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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새 포도는 새 부대에 (막 02:18-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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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대 사회를 가리켜 급변하는 사회라고 말합니다. 너무 빨리 변하기 때문에 변하는 것 조차 느끼지 못할 때가 있습니다. 마치 지구의 자전 속도가 너무 빨라 우리가 어지러움을 못 느끼는 것 같은 원리겠지요. 세상에 변하는 가치관이나 방법들이 참으로 초고속 시대라고 할 수 있습니다. 여러분들이 사용하는 컴퓨터도 몇 달, 길어야 1년 지나면 옛것이 되어 새것으로 바꿔야만 하는 시대에 우리는 살고 있습니다.

과거 같으면 그 비싼 재산이 될 수 있는 자동차를 밖에, 길거리에 둔다고 하는 것은 상상도 못할 일이었습니다. 하지만 이제는 두는 것이 문제가 아니라 차를 세워 둘 곳을 찾는 것이 급한 시대가 되었어요. 주부들은 남편이 퇴근할 때 주차 공간 마련하느라 온갖 신경을 다 쓰곤 합니다. 그것 때문에 이웃끼리 싸움도 하고 여러 가지 불미스러운 일들도 생겨나곤 합니다.

한 20년쯤 전에 행정학을 공부한 한 목회자가 미국에서 들어오셔서 우리 목회자를 대상으로 세미나를 한 적이 있었는데 그때 그분이 이런 충고를 했습니다. 지금 생각해 보니까 예언자적인 충고였는데 그때는 모두 한 귀로 듣고 한 귀로 흘려버렸던 이야기입니다. 무슨 내용이냐 하면 '앞으로 교회가 주차장을 확보하지 않으면 어려울 것입니다.'라는 이야기였어요.
20년전에 그 말을 듣고서 실감있게 생각하는 분이 하나도 없었습니다. '배부른 소리하고 있네... 교회가 자기 땅 구하기도 어려울 때 무슨 주차장이냐..' 그랬습니다. 하지만 지금 생각해 보면 정말 예언자적인 이야기지요. 오늘 우리가 이렇게 우리의 가치관들이 시대에 따라서 변하는 그런 모습들을 보게 됩니다. 너무 빨리 변하기 때문에 우리는 변하는 것 조차 모를 지경입니다.

1885년 아펜셀러 부부와 언더우드 선교사가 제물포를 통해서 한국에 처음 들어오셨을 때, '누가 먼저 한국 땅을 밟았느냐?' 하는 것이 교회사 학자들의 논쟁거리였습니다만, 지난번 중부연회 70년사를 발간하면서 감리교단의 원로 사학자이신 윤춘병 감독님께서 70년사를 쓰시면서 아주 중요한 자료를 발굴해 내셨습니다.

그것은 다름 아닌 아펜셀러 선교사의 일기였는데 거기에는 아주 분명하게 그동안 우리가 잘못 알거나 분명치 않았던 부분들이 기록되 있었습니다. 흔히 우리는 그분들이 부활절 아침에 제물포에 도착했다고 알고 있었는데 그분의 일기를 보면 '우리는 1885년 부활절 오후에 제물포에 도착했다.'고 분명한 싯점을 밝혀 놓았습니다.
막 결혼을 한 신혼부부였던 아펜젤라의 아내가 먼저 배에서 내렸고 뒤이어 자신이 따라 내렸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서구적인 사고에 있어서 당연한 모습이겠지요. 아펜셀러의 일기가 발견됨으로 인하여 '누가 먼저냐?' 라는 논쟁은 이제 별 의미가 없게 되었습니다.

하지만 사실 '누가 먼저 이 땅을 밟았느냐?' 는 그렇게 중요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우리에게 중요한 것은 그들이 자신의 젊음과 인생의 모든 것을 뒤로 하고 오직 깜깜한 나라, 마치 지금의 아프리카 보다도 더 미개한 나라에 복음을 가지고 찾아왔다는 사실입니다.
당시는 사진을 찍으려고 하니까 혼비백산 도망가고, 어렵게 사진 찍은 것을 보여주니까 사람의 영혼을 빼내어 거기다가 박아놓았다고 선교사들을 호통치던 시대였습니다.

44세의 일기로 아펠셀러는 인천에서 목포로 배를 타고 가던 중 군산 앞 바다에서 풍랑으로 순직을 할 때까지 그는 오직 한국을 위해서만 살았고 그의 아들, 그의 손자들이 계속 연세대학에 남아 오늘날 이 땅의 서구 문화를 전하는데 평생을 바치는 한국의 은인으로서의 삶을 살았습니다.

전도의 방법에 있어서 가장 오래되고 교과서적인 방법이라면 노방전도를 들 수 있습니다. 일제시대를 거쳐 70년대 까지'노방 전도'하면 우리 머리 속에 전형적으로 떠오르는 모습, 큰 북을 한 사람이 메고 그 북을 치면서 거리로 동네로 나아가면 수많은 사람들이 그 주위에 모여들고 그러면 선교사님들이나 주의 종들이 복음을 전했던 것이 당시의 노방 전도의 전형적인 모습이었습니다. 그렇게 해서 한국 교회는 지금까지 부흥해 왔습니다.

그러다가 70년대 후반 들면서 아파트가 생기기 시작하면서 집집마다 방문하는 축호 전도가 활성화되기 시작했습니다. 신학대학에서도 '아파트전도대'가 생겨 전도의 불을 붙이는 견인차 역할을 하였는데, 그때부터 '전도'하면 가정을 방문하는 '축호 전도'가 주종을 이루었습니다.

그후, 90년대 들면서는 전도지나 혹은 비디오 테이프나 카세트 테이프 같은 이런 매체들을 통해서 가정으로 발송하거나 전해주는 문서 전도가 점점 새로운 전도의 개념으로 자리를 잡아갔습니다. 당연히 '전도'하면 전도지를 준비하는 것으로 알았고, 테이프나 비디오를 가져야 하는 것으로 알만큼 이제 문서 전도는 우리의 전도의 아주 중요한 부분이 되었습니다.

그러나 90년대 후반 전도에 잇어서 획기적인 패러다임의 전환이 일어나기 시작하였는데 그것이 바로 컴퓨터를 통한 인터넷 방송, 홈페이지를 통한 새로운 전도 방법이 도입되어 지역의 한계를 넘어서서 전국적, 세계적 네트웍을 이용한 시대가 열린게 되었습니다. 교회의 소개와 목회자들의 생생한 설교, 그리고 다양한 교회활동과 선교사역들이 컴퓨터를 이용하는 모든이들에게 다가가는 계기가 된 것입니다.

얼마전 우리 나라의 인터넷 사용자가 3,000만명을 돌파하였다는 통계가 발표되었습니다. 어린이들과 노인들을 빼면 거의 대부분의 국민이 컴퓨터와 인터넷을 사용한다는 놀라운 의미가 될 것입니다. 하지만 아직도 컴퓨터에 대해스스로 컴맹이라고 얘기하는 분들도 있을 것입니다. 하지만 그것은 그리 자랑스러운 일은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70이 넘으신 분들이 컴퓨터를 배우시거나 운전을 배우시는 분들을 보며 도전을 받아야 합니다. 그런 분들의 생각은 젊은이들 못지 않게 시대에 맞추어 가려는 도전적이고 창의적인 건강한 정신을 가졌다고 볼 수 있습니다.

어떤 분들은 '나는 은행에 가서 돈을 넣고 빼는 것도 모른다거나, 나는 통장이 없다'라고 말하는 분들을 간혹 만나게 됩니다만, 그것은 아마도 목회자가 어떤 물질적인 부분에 욕심을 가지지 않겠다는 의지의 표현일지는 몰라도 그렇게 좋은 모델은 될 수 없을 것입니다. 전자 매체로 대금을 결제하는 시대에 스스로 낙오자임을 자청하는 패배주의적 모습이라는 것입니다.

주님께서 말씀합니다. '새 포도주는 새 부대에 넣느니라' 이 말은 당시로 보면 대단히 놀라운 말씀이었습니다. 그러면서 고민합니다. 그동안 쓰던 헌 부대는 어찌할꼬? 그렇지요. 그 헌 부대를 어찌할꼬? 하고 염려하며 그것 붙잡고 있다면 새 것은 쓸 수가 없어요.

성도 여러분, 오늘 주님께서는 바리새인들과 서기관들에 의해서 어떤 도전적인 그러한 힐난을 받고 있습니다. 18절에 보면 요한의 제자들과 바리새인들, 바리새인의 제자들이 금식하고 있었는데 주님의 제자들이 금식하지 않은 것 때문에 지금 비판을 받고 있습니다.
'어찌하여 당신의 제자들은 금식하지 않습니까?' 주님께서 말씀합니다. '잔치집에 신랑과 함께 있는 동안에 어찌 금식할 수 있느냐? 그때는 먹고 마시고 즐거워해야지.. 하지만 신랑을 빼앗길 날이 오는데 그때는 금식해야 할 것이다.'

주님과 함께 있는 자리에서 바리새인과 서기관들은 주님과 제자들을 걸고 넘어지는 이유는 사실 주님의 이 말씀 때문이 아니라 벌써 그 앞서 행하신 주님의 사역 때문이었습니다.

한 중풍병자를 네 사람이 지붕을 뚫고 들어왔을 때 그냥 병만 고쳐 주셔도 시비거리인데 '네 죄사함을 받았느니라' 며 죄사함을 선언했을 때 바리새인과 서기관들의 분노는 극에 달했습니다. '당신이 무엇인데 죄를 사한다고 선언하느냐?' 그리고 한 걸음 더 나아가 세관에 앉아있는 레위를 바라 보신일, 그를 제자로 불러주신일, 그의 집에서 세리들과 함께 식사하시는 상황에선 완전히 분노의 수준이었습니다.

왜 분노합니까? 그것은 자기들의 전통과 방식대로 따라하지 않았다는 것이지요. 성도여러분, 우리가 왜 화를 냅니까? 주님의 일을 하다가도 종종 우리들도 바리새인이나 서기관같이 자기 도취 때문에 사람들의 마음에 상처를 주고, 복음의 본질이 아닌 주변적인 것 때문에 오히려 공동체 분위기를 깨뜨리는 경우들이 있어요. 이제 제자된 우리는 무엇이 더 중요하며 주님께서 무엇을 더 기뻐하시는지를 알고 실천해야 할 줄로 믿습니다.

그들은 금식을 아주 철저하게 금식을 해야 할 절기에는 감당을 했습니다. 귀한 일입니다. 지금은 세계의 모든 교회가 주님의 고난을 기억하며 참회하는 사순절 절기입니다. 우리 교회는 3월 첫주간 특별 새벽기도회를 개최하고 둘째주간은 창립 19주년 감사 심령대 부흥성회를 준비하고 있습니다.

모두가 새벽 기도회에 동참하는 일 귀한 일입니다. 감사한 일이예요. 하지만 참여하지 못하는 사람을 ' 새벽기도도 못하는 당신이 집사냐?'라고 힐난하는 것은 옳지 않습니다.
참석하지 못하는 사람도 새벽기도를 해야 옳은 것은 잘 알고 있지요. 단지 그것을 감당할 믿음이 부족한 것 뿐입니다. 앞서가는 신앙의 사람들은 연약한 이들을 위해서 오히려 기도해 주어야 합니다. '아무개 집사님도 기도에 동참할 수 있도록 믿음을 주시고, 주어진 환경을 이길 수 있는 용기를 주시옵소서' 그렇게 우리는 중보기도해야 합니다.

주님께서 금식기도하는 그들의 금식 자체를 탓하신 것은 아닙니다. '우리는 하는데 너희들은 왜 안하느냐?' 정죄의 삶에 문제가 있는 거예요. 사실 금식은 얼마나 귀한 것입니까? 성경은 말씀합니다. 금식하는 기도는 흉악의 결박을 푸는 능력이 있다고 했습니다. 여러분의 삶에 있어서 정말 감당하기 어려운 문제들이 있다면 여러분들은 금식해야 합니다.

늘 여러분들의 마음에 상상 전도, 상상 신앙, 그런 생각만으로 배불러서는 안돼요. 아이를 꼭 갖고 싶어서 그것에 대해서 너무 집착하다 보면 입덧도 하게 되고, 배도 부른 것 같고, 그래서 산부인과 가서 진찰하면 뭐라고 그래요? '상상 임신입니다'
'우리 남편 예수 믿어야 되는데.. 우리 아이들 신앙생활 잘 해야 되는데..' 그렇지요. 그렇게 생각들은 하시지요. 그런데 그 이상 진전이 되지 않아요. 희망사항이 아니라 우리의 눈물어린 기도의 제목이 되어야 하고 작정하며 주님께 매달리는 헌신이 있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여러분의 배우자를 위해서 작정하고 예물을 드리면서 금식하면서 기도 한번 제대로 해 보았나요? 여러분의 자녀들을 위해서 학원에 학비를 대주기는 해도 여러분의 자녀들의 신앙적인 성장을 위해서 투자 한번 제대로 해 보셨나요? 정말 우리가 주님께서 원하시는 것처럼 이 금식의 삶의 능력을 위해서 정말 기도의 제목을 가지고 금식해 보셨습니까?

정말 사랑한다고 하면서, 정말 아낀다고 하면서 금식 한번 못해본 우리 그를 사랑한다고 말할 수 없습니다. 그를 위해서 기도했다고 말할 수 없어요. 어떻게 보면 지금 이 바리새인들 보다도 우리는 못한 것입니다. 그냥 머리 속에 상상으로만, 희망 사항으로만 갖고 있어서는 평생가도 여러분의 기도의 대상자들은 끄떡도 하지 않습니다.

다니엘과 세 친구는 우상숭배에 대한 도전이 왔을 때 그들은 금식하면서 하나님 앞에 매달렸습니다. 풀무불에 들어가는 위험에 직면하면서도 신앙의 정절은 변하지 않았습니다.

하만 총리에 의해 이스라엘 민족들이 완전히 제거하려는 음모를 알았던 에스더는, 먼저 하나님 앞에 금식하면서 모르드개와 지도자들에게 이 일을 위해 함께 금식해 달라고 요청하였습니다.

느헤미야는 훼파된 예루살렘 성을 재건하기위해 먼저 하늘의 하나님께 금식하면서 자신과 연결된 사람들을 하나님께서 역사하시도록 기도했습니다.

주님께서 말씀하시기를 '천지는 변하겠거니와 하나님의 말씀은 변하지 않는다'고 말씀하셨어요. 2000년전의 주님의 말씀이나 오늘의 주님의 말씀이나 그 말씀은 변하지 않습니다. 하지만 그 말씀을 담는 그릇이나 그 말씀을 전하는 도구들은 새롭게 새롭게 변해야 된다는 거예요. 고집하지 마세요. 복음을 담는 그릇이나 복음을 전하는 도구들을 새롭게 하는 일에 우리는 고집을 피워서는 안됩니다. 그것은 새로워질수록 좋은 것입니다.

오늘 주님은 우리에게 새로운 도전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새 포도주를 새 부대에 넣으라' 바울 사도는 이 부분에 있어서 가장 온전히 순종한 사람 중의 하나일 것입니다. 그는 율법의 신봉자였습니다. 바리새인 중의 바리새인이었습니다. 나이 30에 의회에 의원이 된 사람입니다. 가말리엘 학문의 최고의 지도자가 되었습니다. 30세의 나이에 학문과 명예와 권력의 중심에 선다고 하는 것은 그가 얼마나 탁월한 지혜와 명철을 가진 사람인가 하는 것을 잘 알 수 있는 대목입니다.

바로 그런 사울이 주님을 만났습니다. 주님을 만난 이후 그는 이렇게 고백하고 있습니다. '나를 위해서 준비했던 모든 것들이 이제는 배설물처럼 여겨집니다' 그리고 나서 그 모든 지식과 그 모든 자신의 주어진 환경들을 오직 복음을 위해서 사용합니다. 전에는 자신을 위해서 준비하고 만족하며 살았는데 이제는 모든 것들을 주님을 위해서 쓰고 기뻐하는 것입니다. 그가 고백합니다.
고린도전서 19장 20절 이하에 보면 '유대인에게는 유대인과 같이, 헬라인에게는 헬라인과 같이, 연약한 이들에게는 연약한 자들과 같이, 약한 자들에게는 약한 자와 같이, 율법이 없는 자는 율법이 없는 자들과 같이 내가 행하노라' 왜? 그는 한가지 중요한 삶의 목표가 있었습니다. '아무쪼록 몇 몇 사람들을 구원코자 함이라'

여러분이 지식이 많은 엘리트라고 해서 늘 엘리트만 상대하라는 것은 아니지요. 여러분이 경제적으로 높은 생활을 한다고 해서 그런 사람들과만 상대하라는 것은 아닙니다. 가난한 사람들에게는 가난한 사람과 같이, 못 배운 사람들에게는 못 배운 사람들 같이 겸손하고 낮은 모습으로 그들 속에 들어가라는 말입니다. 언제나 그들의 입장에 서서 주님 말씀하시듯이 너희가 세상에서 빛이요, 세상에서 소금인 것처럼 그 세상 속으로, 연약한 세상 속으로, 율법있는 자들의 세상 속으로, 헬라인들의 세상 속으로 들어가서 빛과 소금이 되라는 것이지요. 고집 부리지 마세요. 나는 그것은 어울리지 않는다고 여러분의 입장만을 주장하지 마세요.

바울 사도처럼 우리도 주님을 만난 이후에는 우리의 체면 다 버렸습니다. 우리의 인간적인 것 다 버렸습니다. 주님을 위해서 이제는 우리는 어디든지 갈 수 있는 준비가 된 줄로 믿습니다. '부름 받아 나선 이 몸 어디든지 가오리다' 아직도 '부름 받아 나선 이 몸 골라서 가리이다' 그렇게 여러분의 삶에 아직도 변화가 덜 되어 있다면 바꾸어야 합니다. 나를 어디로 보내 주시든지, 2속으로 보내 주시든지, 나를 강사로 쓰시든지, 속장으로 쓰시든지, 어떤 모양으로 나를 쓰시던지 주님 내가 충성하기를 원합니다'

오늘 바울 사도는 어떤 모양으로든지 전파되는 것은 그리스도니 그렇게 고백하면서 자신보다는 주님이 드러날 수만 있다면 자신은 어느 곳에든지 쓰이기를 그는 기뻐했고 즐거워했습니다.

헨리 나우웬은 하버드대 교수였지만 그곳을 떠나 캐나다의 '데이브레이크'라는 지체 장애자들을 섬기는 곳으로 가 그들을 섬기면서 '내가 높은 곳에 있을 때에는 주님을 만날 수 없었는데 , 가장 낮은 이곳에서 주님을 만날 수 있었다'고 고백하고 있습니다.

슈바이처는 박사학위를 몇 개나 가져 가장 멋지고 융숭한 대우받으며 살 수 있었지만, 그 모든 자리를 떠나 아프리카로 간다고 했을 때 사람들이 의아해 했습니다. '왜 아프리카로 가십니까?' 그의 대답은 간단했어요. '빚 갚으러 갑니다'
바울 사도는 언제나 주님의 사랑에 빚진 자라고 고백했습니다. 주님의 사랑을 깨달으면 깨달을수록 체험하면 체험할수록 주님에게 빚진 자라고 하는 것을 알았어요. 사랑의 빚을 갚겠다고 아프리카로 간 그를 누가 어리석다고 말하겠습니까?

이제 우리는 21세기에 어울리는 복음의 그릇과 방법들을 가지고 주님이 원하시는 그곳에서 충성해야 합니다. 주님이 기뻐하시는 대로, 주님의 인도하심을 따라 곳곳에서 새로운 변화의 역사가, 한 영혼이 새로워지는 역사가 나타나길 바랍니다.
주님과 함께 새 포도주는 새 부대에 담는 앞서가는 평안의 공동체가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간절히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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