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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그리스도인의 가치관 (마 06:19-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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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 어느 교회에서 실제로 있었던 일이랍니다. 그 교회에 결혼식이 있었습니다. 그 교회 담임목사님이 주례를 서시는데, 목사님의 주례설교가 끝나고 축가 순서가 되었습니다. '소프라노 아무개씨가 나와서 축가를 부르겠습니다. 제목은 불란서 샹송 '사랑의 기쁨'입니다. '사회자가 가수를 소개했습니다. 신부를 잘 아는 그 소프라노는 나와서 노래를 부르기 시작했습니다. 아름다운 목소리로 사랑의 기쁨을 노래할 때 사람들은 그 노래에 취해서 감상하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왠일인지 그 주례 목사님의 얼굴이 상당히 심각해졌습니다. 이윽고 예식이 끝난후 그 주례 목사님이 그 사람을 불러서 이렇게 말했습니다. '당신 오늘 그걸 축가라고 부른거요?' 당황한 그 사람이 물었습니다. '목사님 뭐가 잘못되었습니까?' '잘못되다마다 그 노래가사가 무슨 뜻인지 알아요?' 모른다는겁니다. 무슨 뜻인지는 잘 모르지만 사랑의 기쁨을 노래한 것 아닙니까? 하면서 노래 멜로디가 좋아서 불란서말로 배웠다는 것입니다. 그 목사님이 딱한 표정으로 그 노래의 뜻을 이렇게 해석해 주었습니다. 원어로 부르고 있던 그 노래의 가사는 이랬습니다. '사랑의 기쁨은 어느덧 사라지고 내 마음속엔 슬픔과 눈물만 남았네...'

여러분 이것이 '사랑의 기쁨'이라는 제목으로 불리고 있는 그 노래의 가사입니다. 가사의 뜻을 제대로 알았더라면 절대로 결혼식 축가로 부를 수 없는 노래입니다. 그런데도 사람들은 노래제목이 '사랑의 기쁨'이니까 아 저 노래가사는 사랑의 기쁨을 노래한 것이구나...하면서 막연히 은혜(?)받고 있었던 것입니다.
엄청난 오해가 아닐 수 없습니다.

우리가 성경말씀을 읽을 때에도 때론 이런 선입견의 안경을 벗어야 필요가 있습니다. 그 말씀에 나오는 단어 몇 개만 보고서 '아, 이 말씀은 이런 말씀이겠지...'하고 너무 쉽게 단정을 해 버리는 경우가 있습니다. 그래서 원래 성경이 말하고 있는 메세지를 놓치거나 엉뚱하게 오해를 하는 경우가 있습니다.

오늘 읽은 19절의 말씀도 그렇습니다. '너희를 위하여 보물을 땅에 쌓아 두지 말라 거기는 좀과 동록이 해하며 도적이 구멍을 뚫고 도적질하느니라 오직 너희는 보물을 하늘에 쌓아두라 거기는 좀이나 동록이 해하지 못하며 도적이 구멍을 뚫지도 못하느니라'

이 말씀은 주로 교회에서 헌금을 강조할 때 즐겨 사용해 왔던 구절입니다. '너희를 위하여 보물을 땅에 쌓아 두지 말라'--여러분 여러분이 가진 물질을 이 땅에 쌓아두고 있지 마십시오. 오직 하늘에 쌓아 두어야 합니다. 하늘에 쌓기 위해서 우리는 이 땅에 있는 동안 헌금도 많이 하고 구제도 많이 하고 주를 위해 써야 합니다. 주를 위해 사용할 때 하늘에는 적금통장처럼 보물이 착착 쌓입니다....저는 그런 설교를 참 많이 들었습니다. 이런 설교 말씀은 성경 전체의 교훈을 놓고 보면 틀린 말은 아닙니다. 우리가 주를 위해 사용할 때 하나님은 그 헌신을 기억하십니다. 하늘에 상을 주시는 것이 맞습니다.

그러나 적어도 오늘 이 산상보훈에서 주님이 이 말씀을 하실 때에는 전혀 그런 뜻이 아닙니다. 주님이 갑자기 우리의 헌금생활에 대해 말씀하고 계신 장면이 아니라는 말입니다.

오늘 본문이 나오기 전 그 앞에서 주님은 무슨 말씀을 하고 계셨습니까? 하나님앞에 나오는 사람들이 가지는 두가지 삶의 방식, 곧 사람에게 보이려고...의 삶의 방식을 따라 사는 사람들이 있고, 하나님 앞에서 은밀히 행하는 하나님 앞에서....의 삶의 방식으로 세상을 살아가는 사람들이 있다는 말씀을 하시던 중이었습니다.

기도를 하고 구제를 하고 금식을 하는데 하나님이야 어떻게 보시든지 오로지 사람들이 이런 나를 얼마나 알아주느냐 사람들이 이런 나의 경건을 보고 얼마나 칭찬해 주느냐?에만 관심을 가진 외식적인 사람들에 대해서 말씀하시면서 이런 사람들은 사람이 주는 칭찬과 명성의 상은 받을지 몰라도 하나님이 주시는 상은 절대로 받을 수 없다고 말씀하시던 중이었습니다. 그러면서 오직 은밀한 중에 의를 행하는 사람이 은밀한 중에 갚으시는 하나님의 상을 받을 수 있다는 말씀을 하고 계셨습니다. 18절

그리고 이어서 나오는 말씀이 오늘 본문입니다. '너희를 위하여 보물을 땅에 쌓아두지 말라, 오직 너희를 위하여 보물을 하늘에 쌓아두라..' 그러면서 결정적으로 21절의 이 말씀을 하십니다. '네 보물있는 그 곳에는 네 마음도 있느니라' 히브리인들은 어떤 진리를 설명할 때 두가지 상반되는 것들을 서로 대조시키면서 강렬하게 진리를 드러내는 대조법을 자주 사용했는데 지금 주님은 바로 그런 방법을 사용하고 계십니다. 두가지가 계속 대비되고 있습니다.

하나는 사람에게 보이려고 사는 사람들이 있고, 또 다른 하나는 하나님께 보이려고 의 삶을 사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사람에게 보이려고..의 삶을 사는 사람이 원하는 상은 무엇입니까? 사람들이 주는 상, 곧 사람들의 칭찬 인정 명예 같은 것들입니다. 눈에 보이지 않는 하나님이 알아주시느냐, 하나님이 인정하시고 칭찬하시느냐?..하나님이 갚아주시느냐..?이런 것은 그들의 관심사가 아닙니다. 그들이 좋아하고 원하는 가치는 눈앞에 함께 사는 사람들이 알아주느냐 사람들이 귀에 듣기 좋은 말로 칭찬하느냐 사람들이 그런 나를 인정하고 우대하고 훌륭하게 봐주는가? 하는 것들입니다.

그러면 하나님 앞에 사는 사람들이 원하는 상은 무엇입니까? 하나님이 주시는 상입니다. 그들은 사람들이 알아주지 않아도 됩니다. 사람들이 오해를 해도 별로 개의치 않습니다. 그들이 관심을 가지고 있는 것은 오로지 하늘에 계신 하나님 아버지께서 그들을 인정하시느냐 아니냐, 하나님 아버지께서 기뻐하시고 칭찬하시고 알아주시느냐? 이것만이 중요할 뿐입니다.

이런 두 사람은 가치관이 서로 다른 사람들입니다. 사람들이 주는 상을 귀하게 여기고 그 상을 얻고 쌓아가는 일에 관심을 두는 사람은 어떻게 하든지 사람들의 시선과 눈길을 의식해서 살아가게 됩니다. 그러나 하나님이 주시는 상을 귀하게 여기고 사모하는 사람은 어떻게 하든지 하나님의 기준에 맞추어서 하나님이 인정하시고 주시는 상을 쌓아나가는 일에 관심을 두고 살게 됩니다. 한 사람은 하늘을 바라보고 삽니다. 그러나 다른 한 사람은 땅에 있는 사람들을 바라보고 삽니다. 여기에 두 사람간의 차이가 있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에서 말하는 보물이라는 것은 두 사람이 가치있게 여기고 살아가는 삶의 목적을 말합니다. 무엇을 가치있게 여기고 사는가? 무엇에 마음과 관심을 두고 사는가? 하는 것입니다. 네 보물있는 곳에 내 마음도 있다 고 하셨습니다. 과연 그렇습니다. 사람은 자기가 가치있다고 여기는 것들에 늘 마음이 쏠리게 되어 있습니다. 마음이 쏠릴 뿐 아니라 그 가치있다고 생각되는 것을 중심으로 세상을 살게 됩니다.

요즘 소위 교육이민을 떠나는 가정들이 많습니다. 주로 30,40대의 중산층들이 이런 경향이 많다고 그러지요. 먹고 살만한 사람들입니다. 나름대로 자리를 잡았고 전문분야에서 일하는데 별로 불편함이 없는 사람들입니다. 그런데도 먼 미국으로 호주로 캐나다로 떠납니다. 가봐야 전문분야에서 일하지도 못하고 고생도 하게 되는게 뻔한데도 굳이 이민을 떠납니다. 그들이 떠나는 이유는 무엇입니까? 자녀교육이라고 하는 보물에 최고의 가치를 두기 때문입니다. 그 분들은 그게 보물입니다. 내가 전문분야에서 얼마나 전문성있는 삶을 사느냐? 하는 것은 자녀교육에 비하면 보물이 아닙니다. 얼마나 편하게 사느냐? 하는 것도 그들이 가장 가치있게 여기는 보물에 비하면 얼마든지 희생해도 좋을 가치들입니다. 그러니 그들이 원하는 그 보물을 위해서 다른 가치를 다 포기하고 이민을 떠나는 것입니다.

그러나 반대로 전에 경북 안동의 어느 종가집 종손을 보니까 그 분은 종가집을 지키기 위해서 자식도 먼 타지에 학교로 나가지 못하게 하고 꼭 집 가까운 학교에 보냅니다. 결혼도 자식이 좋아하는 여자가 아니라 종가집일을 잘 할 수 있는 며느리감을 구하고 있었습니다. 집이 낡고 불편해서 힘든게 한 두가지가 아니지만 종가집을 지키고 종손의 사명을 다한다고 하는 그 보물때문에 참고 견디고 있었습니다. 그 분들에게 있어서의 보물은 종가집 종손이라는 가치입니다. 그 보물을 위해서는 자녀를 비롯한 어떤 가치도 얼마든지 희생하고 손해볼 수 있는 것입니다. 보물있는 곳에 마음이 있는 것입니다.

오늘 주님은 우리들에게 선택하라고 요구하십니다. 땅에 있는 보물, 곧 사람들이 칭찬하고 사람들이 인정하고 사람들이 알아주는 이 땅의 가치를 선택해서 이 땅에 보물을 잔뜩 쌓아놓은 이 땅의 부자로 살든지, 아니면 은밀한 중에 보시는 하나님이 알아주고 하나님이 인정하고 하나님이 주시는 하늘의 상을 차곡차곡 쌓아가며 살든지 둘 중에 하나의 삶을 분명히 하라고 요구하고 계십니다.

24절을 읽읍시다. 중심이 두 개인 원이 존재할 수 없듯이 땅의 보물도 얻고자하고 하늘의 보물도 얻고자 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사람이 하늘과 땅을 동시에 바라볼 수 있습니까? 하늘을 보고 있는 동안에는 땅이 보이지 않습니다. 반대로 땅을 내려다 보고 있는 동안에는 내 위에 푸른 하늘이 있다는 것을 깨닫지 못하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여러분은 무엇을 보물이라고 여기며 살아가십니까? 눈 앞에 보이는 사람들이 주는 상급, 이것을 놓칠 수 없는 최고의 보물로 여기고 사십니까? 아니면 하나님은 눈에 보이지 아니하시지만 그 눈에 보이지 아니하시는 하나님이 알아주시고 인정해 주시며 결국은 장차 놀라운 영광으로 안겨 주실 그 하나님의 상을 바라보며 그 상을 내 인생 최고의 보물로 여기며 그 보물을 얻기 위해 오늘도 살아가고 계십니까?

사람들이 주는 상은 금방 눈에 확 띕니다. 잘한다는 칭찬도 눈에 보이고, 역시 누가누가 훌륭하다는 박수소리도 귀에 금방 들립니다. 또한 사람들이 주는 상은 주로 외형적인 것을 보고 줄 때가 많습니다. 사람을 많이 모아 놓으면 잘했다고 큰 일을 했다고 인정해 줍니다. 큰 건물을 지어 놓으면 뭔가 대단한 성과를 이루어 내었다고 환호를 보냅니다.

목회를 하다보면 눈이 금방 드러나는 일들을 하고 싶은 유혹이 늘 일어납니다. 큰 예배당을 짓고 싶고, 수단방법이야 어떻든지 일단 사람을 많이 모아서 훌륭하다는 이야기도 듣고 싶고...설교를 하거나 목회를 해도 사람들의 눈에 당장 좋아 보이고 사람들이 금방 알아주는 쪽으로 일을 하고 싶은 생각이 들 때가 많습니다. 장기적으로 꾸준하게 무얼 하기보다는 단기적으로 금방 눈에 그 효과가 드러나는 그런 일들을 해서 당장 사람들에게 인정받는 그런 생각이 안 드는 것도 아닙니다.

사람들이란 것이 당장 눈에 보이는 것만을 가지고 쉽게 판단해 버리기 때문에 큰 건물을 가진 수천명 교회에서 목회를 하면 훌륭한 사람이고 목회에 성공했다고 칭찬하고, 개척교회나 시골교회에서 교인 몇 사람과 씨름하고 있는 목회자는 뭔가 문제가 있고 실패한 사람인 것처럼 평가하는 것이 사람들의 평가입니다. 물론 성실하고 하나님앞에서 참 진지하고 바르게 목회를 해서 큰 교회를 이룬 분들이 많은 것이 사실입니다. 그러나 복음사역에 있어서의 성공과 실패를 그런 외형적인 것만을 보고 판단한다고 하는 것은 얼마나 위험한 일인지 모릅니다.

누가 성공한 사람이고 누가 실패한 사람입니까? 그 성공과 실패를 누가 판단하는 것입니까? 우리나라에 와서 복음을 전하다가 최초로 순교한 영국의 토마스 선교사는 사실 복음을 제대로 전해 보기도 전에 죽었습니다. 복음전하기 위해 타고 들어온 배가 하필이면 평양사람들을 자극해서 불에 타고 그 배의 선원들이 죽을 때 같이 죽어버렸습니다. 그 당시의 평가로 본다면 그는 실패한 사람이었습니다. 선교사가 복음도 제대로 전해 보지도 못하고 상선을 얻어 타고 들어오다가 죽었으니 누가 그를 성공한 선교사라고 부를 수 있겟습니까? 그렇지만 하나님께서도 그를 실패했다고 말씀하실까요? 하나님께서도 그의 죽음이 의미없는 죽음이었다고 말씀하시겠습니까? 사람들은 모릅니다. 눈에 보이는 것만 보지 그 뒤에 숨은 진실은 모릅니다. 그러니 그런 불완전한 사람들의 인정과 칭찬을 보물로 알고 그 보물을 얻기 위해 살아간다고 하는 것이 얼마나 어리석은 일이겠습니까?

19절입니다. 이땅의 보물이 가지는 속성은 좀이 먹고 동록이 해하고 도적이 가져가 버려서 결국 손에 남는 것이 없다고 말씀하십니다. 그렇습니다. 사람들이 주는 칭찬의 상은 시간이 지나면 금새 지나가버립니다. 오래 가지 않습니다.

성도 여러분 세상의 영광이란 것은 그런 것입니다. 오래 가지 않습니다. 지금은 크게 보이지만 상황이 변하고 여건이 바뀌면 칭찬도 욕이 되고, 영광도 수치가 되는 것이 세상의 영광입니다. 1990년대 소련 공산당이 무너졌을 때 모스크바 시내에서는 레닌시대 스탈린 시대에 받았던 훈장들을 길거리에 내다 빵 한조각과 바꾸어 먹으려 하던 많은 인민영웅들이 있었습니다. 그들이 손에 손에 들고 있던 훈장들은 한 때 최고 영광의 상징이었습니다. 그러나 시대가 바뀌니까 그 영광들은 한 조각 빵보다 못한 쇠조각으로 전락해 버렸던 것입니다.

사람의 영광을 구하지 마십시오. 이땅의 보물을 진정한 보물로 여기지 마십시오. 진정한 영광은 하나님이 주시는 영광입니다. 이 땅의 보물을 얻기 위해 하늘의 상을 포기하지 마십시오. 오히려 이 땅의 썩어질 영광을 포기하고서 변하지 아니하는 하늘의 상을 예비하는 것이 옳습니다. 눈에 보이는 사람들이 칭찬해 주는 삶에 연연하지 마십시오. 아니 그 사람들이 주는 칭찬과 상이 은밀한 중에 보시는 하나님이 갚아주시는 상보다도 더 가치있고 더 귀하다고 여겨지면, 그렇게 사람들의 보기에 무난하고 적당하고칭찬받는 삶을 사십시오.

그러나 은밀한 중에 갚으시는 하나님이 주시는 상이 훨씬 더 가치있고 귀하다고 믿는다면, 하나님앞에 옳고/ 하나님앞에 인정받는 삶을 살기 위해 노력하십시오. 사람들이 주는 이 땅의 상이냐, 하나님께서 계산해 놓으시는 하늘의 상이냐..이 둘 중 하나를 선택하고 사십시오.

오늘도 하나님앞에서 하나님의 의를 지키며 묵묵히 최선을 다해 살아가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사람들은 그의 수고를 몰라줄 수 있습니다. 사람들은 그의 삶을 잘 모르기 때문에 오해할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굳이 변명하지 않고 굳이 떠들고 다니지 않는 것은 은밀한 중에 보시는 하늘 아버지가 알고 계시다는 것을 믿고 그 하나님의 상을 사모하며 바라기 때문입니다.

성도 여러분 말씀대로 살아가는 여러분의 삶을 사람들이 알아주지 않는다고해서 답답해하거나 낙심하지 마십시오. 어차피 사람의 영광, 사람들이 주는 상을 바라고 시작한 일이 아니지 않습니까? 하나님만 아시면 됩니다. 하나님만 알아주시면 됩니다. 그것으로 족합니다. 하늘의 상이 예비되어 있습니다. 썩지 아니하는 기업, 쇠하지 아니하는 영광의 상이 예비되어 있습니다.

하나님 앞에서 사십시오. 하나님앞에서 옳다함을 인정받는 그런 삶을 사십시오. 그래서 장차 우리 주님이 하늘과 땅을 심판하시는 그 날에, 그동안 사람들에게 감취어졌던 진실을 밝혀주시고, 잘하였도다 착하고 충성된 종아!라고 칭찬하시며 예비된 상급으로 영원한 하늘의 영광을 주실 때 기쁨으로 그 상을 안게 되는 복된 여러분 되시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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