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그인

  • 목록
  • 아래로
  • 위로
  • 쓰기
  • 검색

설교 고향에서 생긴 일 (막 06:1-6)

첨부 1


우리에게 고향을 주신 것은 하나님의 은혜인 줄 믿습니다. 저와 여러분은 모두 고향을 가지고 있습니다. 고향이란 그저 생각만 해도 마음이 평안하고 푸근하여 무엇인가 나에게 도움이 될 것 같은 따뜻한 기대감을 주는 곳입니다.
그런데 언제부터인가 이 고향이 애물단지처럼 되어버렸습니다. 모든 문서에서도 고향을 표기하는 본적란이 사라졌고, 고향이 어디냐고 물어보는 것이 실례가 되는 안타까운 분위기가 되고 말았습니다.

최근 각 정당마다 대통령 후보 선출을 위한 선거인단 투표를 하고 있는데, 어느 후보는 자기 고향에서 기대한 만큼의 표가 나오지 않자 후보 사퇴를 선언했습니다. 기자회견에서 왜 사퇴했느냐 물으니까 '고향에서는 내가 1등 할 줄 알았는데 3등을 하여 고향 사람들이 나를 더 수련하라는 채찍으로 알고 사퇴한다'고 했습니다만, 아마도 그분은 마음속에 무척 서운했을 거예요. 적어도 내 고향에서는 나를 더 지지해 주리라 기대했는데 그렇지 못한 것이 못내 아쉬웠을 것입니다.

우리 주님께서도 고향이 있었습니다. 주님은 베들레헴에서 태어나시기는 했지만 베들레헴을 고향이라고 말하지는 않습니다. 그곳은 단지 부모님이 호적을 위해 여행 중에 태어나셨으나, 자랐던 곳은 나사렛이기 때문에 예수님의 고향은 나사렛이라고 말합니다. 요즘 미국처럼 출생 지상주의가 아닌셈입니다.

1절 말씀을 보면 '예수님께서 거기를 떠나사 고향으로 가셨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이 말은 가버나움을 떠나 30분 정도의 거리에 위치한 고향 나사렛으로 가셨다는 말입니다. 그런데 정작 고향에 가보니까 분위기가 영 아니었어요. 가버나움에서는 5장의 내용처럼 회당장 '야이로'의 딸을 죽음에서 다시 살리신 사건이 있었고, 열두 해 혈루증 앓았던 여인을 치료하시는 사건도 있었습니다. 모든 사람들이 주님을 높였고, 메시아로 여겼습니다. 오히려 주님은 그러한 열기를 자제시키시고 나아가 그렇게 말하는 것을 조심하라고 이를 정도였습니다.

그런데 고향으로 오신 주님에게 사람들이 이렇게 말하고 있었습니다. '저 예수가 어디서 배웠길래 저런 능력이 있었는가?' 사람들은 예수를 의아하게 생각했어요. 그들은 3절에서 계속 말합니다. '저 사람은 마리아의 아들 목수가 아닌가? 저 사람의 형제들과 누이들이 우리와 함께 있는데 ......' 결국 그들은 예수를 그리스도로 인정하지도 영접하지 않고 배척했습니다.

넓은 의미에서 보면 나사렛만 그런 것은 아닙니다. 요한복음 1장 11절에 보면, 예수께서 자기 땅에 오셨지만 사람들이 영접치 않았다고 했습니다. 하지만 주님은 영접하는 자, 곧 그 이름을 믿는 자들에게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주시겠다고 약속하셨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주님을 영접하지 않았습니다. 내어쫓았습니다. 무시했습니다. 고향에서 인정받지 못하고 배척을 당할 때의 그 서운함은 말할 수 없을 거예요.

요즘은 동창회 중에서도 옛날 국민학교 동창회가 그렇게 잘 모인다고 합니다. 올라갈수록 잘 안 모이고 애써 가보면 정신적으로 피곤해 다시 갈 마음이 안생긴다고 말들합니다. 하지만 어릴적 고향에서 다녔던 국민학교 동창들은 똑같은 입장에서 공부하며 놀았기에 서로가 서로를 너무나 잘 알지요. 약점이나 부족함도 익히 잘 알고있을 뿐만 아니라 그것이 오히려 친근감의 계기가 되기도 했습니다.

사실 성도가 가까워지는 것도 우리가 흔히 말하는 '파티 매너'만 가지고는 될 수 없는 일입니다. 언제나 정장한 모습이나 실수없는 매너만 가지고는 결코 가까이 다가갈 수가 없지요. 오늘 오후에는 우리 교회의 소 운동회라 할 수 있는 남녀선교회 대상의 족구 및 피구대회가 개최됩니다. 늘 강조하는 것이지만 운동회때는 운동복을 입고 운동화를 신고 뛰면서 소리도 질러보며 응원하는 가운데 하나가 되어가는 것입니다.

때론 열기가 지나쳐 다투어도 보고, 또 악수하면서 화해하는 가운데 가까워지고 하나가 되어진다는 것이지요. 여행을 하면 좋고, 함께 합숙훈련을 하면 더욱 좋습니다. 그 말은 가까이 다가갈수록 우리에게 허물이 나타나기 마련이지만 그 허물을 서로 알아가면서 이해해주고 공감대를 넓힐 수 있다는 것입니다. '아, 나만 이런 연약함이 있는 줄 알았는데, 저 사람에게도 그런 연약함이 있었구나' 그것이 비난의 계기가 아니라 이해와 관용의 기회가 되어질 때 하나가 되는 줄 믿습니다.

제가 이렇게 입술이 부르트면 '목사가 신령하지 않아서 저렇게 입술이 다 부르트는구나' 하며 비난할 수도 있겠지요. 하지만 '대심방하시느라 얼마나 피곤하셨으면 저렇게 입술이 다 부르트셨는가?' 하며 박카스라도 사가지고 오셔서 위로해 주시면 얼마나 고맙겠어요. 우리가 똑같은 허물을 보아도 그것을 사랑으로 접근하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비난으로 접근하는 사람도 있습니다.
성도여러분, 사랑으로 바라보면 허물도 은혜가 되는 줄 믿습니다. 우리 지방 목사님들이 저를 얼마나 부러워하는지 아십니까? '황목사님은 좋겠다' '왜요?' '나는 피곤하면 입안이 헐지만 표가 나지않는데, 목사님은 밖으로 표가 나니까 위로의 인사라도 받지 않느냐?' 그렇지요. 저는 그 이야기를 듣고 또 감사했어요. 이왕 터질 거라면 밖으로 터져야지....... 감사함으로 받으면 버릴것이 없다던 바울 사도의 말씀이 실감이 나는듯 합니다. 할렐루야 !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오늘 주님은 고향에서 그분의 놀라운 능력과 가르침을 인정받지못했습니다. 오히려 고향사람들은 말합니다. '저 사람 마리아의 아들 목수 아니야?' 그렇지요. 그들이 말한 것이 틀리지는 않았습니다. 하지만 그것은 주님께서 공생애를 시작하기 전의 모습입니다. 중요한 것은 어제가 아니라 오늘이라는 거예요. 그런데 많은 사람들은 오늘의 나의 모습보다는 어제의 모습을 보고 여전히 평가하고 있는것입니다. 이력서를 중시하는 사회, 현재의 변화된 모습보다 과거의 경력을 더 중요히 여기는 사회에서는 결코 창조적인 삶을 살 수 없습니다.

사람들은 말합니다. '지금 저 예수의 형제들이 6남매나 우리와 같이 있지 않느냐?' 하지만 정확하게 말하면 그들은 주님의 형제 자매일 수 없어요. 마리아는 동정녀일 때 예수를 낳으신 줄 믿습니다. 그래서 성경은 주님게서 성령으로 잉태하셨다고 선언하셨고, 우리는 예배 때마다 사도신경을 고백하는데 그 중에 빼놓지 않는 것이 예수께서 동정녀 마리아에게서 나셨다는 고백입니다.

그후 요셉과 정혼한 마리아는 결혼해서 낳은 자녀들이 최소한 6남매 이상이라고 오늘 본문에 소개되어져 있습니다. 야고보와 요셉, 유다와 시몬, 그리고 누이들이 있었다고 했습니다. 그런데 고향 사람들은 예수님을 7남매로 맏이로 생각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사실 고향에서 사역을 한다는 것은 쉬운 일은 아닙니다. 주님께서도 말씀했습니다. 4절에 보면 '선지자가 자기 고향과 자기 친척과 자기 집 외에서는 존경을 받지 않은 이 없다' 다시 말하면 자기 집과 자기 친척과 자기 고향에서는 존경받기가 어렵다는 말씀입니다.
제가 약대교회에서 대부분 살았습니다. 중학교 2학년 때부터 살았으니까 꽤 오래 살았지요. 중등부 회장, 고등부 회장, 청년부 회장을 거기서 다 했습니다. 제가 중학교 때 키가 작아서 가방을 들고 다니면 가방이 땅에 끌릴 정도로 제가 가방의 높이가 아슬아슬했던 모양이예요. 저는 잘 느끼지 못했는데 교회로 정류장에서 가다 보면 동네를 지나가게 되는데 우리 교회의 집사님, 속장님들이 지나가다가 저를 보면 '아유, 우리 꼬마 목사님 오시네' 그러면서 그 가방을 땅에 닿을 듯한 가방을 보고 안쓰러워서 들어주시곤 했어요.

그렇게 사랑을 받으면서 자랐는데 제가 그 교회에서 교육 전도사를 했잖아요. 신학대학 3년부터 교육 전도사를 했는데 나이는 그때 해봐야 22살 밖에 안됩니다. 그런데 문제는 그분들이 언제나 언제를 생각하느냐 하면 전도사로의 내가 아니라 중학교 때 가방이 닿을 듯 해서 가방을 들어주던 그때 꼬마 목사님을 생각해요. 그리고 앉으면 하는 이야기가 '우리 전도사님 어릴 때 내가 가방 들어주었는데..' 자꾸 그때를 얘기하는 거예요. 고마운 일이지요. 사랑하셨던 일이고, 저로 보면 사랑 받았던 이야기인데 사실은 사역에 굉장히 지장이 돼요.

그래서 제가 마음에 한가지 결심을 했어요. '대부분의 사람들이 이래서 자기 출신 지역에서 사역하기가 어렵구나' 저는 그때 제 마음에 다짐을 하기를 '내가 여기서 바른 사역으로 자리를 잡아야 되겠다' 제가 전도사 생활을 7년을 했습니다 만은 그때 그런 결심을 하고 교회학교를 맡아서 열심히 했습니다. 사실 교회학교 교사가 10명도 안되었는데 그 선생님들이 전부 제가 어릴 때 저를 가르친 분들이었어요. 20대 초반의 전도사가 교회학교를 책임 맡았는데 저를 가르쳤던 분들이 교회학교 교사들입니다. 쉽지 않은 상황이지요. 아이들은 몇 십명 밖에 되지 않았습니다. 그때 제 마음속에 한가지 기도의 제목은 하나님께서 이러한 어려운 환경, 남들은 어렵다고 하는 이 환경에서 반드시 승리해야 되겠다는 그런 기도의 제목이 생겼어요. 그리고 열심으로 사역했습니다.

그리고 얼마 후에 결혼도 하였는데 바로 집은 옆에 넘어지면 코가 닿을 곳입니다 만은 10시 이전에 제가 집을 들어간 적이 없어요. 교회학교 사무실에서 코피가 터지면서 일했습니다. 저의 아내는 늘 그것이 지금도 아쉽지요. 신혼을 좀 재밌게 보냈어야 하는데 교회학교를 맡은 저는 그 일에 '어떻게 하면 교회학교를 부흥시킬까? 어떻게 하면 이 교회학교를 통해서 많은 영혼들을 구원할까?' 그것이 오직 저의 관심이었어요. 그리고 교회학교가 자라가기 시작하는데 교사가 70명이 넘어서고 어린이들이 1,200명이 넘어선 줄 믿습니다. 정말 열심히 했어요.

요즘 우리 교회학교를 보니까 교장 선생님과 총무님을 중심해서 열심히 해요. 두분 다 집이 서울인데 토요일만 되면 일찍 와서 학교 앞에 가서 전도하고 모여서 큐티하시고 열심히 하시는 모습을 보면 눈물겨워요. '아, 우리 교회학교가 되겠구나. 저 교장 선생님, 총무 선생님 저 지도자들이 저렇게 열심히 하는 것을 보니까 교회학교가 되겠구나' 저는 확신을 갖습니다. 왜? 지도자에 달려있거든요. 모든 공동체는 지도자에게 달려 있습니다. 아무리 환경이 어렵고, 아무리 여건이 어렵고, 편견이 지배하는 사회라고 해도 지도자 한 사람이 정상적인 생각을 갖고 하나님 앞에 기도하면서 매달리면 하나님의 역사는 반드시 일어나는 줄 믿습니다.

저는 그 확신을 가지고 우리 교회에 민철영전도사님을 전도사로 세웠습니다. 사실 그분도 여기서 청년 때 대학을 다닌 분입니다. 그의 약점을 사람들은 다 알고 있어요. 그러나 지금 많은 시간이 지나면서 얼마나 많이 그가 성장을 했습니까? 말하는 방법부터, 교인들을 대하는 태도부터, 설교하는 것도 보면 얼마나 많이 달라졌는지 몰라요. 저는 그가 성장하는 것을 보면서 기쁨을 느낍니다. 어쩌면 여러분들 마음속에는 그의 청년의 그 어린 시절을 보면서 그때를 자꾸 연상하는 지 모르겠어요. 하지만 그 한계를 여러분들이 넘어서야 합니다. 제가 넘어서는 경험을 가졌기 때문에 제가 그런 모험을 하고 있는 거예요. 가능하면 우리 교회에서 좋은 지도자들이 계속 나타나기를 바랍니다. 왜 여기서 좋은 지도자가 다른 데 가서만 잘할 수 있느냐 그 말이예요.

그건 왜 그렇습니까? 오늘 나사렛이 가지고 있는 한계 때문입니다. 나사렛의 한계가 무엇입니까? 첫째는 호기심의 한계입니다. '예수가 왔대. 예수가 가버나움에서 죽은 사람을 살렸대. 혈루증 앓는 여인을 치료했대' 소문은 이미 들렸습니다. 호기심이라고 하는 것은 좋은 거예요. 이 호기심이 긍정적으로 작용하면 놀라운 결과가 나타납니다.
제가 어렸을 때 기억인데 그때는 목사님들이 자가용이 뭐냐 하면 자전거입니다. 자전거를 타고 심방을 다니셨는데 이 호기심 많은 학생 하나가 그 교회 앞마당에 세워놓은 자전거를 뜯었어요. 얼마나 그 자전거가 신기했겠어요. 다 뜯어서 바퀴도 빼고, 체인도 빼고, 다 빼놓았는데 이것을 다시 조립을 해야 되는데 조립이 잘 안되는 거예요.

목사님이 심방을 가려고 나와보니까 바퀴가 빠져있고, 체인이 빠져있고 엉망이예요. '이거 누가 그랬느냐?' '누가요, 이거 뜯다가 도망갔어요' 시계를 사주면 시계의 그 시간을 알려주는 그 효용성에 대해서 우리가 즐기고 기뻐하기보다는 '이게 어떻게 가나?'하고 뜯어보는 마음을 가진 사람들이 있지요. 그런데 다시 조립을 못해서 망가지는 경우들이 많습니다. 그런데 그것은 어떤 창조적인 발명을 향한 좋은 동기입니다. 그런 호기심을 가졌을 때 사람들은 '아, 이 아이가 과학적인 마인드를 가졌나보다' 그리고 좋아합니다.

여러분, 라이트 형제를 아십니까? 새가 하늘을 나는 것을 보면서 '야, 어쩌면 저렇게 하늘을 날을 수 있을까?' 자기도 한번 날아보려고 하는데 안되니까 팔에다가 넓적하게 종이를 붙여서 날개를 만들어서 언덕을 날아 뛰어보고, 그러다가 자빠져서 무릎도 깨보고, 또 여러 가지 모양으로 새의 모양을 만들어서 계속 해봅니다. 동네 사람들이 그 라이트 형제를 미쳤다고 그럽니다. 그런데 그 라이트 형제의 꿈을 끝까지 그래도 지지해 준 사람이 있었는데 부모님이었어요. 동네 사람들은 미쳤다고 정신 나갔다고 그러는데 부모는 그래도 그 아이가 하는 것을 보면서 이 아이가 뭔가 창조적인 생각을 가지고 있다고 여겼습니다. 여러분들이 오늘날 해외로 나가게 되면 반드시 타야 할 비행기는 그 라이트 형제의 그러한 호기심에서 시작된 결과인 줄 믿습니다. 순기능으로 작용하면 이렇게 멋있어요. 닭이 계란을 품고 있다가 병아리가 되는 것을 보면서 그 알을 자기도 품고 새끼를 낳아보겠다고 하는 그런 순수한 호기심, 그것이 발명의 동기가 되는 거예요.

하지만 나사렛 사람들은 이 호기심의 한계를 넘지 못했어요. 결국 예수는 이웃 동네에서 사람을 살리고 병을 고치기는 했지만 나사렛에 와서는 그들은 그저 그것이 이상할 뿐입니다. '어떻게 저 예수가 병을 고쳤을까? 어떻게 저 예수가 사람을 살렸을까? 이상하다. 우리 동네에 형제 자매들이 함께 살고 있는데...' 그리고 그들은 그 호기심의 한계에서 주저앉아버렸습니다.

그들의 한계는 또 있습니다. '이 사람이 마리아의 아들 목수가 아니냐?' 무슨 얘기입니까? 그들은 예수를 그리스도로 바라보지 못했습니다.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를 진정으로 깊이 생각하고 예수에 대해서 우리의 마음과 정성과 뜻을 다해서 그분을 열정으로 나아가려고 하는, 그분을 만나려고 하는, 그분을 알려고 하는 그러한 모습이 있어야 되는데 그들은 그저 사회적인 편견 속에 자신들의 한계가 멈춰버리고 말았어요.

'마크 트웨인'은 이렇게 말합니다. '인간의 역사는 편견의 역사다' 그렇지요. 누가 역사의 펜대를 잡느냐에 따라서 역사의 시각이 달라집니다.
제가 삼국지를 꽤 많이 읽었는데 제가 읽은 삼국지는 '길천 영재'라고 하는 일본 사람이 쓴 삼국지입니다. 그 삼국지는 세 나라의 인물 중에 유비라고 하는 사람을 중심으로 해서 견휜과 이 조조라고 하는 사람을 사이드에서 본 거예요. 늘 두 사람은 유비를 공격하고 고통을 주는 사람으로 그려져 있어요. 그런데 다른 삼국지를 보면 조조가 중심이 되는 그런 글도 있습니다. 거기에는 유비가 아주 기회주의적이고 심약한 사람으로 나와있어요. 누가 쓰느냐에 따라서 역사도 달라집니다. 그렇지요. 우리 나라의 삼국도 신라 사람이 삼국에 대한 역사를 쓰던지, 백제 사람이 쓰던지, 아니면 고구려나 고려 사람이 쓰던지 거기에 따라 역사의 보는 관점이 달라집니다.

한동안 인기를 얻었던 제 몇 공화국, 1공화국부터 쭉 올라와서 5공화국까지 드라마가 되었지요. 그리고 중단이 되었습니다. 많은 비판을 받았습니다. 왜냐하면 사람이 생존해 있는 동안에는 평가될 수 없기 때문이예요. 최소한 그 사람이 이 땅을 떠난 후에 평가되어야 그것을 역사라고 말합니다. 성급한 사람들은 자기가 있는 동안 자기를 미화합니다. 자기가 있는 동안 동상을 세웁니다. 자기가 있는 동안 글을 쓰게 만듭니다. 그러나 그것은 아전인수가 되기 십상입니다. 편견, 역사가 상당한 경우에 편견의 역사일 수 있어요.

지금 나사렛 사람들은 그런 편견의 한계를 넘어서지 못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제 우리는 이 나사렛 사람들의 편견의 한계와 호기심의 한계가 바로 오늘 우리들의 한계가 아닌가로 생각해 보아야 합니다. 여러분들은 어떻습니까? 우리가 주님을 바라볼 때, 우리가 주님을 생각할 때, 우리가 주님의 말씀을 들을 때 우리의 한계가 어디입니까?
이제 우리는 얼마 후면 대통령 선거를 치릅니다. 아니 곧 우리는 지방선거를 치르게 됩니다. 여러분들은 또 여러분들의 한계를 노출할 지도 모릅니다. 지역의 한계, 고향의 한계... 우리는 그 한계를 넘어서지 않고서는 우리는 정말 성장할 수가 없습니다.

오늘 주님께서는 말씀합니다. 선지자가 자기 고향과 자기 친척과 자기 집 외에서는 환영을 받았는데, 존경을 받았는데 '내가 여기서는 아무 권능도 행할 수 없도다' 얼마나 불행한 일입니까? 주님께서는 나사렛에서 아무 권능도 말씀도 이적도 행하실 수가 없다고 했습니다. 주님의 능력을, 주님의 말씀을, 주님의 은혜를 입을 수 있는 기회가 그들에게 주어졌는데 그들이 가진 편견 때문에, 그들이 가진 한계 때문에 주님의 은혜와 능력을 그들은 받을 수 없고 체험할 수 없게 되었어요. 비극입니다. 주님의 은혜와 구원을 경험치 못하는 기회를 상실하는 안타까움의 모습이 여기에 소개되어져 있습니다. 이것은 그들의 편견과 그들의 한계가 하나님의 능력을 제한하는 결과를 가져왔다는 것입니다.

미국 남캘리포니아의 '그린빌 신학교'의 '조셉 파이파'라고 하는 총장은 이렇게 말합니다. '설교란 배워서 되는 것이 아니라 붙잡혀지는 것이다' 어제 받은 5월 '목회와 신학'에 나온 그의 대담을 제가 어제 저녁에 잠깐 보았습니다. 설교에 대해서 쭉 토론하면서 그가 내린 정의입니다. '설교라고 하는 것은 배워서 되어지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능력에 붙잡혀야 되는 것이다' 저는 전적으로 동의합니다. 물론 신학교에서 설교학도 배우고, 개론도 배우고, 이론과 실제도 배우지만 목사님들이 그거 배우지 못해서 설교를 못합니까? 아닙니다. 설교는 그야 말로 인간의 노력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위로부터 주시는 것입니다. 우리로 보면 하나님의 그 능력에 붙잡히지 않고는 설교는 될 수가 없는 거예요. 다시 말하면 하나님의 능력의 종은 만들어지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붙잡으시지 않으면 안된다는 거예요.

주님은 말합니다. '나의 택한 종, 나의 붙잡힌 종' 이사야는 하나님이 붙잡으신 종입니다. 여러분들, 오다가다가 갈 데 없어서 여기 오셨습니까? 아니시잖아요. 정말 하나님이 여러분 개인 개인을 지명하여 여러분을 붙잡으시고 부르신 줄 믿습니다. 그런 확신을 가지면 여러분의 이 자리가 얼마나 소중하고, 여러분의 이 자리가 얼마나 하나님 앞에 소중한지 '내가 이 자리에서 무엇을 해야 할꼬?' 고민하게 되고, 기도하게 되고, '그래. 하나님이 나를 이곳에 부르신 건 이러한 이유 때문이다' 충성하게 되는 줄 믿습니다.

나사렛은 불행했습니다. 주님이 그곳을 가셨지만 그들은 주님의 은혜를 체험하지 못했습니다. 오히려 가버나움은 하나님의 능력에, 주의 종의 능력의 예수를 알았기에 다른 곳에 계신 그분을 오히려 자기 동네로 초대해서라도 은혜를 입었습니다. 그런데 주님의 고향, 나사렛은 주님께서 스스로 가셨으나 그들은 주님을 알아보지 못했고 그리스도로 영접하지 않았습니다. 그들 스스로 그들의 가진 편견과 그들의 한계가 하나님의 능력을 제한해 버렸습니다.

오늘 우리가 가진 편견들, 오늘 우리가 가진 잘못된 정보 때문에 하나님의 능력과 역사가 내 안에서 제한되고 있지는 않습니까? 우리의 공동체에서 제한되고 있지는 않습니까? 성경은 말합니다. 다수의 믿지 않는 사회적인 분위기, 그러나 언제나 하나님의 역사는 다수의 역사가 아니라 창조적인 소수의 역사인 줄 믿습니다. 그래서 성경은 말씀합니다. '좁은 문으로 들어가라. 그 길은 협착하여 찾는 사람이 적다' 그러나 우리는 이 길이 진리의 길이요, 이 길이 생명의 길인 줄 알기에 우리는 언제나 그 길로 가기를 원하는 줄 믿습니다. 주님과 동행하는 거예요. 주님이 오셨을 때 그 주님을 영접하고 그 주님의 능력과 은혜를 우리 안에 이루게 하시는 것 바로 우리의 역할이요, 우리의 사명인 줄 믿습니다.
 

이런 글도 찾아보세요!

공유

facebooktwitterpinterestbandkakao story
퍼머링크

댓글 0

권한이 없습니다. 로그인

신고

"님의 댓글"

이 댓글을 신고 하시겠습니까?

삭제

"님의 댓글"

이 댓글을 삭제하시겠습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