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그인

  • 목록
  • 아래로
  • 위로
  • 쓰기
  • 검색

설교 안식일의 참 정신 (막 02:23-3:5)

첨부 1


오늘 본문 말씀을 보면 예수님께서 손마른 사람을 안식일에 고치시려고 하는 장면과, 제자들이 안식일에 밀밭 사이로 가다가 밀을 비벼 먹은 것을 보고 바리새인들이 제자들과 예수님을 향해서 비난하고 정죄하는 모습이 소개되어져 있습니다.
우리는 바리새인 하면 우리 머리 속에는 정말 그 사람은 상종하기 어려운 사람, 예수님의 사역을 늘 시비하고 어렵게 했던 그런 집단으로 생각합니다. 주님은 그들을 향해서 '회칠한 무덤 같은, 독사의 자식들 같다'라고 책망하시기까지 했어요. 그렇습니다. 그들은 그런 비판을 주님으로부터 받아도 충분한 사람들입니다. 하지만 바리새인들이 처음부터 그랬던 것은 아니예요.

신약성경을 보면, 구약성경에는 나와있지 않은 새로운 개념의 바리새인이라는 집단을 만나게 됩니다. 구약의 말라기가 끝나고 신약이 시작되는 그 사이가 우리는 자연스럽게 연결된 것으로 알지만, 알고 보면 약 400년 정도의 신약과 구약의 중간 시기가 있었어요.
그 시기가 바벨론 포로 후기부터 인데 이스라엘 민족들이 성경을 두루마리에 쓰기 시작했던 시기이고 바리새인 같은 특별한 신앙의 공동체가 형성되는 시기이며, 하나님의 말씀과 이스라엘의 역사를 가르치면서 자라나는 후세들에게 역사 의식을 심어주던 '시나고규' 즉 회당이 곳곳에 세워지던 시기이기도 합니다.

그러므로 신구약 중간시대는 신약을 이해하는데 우리가 반드시 알아야 할 중요한 역사적 시기입니다. 베델성서대학을 하신 분들은 신구약 중간시대를 2-3주에 걸쳐서 공부하셨을 것입니다. 거기에서 세례의 개념도 새롭게 정리되고, 그리고 하나님의 말씀을 회당에서 가르칠 수 있다고 하는 이제는 예루살렘 성전뿐만 아니라 회당에서도 그들이 주의 이름으로 모여지는 그러한 새로운 모습들도 태동되기 시작했습니다.

거기에 바리새인이라고 하는신앙의 정통성을 유지하고 신앙의 정절을 지켜보겠다고 하는 순수하고 아름다운 의도에서 모인 경건한 공동체가 '핫시딤'인데 이 단체에 속한 사람들이 바리새인 그룹을 형성하기에 이른 것입니다. 좋은 의도로 출발했습니다. 모든 사람들보다도 겸손과 온유로 출발을 했어요. 그런데 시간이 가면서 변질되기 시작한 것입니다.
원래 이스라엘 사람들은 일년에 한번, 대속죄일에는 금식을 했습니다. 그런데 경건한 사람들이 생각합니다. '우리가 일년에 한번씩만 금식을 해서야 될것인가? 우리가 많은 절기들이 있는데 절기마다 금식을 해야 되겠다. 유월절에 금식하고, 수장절에 금식하고, 맥추절에 금식하고, 부림절에 금식하고 우리가 절기때마다 금식을 해야 되겠다. 더 나아가서는 우리가 일주일에 한번씩 금식하자' 바리새인들은 나중에는 일주일에 이틀씩 금식을 하기도 했습니다. 쉬운 일이 아니잖아요. 일년에 한번씩 금식하는 것도 귀한데 그들은 일주일에 이틀씩이나 금식을 했습니다.

그런데 문제는 자신들의 그 금식과 자신들의 경건의 생활을 다른 사람들에게 그것도 자신의 잣대를 가지고 평가하는 것입니다. '내가 일주일에 두 번 금식하는데 당신은 도대체 뭐하는 거냐?' 그 말을 듣는 사람은 상처를 받습니다. 금식을 못하는 여러 가지 이유가 있겠지요. 믿음이 연약해서 못할 수도 있고, 또 금식을 하게 되면 매일같이 노동해서 일을 해야 할 사람이기 때문에 내가 금식할 수 없는 환경적인 그런 조건도 있고, 혹은 몸이 허약해서 금식을 하면은 건강을 해칠 수 있는 우려도 있고, 여러 가지 이유가 있을 것입니다.

제자들이 밀밭 사이로 지나가면서 이삭을 잘랐을 때 바리새인들은 예수님에게 말합니다. '보시오. 당신의 제자들이 하지 못할 일을 하고 있습니다. 내가 지금 안식일에 금식하고 있는데 당신의 제자들은 금식하기는 커녕 밀 이삭을 잘라먹다니 지금 도대체 정신들이 있는 것입니까?'라고 지금 도전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렇지요. 명백히 제자들이 잘못한 것입니다. 그래도 주님의 제자들이 주님에게 선택받은 창조적인 소수라고 자부심을 갖는 사람들이었는데 잘못된 것이지요. 하지만 더 잘못된 것은 그러한 그들을 정죄하는 손길들이라는 것입니다.

내일부터 사순절 '특별 새벽기도회'가 시작됩니다. 확신하건대 새벽을 깨우는 성도들로 이 성전은 가득찰 줄로 믿습니다. 사순절 기간은 40일 이지만 젊은이부터 어른에 이르기까지 모두가 동참하자는 취지에서 일주일 동안 실시합니다. 가깝든 멀든 원근 각처에서 성전에 모여 한 마음으로 주님의 고난에 참예하는 귀하고 복된 시간이 될 것입니다.

사실 경건한 성도들은 이미 '재의 수요일'이 시작되면서부터 기도에 들어가신 분들도 많지요. 그러나 우리는 교회가 공동체가 아닙니까? 공동체라고 하는 것은 연약한 이들도 함께 붙들고 세우며 가야 하는 것이기에 이제 제가 목회를 생각하면서도 그런 부분을 염두에 두지 않을 수가 없습니다. 하지만 그 일주일의 특별 새벽기도회도 참석 못하는 분들이 혹시 계실지 모르겠습니다. 그런 분들을 정죄하기 보다는 그들이 믿음을 가지고 건강을 회복해서 동참하도록 기도하는 것이 우리의 바른 모습일 줄 믿습니다.

오늘 바리새인들은 참으로 안타까운 모습들을 가지고 있습니다. 우리가 3장 1절과 2절에 보면 주님께서 회당에 들어가셔서 손마른 사람을 보셨을 때 바리새인들이 취한 태도를 보면 참으로 안타깝기 그지없습니다. '바리새인들이 예수를 송사하려 하여 안식일에 그 사람을 고치시는가 엿보거늘..' 당당하게 보는 것도 아닙니다. 엿보는 것입니다. 지금 예수께서 실수하는가 안하는가를 지금 엿보고 있는 거예요. 똑같은 자리에서 어떤 사람은 치유받고 어떤 사람은 큰 은혜받고 기뻐서 어쩔 몰라요. 어떤 사람은 그 자리에서 엿보고 있어요.

어느 목사님은 주일 예배 끝나고 나면 오히려 긴장을 하신다고 그래요. 왜냐하면 예배만 마치기 무섭게 전화를 걸어오는 분이 있답니다. '목사님, 오늘 말씀 중 인용한 성경귀절 있지 않습니까? 그거 틀렸습니다. 요한복음 3장 16절인데 4장 16절이라고 하셨습니다........'
고마운 일이지요. 하지만 그렇게 전화하는 의도가 무엇입니까? 설교자에게는 주일 예배를 마쳐도 일주일 동안의 긴장감으로 몹시 피곤해 있는 상태입니다. 저희는 주로 저녁예배를 마친 뒤에야 10시쯤 해서 저녁식사를 합니다. 수요기도합주회를 인도하고 나면 거의 새벽 1시나 되어야 잠을 이루게 됩니다. 영적인 충만함과 또 긴장된 육신때문이겠지요. 다시금 원기를 충분히 회복하려면 많은 시간이 필요합니다.

그런데 철없는 그 성도는 그 중요한 시간에 전화를 한다는 것입니다. ' 아이쿠, 오늘은 또 뭐가 틀렸나.....' 하고 가슴이 덜컥 내려않는다는 것이지요. 사실 저도 가끔씩은 틀릴 때가 있어요. 예를 들어 1,000원이라고 했는데 집사람이 집에 들어와서는 그래요. '여보, 오늘 당신 10,000원을 1,000원이라고 그랬어요' '난 1,000원이라고 그랬는데...' '아니예요. 10,000원이라고 그랬어요' '그래요? 그 설교 테이프 한번 들어봅시다'
아이쿠, 내가 틀렸네.... 하지만 그게 뭐가 그렇게 중요해요? 3장 16절을 4장 16절이라고 하여도 3장 16절인데 오늘 목사님이 잘못 말씀하셨구나. 피곤해서 그러신가 보다.... 그렇게 이해하고 넘어가면 얼마나 좋아요.
감사하기는 저희 평안의 교회는 지난 20년 동안 설교 끝나면 뭐뭐 틀렸다고 사명감 가지고 전화하는 사람이 아직까지 없어서 참으로 다행입니다.

우리 주님께서 안식일에 병을 고시치는데 바리새인들이 엿보고 있습니다. 예수가 무슨 실수를 하는지, 어떤 잘못된 일을 하는지 알아내어 비난하고 조롱하려고 말입니다. 그것을 바로 고쳐서 개선하겠다고 하는 긍정적인 의도가 아니라 시작부터가 그들은 잘못 출발하고 있는 거예요. 하지만 주님께서는 당당하셨습니다. 오히려 그 많은 사람 가운데 손마른 사람을 부르시고는 '한 가운데 일어서라'고 하셨습니다. 그리고 바리새인들에게 묻습니다. 안식일에 병을 고치는 것과 병을 고치지 않는 것, 쉽게 얘기하면 '사람을 살리는 것과 죽이는 것 어느 것이 옳으냐?'

성도여러분, 우리가 안식일에 모이는 목적이 무엇입니까? 주님께서 부활하신 이후, 우리 크리스천들의 안식일은 안식 후 첫날 곧 주일이 되었습니다. 우리가 여기 모이는 이유가 뭐예요? 내 영혼이 살고 내가 살므로 나의 가정과 나의 직장과 이 사회를 살리려고 하는 것이 우리 모임의 목적 아니겠어요? 그러기에 '모이면 기도하고 흩어지면 전도하자'
전도가 무었입니까? 영혼을 애굽에서 가나안으로 이끌어내자는 거 아니예요? 그런데 '안식일에 사람을 살리는 것과 죽이는 것 중 어느 것이 옳은가 한번 대답해 보라.......' 질서를 위해서 제도는 필요합니다. 하지만 그것도 궁극적으로 사람보다 앞서가면 안돼요. 주님은 분명히 말씀합니다. '안식일은 사람을 위해서 있는 것이다' 사람이 안식일을 위해서 있는 것이 아니라는 거예요. 제도가 중요하지만 그 제도가 사람을 억압하고 스트레스를 준다면 그것은 옳바른 제도가 아니라는 것이지요.

안식일에 하지 말아야 할 것들, 많습니다. 바리새인들은 안식일에 하지 말아야 할 것들을 처음에는 39가지를 정해 놓았어요. 안식일에는 음식을 만들면 안됩니다. 이스라엘에 가보니까 그들은 토요일을 지금도 안식일로 지키고 있는데 절대로 토요일날 음식을 만들지 않아요. 그런데 그들은 어떻게 합니까? 금요일날 음식을 만들어 놓는데 예를 들어서 찬 것을 먹기가 싫으니까 보온통에 보관을 합니다.
또한 안식일에는 5리 이상을 걸어가면 안됩니다. 안식일에는 손에 무게를 느낄 정도의 무거운 짐을 운반하면 안됩니다. 이런저런 조항을 만들다 보니 200가지가 넘는 금지조항들로 인해 백성들은 안식일이 돌아오면 펑안과 쉼을 느끼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어떤 것을 하지 말아야 되는 지 다 알 수가 없어 스트레스가 쌓이는 날이 되버렸습니다.

주님께서는 그런 백성들에게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수고하고 무거운 짐진 자들아,,,' 그들의 짐은 먹고사는 데 힘겨운 짐이 아니라 종교적이고 율법적인 짐으로 인해 허덕이는 사람들에게 하신 말씀인줄 믿습니다. '내가 너희를 쉬게 하리라'
성도 여러분, 예수 믿는 것이 부담이 되어서야 되겠습니까? 기쁨이고 평안이고 안식이 되어야 그날이 스트레스가 쌓이는 날이 되어서는 안된다는 것이 주님의 뜻인 줄로 믿습니다.

바리새인들은 자신들의 기준에 모든 사람들을 대했습니다. 내 잣대에 맞지 않으면 잘못된 것이라고 정죄합니다. 하지만 그들은 자신들의 그런 경직된 신앙의 기준이 얼마나 많은 사람들에게 고통을 주는가를 잘 알지 못합니다.
오늘 우리가 바래새인들을 바라보면서 정말 우리의 종교적인 이기심이, 종교적인 독단주의가 모든 사람이 자기와 같아야 한다고 하는 이런 부분들이 결국은 바리새인과 같은 이기적인 집단을 만들어버렸습니다.

6절에 보면 '바리새인들이 헤롯 당과 더불어서 예수를 죽이려고 논의했다'고 했습니다. 헤롯 당이 무엇입니까? 헤롯 왕 로마에서 인정해 준 어떻게 보면 그것은 정상적인 정권이 아니지요. 유대 민족에게 인정받는 그런 왕이 아닙니다. 로마 군대의 힘을 빌어서 통치하고 있는 헤롯 왕가에 속해있는 정치적인 그룹인데 그 그룹과 이스라엘 민족의 정통성을 유지하려고 하는 그러한 이 바리새인과는 전혀 하나가 될 수 없는 정치적, 종교적 성향을 가졌는데 놀랍게도 예수를 죽이자고 하는 데에는 한 마음이 되었어요. '오월동주'라고 할 수 있습니다.

정치적인 성향으로 진보주의와 보수주의가 있는데 우리 나라도 보면 어떤 인간적인 목적을 위해서 서로 연합하고 합당하고 이런 모습을 보면서 부끄러운 정치의 내용들을 우리가 느끼게 됩니다. 바리새인은 자신들의 어떤 목적을 위해서 헤롯 당이라고 하는 정치적인 세력과 손을 잡았습니다. 예수를 죽이려고... 자신들의 이기심, 자신들의 독단주의가 인정받지 못하고 확산되지 못하는 그 방해의 중심에 예수께서 있다고 생각한 것입니다. 그리고 그들은 예수를 죽이기 위해서 헤롯 당과 손을 잡았습니다.

오늘 우리는 성경을 통해서 주님께서 말씀하시는 그 안식의 정신을 다시 회복하기를 바랍니다. 그것은 사랑이요, 그것은 섬김입니다. 자기보다도 다른 사람을 생각할 수 있을 때 헌혈이 가능하고, 자기보다 민족을 생각할 때 삼일 정신이 있는 것처럼 우리 나라가 헌법을 새로 개정할 때 꼭 빼놓지 않는 정신이 하나 있는데 삼일 정신입니다. 정권이 바뀔 때마다 별의 별 것들을 다 갖다가 자기의 정통성을 세우려고 그러지만 정권이 바뀌면서 넣고, 빼고 그것을 반복하지만 언제나 독재 정권조차도 빼놓을 수 없는 정신이 하나 있는데 그것이 삼일 정신이예요. 33인 중에 대부분이 목회자들이고 크리스챤들입니다.

지금 우리는 사회적으로 크리스챤의 영향력이 많이 감소했어요. 그것은 사회적인 구조의 문제가 아니라 오늘 우리 자신들의 문제입니다. 얼마나 우리가 사회를 향해서 내가 아닌 사회와 이웃을 위해서 사랑의 실천의 삶을 살았느냐 하는 그 부분에 있어서 우리는 부끄러운 점이 많습니다. 이제는 내가 아닙니다. 이제는 다른 사람을 돌아보아야 합니다. 환난 당한 자, 빚진 자, 원통한 자들이 우리 가까이 올 때 왜 저런 사람들이 우리에게 오느냐고, 엘리트가 와야 되고, 부자가 와야 되고, 지식인이 와야 된다고 그렇게 생각하지는 않습니까?

하지만 다윗은 아둘람 굴에 모인 그러한 연약한 사람들을 그들을 위해서 챙기고 함께 했을 때 결국 다윗의 공동체가 하나님께서 왕국을 주셨을 때 그들은 다윗을 도와 목숨을 다한 동역자가 된 줄로 믿습니다. 이 사회를 향해서 우리가 예수의 이름으로 강하게 외칠 때 그것이 설득력이 있으려면 평소에 우리가 세상을 향해서 희생의 손길이 펼쳐져야 합니다. 샬롬 복지센타를 우리가 해야 하겠다고 하는 이유도 거기 있어요. 작은 우리의 손길이 아닌 이제는 보다 구체적이고 이 지역을 향한 보다 넓은 의미에서의 섬김이 있어야 하겠다는 것입니다.

저는 우리가 필요로 하던 성전 비품과 그리고 P.P.M 선교센타를 위한 봉헌 작정이 지난 한주간 만에 이루어 진것을 보면서 저는 놀라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3,500만원이 넘는 그 많은 비품들이 교회를 사랑하는 성도들의 눈물겨운 손길에 의해 마무리가 되어졌기 때문입니다.

사랑하는 성도여러분, 사랑은 실천입니다. 사랑은 이론도 사상도 아닙니다. 아무리 말 잘하면 뭐해요? 우리가 그 사랑의 현장에 나아가지 않으면 안됩니다. 저는 헌혈을 위해 검사를 받았으나 부적격 판정을 받으신 분들이나 적격 판정을 받고 헌혈하신 분들이나 일반이라고 생각합니다.

중요한 것은 우리의 정신입니다. 안식일은 제도가 중요한 것이 아닙니다. 오늘 우리에게 진정한 삶의 안식과 신앙의 평안을 주시기를 원하시는 그 주님의 안식의참 정신을 따라 부담이 아닌 참 평안과 기쁨을 나누어 갈 수 있는 성도들의 삶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간절히 축원합니다.
 

이런 글도 찾아보세요!

공유

facebooktwitterpinterestbandkakao story
퍼머링크

댓글 0

권한이 없습니다. 로그인

신고

"님의 댓글"

이 댓글을 신고 하시겠습니까?

삭제

"님의 댓글"

이 댓글을 삭제하시겠습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