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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권세 있는 새 교훈 (막 01:21-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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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님께서 가버나움이라고 하는 갈릴리의 도시를 방문하셨습니다. 회당에 들어가 말씀을 가르치실 때 주님의 가르치심에 대하여 사람들이 놀랐습니다. 오늘 본문 말씀은 주님의 가르치심이 서기관들의 가르침과는 달리 권세가 있었다고 강조하고 있습니다.

당시 회당에서 가르치는 사역은 서기관들의 몫이었습니다. 그들은 모세오경을 외우는 이들이었고, 율법에 필요한 모든 조항들, 탈무드나 그외의 여러 가지 교훈들을 기억하고 있는 전문가였습니다. 그들은 그것을 위해서 전문적인 훈련을 받은 이들이었습니다.
그런데 오늘 말씀에 보면 '예수님의 가르침이 서기관들과 달랐다'라고 마가는 강조하고 있습니다. 사실 주님은 3년 반 동안의 공생애를 시작하시기 전, 대부분의 삶은 부친을 도와 일을 하셨고, 때때로 성전에 올라오셔서 가르쳤을 때 그 가르침에 놀라기는 했지만 다시금 가정으로 돌아가시곤 했었습니다.

그러나 주님께서 공생애를 시작하시면서 세례 요한으로부터 세례를 받으실 때 하늘에서 '이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니 너희는 저의 말을 들으라. 이는 내 기뻐하는 자라' 는 음성을 듣고 복음을 시작하셨을 때 이미 주님의 가르치심은 서기관들과 다를 수 밖에 없었습니다.

사실 우리는 자신이 다른 사람과 다르기를 기대합니다. 뛰어난 실력을 가졌다고 인정받기를 원하고, 외모도 다른 사람들과 구별된 탁월함을 기대합니다. 옷을 입어도 다른 사람들보다는 돋보이게 입기를 원하지요. 그래서 백화점에 가서 옷을 사도 가능하면 다른 사람들과는 다른 옷을 사기를 원합니다. 그리고 자랑스러워하다가 길거리에서 자기와 똑같은 옷을 입은 사람을 보면 기분이 싹 달라집니다. 얼른 옷을 가지고 가서 바꿔달라고 억지를 부립니다. '제품에 문제가 있습니까?' '그게 아니라 기분 나쁘게도 나와 똑같은 옷을 입은 사람이 있더라구요......'

식당에 가면 뭐라고 말씀합니까? '귀한 분 모시고 왔으니까 특별히 잘 해주세요' 그러면 지혜로운 주방장이나 주인 같으면 주방을 향해서 이렇게 주문합니다.
'오늘 특별한 분이 오셨으니 잘해주세요' 그러면 주방 안에서 멋진 대답이 나옵니다. '잘 알겠습니다. 특별히 잘해드리지요' 하지만 양념이나 반찬 넣는 것은 똑같지요. 그러나 말이라도 오신 분을 기쁘게 해드리기 위해서 특별히 해드리겠다고 그러면 주문한 손님도 특별한 대우를 받는 것 같아서 좋아합니다.

우리 모두는 이렇게 특별하기를 원해요. 오늘 이 예배에 참석하시는 모든 분들은 아주 특별한 은혜를 받으시고 돌아가시길 축원합니다.
기분이 좋으시지요? 특별히 은혜를 받으라니까 더 기분이 좋지요. 하지만 주님에 대한 평가는 의례적인 위로와 격려의 차원이 아니었습니다.

27절에 보면 '권세 있는 새 교훈' 이라고 백성들은 놀랐습니다. 무엇이 그들에게 차이를 느끼게 해주었을까요? 서기관들의 가르침과 예수님의 가르침의 권위가 다르다고 했는데 이 권위의 차이는 어디에서 온 것일까?
주님의 목소리가 우렁차고 카리스마적인 음색을 가졌기 때문일까?'
사실 목소리도 중요합니다. 흔히 홀리 보이스라고 하는 은혜스러운 성대을 가진 분들이 있어요. 우리 장로님들 중에는 이형훈 장로님이 홀리 보이스지요. 여러분들 아시지요. '기도-하시겠-습-니-다.....' 그러면 굉장히 은혜스럽잖아요. 그분이 기도하시면 마음이 푸근해지고 편안해집니다. 좋은 음성은 하나님이 주신 플러스 알파의 은혜예요.

하지만 주님의 권세는 그런 차원은 아니었을 것입니다. 오히려 제가 생각하건대 주님이 말씀하실 때의 분위기는 조용 조용히 아주 차분하게 말씀하셨을 것입니다. 물론 성전을 청결케 하기 위하여 책상을 뒤집어엎을 때도 계셨지만..... 대부분의 분위기는 조용하고 따뜻한 분위기였을 것입니다.

그러면 무엇이 그들과 주님의 차이를 주었을까? 그 대표적인 사건이 23절 이하에 나와 있습니다. 말씀을 가르치시는 중에 더러운 귀신 들린 사람이 소리를 지르고 말씀을 방해하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놀랍게도 24절을 보면 이 귀신 들린, 더러운 귀신 들린 사람이 예수님에게 말씀을 하는데 '나사렛 예수여, 우리가 당신과 무슨 상관이 있나이까? 우리를 멸하러 왔나이까? 나는 당신이 누구인지 아노니 하나님의 거룩한 자니이다'

더러운 귀신 들린 사람이 말하고 있다고 했습니다. 그러나 사실은 정확하게 표현하면 그 사람이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여기에 더러운 귀신 들린 사람이 이제 귀신에 의해서 해방을 받고 났을 때 온전한 모습이었을 것입니다. 다시 말하면 더러운 귀신이 한 사람을 지배하고 주장해서 그의 음성을 빌어서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젊은 아가씨가 귀신 들린 경우를 보았습니다. 그런데 그 아가씨는 남자의 음성이었어요. 목사님과 기도 많이 하는 권사님 수십명이 빙 둘러앉아서 찬송을 해요. 그런데 그 여성이 소리를 막 지르고 진정시키면 뿌리치기도 하는데 그 힘이나 목소리가 본래의 그 여성이 아니었어요.

그래서 목사님께서 물었습니다. '너는 누구냐?' ' 나는 000이다' 알고보니까 결혼하려고 사귀던 남자 친구가 사고로 죽었는데 그가 사랑하던 여자에게 붙어버린것입니다.

더러운 귀신 들린 사람이 이야기하는 것도 사실은 그가 말하는 것이 아니고 그 속에 들어간 귀신이 말하고 있는 거예요. 귀신의 존재에 대해서 귀신이 있느냐? 없느냐?' 뭐 여러 가지 이야기들도 많지요. 사실 어느 정도 신앙생활을 했다면 그런 논쟁 자체가 우스운 거예요.

여러분, 요한계시록 12장에 보면, '하늘에 전쟁이 있으니 미가엘과 그의 사자들이 용과 그의 사자들과 싸우더라' 미가엘은 하나님의 군대의 천사장입니다. 그의 사자들은 당연히 천사들입니다. 그 하나님의 천사장과 천사들이 누구와 싸우냐 하면 용과 그의 사자들과 싸운다고 그랬어요. 용은 중국인들이 추앙하는 상징적인 존재입니다만, 성경은 이 용에 대해서 이렇게 설명하고 있습니다.

'큰 용이 내쫓기니 옛뱀, 곧 마귀라고도 하고 사탄이라고도 하는 온 천하를 꾀는 자라' 주님은 특별히 이 사탄과 마귀를 거짓의 아비라고도 정의하셨습니다.
그런데 이 사탄과 그 사자들이 하나님의 천군 천사와 싸우고 있더라.

계시록 16장에 보면, 하나님의 천사가 진노의 7 대접을 하나씩 쏟아가는 장면이 나오는데 그 때에 사탄의 정체가 밝혀집니다. '개구리 같은 더러운 세 영이 드러나는데, 용의 입과 짐승의 입과 거짓 선지자의 입이더라'
그리고 말씀하기를 '저희는 귀신의 영이더라' 고 하셨습니다.

요한복음 17장 3절에 보면, 영생은 곧 하나님의 보내신 자를 아는 것이라고 했습니다. 하나님이 보내신 자, 곧 예수 그리스도를 정확하게 아는 것이 영생이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오늘 이 사탄은, 이 귀신은 예수님을 바라보고서 말하기를 '나는 주님을 잘 알고 있습니다' 그러면 이 귀신은 영생을 얻었다는 말입니까? 하나님이 보내신 자를 아는 것이 영생이라고 그랬는데 이 더러운 귀신 들린 자가 주님을 바라보면서 뭐라고 그래요? '나는 주님을 잘 압니다. 나는 당신이 누구인지 알고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에게 돌아온 귀신이 영생을 얻었다고 우리는 생각하지 않습니다. 왜 그럴까요?

성도 여러분, 우리가 세상 사람들을 만나보면 아는 체 하는 사람들이 많아요. '교회, 나 잘 압니다. 성경이요? 내가 옛날에 성경을 몇 번을 읽었는데요.. 예수요? 내가 잘 알지요' 아주 꿰고 앉아 있는 분들이 많아요. 그러나 그분들이 영생을 받았다고 우리는 믿지 않습니다.

여기서 더러운 귀신 들린 자가 예수님을 내가 잘 알고 있다고 그 의미는 무엇입니까? 그것은 예수를 구주로 고백한 메시야요, 구세주로서 주님을 알기를 원하는 앎이 아니라 자신의 목적, 자신의 더러운 목적을 이루기 위해서 정략적으로 알고 있는 지식을 말하는 것입니다.

세상 사람들이 예수를 메시아로서 고백하면서 자기의 구세주로서 예수를 아는 것이 아니라 자기의 인간의 욕심을 채우기 위해서 예수를 알고 있는 거예요. 어쩌면 이 자리에도 예수 그리스도를 구세주로 고백하고, 주님을 구주로 영접한 하나님의 자녀로서 주님을 안다고 이 자리에 와 있지 않고, 여러 가지 세상적, 정욕적 목적을 가지고 그것을 자신에게 이용하기 위해서 예수를 아는 척 하는 사람들이 있을 수 있습니다. 사업적인 목적으로 예수를 아는 척 할 수도 있고, 인간적의 교류적 목적을 위해서 그렇게 할 수도 있습니다. 제 소원은 이 평안의 교회를 출입하는 분들이 한 분도 그런 분이 없기를 바랍니다.

하지만 주님이 가버나움 회당 안에 더러운 귀신이 주님을 잘 안다고 하면서 주님 앞에 왔습니다. 그런데 주님이 주님을 잘 안다고 하는 그 더러운 귀신 들린 사람과 토론하지 않으셨어요. 대화하지 않으셨어요. 오히려 본문 말씀 보면 25절에 '예수께서 꾸짖어 가라사대 잠잠하고 그 사람에게서 나오라' 오히려 꾸짖고 책망하셨습니다. 물론 그 사람을 꾸짖은 것이 아니라 더러운 귀신을 향해서 꾸짖습니다. 그런데 놀라운 일이 생겼습니다. 주님께서 그 더러운 귀신을 향해서 꾸짖고 그에게서 나오라고 했을 때 더러운 귀신이 그 사람에게서 나오면서 그 사람으로 하여금 경련을 일으키게 하고 고통을 받게 했습니다. 그것은 더러운 귀신의 언제나 일관된 모습입니다. 귀신이 그 사람을 떠날 때에 그냥 편안하게 신사적으로 떠나는 법이 없어요.

우리 속담에 아주 잘 어울리는 말이 있습니다. '못 먹어보는 감은 찔러나 본다' 내가 못 먹을 것 너도 못 먹도록... 귀신이 나가면서는 언제는 그렇습니다. 예수의 이름으로 치료받아야 할 그 사람에게 경련을 일으키게 하고, 고통을 일으키게 하고, 데굴 데굴 구르게 하고 고통을 준 후에야 나가는 그것이 귀신의 일관된 모습입니다. 우리가 귀신을 내어쫓을 때 보면 늘 귀신은 그렇게 심술을 부리고 떠나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이 장면을 가버나움 회당의 수많은 사람들이 보았습니다. 어떻게 귀신을 향해서 책망하시고 귀신을 향해서 명하셨을 때 귀신이 순종하느냐? 순종하려고 하면 어떻게 됩니까? 자기 보다 높은 권위를 가져야 되겠지요. 자기 보다 큰 힘을 가져야 되겠지요. 비로소 사람들이 예수님을 향해서 새롭게 눈을 뜨게 되었습니다. '귀신을 명하니까 귀신도 순종하는 분이구나'

마가복음 6장 7절에 보면, 주님께서 제자들을 부르시고 그 제자들을 동네의 전도를 위해서 보내시면서 제일 먼저 당신의 제자들에게 주신 권세가 있습니다. '12제자를 부르사 둘씩 보내시며 더러운 귀신을 제어하는 권세를 주시고.....' 아멘!
저와 여러분은 이미 더러운 귀신을 제어할 권세를 소유한 줄 믿습니다. 당당하세요. 담대하세요. 문제는 왜 내가 세상에 나가서 사탄의 권세와 귀신의 권세와 맞닥뜨릴 때 그렇게 우리가 기가 죽어서 그러는가? 놀래 가지고 두려워서 어쩔 줄 모르는 거예요. 여러분들이 예수님이 주신 더러운 귀신을 쫓아내는 권세가 없는 것이 아니라 권세를 주셨으나 그 권세를 바로 알고 사용하지 못하기 때문이예요.

미국의 어느 가정의 노인이 어렵게 어렵게 거지처럼 살았어요. 그분이 돌아가시고 나서 동네 사람들이 장례위원들이 모였습니다. '우리가 저 불쌍한 저 가난한 노인의 장례비용을 우리가 각출해서 저분의 장례를 우리가 치러드리자' 그리고 사람들이 그 집에 가서 이제 그분의 시신을 수습하고 그리고 남은 모든 집안의 가제도구들을 수습하다가 보니까 그분의 방에 액자가 하나 있는데 여느 액자와 달랐어요. 자세히 보니까 그 액자는 다름아닌 큰 수표였었어요.
어마어마한 돈을 그 주인 돌아가신 그분이 싸인만 하면 엄청난 돈을 쓸 수 있는 수표였는데 그들은 그것이 무엇인지 몰랐던 거예요. 그 수표에 싸인만 했으면 너무나도 좋은 저택을 준비하고 최고의 문화생활을 하면서 매일 거지처럼 살 것이 아니라 정말 부자처럼 살 수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그는 자기 방에 걸려 있는 그 수표를 쓸 줄을 몰랐던 거예요.

주님은 우리에게 주신을 제어할 권세를 주셨는데 왜 그 권세를 알지 못하고 사용하지 못하고 늘 도망다닙니까? 두려워하고 염려하면서 우리는 그렇게 살아왔어요. 그리고 권세 있는 사람이 있다고 그러면 쫓아가서 부러워하는 것입니다. '나도 저런 권세가 있으면 얼마나 좋을까?' 그러나 사실은 우리가 주님을 구주로 고백했을 때 주님께서 우리에게 성경을 은혜로 주셨을 때 이미 우리는 귀신을 제어할 권세를 소유한 줄로 믿습니다.

이제 우리는 지혜롭게 깨달았어요.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임을 깨닫고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신 성령의 능력을 깨닫고 이제는 예수의 이름으로 명하면 됩니다. '예수의 이름으로 명하노니 사탄아 마귀야 물러가라' 주의 이름으로 명하시면서 여러분에게 허락하신 하나님의 권세를 누리며 사시는 능력의 성도들 되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오늘 주님의 권세있는 새 교훈을 보고 백성들이 놀라워하면서 이제는 그 예수 그리스도의 백성으로 살기를 도전 받았듯이, 오늘 평안의교회를 출입하는 여러분들이 주님의 은혜를 힘입고 세상속에서 진정한 예배를 드리며 표현할 때 , 세상 사람들이 여러분들을 바라보면서 권세있는 예수의 자녀임을 인정하고 세상과 사탄의 권세에 눌려있는 그들을 해방시키는 놀라운 역사를 이루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간절히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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