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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언제나 동일하신 주님 (마 26:69-7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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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가 살고 있는 이 세상을 어떤 시각으로 보느냐 그리고 이 세상 사람들을 어떻게 생각하느냐 하는 개개인의 관점은 대단히 중요한 화두가 아닐 수 없습니다. 매사에 부정적인 사람들은 세상살이가 힘들고 또 이 세상이 극도로 악하기 때문에 곧 멸망할 것처럼 말합니다. 이런 사람은 늘 이 세상에 믿을 사람 하나도 없다며, 세상이 온통 나쁜 사람들로 가득 차 있다고 비판적으로 말합니다.

반면에 긍정적인 사람들은 비록 이 세상이 어지럽고 살기 힘든 것은 사실이지만 그래도 살만 하다고 생각합니다. 나쁜 사람들은 극소수이고 대부분은 좋은 사람들로, 이런 착한 사람들 때문에 이 사회가 이만큼 유지되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여러분은 어느 편에 속해 있습니까? 도둑의 눈에는 모든 사람이 도둑으로 보인다는 속담이 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세상사람들을 나쁘게 보는 그 사람이 사실은 문제가 더 많은 사람입니다.

1963년 11월 22일은 미국의 존 F 케네디 대통령이 암살 당한 날입니다. 암살범인 오스왈드의 어머니는 세 번이나 결혼했으나 인생에 실패한 여자였습니다. 이 여자는 첫 번째 결혼하여 아들을 낳았습니다. 그후 그 아들을 데리고 재혼했습니다. 그러나 재혼에 실패하고 다시 결혼했으나 그 역시 실패하고 말았습니다.

한편 이 아들은 항상 어머니가 결혼할 때마다 방해거리가 되는 귀찮은 존재였습니다. 그로 인해 이 아들은 정서적인 안정을 누리지 못하고 상처를 많이 받았습니다. 어머니의 결혼 실패로 계속 바뀐 의붓 아버지에게 적응하지 못했으며 사랑도 받지 못했습니다. 어머니가 새로운 아버지와 심하게 다툴 때마다 고통스러워했고 “나는 왜 이 세상에 태어났을까?” “왜 살아야 하나?” 계속 고민하며 괴로워했습니다. 뿐만 아니라 그는 어머니로부터 “절대로 사람을 믿지 말아라. 사람을 사랑하지 말아라. 이 세상에 사랑이란 없다. 사랑하는 것처럼 보이지만 모두가 다 거짓이다. 아무 것도 믿을 것이 없다”라는 말을 귀에 못이 박히도록 들어야 했습니다.

매사에 부정적인 시각을 가진 어머니 밑에서 자라난 오스왈드는 점점 냉정하고 사나운 성격의 소유자가 되어갔습니다. 고등학교 때 큰 사고를 치고 퇴학까지 당했으며, 군대에 입대해서는 더 큰 사고를 쳐서 불명예 제대를 해야만 했습니다. 그후 우여곡절 끝에 결혼했으나 부부생활이 평탄할리 없었습니다. 사람을 믿지 못했기에 자연히 사랑할 줄도 모르고 사랑 받을 줄도 모르며 불행하게 살수밖에 없었습니다. 결국 대통령을 암살하는 엄청난 일을 저지르고 만 것입니다.

사람은 떡으로만 사는 것이 아니라 사랑을 먹고 삽니다. 사람은 누구나 사랑을 받을 때 행복을 느낍니다. 그래서 사랑을 받아 본 사람이 사랑을 알고 사랑을 느낄 줄 알며 사랑할 줄도 압니다. 그러나 사랑 받지 못한 사람은 도무지 사랑을 모릅니다. 사랑을 느끼지도 못할 뿐더러 사랑을 받을 줄도 모릅니다. 대개 이런 사람들은 세상을 부정적으로 보고 사람들을 나쁘게 생각하기 때문에 결국 사랑을 베풀 줄 모르는 인색한 사람이 되는 것입니다. 참으로 큰 비극이 아닐 수 없습니다.

여러분은 이 세상을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또 이 세상 사람들을 어떻게 보십니까? 이 세상에는 나쁜 사람들만 있는 것이 아닙니다. 좋은 사람들도 많이 있습니다. 그런데 더욱 놀라운 것은 우리 믿는 사람 안에도 가룟 유다와 같은 나쁜 속성이 남아있다는 사실입니다.

성경을 보면 하나님께서 내 마음에 합한 사람이라고 말씀하신 다윗같이 거룩한 성군도 그 마음 한 구석에는 자신도 알지 못했던 음란하고 악하고 거짓된 마음이 자리잡고 있었습니다. 그로인해 음란죄와 살인죄를 범하는 일생일대의 뼈아픈 실수를 저지르게 된 것입니다. 이스라엘의 지도자 모세도 그 당시 온 천하에 그와같이 온유한 사람이 없다고 성경이 말씀할 정도로 하나님으로부터 인정받은 사람이었습니다. 그러나 한 순간 혈기를 부린 죄로, 하나님으로부터 가나안 땅에 들어가는 것을 거절당하고 광야에서 생을 마쳐야 했습니다.

사람들 중에는 절대적인 의인도 없고 절대적인 악인도 없습니다. 아무리 착하고 의로워보이는 사람일지라도 그 마음 속에 악한 구석이 있고, 살인강도와 같이 포악한 사람 속에도 착한 속성이 있습니다. 또 사람은 때와 장소에 따라 달라지기도 합니다. 저는 고등학교 때 모범생이던 친구가 대학생이 되더니 삼류인생으로 타락하는 것을 보았고, 고등학교 때 얼마나 말썽꾸러기였는지 사람노릇이나 제대로 할까 생각했던 친구가 고등학교를 졸업한 후 얼마나 점잖고 의젓해졌는지 몰라보게 성숙한 사람이 되는 것을 볼 수 있었습니다.

오늘 본문에 등장하는 베드로는 예수님의 12제자 중의 수제자로서 누구보다도 주님을 사랑했고 주님을 위해 충성을 맹세한 사람입니다. 마태복음 26:31-35을 보면, 예수님께서 십자가를 지시기 전날 밤에 『너희가 다 나를 버리리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러나 베드로는 『다 주를 버릴지라도 나는 언제든지 버리지 않겠나이다』라고 큰소리를 쳤습니다. 이에 예수님께서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오늘밤 닭 울기 전에 네가 세 번 나를 부인하리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베드로는 예수님의 이 말씀이 섭섭했든지 다시금 『내가 주와 함께 죽을지언정 주를 부인하지 않겠나이다』라고 맹세했습니다. 그런데 불과 몇 시간이 지나지 않아서 세 번씩이나 예수님을 모른다고 부인했습니다. 뿐만 아니라 나중에는 예수님을 저주하기까지 했습니다. 이 얼마나 충격적인 일입니까? 그러나 우리 예수님은 전혀 충격을 받지 않으셨습니다. 이는 처음부터 모든 것을 다 알고 계셨기 때문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닭이 울기 전에 세 번씩이나 자신을 부인하게 될 것까지도 베드로에게 미리 말씀해주신 것입니다.

하나님의 아들이신 예수님은 전지전능하신 하나님이기 때문에 베드로를 제자로 부르실 때 베드로의 모든 것을 다 아시고 부르셨습니다. 그의 과거와 현재와 미래뿐만 아니라 그의 장단점이 무엇인지 다 아시고 제자로 부르셨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 주님은 베드로가 어떤 행동을 해도 놀라거나 충격을 받지 않으신 것입니다. 예수님은 이러한 베드로를 끝까지 사랑하시고 변함없이 사랑하셨습니다. 예수님은 어제나 오늘이나 영원토록 동일하신 하나님의 아들이십니다.

성경은 베드로가 닭 우는 소리를 듣고 『닭 울기 전에 네가 세번 나를 부인하리라』고 하신 주님의 말씀이 생각나서 밖에 나가 심히 통곡했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이때 베드로는 자신이 한 말이 생각나서 심한 죄책감에 사로잡혔을 것입니다. 잠시 전에 큰소리쳤던 자신의 부끄러운 모습을 돌이켜보며 통곡하지 않을 없었습니다.

눈물 중에 가장 복된 눈물은 회개의 눈물입니다. 회개의 눈물은 어떤 죄를 범했다할지라도 그 죄를 씻을 수 있습니다. 자비하신 하나님은 회개의 눈물을 외면하지 않으십니다. 누구든지 회개하면 용서해주십니다. 우리가 지은 모든 죄를 기억도 하지 않으십니다. 전혀 그런 죄를 범한 일이 없었던 것처럼 도말해주십니다. 그리고 회개하는 순간 진노를 거두어주실 뿐만 아니라 죄 가운데서 잃어버렸던 과거의 모든 손해를 회복시켜주시기까지 하십니다. 그러므로 회개의 눈물은 축복입니다.

사람은 누구나 죄책감이 생길 때가 있습니다. 죄책감이 생기는 것은 죄가 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죄가 있으면서도 죄책감을 느끼지 못한다면 보통 문제가 아닙니다. 그러므로 죄책감을 가지게 되는 것 자체가 축복입니다. 죄책감이 자꾸 생길 때는 하나님을 만날만한 때요, 하나님이 가까이 계실 때입니다. 왜냐하면 회개할 좋은 기회가 되기 때문입니다. 시편 32:5-6을 보면 『내가 이르기를 내 허물을 여호와께 자복하리라 하고 주께 내 죄를 아뢰고 내 죄악을 숨기지 아니하였더니 곧 주께서 내 죄의 악을 사하셨나이다(셀라) 이로 인하여 무릇 경건한 자는 주를 만날 기회를 타서 주께 기도할지라 진실로 홍수가 범람할지라도 저에게 미치지 못하리이다』고 했습니다.

또 이사야 55:6-7에서도 『너희는 여호와를 만날 만한 때에 찾으라 가까이 계실 때에 그를 부르라 악인은 그 길을, 불의한 자는 그 생각을 버리고 여호와께로 돌아오라 그리하면 그가 긍휼히 여기시리라 우리 하나님께로 나아오라 그가 널리 용서하시리라』고 했습니다. 여기에서 하나님을 만날만한 때와 가까이 계실 때의 의미는, 자신의 죄가 자꾸 떠오르고 죄책감에 사로잡혀있을 때를 말합니다. 이때 하나님께 돌아와 자신의 죄를 회개해야 합니다. 그러면 하나님이 우리를 긍휼히 여겨주시고 우리의 죄를 용서해주시며 우리를 만나주십니다. 누가복음 15:7을 보면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이와 같이 죄인 하나가 회개(悔改)하면 하늘에서는 회개할 것 없는 의인 아흔 아홉을 인하여 기뻐하는 것보다 더하리라』고 했습니다.

우리 하나님은 죄를 철저히 미워하시지만 죄인의 회개를 기뻐하시고 그 사람을 축복해주신다는 것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일반적으로 죄책감이 있는 사람은 뭔가 일이 잘 안되고 계속해서 어려움이 생기고 고난이 찾아오면, 하나님이 진노하신 것은 아닌가 하는 생각을 하게 되고, 마치 하나님의 사랑이 멀리 떠난 것처럼, 하나님이 자신을 버린 것처럼 여기게 됩니다. 그러나 이와 반대로 일이 잘되고 아무런 어려움이 없는 가운데 잘 살게 되면, 하나님이 자신을 축복하시는 것 같고 하나님의 사랑이 가까이 임하며 하나님이 날 붙들고 계시다고 생각하게 됩니다.

하나님의 사랑도 우리 인간들처럼 조석으로 변하는 것처럼 생각하기 쉽습니다. 그러나 이것은 분명히 잘못된 생각입니다. 인간의 사랑은 기분을 따라 조건을 따라 시시때때로 변덕스럽지만, 우리 하나님의 사랑은 어제나 오늘이나 영원토록 동일하시기 때문에 변함이 없습니다.
로마서 3:10-12를 보면 『기록한바 의인은 없나니 하나도 없으며 깨닫는 자도 없고 하나님을 찾는 자도 없고 다 치우쳐 한가지로 무익하게 되고 선을 행하는 자는 없나니 하나도 없도다』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다시 말해서 우리가 아직 죄인으로 원수되었으나 예수님께서 우리의 모든 죄를 대속하기 위하여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셨습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의인이기 때문에 사랑하신 것이 아닙니다. 또 우리가 사랑할만하기 때문에 사랑하신 것도 아닙니다. 더구나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그 무엇을 했기 때문에 우리를 사랑해주시는 것도 아닙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무조건 사랑하셨습니다. 일방적으로 독생자를 이 세상에 보내주셨습니다. 이것이 복음입니다. 하나님이 무조건 우리를 먼저 사랑하신 것입니다. 하나님의 이 사랑을 믿고 이 사랑을 받아들이는 사람은 구원을 얻게 됩니다. 하나님의 사랑을 깨닫고 느끼는 사람은 행복한 사람이며, 하나님의 마음을 아는 사람은 복이 있는 사람입니다.

그러나 이 세상에는 하나님의 마음을 모를 뿐더러 하나님의 사랑도 알지 못하는 사람들이 너무나 많이 있습니다. 이런 사람들은 하나님의 사랑을 느끼지 못할 뿐더러 하나님의 사랑을 받아들이지 않으며, 하나님의 사랑을 믿지 못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구원을 받지 못하고 불행한 인생을 살게 되는 것입니다.

어떤 아버지에게 외아들이 있었습니다. 아버지는 이 아들을 너무 사랑했기 때문에 이 아들을 위하여 자신의 삶을 희생했습니다. 비록 가정형편이 넉넉하지 않았지만 아들이 원하는 것이라면 무엇이든지 다 해주려고 애썼습니다. 드디어 이 아들이 대학에 입학하게 되었습니다. 이 아버지는기쁨이 얼마나 컸든지 뛸듯이 기뻐했습니다. 매학기마다 집에서 기르던 소를 팔아 학자금을 보내주었습니다. 객지에 나가 있는 아들이 돈을 보내달라고 편지를 해오면 어떻게 해서든지 그 돈을 마련하여 보내주었습니다. 그러나 이 아들은 그 돈으로 친구들과 어울려 다니며 술을 먹고 방탕한 생활을 하고 있었습니다. 나중에 이러한 사실을 알게 된 아버지는 너무나 실망한 나머지 무조건 돈을 보내주는 것이 이 아들을 위한 길이 아님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이 아버지는 마음을 독하게 먹고 더 이상 돈을 보내주지 않기로 결심했습니다.

아무리 편지를 부쳐도 돈이 오지 않자 화가 난 아들은 급한 마음에 아버지에게 전보를 쳤습니다. 그 당시에는 전보를 칠 때 글자를 10자 이상 넘길 수 없었던 때라 “당신 아들 굶어 죽음 ”이라고 써서 보냈습니다. 전보를 받아 본 아버지의 마음은 찢어질 듯 아팠습니다. 이 세상 누구보다도 아들을 사랑하는 아버지였지만 아들에게 “굶어 죽어라 애비가”라고 쓴 전보를 보냈습니다. 이 전보를 받아든 아들은 큰 충격을 받았습니다. 이 아들은 자신의 잘못은 생각하지 않고 무조건 아버지가 자신을 버린 것으로 생각했습니다. 아들은 아버지를 증오했습니다. 아버지와 인연을 끊고 다시는 일체 고향집에 아무런 연락도 하지 않았습니다. 스스로 부자의 연을 끊은 것입니다.

그후 이 아들은 먹고살기 위해 이를 악물고 악착같이 일을 했습니다. 그후 결혼도 하고 자식도 낳고 안정된 생활을 하게 되었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지난날을 곰곰히 생각해보니, 굶어죽으라는 아버지의 매정한 전보를 받고 몹시 화가 났었지만, 그것이 자극이 되어 분발한 덕에 열심히 일하게 되었고 인생의 새로운 전기를 맞이하게 되었다는 사실을 새삼 깨닫게 되었습니다.

그 해 추석을 맞이하여 고향을 떠난 지 20년만에 고향을 방문했습니다. 그러나 아버지는 이미 이 세상 사람이 아니었습니다. 다만 아버지의 유품에서 자신에게 남겨진 유서 한 장을 발견하게 되었습니다. “아들아! 너를 기다리다가 먼저 간다. 하루도 너를 잊어본 적이 없다. 네가 소식을 끊은 날로부터 나는 매우 고통스러운 나날들을 보냈다. 정말 너를 사랑했다. 내가 너에게 보낸 전보는, 네가 분발하여 새로운 인생의 전기를 맞이할 수 있도록 자극을 주기 위해서 보낸 것이란다. 부디 이 애비를 원망하지 말고 행복하게 살아라. 네 가슴에 못을 박은 애비가.”라고 쓰여 있었습니다.

이 아들은 편지를 다 읽고 난 후 편지를 들고서 아버지의 무덤을 찾아갔습니다. 그리고 “아버지! 제가 잘못했습니다. 이 불효자식이 아버지의 마음을 몰랐습니다. 아버지의 가슴에 못을 박은 것은 바로 접니다. 아버지가 제 가슴에 못을 박은 것이 아니라 이 불효자식이 아버지의 가슴에 대못을 박았습니다.”라고 소리치며 몸을 뒹굴고 대성통곡했다고 합니다.

여러분은 하나님 아버지의 마음을 아십니까? 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사랑을 아십니까?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창세 전에 택하셨다고 말씀하셨습니다. 하나님께서 우리가 남보다 의로워서 착해서 택하신 것이 아닙니다. 전능하신 하나님은 우리의 허물과 죄를 다 아시고 우리가 얼마나 부족한지도 아시면서 우리를 택해주시고 사랑하신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사랑은 영원불변한 것입니다. 어제나 오늘이나 영원토록 동일하십니다.

주님을 모른다고 세 번씩이나 부인했던 베드로도 후에 성령의 충만함을 받고 주님과 복음을 위해 살다가 순교했습니다. 주님의 깊은 사랑을 깨달은 베드로는 주님을 위해 살다가 그 주님을 위해 목숨까지 바친 것입니다. 누구든지 주님의 사랑을 깨닫게 되면 변화가 일어납니다. 주님의 사랑에 감격하게 되고, 주님의 사랑에 감사하게 되며, 주님을 더욱 사랑하게 됩니다. 더 나아가 그 주님을 위해 살게 됩니다. 아무쪼록 저와 여러분은 어제나 오늘이나 영원토록 동일하신 주님의 사랑을 믿고 받아들이고 붙잡고 그 사랑에 늘 감사하면서, 주님의 사랑에 만 분의 일이라도 보답하며 살아가는 성도들이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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