신의 정체성을 중심으로 어느 한 편이 진리에 무릎을 꿇을 때까지 계속되며, 그때까지 갈등 속에 살아갑니다. 그러므로 보혁의 갈등에 놓여진 존재들마다 갈등에서 벗어나는 지름길은 신속히 그 존재의 정체성을 이루는 진리 앞에 무릎 꿇는 일입니다. 진리 가운데 하나가 되는 것입니다.

2. 보혁의 갈등 속에서 진리를 향해 마음을 여는 질문이 있어야 한다.
하지만 그리스도인들에게는 소망이 있습니다. 세상 사람들과 세상 공동체가 겪는 보혁의 갈등과는 다르기 때문입니다. 세상에는 절대적인 진리가 없습니다. 절대적인 진리를 인정하지도 않습니다. 보혁의 갈등을 정리하고 통합할 조정자도 없습니다. 세상에서의 보혁의 갈등은 보혁의 충돌로 이어지며, 그 해결의 결국은 분열입니다. 공동체는 분열되어 다양한 집단을 형성합니다. 개인적으로는 분열되어 정신분열 증세에 빠집니다.

세상 사람들은 이러한 공동체의 분열을 합리화하기 위하여 상대주의를 최고의 가치로 여깁니다. 다원주의 이론을 최고의 이론으로 받아들입니다. 상대주의적이며 다원주의적인 이론들은 외적으로 서로를 인정하는 삶의 방식을 취합니다. 그러나 그들 자신이 내적으로 품고 있는 전통적 가치를 상대적 가치로 양보하여 정체성의 혼란을 겪든지, 그 가치를 고수함으로써 언제든지 폭발할 수 있는 내적인 갈등을 품습니다.

이들은 다수의 공동체와 다수의 존재들 속에서도 고독합니다. 내적인 진실이 외적인 삶과 일치되지 않기에 언제나 내적인 갈등 속에 존재하면서도 그 사실을 외적으로 표현하지 못합니다. 겉으로는 다원주의를 따라가야 하기에 자신의 내적인 갈등을 노출하지 못하고, 외적인 갈등까지도 내적인 분열증세 속으로 끌어들입니다. 이러한 삶이 각종 증세로 세상 가운데 나타나는 모습들을 봅니다.

그러나 그리스도인들은 자신의 옛 사람의 전통이 틀렸다는 사실을 인정합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주시는 새로운 가치관, 새로운 전통이 진리로서 옳으며, 그 진리를 따를 때 우리 인생이 행복하다는 사실도 받아들입니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인들은 정체성이 분명합니다. 옛 전통과 새로운 전통 사이의 보혁 갈등이 발생하더라도 하나님의 진리 앞에 무릎 꿇기만 하면 순식간에 모든 갈등이 해결됩니다.

우리는 마태복음 9장에서 보혁 갈등에서 승리하는 그룹과 실패하는 그룹을 만납니다. 두 그룹 모두 전통적인 가치를 지니며, 그 전통을 따라 자신의 정체성을 유지해 왔던 그룹들입니다. 그러나 한 그룹은 예수님의 진리 앞에서 보혁 갈등을 승리로 이끌며, 진리에 기초한 새로운 인생을 출발합니다. 반면에 다른 한 그룹은 예수님의 진리 앞에 도전하며 옛 전통도 잃어버리고, 진리를 따르는 새로운 인생도 잃어버립니다.

이들은 예수 그리스도의 진리를 대할 때 나타내는 질문부터 다릅니다. 먼저 실패한 한 그룹을 보면, 마 9:11에서 예수님께서 세리 마태를 제자로 부르실 때 “바리새인들이 보고 그 제자들에게 이르되 어찌하여 너희 선생은 세리와 죄인들과 함께 잡수시느냐”라고 질문하였습니다. 이들의 질문은 “비난과 야유”의 의도를 지닌 질문입니다. 이들의 접근은 자신들의 전통적인 가치를 보호하기 위한 질문입니다. 세리와 죄인들과는 함께할 수 없다는 전통적 가치를 통해 예수님의 말씀을 바라봅니다.

이들의 질문은 진리를 중심으로 자신들의 전통적인 가치를 변화시키고자 하는 질문이 아닙니다. 예수님의 말씀과 사역과 각종 요구들이 자신들이 정체성을 유지해 왔던 전통적인 가치를 인정하는 것인지, 거부하는 것인지에 대한 관점의 질문입니다. 전통적인 삶과 전통적인 규례를 지키기 위하여 예수님의 새로운 가치 체계가 진리인지 여부에 관계없이 도전하는 갈등 확대의 질문입니다. 예수님은 이러한 비난과 야유성 질문에 대해서는 책망을 하시며, 마 9:13에서 진리를 배우라고 명령하십니다.

그곳에 있던 다른 한 그룹에서 승리하는 두 번째 질문을 합니다. 마 9:14에 보면, “그 때에 요한의 제자들이 예수께 나아와 가로되 우리와 바리새인들은 금식하는데 어찌하여 당신의 제자들은 금식하지 아니하나이까”라고 질문하였습니다. 이 질문은 바리새인들의 질문과 달랐습니다. 이 질문은 자신들이 모르는 사실을 알고 이해하기 위한 “정직한 질문”이었습니다. 예수님의 말씀과 사역에 대한 의문은 바리새인 뿐 아니라 세례 요한의 제자들도 마찬가지였으나 이들은 정직한 질문을 하였습니다.

세례 요한의 제자들은 전통적인 생활양식에 대한 예수님의 태도를 물었습니다. 이들의 의문은 당시의 전통적인 생활양식에 대한 것입니다. 유대교의 삼대 행위는 구제, 기도, 금식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의 제자들이 금식을 하지 않음으로서 이들 중의 하나를 파괴하는 것으로 보였습니다. 유대인이라면 당연히 따라야 할 당시의 삼대 행위를 파괴한 모습입니다. 요한의 제자들은 세례 요한, 예수님의 말씀, 각종 이적들을 보면서도 전통의 파괴처럼 보이는 것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몰라서 질문한 것입니다.

바리새인들의 질문은 자신의 전통적인 삶의 양식과 가치관을 보전하기 위한 도전적이며 거부하는 질문이었지만, 세례 요한의 제자들은 그 의미를 진리 안에서 발견하기 위한 질문입니다. 자신이 지켜오던 전통이 진리와 만날 때 맞이하는 혼란을 해결하기 위한 질문입니다. 언제나 진리를 향하여 마음의 문을 열어두는 존재들의 질문입니다. 예수님은 이렇게 정직한 질문에 대해서는 긴 설명을 통해 사실을 이해 시켜 주셨습니다.

자신의 전통적인 가치와 삶의 양식을 지키기 위하여 진리 되신 예수님께 도전적으로 닫힌 질문을 하는 존재들은 진리 되신 예수님께 버림받습니다. 하지만 자신의 전통적인 가치와 삶의 양식을 예수님의 진리 안에서 변혁시켜 나가기 위하여 진리 되신 예수님께 열린 질문을 하는 존재들은 진리 되신 예수님의 인도하심을 받아 예수님의 진리 안에서 옛 전통과 삶의 의미를 깨달으며 새로운 삶을 살아갑니다.

3. 보혁의 갈등은 새 포도주를 담을 새 가죽부대를 준비하게 한다.
예수님께서는 전통에 대한 혼란을 겪으며 정직한 질문을 하는 요한의 제자들에게 자세한 답변을 주셨습니다. 마 9:15에서 “예수께서 저희에게 이르시되 혼인집 손님들이 신랑과 함께 있을 동안에 슬퍼할 수 있느뇨 그러나 신랑을 빼앗길 날이 이르리니 그 때에는 금식할 것이니라”라고 답변하셨습니다. 혼인 잔치 중에 해야 할 일의 비유를 통해 세례 요한의 제자들이 금식의 전통의 의미를 깨닫게 하셨습니다.

전통적으로 혼인잔치 7일간 신랑 신부는 금식, 경찰 붙이는 의무가 면제되었습니다. 신랑 신부는 왕과 왕비 취급을 받았습니다. 신랑의 친구는 신랑 신부와 함께 기뻐하며 축하합니다. 그러나 대적들이 신랑을 잡아가면 그때 슬픔 때문에 금식합니다. 그러므로 신랑 되신 예수님께서 함께 계신다면 친구들은 금식할 필요가 없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메시아로, 즉 신랑으로 맞아들이는 자들은 금식하지 말아야 합니다. 그러나 예수님의 메시아 되심을 모르고, 거부하는 자들은 여전히 금식할 것입니다.

바리새인들도, 세례 요한의 제자들도 이러한 혼인잔치의 전통을 알고, 지켜왔습니다. 메시아의 도래가 이러한 혼인잔치의 시대로 들어가는 것도 알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바리새인들은 예수님의 메시아이심을 몰랐습니다. 예수님의 도래가 메시아 시대에 들어간 것으로서 유대 사상이 말하는 기쁜 혼인 잔치의 시대에 들어간 것이라는 사실을 몰랐습니다. 예수님의 제자들은 유대인의 삼대 행위를 파괴한 것이 아니라 메시아와 함께하고 있는 자들로서 바른 행동입니다.

예수님은 이 사건을 통하여 마 9:16-17에서 옛 전통과 새 시대의 관계를 다음처럼 설명하셨습니다. “생베 조각을 낡은 옷에 붙이는 자가 없나니 이는 기운 것이 그 옷을 당기어 해어짐이 더하게 됨이요 새 포도주를 낡은 가죽 부대에 넣지 아니하나니 그렇게 하면 부대가 터져 포도주도 쏟아지고 부대도 버리게 됨이라 새 포도주는 새 부대에 넣어야 둘이 다 보전되느니라”

예수님은 먼저 옷 깁는 비유를 통해 설명하십니다. 예수님은 “생베 조각을 낡은 옷에 붙이는 자”가 없는 것같이 새시대를 낡은 전통에 맞추지 않는다고 하셨습니다. 생베는 직조물의 처리 공정 중의 하나로 제품을 완성하기 전 직포가 더 줄지 않도록 만드는 공정을 거치지 않은 것입니다. 생베 조각을 사용하면 옷 깁은 후 줄어들어 주위의 헌 부분을 망가트립니다. 그러므로 생베 조각은 새 옷에만 사용해야 합니다.

예수님은 또한 새 포도주의 비유를 통해 설명하십니다. 가죽 부대는 양, 산양, 송아지 등을 통으로 벗겨서 털 있는 부분이 안으로 들어가게 하고, 네 다리와 꼬리의 구멍을 막고, 목 자른 부분을 자루의 어구로 한 것입니다. 새 가죽 부대는 유연하고 신축성이 있지만 헌 가죽 부대는 딱딱해져서 신축성이 없습니다. 또한 새 포도주는 발효가 끝나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새 포도주를 낡은 가죽부대에 담으면 새 포도주의 발효에 의한 압력으로 낡은 가죽 부대가 찢어집니다.

두 설명 모두 유대인의 옛 전통의 틀에 메시아의 새시대를 넣는 것이 불가능하다는 설명입니다. 예수님의 구원의 새시대는 유대교 전통의 모든 제도와 근본적으로 맞지 않습니다. 바리새인들이 고수하기 원하는 옛 전통과 가치관은 신랑 되신 예수님께서 오시기 전까지만 유효합니다. 신랑 되신 예수님을 맞이하는 자들은 새 것을 위해서 낡은 것을 버려야 합니다. 예수님과 함께하는 새시대는 율법의 형식주의 틀에 맞지 않습니다. 그러므로 신랑 되신 예수님을 위한 새 가죽부대를 준비해야 합니다.

우리에게 신랑으로 임하신 그리스도의 복음은 새로운 생활 태도와 생활 방식이라는 새로운 가죽 부대를 요구합니다. 옛 전통의 참의미를 깨닫고 새시대에 맞는 전통을 형성해야 합니다. 우리의 새 삶을 위하여 주시는 예수님의 말씀을 우리의 옛 전통의 가치관과 틀에 가두지 말아야 합니다. 이제 우리는 복음으로 변화된 새생활을 담을 수 있는 새 가죽부대를 만들어 나가는 안목의 변화가 있어야 합니다. 우리는 옛 것을 보완하는 존재가 아니라 새 것으로 새로운 나라를 이끌어 나가는 자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우리의 삶 가운데 나타나는 각종 보혁의 충돌을 온전한 안목으로 바라보아야 합니다. 우리에게 나타나는 보혁의 갈등이 예수님의 진리 안에서 오는 갈등이라면 감사드려야 할 갈등입니다. 하나님은 그 갈등을 통하여 우리들이 바꾸어야 할 낡은 가죽부대가 무엇인지 알게 하시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을 만나기 전에 우리 자신을 지탱해 오던 낡은 가죽부대가 무엇인지 알게 하시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이제 더 이상 우리 자신을 지탱해 오던 우리의 전통적인 가치관과 삶의 양식 안에 예수님의 새시대의 말씀을 가두지 말아야 합니다. 우리는 그럴 때마다 예수님의 진리의 말씀에 불순종하며 쓰러지는 우리들의 모습을 경험해 왔습니다. 또한 우리의 정체성을 유지해 오던 전통적인 가치관도 도전을 받으며 무너져 가는 모습을 경험해 왔습니다. 그러므로 이제는 예수님의 진리의 말씀을 담을 수 있는 우리의 새로운 가죽 부대를 만들어 나가는 인생의 방법적인 비전을 찾아야 합니다.

언제나 새 것은 새로운 세계관을 형성합니다. 하나님의 모든 말씀은 우리 인생의 새로운 포도주입니다. 성령께서 새 포도주를 발효시켜 부풀게 하십니다. 그러므로 첫째로, 우리들이 지켜오던 전통적인 가치관과 삶의 방식을 언제든지 변혁시켜 나갈 수 있는 “개방적인 사고”를 지녀야 합니다. 우리의 전통적인 생각과 삶의 방식은 진리가 아닙니다. 우리에게 임하신 예수 그리스도가 진리이며, 새 포도주 되신 예수님을 담을 수 있는 새로운 가죽부대와 같은 가치관과 삶의 양식만이 진리입니다.

둘째로 자신의 전통적인 가치관과 삶의 양식을 역사 진행적인 관점으로 바라보는 “역사적인 사고”를 지녀야 합니다. 우리의 개인적인 고정관념이나 사상이나 삶의 양식은 예수님의 말씀을 따라 시간적으로 변혁되어 가는 모습이 정상이며 진리입니다. 개인의 가치관의 변화가 결코 혼돈이 아니며 정체성 상실이 아닙니다. 그리스도인에게는 개인의 삶의 양식의 변화가 결코 실패가 아닙니다. 새 포도주의 발효에 따라 새로운 가죽부대를 만들어 가는 역사적인 흐름으로서 성도의 정체성입니다.

셋째로 자신의 전통적인 사고 체계와 삶의 양식을 인간 중심으로 바라보는 “인간 중심의 사고”를 지녀야 합니다. 바리새인들은 금식을 일 중심으로, 물질 중심으로 받아들였기 때문에 금식이 예수님에 의해서 낡은 가죽부대로 버려졌습니다. 금식은 예수님을 맞이하기 위한 것이며, 신랑 되신 예수님을 빼앗길 때 나타내는 표현입니다. 금식보다 예수님이 우선입니다. 새 포도주는 사람 중심으로 발효됩니다. 우리의 전통은 이처럼 모두 예수님의 말씀의 진리 앞에서 새 부대로 변혁되어야 가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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