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그인

  • 목록
  • 아래로
  • 위로
  • 쓰기
  • 검색

설교 두려워말고 믿기만 하라 (막 05:35-43)

첨부 1


어제 저녁은 모든 사람들이 잠시 동안이었지만 축구로 인해 행복했었습니다. 한달 밖에 남지 않은 월드컵 대표팀이 A 매치 경기에서 20대 초반의 차두리, 송종국, 최태욱 등 믿음의 아들들이 큰 활약을 한 날이었고, 특별히 골을 넣은 최태욱 선수의 무릎 꿇고 손 모아 기도하는 모습은 너무나 감동적이었습니다. 기도해야겠다며 의도적으로 한 것이 아니라 거의 반사적으로 골인과 동시에 무릎을 꿇는 그의 모습을 보면서 그가 바로 스포츠 선교사라는 확신을 가졌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여러 모양으로 삶의 자리를 주셨고 그 삶의 자리가 곧 선교의 현장이요, 하나님께서 영광을 받으셔야 할 자리라는 사실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오늘 내가 땀흘려 수고하는 곳이 바로 하나님께서 기쁨으로 열납하실 자리라는 것이지요. 환경과 여건이 다르지만 우리의 일터가 하나님의 사람답게 살아야 할 믿음의 장소요, 선교의 현장이라고 생각한다면 우리는 하루하루를 결코 헛되게 살 수 없을 것입니다.

오늘 본문 말씀은 회당장 야이로라는 당시로서는 매우 지위가 높고 존경받는 위치에 있는 사람이 예수님을 만나 무릎을 꿇고 초청하는 일로 시작됩니다. 사실 오늘 말씀의 시작은 22절부터입니다. 회당(시나고규)이란, 이스라엘의 율법과 전통을 가르치는 종교교육의 산실이었고, 일반적인 학습도 함께 이루어 지던 곳이었습니다.

사실 회당장으로서 주님 앞에 무릎을 꿇는다는 것은 당시로서는 상상하기 어려운 일입니다. 그런데 야이로는 주님 앞에 나아와 무릎을 꿇었습니다. 무엇이 그로 하여금 주님 앞에 나아오게 했고, 무릎을 꿇게 했습니까? 22절에 보면 아이가 죽게 되었기 때문입니다. 다시 말하면 회당장은 가정 문제, 자녀문제로 인하여 주님 앞에 나아오게 되었다는 말입니다. 무엇이 그로 하여금 체면을 넘어서게 했습니까? 흔히 말합니다. '자식 이기는 부모 없다...' 그렇지요. 자식이 죽어가는데 사회적 체면이 무슨 의미가 있어요?

사실, 자식 때문에 부모가 체면을 구기는 일이 많지요. 전직 대통령이 그랬고, 현직 대통령도 그렇게 되어가고 있는 것 같습니다. 결국 두 대통령은 불행하게도 자식들 때문에 임기의 마지막을 아주 곤욕스럽게 치루어야 할 것 같습니다. 자녀된 분들에게 권면하고 싶은 것은 제발 정신 차리라는 것입니다. 내가 잘못된 처신으로 인하여 부모님이 평생 쌓아놓은 명성과 인격을 하루아침에 허무는 그런 자식이 되어서는 안될 거예요.

회당장 야이로는 자기의 사랑하는 딸이 죽게 된 문제로 인해서 주님 앞에 나왔습니다. 이것은 어떻게 보면 위기가 주님을 만나게 한 동기가 되었습니다. 참으로 감사한 일입니다. 24절에 보면 주님께서는 회당장의 간청을 받아들여 그의 집으로 함께 동행하고 있었습니다. 할렐루야 !

그런데 25절에서 불쑥 한 여자가 끼어드는 사건이 발생합니다. 열두 해를 혈루증으로 고통받았던 이 여인은 주님의 옷자락을 만지기만 해도 치료될 것이라는 확신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혈루증이 부정한 병이라는 사회적 편견에 시달렸지만 주님을 만나지 않고는 안되겠다는 죽음을 각오한 그의 열정과 확신이 그를 주님에게로 가게 했고, 주님의 옷자락을 만졌을 때 주님은 그의 사모함을 알아보신 줄 믿습니다.

'누군가 나를 만졌느니라' 주님의 관심 표명에 제자들조차도 너무나도 흔한 일인데 그런 것까지 신경쓰느냐며 지나치려했지만 주님은 간과하지 않으셨습니다. 사실 혈루증을 앓았던 이 여인에게는 작은 일이 아니라 목숨을 건 일이었어요. 결국 그 여인은 주님으로부터 소망의 복음을 듣게 된줄 믿습니다. '딸아,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으니 이제 평안을 향하여 가라'

하지만 회당장 입장에서 보면, 자기의 12살 먹은 딸이 죽어가고 있어 체면을 불구하고 무릎 꿇고 간청하여 주님을 모시고 가는 중인데, 낯모르는 한 여자가 불쑥 끼어들어 가던길을 멈추게 했으니 얼마나 원망스러웠겠습니까? 한시가 급한데 어찌하여 우리 일을 방해놓고 있느냐고 조바심을 가졌을 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저는 이 장면을 다시 묵상해 보았습니다. 왜 마가복음 기자는 회당장의 사건을 마무리한 뒤 다시 혈루증 앓았던 여인의 사건을 시작해도 될터인데, 굳이 25절부터 34절까지 혈루증을 앓았던 여인의 사건을 그 사이에 넣고 다시 35절에서 회당장의 사건을 이어갔을까?
신학적으로 이러한 편집 방법을 'sandwich method'라고 하는데 그것은 마치 빵 사이에 햄이나 치즈, 야채등을 넣어 먹는 샌드위치와 같다는 의미에서 불러진 것입니다. 왜 그랬을까요?

회당장은 당시로서는 지도층의 한 사람이지만, 혈루증을 앓았던 여인은 성밖에 나가 이름 없이 살아야 할 힘없는 여인이었습니다. 그 두사람을 세상적인 지위나 가진것으로 비교해 볼 때에는 당연히 회당장이 중요하지만, 주님의 입장에서 볼 때는 모두가 소중한 주님의 백성인 줄 믿습니다. 건강한 교회, 은혜로운 교회란 바로 이런 장면에서 나타나는 것인줄 믿습니다.

교회에 잘 사는 사람과 그렇지 못한 사람이 있을 때, 목회자의 손길이 어려운 사람에게 갈수록 그 교회는 은혜로운 교회인줄 믿습니다. 많이 배운 사람과 그렇지 못한 사람이 있을 때, 배우지 못한 사람에게 한마디 더 사랑의 말을 전하는 교회가 건강한 교회인 줄 믿습니다. 다양한 사람들이 교회 안에 있으나 그들이 함께 행복을 느끼고 평안을 느껴야 비로소 공동체인 줄 믿습니다. 어떤 특정한 집단만 행복감을 느끼고 만족을 누린다면 그곳은 이미 교회가 아니지요.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회당장과 열두 해 혈루증을 앓았던 여인과는 1대1로 비교할 수 없는 존재입니다. 하지만 회당장의 집을 가던 주님에게는 혈루증을 앓았던 여인도 중요하기에 아무리 급하더라도 그 여인의 문제를 해결해 주시고 가신 줄 믿습니다. 이 여인에게는 갑절이나 기쁨이 있었을 거예요. '회당장 가정의 일로 가시던 주님께서 나 같은 사람을 위해서 그 귀한 시간을 할애해 주시다니.....'

그리고 주님께서 가시려고 할 때에 회당장 집에서 소식이 왔습니다. '딸이 죽었습니다' 마음 아픈 소식이지요. 거기에 심부름을 왔던 사람이 한 마디를 덧붙입니다. '이제는 더 이상 저 선생님을, 저 예수님을 괴롭게 하지 마세요. 이제 죽었는데, 죽은 그 아이를 주님이 오신들 무슨 소용이 있습니까? 더 이상 주님을 괴롭게 하지 마십시오' 좋게 들으면 좋은 얘기 같은데 사실은 굉장히 불신앙의 얘기지요. 이제 주님이 오신들 무슨 도움이 되겠느냐는 얘기입니다. 주님을 포기하라는 말이예요.

이제 회당장은 그 시간, 매우 중요한 시간이 돌아온 것입니다. 결단의 시간이 돌아온 것입니다. '내가 계속해서 예수님을 믿음으로 동행할 것인가? 아니면 포기할 것인가?' 너무나 중요한 시간이 돌아왔습니다. 그때에 주님이 그 소식을 옆에서 들으셨습니다. 그리고 말씀하십니다. '두려워말고 믿기만 하라' 이제 회당장에게는 처음에 주님을 만나고 주님 앞에 무릎을 꿇었을 때에는 자신의 문제가 아니라 딸의 문제 때문에 그렇게 했습니다. 하지만 이제는 딸이 죽었기 때문에 딸의 문제가 아니라 이제는 회당장 자신의 문제가 되었어요. '네가 믿음을 가지고 나와 동행하겠느냐? 아니면 포기하겠느냐?' 너의 믿음이 중요하다는 거예요. 회당장 마음에 두려움이 생겼을 것입니다. 회당장 마음에 회의가 생겼을 것입니다. '가야하나 말아야 하나...'

그때 주님께서 그의 마음을 아시고 그의 마음을 다독여주십니다. 그의 마음을 든든하게 세워주십니다. '두려워말고 믿기만 하라' 이제 너에게 중요한 문제는 믿음의 문제라는 것입니다. 기적과 치유와 서광의 역사가 이제 너의 믿음 때문에 일어날 수도 있고 안 일어날 수도 있다는 것입니다.

동행하시다가 혈루증 앓던 여인을 이 회당장은 옆에서 보았을 것입니다. 혈루증 걸렸던 여인을 치료하시는 주님의 음성을 들었을 것입니다.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으니 딸아 평안을 향하여 가라' '아, 믿음이구나. 그래. 이제 내게 필요한 것은 믿음이야. 이제 내게 필요한 것은 믿음이야' 여러분, 오늘 교독문에서 교독하신 것처럼 히브리서 11장에서 히브리 기자는 이렇게 말하지 않습니까? '믿음은 바라는 것들의 실상이요, 보지 못하는 것들의 증거라' 믿음, 믿음은 보지 못하는 것들의 증거인 줄로 믿습니다. 주님께서 회당장에게 요구하시는 것은 바로 그것입니다. '이제는 믿음이야. 너가 믿음이 있다면 너의 믿음을 보여줄 때가 되었어'

평상시에는 믿음은 그렇게 중요하지 않은 것처럼 보입니다. 그저 습관과 여러분의 눈썰미만 있어도 여러분은 주님의 일들을 하실 수 있어요. 크게 믿음이 필요하지 않은 것 같이 보입니다. 하지만 우리의 삶의 위기가 닥쳐오면 그때는 습관 가지고 되어지지 않습니다. 눈썰미 가지고 되어지지 않아요. 그때에 여러분의 살아있는 믿음을 사용하시기 바랍니다.

주님께서 그 가정에 도착하셨을 때에는 이미 장례식 준비가 한창이었습니다. 우리 나라도 그렇습니다 만은 장례식 준비의 최고가 준비가 무엇입니까? 곡하는 것 아니겠어요. 가족들이 울다가 지치면 곡하는 사람을 돈을 주고 사서라도 담 넘어라도 우는 소리가 들여야 된다는 거예요. 며느리들은 잘 울어야 되는 것입니다. 이스라엘도 우리 문화적 전통과 크게 다르지 않았습니다. 헌화하는 사람들, 우는 사람들을 사서 울음 소리가 담 밖으로 나가야 되었습니다. 주님이 도착하셨을 때에는 온통 우는 소리로 장례식 분위기가 가라앉아 있었습니다. 주님께서 그 상황을 보시고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이 아이가 죽은 것이 아니라 자는 거다' 주님의 위트가 번쩍이지 않습니까? 사실 주님의 위트는 이것이 처음이 아닙니다.

요한복음 11장 11절에 가보면 주님께서 가장 사랑하시던 친구라고 표현했던 나사로가 죽었을 때 마리아와 마르다는 '주님께서 빨리 좀 오셨으면...' 그렇게 사모하고 사모했지만 주님은 당신의 일을 더 하시고 며칠 더 계시다가 그의 가정을 가셨어요. 가셨을 때 이미 나사로는 죽었습니다. 마리아와 마르다가 원망조로 말합니다. '주님이 빨리 오셨으면 우리 오라비가 죽지 않았을 수도 있었는데...' 마리아와 마르다의 심정은 지금 회당장 야이로의 심정과 같았을 거예요. '왜 중간에 다른 일을 하십니까? 우리 가정만 신경을 써주셔야지요' 하지만 목회자에게는 신경 쓸 가정이 너무나 많습니다.

사실 요즘은 목회자에게 참 피곤합니다. 일들이 많아요. 한 주간 한 주간이 엄청나게 일이 많습니다. 어제도 밤늦게 돌아오면서 아내와 그런 이야기를 했어요. '여러 교역자가 더 있어야 되겠다' 그러면서도 또다시 결론은 '그래도 아무리 목사님이 많고 전도사님이 많아도 이런 일은 결국 담임목사가 가야 할 자리이니 결국 교역자가 많아도 마찬가지야. 우리가 해야 할 일은 또 우리가 해야지'

주님께서 나사로를 향해서 뭐라고 말씀하신 줄 아십니까? '우리 친구 나사로가 잠들었도다' 뭐하러 가자구요? '깨우러가자' 주님의 여유가 놀랍습니다. 지금 울고불고 하는 회당장 야이로의 집에서 사람들에게 주님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이 아이는 죽은 것이 아니라 자고 있는 것입니다' 성경을 보니까 사람들의 반응이 즉시 나타났습니다. '저희가 비웃더라'

세상은 하나님의 사람들의 말에 동의하지 않습니다. 여러분들이 신앙생활하면서 때때로 그런 것 때문에 힘들어하지만 여러분 그것은 이상한 일이 아닙니다. 주님께서 제자들에게 말씀하십니다. '너희가 세상에 나가서 하나님의 자녀로서 살아갈 때 빛과 소금으로 살아갈 때 세상이 너희를 욕하고 핍박하거든 이상하게 생각하지 마라. 그것이 정상이다. 사람들이 예수를 비웃는 것은 정상이다' 왜? 믿음이 없는 사람이 믿음이 있는 사람의 세계를 어떻게 이해할 수 있습니까? 땅에 속한 사람이 하늘에 속한 사람을 어떻게 이해할 수 있어요.

주님께서는 그들의 말을 아랑곳하지 않고, 오히려 비웃는 그들, 그들을 모두 다 내어보내셨습니다. 그리고 베드로와 야고보와 요한, 그리고 회당장 부모만 남겨놓고 모두 다 내어보내셨어요. 믿음의 역사는 믿음의 기적은 군중들과 더불어 일어나는 법이 없어요. 기도의 사람들과 믿음의 사람들만이 기적의 주인공이 될 줄로 믿습니다. 구경꾼은 결코 믿음의 역사에 주인공이 될 수 없어요. 주님은 그들을 다 내어보내셨습니다.

우리 주님께서 여자의 손, 그 소녀의 손을 잡아 일으키시면서 말씀합니다. '달리다굼' 이 '달리다굼'이라는 말은 셈족 언어인 아람어인데 이 아람어는 당시에 이스라엘 백성들이 그 조상들이 바벨론 포로생활을 하면서 익숙하게 사용하던 말입니다. 그들에게는 헬라어라고 하는 통용어가 있었습니다. 국제적으로 사용되는 말입니다. 그들의 언어인 히브리어와 더불어서 헬라어와 아람어가 일상적으로 사용되었던 시대에 주님께서 자주 아람어를 사용하셨습니다.

'달리다굼'이라는 이 말은 주님께서 특별히 사용하신, 주님만이 쓰시는 단어는 아닙니다. 이것은 모든 사람들에게 귀에 익숙해 있는 일상적인 언어입니다. 예를 들어 '달리다'라고 하는 말은 '연약하다' '작다'라는 뜻을 가지고 있고, '굼'이라는 말은 '일어나라'는 뜻을 가지고 있어요. '연약한 자, 그리고 작은 자 일어나라' 이런 뜻인데 이 말은 주로 부모들이 아이들이 늦잠을 자면 학교를 가야 하는데 이제 시간이 모자랍니다. 그러면 아이들을 깨웁니다. '아무개야, 일어나라' 아이를 깨우면서 부모가 하는 말이 '달리다굼'하는 것이 당시에 가정마다 사용되던 관용구였어요. 그러니까 그 동네사람들이나 제자들이나 주님이 사용하시는 '달리다굼'이라는 말은 아주 익숙히 들었던, 자기들이 사용하던 말입니다. 누구를 향해서 하는 말이라구요? 잠자는 아이들을 깨우는 말이 '달리다굼'입니다. '얘야, 일어나라'

주님께서 이 아이보고 뭐라고 그랬습니까? 죽은 것이 아니고 잔다고 하지 않았습니까? 그리고 주님은 이 아이를 깨우십니다. '달리다굼' '얘야, 일어나라' 이 아이가 다시 살아난 줄 믿습니다. 우리가 성경을 잘 연구해 보면 얼마나 재미있는 지 몰라요. 단어 하나 하나가 말씀 하나 하나가 얼마나 조화있게 어우러져 있는 지 모릅니다. 주님께서는 일상적인 것들을 가지고 비유하셨고, 교훈하셨고, 오늘도 한 가정의 결정적인 삶의 문제를 주님은 일상적인 언어를 가지고 그 가정에 소망을 주시고 생명을 허락하여 주신 줄 믿습니다. 이제 주님께서 말씀하시는 그 선언을 이제 우리 자신들이 들어야 합니다. 그리고 우리 가정마다 심령마다 우리는 새롭게 선포해야 합니다.

'달리다굼' 일어나는 역사가 일어야 합니다. 절망 때문에 좌절하고, 절망 때문에 가슴치는 이 시대를 살고 있는 이들에게 필요한 것은 '달리다굼'입니다. 생명을 살리고, 우리의 연약한 부분을 치료하고, 좌절하고 있는 이들에게 소망을 주는 이 주님의 말씀, '소녀야, 내가 네게 말하노니 일어나라' 주님께서 우리에게 말씀하십니다. '일어나라'라고 말씀하십니다. 삶의 자리에서 그 게으름과 나태와 구경꾼의 자리에서 뭉개지 말고 일어나라고 말씀하십니다. 헌신의 자리로 충성의 자리로 주님과 함께 동행하는 믿음의 자리로 나아가도록 주님은 우리에게 요청하고 있습니다.

이 놀라운 주님의 요청에 여러분들이 회당장 야이로와 같이 삶의 중요한 기로에서 결국 믿음을 가지고 끝까지 주님과 동행함으로 기적의 현장에서 하나님의 영광을 맛보았던 것처럼 그리고 자신의 가정에 큰 문제를 해결하는 큰 기쁨을 회복했던 회당장 야이로처럼 여러분이 삶의 중요한 시기에 여러분의 살아있는 믿음을 온전히 사용하셔서 주님과 함께 더불어 큰 믿음의 역사의 주인공들이 될 수 있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간절히 축원합니다.

 

이런 글도 찾아보세요!

공유

facebooktwitterpinterestbandkakao story
퍼머링크

댓글 0

권한이 없습니다. 로그인

신고

"님의 댓글"

이 댓글을 신고 하시겠습니까?

삭제

"님의 댓글"

이 댓글을 삭제하시겠습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