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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죄인과 함께 한 예수 (막 02:13-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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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회 생활을 하다 보면 사람들로 인해 힘들 때도 있고, 또 우리의 이상이나 가치관과 어긋나는 일 때문에 갈등을 겪는 경우도 있습니다. 어떤 사람은 그런 갈등을 잘 해결하지 못한채 교회를 옮기는 경우도 있고, 심지어는 아예 교회를 다니지 않겠다고 말하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어떤 교회가 좋은 교회일까? 우리가 인정하는 가장 건강한 교회의 모델은 초대 교회입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교회가 건강하지 못할 때 이렇게 외칩니다. '초대 교회로 돌아가자' 아마도 이 주장에는 모두가 공감하여 반대하는 사람이 없을 것입니다.

초대 교회는 계시록에 일곱 교회가 모델로 나와있고 그 중에는 칭찬만 받은 교회, 책망만 받은 교회, 그리고 칭찬과 책망을 겸하여 받은 교회도 있습니다. 일곱 교회 중 칭찬만 받은 교회가 둘 밖에 없다는 것만 보아도 주님의 이름으로 모인 공동체에도 부족함과 연약함이 많다고 하는 사실을 우리는 잘 알 수 있습니다.

필라델피아 교회, 서머나 교회, 에베소교회 등은 건강한 교회의 대표성을 지닌 상징적인 교회들입니다. 에베소 교회의 예를 보더라도 그들 공동체는 우상과 황제 숭배, 음란과 타락의 도시에서 신앙의 정절을 지키며 살았기에 칭찬받기에 충분한 교회임이 틀림이 없습니다.
바울 사도 자신도 약 3년 이상을 에베소에서 사역할 정도로 심혈을 기울였던 교회이지만 그 교회도 알고 보면 문제가 많이 있습니다.

에베소서 4장에 보면, 바울 사도는 에베소 교회를 향해서 이렇게 권면하고 있습니다. '그런즉 거짓을 버리고 각각 그 이웃으로 더불어 참된 것을 말하라' '도적질하는 자는 다시 도적질하지 말라.'
이것은 무슨 말입니까? 초대 교회의 모델이랄 수 있는 에베소 교회 안에도 도둑놈이나 거짓말쟁이가 있었음을 말해주는 것입니다.
성도들이 교회가 맞지않는다며 교회를 찾아다니지만 사실 그것은 엄밀히 말해 자신의 이기심과 정욕에 맞는 모델을 찾는 것이지요. 그럼에도 불구하고 많은 사람들이 떠돌아다닙니다. '어느 교회가 내 맘에 들까?' 하지만 이 땅에는 완전한 교회란 없습니다.

가끔씩 교회에서 도난 사고가 생깁니다. 우리 성도들은 대부분 헌금을 성경책에 끼워 넣고 다니는 습관이 있어요. 거기에 십일조나 선교헌금 등을 넣었다가 잃어버리면 큰 낭패입니다. 잠간 화장실에 가거나 커피 한 잔 하러 가는 사이 손을 타게되면 큰 시험거리가 되곤 합니다.

우리 교회도 가끔 도난 사고가 생깁니다만 교회 안의 사람들이 아닌 , 그런 것만 알고 교회만 찾아다니는 사람들의 소행일 가능성이 더 많을 것입니다. 그래서 좀더 신중하도록 부탁을 하고 광고도 해보지만 근본적인 문제는 해결하기가 쉽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우리의 노력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인간은 욕심과 정욕으로 유혹받기 쉬운 부족하고 연약한 존재이기 때문입니다. .

교회를 말할 때 우리는 이렇게 말할 수 있어요. '죄인들의 집합소다' 기분 나쁘지요? 하지만 인정해야합니다. 사실 알고 보면 틀린 말이 아니예요. 정확하게 말하면 교회는 자신이 죄인임을 인정하고 고백한 사람들의 공동체입니다.
또한 교회는 육신의 질병 뿐만 아니라 심령의 질병을 치료받기 원하는 사람들의 공동체 이기도 합니다. 교회 안과 밖의 차이는 바로 여기에서 구별되는 것입니다.

17절에서 주님은 말씀하십니다. '건강한 사람은 필요없다. 의인들은 필요없다.' 주님을 만난 사람들의 최초의 고백은 이것입니다. '주여, 나는 죄인이로소이다' 베드로가 그랬고, 안드레가 그랬고, 바울이 그랬습니다. 죄인인 줄 모르고 살았는데 주님을 만나고 나니까 죄인임을 알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예수를 바로 만난이들은 결코 교만하거나 건방질 수 없습니다. 예수를 믿는다면서도 건방을 떨고 있다면 그는 아직 자신의 위치를 잘 모르는 철없는 사람일 것입니다.

오늘 본문 말씀을 보면 주님께서 바닷가에서 사람들을 가르치신 후에 동네로 들어오셔서 지나가시다가 보지 못할 것을 보신 사건이 소개되어져 있습니다. 원래 율법에 정통한 사람들은 보지 않아야 할 것들이 있습니다. 그 중의 하나가 죄인들을 보아서는 안된다는 것입니다. 당시 가장 큰 죄인은 창기와 세리였어요.

혹 세관에 근무하시는 분이나 가족이 계시면 이해하고 들으시기 바랍니다. 이것은 2000년 전 당시 상황을 말하는 것입니다. 로마가 이스라엘을 지배하던 당시에는 모든 공무원들이 로마를 위해서 일하였기에 자기 민족들에게 미움을 받았습니다.
마치 일제 시대의 공무원들이 미움을 받은 것과 같은 상황일 것입니다. 그러나 정작 미움의 원인은 다른데 있었습습니다. 세리들은 수없이 많은 세금을 거두어 로마정부에 일부를 낸뒤 자신들이 착복하기 일 수 였습니다.
당시 세금 제도를 보면 재미있어요. 땅이 있는 사람들에게는 토지세를 걷습니다. 사람 머리 수대로 인두세를 거두어 들입니다. 길을 막아놓고 통행세를 받습니다. 마차를 타고 지나가면 마차세를 받습니다.
이러니 이스라엘 사람들이 화가 안나겠어요? 세리들을 보면 이가 갈리겠지요. 그런 세리들을 죄인 중에 죄인이라고 구별하여 보지 못할 인간들로 규정한 것입니다.

그런데 사람들은 절대로 보지 말라고 한 그들을 주님은 기어코 보셨어요. 위대한 성서학자 '바클레이'는 이렇게 말합니다. '주님께서는 세관에 앉아있는 레위를 보시면서 그 안에 위대한 전도자 마태를 보셨다' 주님께서 세리 레위를 보시면서 그 안에 감추인 놀라운 가능성을 보신줄 믿습니다.

우리가 세상이 가지고 있는 편견을 가지고 사람을 보면 한이 없습니다. 2002년에 대학입시제도에 큰 변화가 일어났어요. 서울대학교가 미달 사태가 난 것입니다. 수많은 학생들이 합격을 하고 나서도 등록을 하지 않았어요. 그리고 다른 대학에 등록을 해버렸습니다.
서울대학으로서는 너무 자존심 상하는 일인데 그래서 처음으로 추가 모집을 했어요. 입시 전문가들은 말합니다. 2'002년이 대한민국 입시제도에 있어서 혁명적인 해가 되었다' 그동안은 간판이 중요했어요. 실력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어느 대학을 나왔는가가 중요했고, 그래서 이력이 중요한 때였어요. 사람은 변변하지 않아도 어느 대학을 나왔는지 그리고 그 대학의 성적이 그때 얼마였는지, 10년전 20년전의 일을 그저 이력서만 가지고 오랍니다. 그것이 우리의 사회였어요.
그 전통적인 개념이 올해에 무너지기 시작한 것입니다. 우리 젊은이들 용감하잖아요. 이제는 간판이 아니라 '내가 하고 싶은 공부를, 내가 가고 싶은 학교를 가겠다' 학생들에 의해서 18-19살 젊은이들에 의해서 한국의 입시 제도의 큰 틀이 지금 물꼬를 튼 거예요. 바람직한 방향으로 가기 시작한 것입니다. 서울대학도 자존심을 버리고 추가 모집을 했어요.

아마 우리 부모님들은 아직도 저를 포함해서 과거의 틀에 많이 얽매어 있습니다. 하지만 사실 시대는 너무나도 변하고 있는데 우리가 그 변화에 다 못 따라가고 있는 경우가 많아요. 그래서 부모와 자녀들이 입시 때만 되면 싸우잖아요. 다투잖아요. 선의로 싸우는 거지요. '너 여기 가야 한다. 그래도 간판이 중요해' '아니예요. 내가 가고 싶은 학교, 내가 공부하고 싶은 데 가고 싶어요' 할 수 있으면 여러분 자녀들이 가고 싶은 학교, 하고 싶은 공부 할 수 있도록 도와주시기 바랍니다'

저도 졌어요. 결국은 아이들이 원하는 공부하도록, 과도 아이들이 원하는 과로 선택하도록 했습니다. 제가 양보하고서 깨달은 것이 있어요. '결국 공부는 자기들이 하는 건데 왜 우리가 여기 가라, 저기 가라 그랬을까? 그동안 아이들 마음을 왜 아프게 했을까?' 많이 후회했어요.
저는 우리 보은이가 말을 조리있게 잘하고 리더쉽이 뛰어나 '너는 KBS 9시 앵커다' 그랬거든요. '9시 뉴스를 틀었을 때 네 얼굴이 나왔으면 좋겠다. 거기 황씨 아나운서들 많더라' 제 욕심이지요. 자기는 아니라는 거예요. 그래도 고마운 것은 S 대학 언론정보학과를 복수지원 하여 합격까지 했어요. 그러나 결론은 자신의 길을 가겠다며 자기가 원하는 과를 갔어요.
지금 생각하면 아이들의 뜻을 따른 것을 잘했다고 생각합니다. 왜? 내가 하고 싶은 공부 내가 하는 건데 왜 부모가 여기 가라, 저기 가라 그럽니까? 이건 정말 우리가 새로워져야 할 부분입니다.

우리는 많은 편견을 가지고 살아요. 괜찮다고 하는 우리 자신들도 많은 사회적 편견을 가지고 있어요. 그 사람을 보면 안된다고 하는 이것도 사실은 그당시 엘리트 집단에서 만들어놓은 편견입니다. 그러나 주님은 그것을 깨뜨리셨어요. 그를 바라보신 것입니다. 그리고 그 안에 잠재해 있는 가능성을 보신 거예요.
주님께서 레위를 보시면서 주님은 전도자 마태를 보신 것입니다. 이 마태는 아마도 주님을 만난 이후에 주님께서 이름을 지어주신 것 같아요. 마태라는 뜻은 '하나님의 선물'이라는 뜻입니다. 그 안에 있는 전도자로서 하나님의 말씀을 기록할 자로서의 미래를 보신 것입니다.

실제로 이 레위는 마태가 되어서 복음서 중에 우리가 첫 번째 펴면 만날 수 있는 '마태복음'을 기록하고 그는 주님의 12제자가 되어서 생명을 걸고 순교자로서 복음을 증거하다가 주님 앞에 부름을 받았어요. 사람들이 편견을 가지고 끝까지 절대로 저 사람은 보아서는 안된다고 하는 기준에 매여있었다면 그는 평생을 그렇게 살았을 것입니다. 하지만 주님은 그 마태를 보시고 당신의 제자로서 수많은 영혼을 구원할 자로서의 미래를 보신 것입니다. 우리 믿음의 사람들은 바로 주님께서 레위를 보셨던 것처럼 그런 안목과 그런 미래지향적인 생각을 가지고 세상을, 그리고 사람들을 바라볼 수 있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두 번째 우리가 생각해야 할 것은 주님께서 그를 보시고 인정만 하신 것이 아니라 초청해 주신 것입니다.
여러분, 사람이 제일 행복한 것이 무엇입니까? 그것은 나를 알아주는 사람을 만나는 것입니다. 직장생활이 행복한 것은 나의 능력을 인정해 주는 윗사람을 만날 때, 주인을 만날 때 행복한 것입니다. 아무리 열심히 하려고 그래도 계속 찐빠만 주면 정말 출근할 맛이 안나잖아요. 알아줄 때, 어떤 프로젝트를 준비해서 제출했을 때 그거 그냥 집어던지는 경우들이 많지요. 정말 그 다음날 직장 가기가 어렵지요.

하지만 지금 당장은 부족해도 '야, 너 정말 가능성있다. 다시 한번 해봐라' 이렇게 자신을 알아주고 인정해 주고 기다려줄 때 그 회사를 위해서 평생을 몸바칠 수 있는 거 아니겠어요? 사랑도 마찬가지입니다. 자기의 마음을 알아줄 때, 믿음도 마찬가지예요. 우리가 왜 교회를 못 정하고 여기저기 방황합니까? 자기를 알아 줄 목자를 못 만나서 그래요. 자기를 알아 줄 사람만 만나면 생명을 걸고 목숨을 걸고 하는 거예요. 여러분, 주님을 바로 만나시면 여러분의 인생을 걸만큼 좋은 삶이 될 줄로 믿습니다. 그 주님을 만나시기 바랍니다.

주님께서 레위를 인정해 주시고 나를 좇으라고 하셨어요. 나를 따르라고 하셨어요. 군더더기가 없습니다. 그냥 그 자리에서 '일어나 좇으니라' 간단합니다. 결단은 간단한 거예요. 복잡하지 않습니다. 우리 주님께서 레위를 불러주셨을 때, 자기를 인정하고 알아주셨을 때 레위도 다른 얘기하지 않았아요. '일어나 좇으니라' 결단입니다. 우리 주님께서 말씀하셨습니다. '건축자의 머릿돌이 성전의 모퉁이돌이 되었더라' 사람들은 그를 버렸습니다. 법도 그를 버렸고, 관습과 전통도 그를 버렸습니다. 그런데 주님은 버린 그 돌을 모퉁이 돌이 되게 하셨어요. 가장 빛나게, 가장 중요하게, 가장 소중하게 사용하셨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사람들이 말합니다. 거기서도 또 좇아 온 제사장들과 바리새인들 서기관이 말합니다. '왜 예수는 죄인들과 같이 먹고 마시는가?' 그때에 주님께서 긴장을 하시고 '내가 이 제도 속에서 인정을 받지 못하면 내가 앞으로 회당에 가서 가르치지도 못할 것이고 내가 앞으로 이 이스라엘에서 주의 복음을 증거하지 못할 지도 모르겠다. 아니면 내가 이 사회 기득권층인 저 바리새인과 서기관들의 인정을 받지 못하면 내가 굉장히 어려움을 당할 지 몰라' 그래서 당신의 소신을 꺾고 지금 죄인들과 같이 식사하는 그 자리에서 자신을 지적하는 그들 앞에서 이렇게 저렇게 내가 왜 이 사람들과 밥을 먹게 되었는지 설명을 하고 변명을 하고 변호하신 것이 아닙니다.

오히려 주님은 17절에서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그래. 내가 죄인들 때문에 왔어. 너희들은 죄인이 아니라고 생각하는 지 몰라. 그래서 너희들은 스스로 의인이라고 생각하지. 나는 의인을 위해 온 것이 아니야. 나는 죄인을 부르러 왔도다' 정확하게 말하면 죄인이라고 고백하고 깨달은 사람들을 위해서 왔다는 것입니다. '너희들이 의인이라고, 너희들이 의인이라고 생각하지만 실제는 그 죄인보다 더 죄인이 너희들이 내 사역의 대상이 아니라 가슴을 치고 부끄러워 얼굴 들지 못하는 죄인임을 깨달은 그들을 위해서 내가 왔다'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오늘 주님께서 건강한 사람이 아닌 병든 사람을 위해서 오셨다고 말씀하셨고 의인이 아닌 죄인을 위해서 오셨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오늘 저와 여러분들은 바로 치료받아야 할 환자들인 줄 믿습니다. 주님은 상한 심령을 가진 자들에게 '내게로 오라. 내가 너희를 쉬게 하리라' 고 말씀하십니다.
죄임됨을 깨닫기 원하는 이들에게 ' 네 죄사함을 선언하노라' 고 하셨습니다. 중풍병자에게도 육신의 질병보다 우선적으로 죄의 문제를 먼저 해결해 주셨습니다.
주님께서는 세상의 편견을 깨뜨리시고 그 속에 있는 미래의 무궁한 재능과 능력을 보시고 그를 인정하시고 불러주셨을 때, 마태는 생명을 다하여 주님의 제자로서 충성할 수 있었습니다. 마태처럼 행복한 이는 없었을 것입니다.
이제 우리는 주님의 안목을 가지고 세상을 바라보아야 합니다. 주님의 안목으로 이웃을 바라보면 시험 들 일도 없을 것입니다. 도둑놈이 많다고, 거짓말쟁이가 많다고 시험 들 일이 없어요. 할렐루야 !

결국 교회라고 하는 공동체는 부족함을 인정하고 그리고 새로워지기를 원하는 주의 백성들이 모인 공동체인 줄 믿습니다. 세상은 죄인이라고, 쳐다보지도 말라고 법으로 정하여 멸시하지만, 주님은 그들을 부르셨고 그들과 함께 있기를 좋아하셨습니다.
오늘 그 주님을 닮아 여러분들의 시각도, 여러분의 발길도 달라지시기를 간절히 축원합니다. 세상이 질시하고 손가락질하는 그들에게 다가가 그들의 친구가 되시고, 위로자가 되시고, 그들의 미래를 찾아주는 동반자가 되셔서 그들까지도 구원의 반열에 함께 참예할 수 있도록 증거자의 삶을 사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간절히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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