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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열 두 제자를 세우심 (막 03:13-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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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본문 말씀 가운데 우리에게 도전 되어지는 말씀 중의 하나는 당신께서 원하시는 사람을 부르셨다는 것입니다. 부부도 성격이나 취미가 안맞을 때 의견 충돌이 많고 심지어는 부모와 자식 간에도 의견이 맞지 않으면 동업조차 할 수 없습니다. 더구나 하나님의 거룩한 역사를 위해 서로 다른 각각의 삶을 가진 우리가 교회라는 공동체의 이름 아래 모였을 때, 정말 우리가 주님께서 원하시는 그런 사람의 모습을 갖지 않는다면 결국 우리도 백인 백색의 색깔과 목소리를 내게 될 것입니다. 그곳은 곧 분열을 의미하는 것이며 혼란을 예고하는 것입니다.

주님께서 제자를 부르실 때에 당신께서 원하는 사람들을 부르셨다는 이 부르심의 기준을 보면서 오늘 우리 모든 성도들이 바로 주님께서 제자로 원하시는 기준에 합당할 수 있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세상 사람들도 사람을 쓰려고 하면 기준을 제시합니다. '남자는 키가 175㎝ 이상, 여자는 160㎝ 이상, 건강하며 용모 단정한 사람 등......' 이렇게 나갑니다. 그런데 이러한 기준들이 최근 성을 차별하는 조항으로 판정을 받아 앞으로는 그런 조건으로는 사람을 뽑을 수 없게 되었습니다. 남녀를 따로 구분하거나 어떤 신체적 제한을 두는 일은 안된다는 것이지요.

최근 한 여성이 장교 후보생 조건에서 키가 기준보다 1㎝ 더 크다는 것 때문에 불합격 통지를 받았는데 포기하지 아니하고 여러 경로로 자기의 억울함을 호소하여 결국은 육군 본부에서 자격 조건을 바꾸어 그를 합격시킨 감동적인 일이 있습니다. 이젠 우리 사회도 여성들에 대한 어떤 사회적인 제한이나 편견에 대해 그냥 스스로 물러나는 것보다는 오히려 그것을 개선하기 위해서 적극적으로 나아가는 정말 멋있는 여성들을 많이 있음을 볼 수 있습니다.

만약 예를 들어서 '우리 평안의교회에 올 수 있는 사람은 서울대학교 출신이어야 합니다' 라든지, '사법고시를 합격한 사람이어야 한다'고 한다면 여기 있는 저부터 사표를 내야 할 것입니다.

그러나 오늘 주님께서 제자들을 부르신 기준은 아주 평이했습니다. 너무 쉬웠어요. 열 두 명의 제자들의 면면을 보면서 우리는 한가지 공통점을 발견할 수 있는데 그것은 그들이 너무나 평범한 사람들이라는 것입니다. 그것은 곧 다른 말로 하면 그들이 세상적으로 내세울 만한 것이 없는 사람이라는 것이지요.

오늘 주님의 교회에 한 지체가 되어 하나님 앞에서 예배하고 있는 여러분들은 어떤 자격으로 부름을 받았다고 생각하십니까? '나는 이 교회에 부름받을 만한 자격이 있지.....'라고 생각하는 분이 있습니까? 그러나 주님은 열 두 명의 제자들을 아주 평범한 사람들로 세우셨습니다. 세상적으로 내세울 것 없는 그들을 부르셔서 3년 6개월 동안 주님과 동거동락하면서 그들을 훈련시키셔서 결국은 세상이 감당할 수 없는 큰 일꾼들로 쓰임받은 줄 믿습니다.

주님의 제자로서 붙잡혔을 때 가장 놀라운 것은 그들의 삶이 변했다는 것입니다. 무엇을 중요하게 여기고 무엇을 위해 살아야 하는가 라는 가치관이 달라졌다는 것입니다.

주님께서 열 두명을 세우셨습니다. 생각해 보면 그 많은 숫자 중에서 왜 열 두 명 일까를 생각해 보았습니다. 우리들에게 열 둘이라고 하는 숫자는 매우 익숙한 숫자이지만 주님께서 제자를 선택할 당시는 그렇지 않았습니다. 왜 12이었을까? 먼저 구약 성경에 보면, 야곱의 열 두 아들을 하나님께서는 12지파로 세우셨고 여호수아를 통해 가나안을 점령했을 때 그들이 12지파의 기준이 되어 땅을 분배 받았었습니다.

요한계시록을 보면, 하나님께서 장차 우리를 불러주실 그 천국의 아름다운 문이 12인데 문마다 12지파의 이름과 12사도의 이름이 기록되어져 있다고 했습니다. 이렇게 하나님께서는 하늘과 땅을 곱한 의미넘치는 숫자 12를 통해 당신의 일을 시작하기를 원하셨습니다. 12명의 사람들, 곧 주님께서는 공생애를 사람을 선택하는 것으로 사역을 시작하셨습니다.

12명을 선택하신 주님께서 제일 먼저 하신 사역은 그들과 함께 계심이었습니다. 3년 6개월 동안 온전히 그들과 함께 하셨습니다. 아침에 출근했다가 저녁에 퇴근하는 형식이 아니라 같이 먹고 같이 자면서 함께 공동체 생활을 했습니다. 많은 시간 동안 12명이 함께 생활했다면 얼마나 많은 어려움들이 있었겠습니까? 인격적인 부분, 취미 부분, 식생활 부분, 더 나아가 시대를 보는 역사의식 등 서로 다른 견해로 인해 수 많은 어려움을 겪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주님은 그들과 함께 있기를 원하셨습니다. 그것은 곧 주님께서 그들과 친교하기를 원하셨다는 것입니다. 어설프게 사귀기를 원치 않았다는 것이지요.

선교회가 잘 되는 선교회는 친교로 다져진 선교회입니다. 스포츠를 통해서든지, 음악적인 부분을 통해서든지, 봉사를 통해서든지, 친교로 다져진 선교회는 힘을 발휘합니다. 그리고 그 첫 번째 특징이 잘 모이는 데 있습니다. 잘 모이지 않는 선교회도 회장님을 중심해서 친교에 관심을 가지면 점점 모이는 숫자가 늘어납니다. 아무리 똑똑해도 모이지 아니하면 일을 할 수가 없는 것입니다.

주님께서 제자들과 함께 이렇게 하나의 친교의 공동체를 이루시는 이유는 그저 사랑하고 나누기 위해서가 아니라 훈련하기 위해서였습니다. 주님은 제자들이 제자 되기를 원하셨어요. 평범하고 내세울 것 없는 그들을 주님을 위해서 목숨이라도 걸 수 있는 증인으로서의 삶을 원하셨습니다.

훈련을 좋아하는 사람은 별로 없습니다. 우리는 지난 한 주간 동안 특별 새벽기도회를 했지요. 우리의 영적인 훈련 중에 큰 훈련이 기도의 훈련입니다. 평소에 못나오신 분들도 특별 새벽기도회니까 내가 이 훈련에 참여하겠다고 하는 그런 마음으로 참여해서 이 성전을 가득 채웠어요. 개중에는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피곤해서, 나는 관심이 없어..' 그래서 남의 일 보듯이 그렇게 한 주간을 지내신 분들도 계실 것입니다. 그렇지요. 지난 한 주간 새벽을 말씀으로, 기도로, 눈물로 하나님 앞에 구한 사람이나 그렇지 않은 사람이나 이 자리에 계서도 똑같아요. 달라진 것 없습니다. 외형적으로는 전혀 달라진 것이 없어요. 그러나 대단히 중요한 변화가 이미 그들과 그들 사이에서 차이가 나고 있다고 하는 것입니다.

군대 생활하면서 제일 부러웠던 것 중의 하나가 추운 겨울날 훈련을 할 때에 따뜻한 난로를 피워놓은 사무실에서 행정을 보는 사람들입니다. '저 사람들은 얼마나 행복할까?' 이 추운 겨울날 벌벌 떨면서 산에 올라가서 훈련하고, 여러 모양으로 어려움을 겪을 때 제일 부러운 사람들이 행정하는 사람들입니다. 그래서 이런저런 힘을 동원해서 행정을 하려고 그러한 곳에 배치를 받으려고 애를 쓰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그런데 1년에 한 두번씩 부대는 전투력 측정을 할 때가 있습니다. 육군 본부나 군사령부에서 그 측정하는 시험관들이 와서 측정을 하는데 사격도 하고, 구보도 하고, 뭐 태권도도 하고 여러 부분을 측정하는데 제가 있을 동안에는 거의 대부분 가장 어렵다고 하는 10㎏ 무장 구보를 꼭 육군 본부에서 오면 '연대 본부 중대' 그렇게 지명을 합니다. 어느 부대가 지명 받을 지 몰라서 늘 준비합니다 만은 늘 사무실에 앉아서 '우리는 행복하다. 우리는 참 군대생활 참 특과다'라고 생각했던 그들이 지적을 받습니다. 완전 군장하면 20㎏가 넘는 무거운 짐을 지고 철모를 쓰고 총을 메고 그리고 10㎏를, 그것도 정해진 시간 안에 한 사람의 낙오자도 없이 중대 병력이 동시에 갖다가 와야 해요.

평소에 훈련받는 이들을 보면서 참 고생 많이 한다고 생각했던 그러면서 이상한 자부심과 쾌감을 느꼈던 그들이 그 측정에서 여지없이 무너집니다. 5㎞도 못 가서 자빠지고 쓰러지고 낙오자가 됩니다. 우리는 흔히 훈련의 땀방울은 전쟁의 피와 바꾼다고 그럽니다. 우리는 그 장면을 보면서 실감을 합니다.
군인은 전투가 목적입니다. 전투에 있어서 기본적인 훈련이 되어있지 않은 사람들을 우리는 군인이라고 말할 수 없는 것처럼 여러분들이 신앙생활에 있어서 여러분들이 일시적으로 경건의 훈련에 참여하지 않았기 때문에 편안함을 가졌을 지는 모르겠지만 그만큼 여러분들은 낙오되고 있는 것입니다.

주님께서 영적인 전투에 여러분들을 부르셨을 때 우리는 여지없이 낙오되고 마는 거예요. 이것은 진리요, 이것은 과학입니다. 평소에 5㎞를 못 뛰는 사람이 완전 군장을 하고 10㎞를 뛸 수 있겠습니까? 그것도 50분 안에 들어올 수 있겠어요? 우리는 보통 사람이 10리를 갔다 오는 것이 거의 한시간이 걸리는데 10㎞를 어떻게 50분 동안에 갖다 올 수 있겠어요? 훈련되어지지 않으면 불가능한 일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저는 여러분들이 저는 평안의 성도들이 영적으로 강건한 훈련된 성도가 되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어떤 영적인 전투의 현장에 여러분들이 사용을 받더라도 패전병들이 되는 것이 아니라 승리자가 되어서 개선 찬송 부르며 돌아올 수 있기를 바랍니다.
기도의 훈련입니다. 끊임없이 기도해야 합니다. 뿐만 아니라 우리의 기도에는 말씀의 훈련이 중요합니다. '주여, 말씀하옵소서. 주의 종이 듣겠나이다' 말씀을 듣는 일이 우리에게는 중요합니다.

어떤 성도들은 말씀을 너무 좋아하는 나머지 설교 시간에도 성경만 읽어요. 이것은 아주 잘못된 것이지요. 제가 먼저 있던 교회에 목사님하고 사이가 않좋은 어떤 권사님이 있었어요. 설교만 시작하면 성경을 읽기 시작합니다. '권사님, 왜 설교 시간에 그렇게 고개만 숙이고 있나요?' '무슨 말씀이세요? 저는 성경 읽고 있었는데..' 설교 시간이 성경 읽는 시간입니까? 설교 시간에는 아무 것도 해서는 안됩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을 사모한다고 하는 것은 그런 의미가 아니예요. 일상생활에서 늘 말씀을 하루에 한 장이라도 읽고 큐티를 하고 그 말씀이 오늘 내게 무엇이라고 말씀하는 지 주님의 음성을 들으려고 애를 쓰는 모습들, 그러나 어떤 이들은 너무 말씀에 치우쳐서 기도가 소홀한 분도 있고, 어떤 분들은 기도생활은 충실한데 말씀에 또 소홀한 사람들이 있어요.

주보를 보면 성경을 읽는 부분이 있는데 이분은 기도를 많이 하는 분인데 그런데 그 속회의 성경은 빈 란으로 되어져 있어요. 이분은 참 성경을 많이 보는 분이다'라고 생각하는데 기도의 자리에는 보이지 않아요. 이렇게 편파적인 우리의 신앙이 되어서는 안됩니다. 그건 마치 우리가 음식을 먹어도 편식하는 것과 같아요. 건강한 성도가 되기 어렵습니다.

오늘 주님께서 제자들을 부르시고 그들과 함께 계시면서 그들과 친교하시고 말씀과 기도의 자리에서 그들이 훈련되기 원하셨습니다. 제자는 태어나는 것이 아니라 훈련되어진다고 하는 사실을 주님은 그들을 통해서 보여주신 것입니다. 산으로 밤에도 끌고 올라가셨습니다. 새벽에도 끌고 올라가셨습니다. '기도해라. 잠들지 말고 기도해라. 깨어 기도하라' 주님은 그들이 언제나 기도하기를 원하셨습니다.

주님께서 그렇게 훈련하신 이유가 무엇입니까? 오늘 본문 말씀 14절에 보면 주님께서 열 둘을 세워 자기와 있게 하실 뿐만 아니라 주님은 그들을 세상으로 보내서 전도하게 하신 줄 믿습니다. 이것은 주님께서 우리를 부르신 궁극적인 목적입니다. 전도하기 위해서 주님은 제자들을 부르셨고, 훈련시키셨고, 그리고 그들을 세상으로 내어 보내셨습니다. 내어 보내시면서도 주님은 염려하셨어요. 마치 양떼를 이리떼 속에 보내는 것 같은 그런 마음의 안타까움을 가지셨습니다.

여러분, 올해 여러분의 전도의 목표가 몇 명입니까? 12명이지요. 어린이 3명, 청소년 3명, 청년, 대학부 3명, 장년 3명, 12명입니다. 어린아이는 10달을 어머니가 모태에 잘 양육하고 나서 세상에 내어놓습니다. 여러분들 태에는, 여러분들 영적인 태에는 지금 몇 개월이나 자라가고 있나요? 우리는 그들을 태신자라고 말합니다. 기도로 키우고, 말씀으로 키우고, 사랑으로 키우는 여러분의 태신자는 지금 몇 개월쯤 자라가고 있습니까?
올 연말쯤 되면 모든 임원들의 전도한 내용을 전부 제가 게시하려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장로님들부터... 부담이 되지요. 하지만 사실 전도는 부담감이 있어야 합니다. 영적인 부담감이 없으면 늘 남의 일이예요. 천만명의 그리스도인들이 이 땅에 있다고 하는 말은 쉽게 하면서도 우리는 그 천만명의 한명을 보태는 전도에 대해서는 늘 우리는 남의 일처럼만 생각을 합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주님께서 그들을 보내실 때에 전도를 위해서 보내셨지만 세상으로 그들을 보내면서 이리떼 가운데 보내는 것 같은 안타까움을 가지시면서 그냥 그들을 세상으로 내몰지 않으셨어요.
오늘 본문 말씀 15절에 보면 주님은 그들에게 무기를 하나 들려 보내셨습니다. 전쟁에서 아무리 훈련이 되어도 무기를 갖지 아니하면 이길 수 없어요.

여러분, 임진왜란 때 우리 조선의 수많은 군대가 그저 밀물처럼 몰려오는 일본의 왜군들에게 그냥 연약하게 쓰러졌잖아요. 그 높은 성도 소용이 없고, 그 강한 왕의 군대도 의미가 없었어요. 왕은 결국 한양을 버리고 신의주로 피난을 가야만 했어요. 왜 그랬습니까? 여러 가지 원인이 있겠지만 가장 중요한 것은 무기의 차이입니다. 여러분, 용맹하다고 하는 것 그것은 칼과 칼의 싸움일 때 하는 이야기지 한쪽에 총을 가졌는데 칼과 창이 무슨 의미가 있습니까? 싸움이 되지 않아요. 주님은 우리를 세상에 보내시면서 전도를 위해서 세상에 파송하시면서 아주 강력한 무기를 주신 줄 믿습니다.

15절은 이렇게 말씀합니다. '귀신을 내어쫓는 권세도 있게 하셨다' 귀신을 내어쫓는 권세, 얼마나 놀라운 권세입니까? 얼마나 큰 권세입니까? 여러분들이 세상을 향해 나아갈 때 사탄 마귀의 세력들이 여러분을 바라보면서 두려워 떨 수 있는 귀신을 내어쫓는 권세를 소유하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그것은 여러분이 하나님의 자녀이기 때문에 얻을 수 있는 특권입니다. 권세를, 하나님께서 주신 권세를 사용하시기 바랍니다. 영접하는 자, 곧 그 이름을 믿는 자들에게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주신다고 그랬어요. 세상에 나가서 빌빌거리지 마세요. 당당하게 하나님의 자녀의 권세를 가지고 당당하게 살아야 합니다.

영화를 보면 권총을 가지고 당당하게 싸우다가 총을 떨어뜨린 다음에는 사람이 왜 갑자기 비굴해 지고 그렇게 약해 보입니까? 똑같은 사람인데.. 단지 무기를 떨어뜨렸다는 것 그거 하나의 변화 외에는 아무 것도 변화가 없는데 사람이 너무 변해요. 무기를 잃어버리면 안됩니다.

여러분에게 있어서 생명은 성령의 능력이요, 성령께서 주시는 권세인 줄 믿습니다. 성도가 세상에서 승리하려면 여러분들이 세상에서 언제나 당당하시려면 바로 주님 주시는 이 권세를 목숨을 걸고 지켜요. 여러분에게 성령의 능력이 있습니까? 여러분에게 성령께서 주시는 성령의 은사와 성령의 역사들이 있느냐 그 말이예요.
에베소 교회를 향해서 바울이 말합니다. '너희가 예수를 믿을 때에 성령을 받았느냐?' '우리는 들어보지도 못했는데요' 그렇지요. 오늘날도 많은 성도들이 신앙생활을 한다고 하면서도 성령의 능력에 대한 부분을 이야기하면 그들은 들어보지도 못했다고 할 정도로 능력과는, 권세와는 관계없는 삶을 살아왔습니다. 그런 그들은 세상에 나아가서 자녀다운 모습을 볼 수 없지요. 하나님의 자녀가 아닌 세상의 자녀로서 깊이 파묻혀 버리는 거예요. 그리스도인의 특징을 찾아볼 수 없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오늘 우리는 이 예수 그리스도의 제자 삼으심을 기억하면서 바로 12명을 삼으신 그 사람들의 면면들이 정말로 내어놓을 것 없고 자랑할 수 없는 평범한 사람들, 오히려 문제가 많은 사람들이었지만 그러나 주님은 그들을 통해서 일하기를 원하셨습니다.

16절 이하에 보면 12명의 제자의 이름이 소개되어져 있습니다. 마태복음이나 누가복음에도 열 두 제자가 소개되어져 있는데 순서는 차이가 있습니다. 하지만 그 순서는 그렇게 중요하지 않습니다. 우리가 알고 있는 열 두 제자의 순서는 주로 마태복음에서 소개하고 있는 제자의 순서입니다.

한번 열 두 제자 이름을 불러 볼까요? 마음 준비를 하시고 ....... 첫 번째 베드로, 두 번째 안드레 형제입니다. 세 번째 야고보, 네 번째 요한 형제입니다. 그 다음부터가 이제 문제지요. 그 다음에 빌립, 그 다음에 바돌로매, 그 다음에 도마, 그 다음에 마태, 그 다음에 알패오의 아들 야고보, 그 다음에 다대오, 다대오는 흔히 우리가 야고보의 아들 유다라고도 합니다. 그 다음에 시몬, 첫 번째 베드로라고 하는 시몬과 다른 가나안인 시몬입니다. 마지막으로 유다. 열 두 제자를 보면 유다가 2명이 있고, 야고보가 2명이 있고, 시몬이 2명이 있습니다. 그래서 누구의 아들, 혹은 어느 동네 출신 이렇게 해서 그 사람들을 구별해 놓았어요.

12명을 보면 그 중에서 우리 주님께서 별명을 붙여주신 사람이 있습니다. 저는 처음에는 이 별명을 붙여주신 사람들이 주님의 사랑을 조금 더 받은 사람들이 아닌가, 편애 받은 것 아닌가 하는 생각을 했었는데 그렇지 않다고 하는 사실을 알았습니다. 시몬에게는 베드로라고 하는 이름을 더하셨습니다. 정확하게 말하면 별명을 주신 거예요. 베드로는 헬라어로 '페트라'입니다. '반석'이라는 뜻입니다. 베드로, 반석이라는 이름과 시몬과는 분위기가 맞지 않습니다. 그는 성격도 급하고 한번 이야기했다가 상황이 달라지면 금방 돌아버리는 그러한 그는 지조없는 배신자의 역할까지도 했었습니다. 그런 베드로, 어떻게 반석이라는 이미지와 그가 같을 수 있어요? 이것은 우리 주님께서 시몬을 '네가 장차 반석 같은 삶을 살기를 원한다'는 주님의 소망이 담겨져 있는 이름이었습니다.

그런가 하면 두 형제 야고보와 요한은 그들의 성격 그대로를 별명으로 주셨습니다. '보아너게' 우뢰의 아들이라는 뜻입니다. 우리는 야고보와 요한이 얼마나 성격이 급한지 이것은 우리가 부드럽게 얘기하기보다는 우리가 일반적으로 하는 말처럼 성질이 얼마나 더러운지 이렇게 표현해야 딱 맞는 이름이예요. 우뢰의 아들이란 말은 그런 뜻입니다. 야고보와 요한은 그렇게 성격이 달랐습니다. 어떤 사람이 얘기할 때에 그 얘기에 대해서 자기하고 맞지 않으면 그 자리에서 쏘아버리는 것입니다. 다른 사람이 상처를 받든 말든 그것은 생각하지 않는 아주 단세포적인 사람입니다. 우리는 그런 성격 때문에 우리 주변의 사람들이 많이 상처를 받지요. 주님께서 이 두 형제에게 그런 별명을 주신 까닭은 그들이 12명의 공동체에서 얼마나 많은 가시 노릇을 하고 얼마나 많은 거침돌이 되었는가를 잘 알 수 있어요. 이 12명 중에서, 이 두 형제 때문에 얼마나 많은 사람이 시험에 들고 낙심하고 좌절하고 어려움을 겪었겠어요?

심지어는 누가복음 9장에 보면 주님께서 사마리아로 제자들과 들어갈 때에 사마리아 사람들이 주님 일행을 환영하지 않았습니다. 화가 난 야고보와 요한이 말합니다. '주님, 하늘에서 불을 내려서 다 없애버리시옵소서' 얼마나 성격이 우뢰와 같은 성격입니까? 그런데 주님은 그런 야고보와 요한을 3년 6개월 동안 다듬고 또 다듬으셔서 우리는 요한을 가리킬 때에 사랑의 사도라고 말합니다. 그는 사도 요한으로 요한복음과 요한 일, 이, 삼서, 계시록을 쓰면서 밧모섬에서 그는 사랑의 사도로서 모든 사람의 존경을 한 몸에 받았습니다. 우뢰의 아들, 더러운 성질을 가진 그가 변하여 사랑의 사도가 된 줄로 믿습니다.

변할 수 있어요. 여러분들의 성질, 여러분들의 성격, 여러분들의 모난 부분들, 예수 안에서 변하여야 할 줄 믿습니다. 희망을 가지셔야 합니다. 이런 우뢰의 아들이 변하여 사랑의 제자가 되었다면 나의 성격, 나의 성질도 예수 안에서 변할 수 있구나. 스스로 변화를 하는 노력도 시도도 하지 않으면서 '성격은 안 변한대요. 목사님!' 그렇게 스스로를 정당화하지 마세요. 성질도 변하고, 성격도 변합니다.

제가 어렸을 때는 남의 집의 음식은 먹을 수 없었어요. 성도들이 가져오는 음식도 어머니가 만든 것이 아니면 절대로 젓가락이 가지 않았습니다. 한 눈에 알아봅니다. '이거 누가 가져온 거지요?' 먹지 않아요. '얘, 이거 먹으면 몸에 좋단다. 너 건강에 도움이 된단다' 아무리 말씀하셔도 어머니가 만든 것 외에는 먹지 않았어요. 장례식 음식이요? 장례식이 생기면 멀리 돌아가고, 장례식장에 가면 그 이상한 냄새 때문에 구역질이 나서 견디기 어려웠어요. 그런 제가 장례식 가면 얼마나 잘 먹는 줄 아세요? 제 육체의 모습은 그대로 있지만 제 모든 부분들이 변하기 시작한 거예요. 사명이 사람을 변화시키고, 하나님의 은혜가 사람을 변화시킵니다. 믿습니까? 여러분도 변할 수 있어요. 음식도 변할 수 있고 성격도 변할 수 있어요. '너희 안에 이 마음을 품으라. 곧 그리스도 예수의 마음이니라' 주님의 마음으로 우리가 변하여져야 될 줄로 믿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는 이러한 제자들의 모습을 보면서 이러한 결론을 갖습니다. '정말로 평범한 사람의 정도가 아니라 정말 문제있는 사람들만 모였구나' 그런데 그런 사람들이 변하여서 땅끝까지 증인된 줄 믿습니다.
오늘 주님께서 열 두 제자를 부르시면서 함께 계시기를 원하셨고, 그들을 세상에 보내서 전도를 원하셨고, 맨손으로 보내신 것이 아니라 가장 강력한 성령의 무기, 귀신을 내어쫓는 권세까지 우리에게 주셨어요. 이 권세를 가지고 세상을 향해 나아가면서 하나님의 자녀답게 살아가는 여러분들 되기를 간절히 축원합니다.

이 세상에 약점이 없는 사람이 어디 있겠습니까? 연약하고 부족한 부분이 없는 사람이 어디 있겠습니까? 만약 그런 완전한 사람만 하나님께서 쓰신다면 제일 먼저 제가 이 자리를 내려와야 할 것입니다. 하지만 주님은 부족하고 연약한 우리들을 당신의 제자로 불러주셨고 연단시키고 새롭게 하셔서 하나님께서 귀한 도구로 우리를 사용하여 주실 줄로 믿습니다.

환경을 탓하지 마십시오. 기술 없는 목수가 연장 탓합니다. 연장도 중요하지요. 하지만 더욱 중요한 것은 사람입니다. 내가 변하면 내 가정도, 교회도, 이 사회도 변화된다고 하는 확신을 가지면서 '주님, 나를 철저히 당신의 제자로 삼아주옵소서' 이 말은 곧 주님께서 어떤 모습으로 우리를 훈련시키시더라도 내가 기꺼이 참여하고 동참해서 마침내 주님이 쓰시기에 아주 합당한 오늘 본문 말씀 첫 말씀처럼 주님께서 원하시는 그러한 사람의 모습, 우리가 온전히 쓰임받을 수 있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간절히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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