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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딸아, 평안을 향해 가라 (막 05:25-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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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대인의 삶의 부정적 특징 중의 하나는 절망이라는 것입니다. 최근 전쟁을 겪은 아프가니스탄의 수많은 사람들이 기근과 가족 해체로 인한 고통으로 절망하고 있습니다. 한쪽에서는 전쟁을 이겼노라고 좋아하고 있지만, 한쪽은 남편과 아들을 잃은 슬픔으로 가슴을 치고 있는 것입니다.

어제 P.P.M센타 봉헌식을 마치고 귀국길에 탄 아시아나 항공에서는 유니세프와 협력하는 사업으로 여행중 남은 동전을 기증받고 있었습니다. 2,000원만 가지면 아프리카의 여러 어린이가 며칠동안 죽을 먹을 수 있다는 설명을 들으면서 우리는 남은 동전뿐 아니라 지폐까지도 기꺼이 내어놓게 되었습니다.

지금 우리 주변에는 삶에 있어서 절망이라는 단어 외에는 생각나지 않는 그런 사람들이 많이 있습니다. 끝없는 고난과 보이지 않는 희망, 왜 살아야 하는지 이유를 알 수 없는 이들이 너무나도 많다는 것이지요.

오늘 본문 말씀은 절망과 소외의 대명사와 같은 한 여인의 삶을 소개하고 있습니다. 26절을 보면 절망적인 삶을 살았던 이 여인은 무려 12년 동안이나 혈루증을 앓았다고 했습니다. 레위기 15장은 이 병을 유출병이라 하였는데 이는 끊임없이 하혈하는 아주 못 쓸 병이요 저주받은 병이라고 사람들은 생각했습니다. 가족과 떨어져 성밖에서 살아야 했고 더구나 회당이나 성전에는 가까이 갈 수 없었습니다.

결국 이 여성은 12년 이라는 긴긴 세월 동안 자기의 병을 숨기며, 소문난 의원들을 찾아다니며 수없이 많은 돈을 썼으나 오히려 의원들로 인해 많은 고생을 하였다고 했습니다. 왜 의원들로 인해 고생을 했을까요? 환자의 입장에선 돈이 들어도 치료가 되면 기쁨이지만, 이 여인의 경우에는 치료는 되지않은채 있던 재산을 다 허비하였기에 절망감은 더욱 컸을 것입니다.

뿐만 아니라 그는 사회적인 편견 때문에 정신적인 면에서 더욱 견디기 어려워했을 것입니다. 가족과 함께 동거하지 못하는 소외감, 부정한 병이라는 사회적인 냉대, 이런 것들이 그를 더욱 힘들게 했을 것입니다. 성밖에서 소외된 채 살아갈 수 밖에 없는 이 여인의 삶이, 어쩌면 수많은 군중 속에서 오늘을 살아가는 나 자신일 수도 있습니다.

절망 밖에는 없던 이 여인에게 놀라운 소식이 들려졌습니다. 27절에 보면, '그가 예수의 소문을 들었다'고 했습니다. 죄인의 친구요 그들의 진정한 위로자가 되시는 예수, 죽은자도 살리신 능력의 치료자 예수의 소문을 들은 것입니다. 그리고 이 여인은 결단합니다.
'내가 그를 만나야 되겠다' 하지만 그가 사람들에게 다가간다고 하는 것은 매우 두려운 일입니다. 어쩌면 자신이 부정한 병을 앓고 있다는 사실을 사람들이 알게 되면 돌을 던질지도 모르는 일이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그는 예수의 소문을 듣고 그 분을 만나기로 작정을 한 것입니다. 이쯤되면 그의 마음속에는 이러한 다짐이 있을 법합니다. '내가 돌에 맞아 죽더라도 예수를 만나야 겠다' 다시 말하면 그가 주님을 만난 것은 그저 지나가다가 운이 좋아서가 아니라 죽기를 작정하고 예수님을 사모한 결과인줄 믿습니다.

주님께서 말씀하시지 않았습니까? '너희가 나를 위해 죽고자 하면 살고 너희를 위해 살고자 하면 죽으리라' 이 여인은 예수님의 소문을 듣고 무리 가운데 섞여 있습니다. 혼자 노출되어지는 것보다는 무리 가운데 있다고 하는 것이 그의 마음을 조금 편하게 했을지 모릅니다. 하지만 그는 무리 가운데 섞여 주님을 바라보는 것 만으로 만족할 수 없었습니다. 조금씩 주님에게 다가가던 이 여인은 결국 주님의 옷을 만지고야 말았습니다.

'누군가가 내 옷을 만졌다'고 주님께서 말씀했을 때 제자들은 오히려 주님을 힐난하듯 반문했습니다. '주님, 수많은 사람이 밀고 당기는 이 어지러운 상황에서 누가 주님을 만지지 않았느냐고 지금 우리에게 물어보고 있는 것입니까? 그것을 지금 말이라고 하십니까?' 오히려 제자들이 주님을 힐난하고 있는듯 합니다. 그런데 주님은 그런 제자들의 반문에는 대꾸도 아니하시고 주변을 둘러보시면서 누군가 자기를 의도적으로 만진 것에 대하여 계속 관심을 표하고 계셨습니다.

결국 뒤에서 주님을 만졌던 이 여인은 주님께서 자신을 만지신 사실을 분명히 알고 계신다는 사실에 더 이상 가만히 있을 수가 없었습니다. 주님 앞에 나와 무릎을 꿇고 내가 주님을 만졌노라고 두려워하면서 고백을 하였습니다. 주님의 제자들조차도 이 여인의 사모함을 눈치채지 못했으나 주님은 이미 알고 계셨던 것입니다.

교회가 성장한다는 일은 분명 기쁜 일입니다. 하지만 그것에 따른 역기능이 있다면 바로 이런 부분입니다. 성도가 적을 때에는 작은 아픔도 우리가 헤아리며 나룰 수 있지만 , 성도가 많아지면 자연히 작은 일들은 그냥 지나칠 수 밖에 없는 한계가 교회가 성장하면서 오는 안타까운 부분입니다. 우마차를 타고 가면 느리긴 해도 주변을 모두 살피며 갈 수 있어 좋은데, 승용차를 타면 빠르긴 해도 보이지 않는 사각지대가 있어 사고가 날 위험이 높은 것과 같은 이치이겠지요.

그런데 주님은 바로 그 부분을 간과하지 않으셨습니다. '누군가 지금 나를 사모하고 있다. 누군가 지금 나를 만지며 자신의 메세지를 내게 전하고 있는데 너희들은 그것을 아느냐?'
'목사님, 교인들이 많은데 그만한 것은 그냥 모른채하세요.......' 그렇게 말할 수 있을 것입니다. 하지만 사실 목회 사역에서 감동이라고 하는 것은 대부분 큰 일에서 오는 것은 아닙니다. 오히려 작은 일에 배려되는 손길에서 성도들은 감동하고 헌신을 새롭게 다짐하곤 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작은 일이라고 여겼지만 성도들은 오히려 그일로 인해 감동을 받고 교회와 주님을 위하여 목숨을 걸만큼 헌신하게 되는 줄 믿습니다. 할렐루야 !


이번 필리핀 선교여행은 참으로 은혜로웠습니다. 필리핀을 많이 방문해 보았지만 우리는 갈 때마다 조금씩 더 큰 은혜와 감격을 느끼고 체험하게 되어지는데 이번에도 예외가 아니었습니다. 우리 24명의 우리 선교여행 팀들이 여행을 하는 중에 우리 한국 여행 멤버 중에 아들이 하나 있었는데 두 부부가 이번 여행에 참여하느라고 다른 집사님의 가정에 맡겨 놓고 온 일이 있었습니다. 필리핀으로 전화가 왔습니다. 아이가 지금 맹장염 때문에 긴급히 수술을 해야 된다는 소식입니다. 부모의 입장에서 얼마나 마음이 안타까웠겠습니까? 어린아이가 집에서 함께 수술 자리에 있어도 위로가 될까 말까한데 부모가 모두 멀리 외국에 가 있는 상황입니다.

감사하게도 그 아이를 맡았던 집사임 가정이 부모 이상으로 잘 대해 주었습니다. 제가 제일 먼저 물었었어요. '어느 집사임 댁입니까?' '아무개 집사임 댁입니다' '그러면 됐어요. 그 집사임 믿을 만 합니다' 누구라고 얘기할까요? 목사가 믿을만한 성도가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이름만 들어도 그분 충분해요. 그분 안심입니다' 그런 성도가 되면 얼마나 좋을까요? '그 사람한테 맡겼어요? 이거 큰일입니다' 인정받는다고 하는 것은 대단히 중요한 일입니다. 그것은 하루 이틀에 되어지는 것은 아니지요. 많은 시간과 많은 세월 속에서 생활에서 인정이 되어지는 것입니다.

하지만 부모의 마음은 굉장히 급하기만 하지요. 벌써 그 전화를 받는데 휴대폰으로 전화를 받으면서 우리는 차로 이동을 하고 있었어요. 그분의 눈에서 눈물이 글썽했어요. 그리고 곧 한 시간 후에 수술에 들어간다는 소식을 듣고 우리가 같이 기도하기를 제가 요청했습니다. 차로 이동하면서 '우리 함께 중보기도 합시다. 그 어린이를 위해서 좋은 의사를 만날 수 있도록 기도하고, 두 번째 그 어린이가 당황하지 않고 평안히 수술을 받을 수 있도록 기도하고, 세 번째 수술 결과가 좋을 수 있도록 기도합시다' 그리고 함께 통성으로 기도한 후에 동행했던 원로 목사님에게 마지막 마무리 기도를 부탁드렸습니다. 그리고 우리는 얼마 후에 다시 전화를 받았습니다. 놀라운 일이 일어난 줄로 믿습니다.

6시 50분이 넘어서 병원을 들어갔는데 7시에 다른 약속으로 퇴근하시던 의사 선생님이 그 아이를 보고 자기의 스케줄을 취소하고 아이의 수술을 직접 집도하신 줄 믿습니다. 그리고 그 수술하신 선생님은 바로 감리교회 장로님이셨습니다. 결과는 더 물어보지 않아도 우리는 충분한 줄로 생각됩니다. 우리의 세 가지, 우리가 소원했던 중보기도 세 가지가 너무나도 분명하게 응답된 줄로 믿습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응답하시는 역사가 얼마나 세밀하시고 얼마나 섬세하신지 몰라요. 여러분들이 중보기도의 능력을 믿는다고 하면 여러분들이 수요일날 해외 선교를 위해서 우리가 기도해야 할 중보의 대상들을 위해서 20-30분 동안이지만 기도하는 그 시간이 얼마나 중요하다고 하는 것을 아신다면 여러분들은 결코 그 자리를 여러분들은 잊지 않을 것입니다.

주님께서 자신의 옷자락을 만졌던 이 여인을 주님은 지나치지 않으셨습니다. '누가 나를 만졌느니라' 이 말은 '누군가 나를 향해서 자기의 간절한 소원을 지금 손길을 통해서 내게 보내고 있다' 말하지 않아도 주님의 옷자락만 만졌어도 '그가 나에게 무엇을 원하는 지를 내가 알고 있느니라' 주님께서 그러한 관심을 보내셨을 때 이 여인은 무릎을 꿇고 주님 앞에 자기의 모든 내용을 고백하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세상 사람들은 우리의 육신의 모습만 바라보고 편견을 갖습니다. 이건 우리와 같이 살 수 없는 사람이라고, 성전에 들어 올 수 없는 사람이라고, 이런 사람은 이혼을 해도 무방하다고 사람들은 그러한 제도를 가지고 우리에게 고통을 주지만 주님은 그러한 것들을 전혀 관계하지 않으셨습니다. 중요한 것은 지금 이 여인이 고통 속에 있고, 열두 해나 치료를 받았지만 치료가 되지 않았고 오히려 중하여 졌다고 했고, 그가 평소에 가지고 있던 많은 재산들은 모두가 허비되어져서 그는 지금 허탈감 속에 있는, 절망 속에 있는 이 여인을 주님께서는 기억하셨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이 여인이 예수의 소문을 듣고 무리 가운데 섞여 뒤로 와 그의 옷을 만졌다고 하는 사실은 그렇게 쉽게 지나갈 부분이 아닙니다. 우리가 주님을 사모하고 주님을 우리가 바라본다고 하는 것 중요하지만 멀찌감치에서 아니 군중 속에 섞여 있는 것만으로는 완전하지 않습니다. 용기를 내어서 주님을 바라보고 주님의 옷을 만지려고 하는 우리의 좀 더 적극적인 우리의 삶의 결단이 필요한 줄로 믿습니다. 만약 이 여인이 사회적인 어떤 제도에 자신을 맡겨서 '나는 사람들 가운데 갈 수 없어. 더구나 거룩하신 주님을 만난다고 하는 것은 있을 수 없는거야' 그렇게 자신을 그렇게 포기했다면 그에게 희망은 없었을 것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우리는 두 사람을 생각합니다. 밤중에 주님을 찾아와 주님을 만났던 니고데모입니다. 그는 바리새인 중에 바리새인이요, 공회에 의원이었던 사람입니다. 그는 예수를 낮에 만난다고 하는 것은 그의 체면으로는 있을 수 없는 일입니다. 환경이 그를 용납하지 않는 것입니다. 사람들은 그를 죄인의 친구라고 더구나 자기와 같은 그룹에 있던 바리새인들이 예수님을 그렇게 말했습니다. 그런 예수를 어떻게 대낮에 만날 수 있습니까? 그런데 그의 마음속에는 예수를 만나고자 하는 열망이 있었습니다. '어떻게 내가 그를 만날 수 있을까?' 예수님을 향한 열정이 결국 그를 밤중에라도 찾아가려는 용기를 허락한 줄 믿습니다. 결국 그는 거듭남의 비밀을 알게 되었고 주님을 통해서 영생의 비밀을 깨닫게 된 줄로 믿습니다.

수가성의 한 여인을 생각합니다. 그는 남편이 다섯이나 있을 만큼 바람둥이였습니다. 그러나 그는 만족하지 않았습니다. 주님께서 그 여인에게 말씀했던 것처럼 '네가 남편이 다섯이나 있었으나 지금은 없도다' 무슨 말입니까? 아직도 그는 육신의 정욕으로 만족하지 못하고 있다는 얘기입니다. 그런 그에게 성밖에 야곱의 우물에 앉아있는 예수님이 눈에 띠였습니다. 원래 여성들은 대낮에 물을 길러 갈 수가 없어요. 그것은 체면으로 있을 수 없는 일이고 사회적인 관습으로 용납될 수 없는 것입니다. 하지만 그 예수를 만나고자 하는 육신적인 열망이 대낮에 물동이를 이고 우물가로 그를 가게 만들었습니다. 정상적인 열정은 아니었지요. 여섯 번째 남편을 만들려고 하는 열정이었을 것입니다. 하지만 그것조차도 주님은 변하여 새로운 은혜의 체험을 하게 하신 줄 믿습니다.

솔직히 교회에 오는 성도들이 은혜롭게 신실한 동기만을 가지고 오십니까? 내가 정말 예수를 메시아로 고백하기 위해서만 교회로 오느냐 그 말입니다. 친구 따라 오는 사람들도 있구요, 젊은이들은 어떤 이상 친구를 사귀고자 하는 그런 이유 때문에 오는 경우도 있어요. 또 사업상의 이익을 위해서 오는 사람도 있을 것입니다. 어떤 많은 사람과의 친교를 위해서 오는 사람도 있을 것입니다. 다양한 목적을 가지고 교회를 찾아오지만 우리 주님은 뭐라고 말씀하십니까? '누구나 와도 좋다' 찬송은 말합니다. '아무나 와도 좋소' 동기가 어떻든 간에 주님 앞에 온다고 하는 것 자체가 사실은 그에게 대단한 용기입니다.

사마리아의 이 수가성 여인은 그런 동기를 가지고 왔지만 주님은 이미 알고 계시면서도 그의 동기를 바꿔주시고, 그의 삶의 방향을 바꿔주시면서 결국 그 여인에게 영원히 목마르지 않는 생수를 그에게 허락하여 주신 줄 믿습니다. 그 여인은 물동이를 집어던집니다. 과거에 예수를 만나고자 했지만 세속적인 동기를 포기했다는 말입니다. 이제는 예수를 그리스도라 증거하는 증인이 되어서 사마리아 성으로 뛰어 들어갑니다. '와보라. 내가 예수를 만났노라' 오늘 사마리아 여인이, 그리고 니고데모가 주님을 만나서 새로운 삶으로 변화된 것처럼 오늘 이 열 두 해를 혈루증을 앓았던 여성은 주님을 만남으로서 새로운 삶의 기쁨과 평안을 얻은 줄로 믿습니다.

'관계를 통한 리더쉽'이라는 책을 쓴 '월터 씨 라이트'는 리더가 무엇인가에 대해서 이렇게 정의하고 있습니다. '리더는 다스리고 명령하는 사람이 아니다. 진정한 리더란 다른 사람들에게 영향을 주고 그에게 변화와 성장을 위해서 진정한 영향을 행사하는 사람이 리더이다'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 그분은 바로 우리의 인생에 바른 변화와 영향을 주는 진정한 리더인 줄 믿습니다. 리더가 무엇입니까? 목자 아니겠습니까? 그래서 우리는 그분을 선한 목자라고 말합니다.

양을 위해서 목숨을 다하고 양을 위해서 최선을 다하는 진정한 목자, 예수 그리스도를 이 여인은 만나게 된 것입니다. 주님께서 그 여인을 바라보시고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딸아!' 주님께서 말씀하시는 표현입니다. '딸아!' 얼마나 따뜻한 주님의 표현입니까? '아들아!' 주님께서 때때로 말씀하셨습니다. 바울 사도는 당신의 사역하던 교회를 향해서 이렇게 말합니다. '자녀들아!' 오늘 주님과 우리의 관계가 아버지와 아들의 관계, 부모와 자식간의 관계와 같이 자기의 모든 것을 다 주고도 부족함을 가지는 부모의 그 사랑, 곧 아가페 사랑이 주님의 사랑인 줄 믿습니다.

지금 이 여인은 그 주님의 사랑, 아가페 사랑을 지금 받고 있는 것입니다. '딸아, 평안히 가라' 헬라어로 기록된 이 말씀의 본래 의미는 이런 것입니다. '딸아, 평안을 향하여 가라' 이제는 절망과 소외 가운데서 눈물짓지 말고 이제는 미래의 소망을 향해서 약속하신 하나님의 축복을 바라보면서 달려가라는 거예요. 오늘이 아니라 내일을 향해서 가라는 것입니다.
'평안을 향하여 가라' 주님 주시는 이 놀라운 축복과 은혜가 오늘 여러분들에게 함께 하시기를 간절히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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