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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한 아이의 헌신 (막 06:35-4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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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본문 말씀은 한 아이의 헌신을 통한 오천명이 먹고 남은 오병이어의 기적이 소개되어 있습니다. 사실 마가복음에는 아이에 대하여는 구체적으로 나와있지 않은데, 요한복음 6장에 보면 한 아이의 헌신이 아주 결정적인 장면에 등장하고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주님의 말씀을 종일 듣는 동안 수많은 사람들이 끼니를 걸러 시장했습니다. 빈들인 그곳에서 별도로 먹을 것을 구하기에는 매우 어려운 환경이었습니다. 하지만 주님께서는 그들이 마을까지 돌아가기에는 너무 허기질 것이라고 염려하셨고, 제자들에게 너희에게 가진 것이 있느냐고 물으셨습니다. 제자들이 대답합니다. '200데나리온의 떡을 사다 먹여도 모자랄것 같습니다' 사실 제자들의 분석은 잘못된 것은 아닙니다. 단지 주님이 말씀한 의도와 다른 방향에서 대답한 것이 문제라면 문제입니다.

제자들이 건의합니다. 여기 있는 사람들에게 2000만원 어치 도시락을 주문해 먹인다해도 모자라니 차라리 스스로 해결토록 하자는 것입니다. 제자들은 참으로 현실적인 대답을 한 것입니다. 틀린 말은 아니지만 주님은 무척 답답해 하셨습니다. 제가 목회하면서 답답할 때도 그런 때입니다. 목회자가 말하는 의도는 이런 부분인데 그냥 현실적으로만 대답하는 사람을 만나면 답답할 수 밖에 없지요.

주님께서 이런 제자들에게 직설적으로 말씀합니다. '너희들이 먹을 것을 갖다 주어라' 저 사람들이 200 데나리온의 돈을 가지고도 안되니까 '주님, 방법이 하나 있습니다' '뭐냐?' '자기들이 가다가 무엇인가 사먹고 가게 하옵소서' 얼마나 무책임한 얘기인가요? 가장 편한 방법이지만 가장 무책임한 방법입니다. 주님께서 얼마나 화가 나셨겠습니까? 여기서 화가 났다는 표현은 없지만 말씀의 분위기로 보면 주님은 지금 격앙되어 있어요. '너희들이 먹을 것을 준비해라. 어떻게 내가 너희들에게 그것을 물어봤는데 저들이 가다가 자기 스스로 사먹고 가라는 어떻게 너희들이 그런 무책임한 대답을 할 수 있느냐? 너희들이 책임을 져라' 그리고 주님은 너희 가운데 무엇인가 가진 것이 없느냐고 물으셨어요. 요한복음 6장에 보면 그 때에 한 아이가 자기의 것을 주님 앞에 가지고 나와요. 열어보니까 아주 보잘 것 없는 보리떡 다섯 개와 물고기 2마리였어요.

제가 자랄 때만 해도 도시락을 '벤또'라는 일본식 표현을 흔히 사용했었습니다. 누르스름한 그 도시락을 밥은 많이 먹어야 하니까, 먹을 것은 그것 밖에 없잖아요. 간식이라고 해야 운동회 때 번데기 사먹는 것이 다인데 무슨 간식이 있어요? 그러니까 밥을 주걱으로 꼭꼭 누릅니다. 밥을 그렇게 눌러 놓으면 맛이 없지요. 그때는 맛보다는 양이지요. 어머니가 밥을 주걱으로 꼭꼭 눌러서 그리고 한쪽 귀퉁이에 주걱으로 공간을 만들고, 그 다음에는 제일 흔한 우리집만 그런지 모르지만 제일 흔한 반찬이 콩장이예요. 이 콩에다가 간장 절인거 아니겠어요. 콩장 반쯤 담고, 그 다음에 무말랭이 한 반쯤 담고, 그리고 뚜껑을 덮어서 학교에 가지고 가면 점심때라고 해서 열어보면 콩장의 그 간장물이 절반은 다 흘러있고, 무말랭이 시뻘건 물이 절반은 밥에 물들어 있어요. 그래도 그거 떡같이 된 그 밥을 떠먹는 것만 해도 행복한 일이예요. 왜냐하면 한쪽 구석에는 그 점심도 못 싸오는 아이들이 부러운 듯이 쳐다보고 있어요. 보리떡 5개는 당시에 평범한, 어찌 보면 가난한 사람들의 양식입니다.

아까 제가 1부 예배 때 우리 중고등부 학생들이 여러분 보다 더 많이 참석했는데 그 학생들에게 그랬어요. 서로 인사시키면서 '애늙은이가 되지 맙시다' 그렇게 인사를 시켰어요. 어른은 아이 같이 되어야 하는데 너무 어른은 겉늙어 보여요. 아이들도 것늙어버렸요. 그게 성장이고, 그게 사회생활에 적응하는 것인 줄 알아요. 아이가 아이답지 않아요. 사실 아이들을 보면 멀리서도 보고 '목사님!' 그러고 뛰어와서 반가워하고 손 흔들어야 하고 이래야 하는 것 아닙니까? 가까이 와서도 째려보고 누가 먼저 인사하나 이거 내기하고 있는... 아주 제가 고민할 때가 많아요. 이게 아이들의 모습이 아니잖아요. 누가 가르친 거예요? 그 부모들이 그렇게 하고 있거든요. 아이가 아이다워야 하는데 겉늙어서 이상해진 거예요. 아이들에게서 싱싱하고 생기 넘치는 모습이 아니라 어른도 아니면서 어른 냄새 비슷한 것이 나요. 그래서 제가 오죽하면 아이들보고 '애늙은이 되지 맙시다' 그런 인사를 시켰겠어요?

이 아이가 그런 생각을 가졌다면 '내가 지금 예수님에게 이 보리떡 5개를 드린다고 무슨 일이 일어날까?' 그런 생각했다면 안 가져갔을 거예요. 이 도시락을 드리다가 보리떡을 보고 나면 '야, 너 가난한 아이구나' 이렇게 내 체면에 손상을 입을까봐 자기 가정의 수준이 드러날까봐 그런 복잡한 생각을 했다면 이 아이가 가져가지 않았을 거예요. 다시 말하면 이 아이는 순수한 마음, 그저 주님이 지금 무엇인가 찾고 계시다고 하는 그 주님의 필요에 내가 응답해야 되겠다고 하는 정말 아이다운 순수함만이 있었어요. 이 아이의 헌신이 가정을 살리고, 이웃을 살리고, 여기 수천의 공동체를 살린 줄 믿습니다.

자동차 왕이라고 불렸던 포드 자동차의 '헨리 포드'가 성공한 후에 집을 하나 지었습니다. 자기가 어릴 때 놀던 농장 가운데에 집을 짓고 우리로 말하면 집들이하듯이 직원들을 불렀어요. 그런데 직원들이 와서 보니까 깜짝 놀랐어요. 이게 대자동차 회사의 회장님 집인데 너무 작고 초라한 거예요. 그래서 모두가 이구동성으로 건의하기를 '이 집이 회장님 저택으로는 어울리지 않으니 다시 짓기 바랍니다' 모두가 그렇게 건의를 했어요. 그때 헨리 포드가 유명한 말을 남겼습니다. '건물을 세우는 것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그 건물 속에 가정이 있느냐가 문제지요'

여러분, 집과 가정의 차이를 아십니까? 요즘 아이들은 집은 있지만 들어가 잘 집은 있고, 들어가 먹을 집은 있는데 사랑 받을 가정이 없어서 당황합니다. 가출한 청소년들을 불러놓고 조사를 해보니까 우리 어른들은 가출한 아이들은 친구를 잘못 만나서 환각제 때문에, 혹은 뭐 잘못된 아이들의 이성문제 때문에, 뭐 음주문제 때문에 그래서 아이들이 집을 나가서 방황할 거라고 생각하는데 그것은 그 나간 아이들의 3% 밖에 안되는 거예요. 60%가 무슨 이유냐 하면 가정문제라고 대답을 했어요. 부모가 너무 잘못 알고 있는 거예요. 가정 문제라는 말은 다시 말하면 그 아이들이 가정에서 빵을 원하는 것이 아니라 사랑을 원하는데 사랑은 받지 못하고 밥만 얻어먹는 거예요. 밥만 집은 싫다고 스스로 집 없는 나그네 길을 선택하는 거예요.

오늘날, 집들은 많지만 가정이 없는 그러한 심각한 시대에 우리가 살고 있어요. 성도 여러분, 여러분의 집은 가정이 존재합니까? 여러분들의 가정이 존재하느냐 그 말이예요. 먹을 곳이 있고, 잘 곳이 있는 집 말고 여러분의 가정, 하나님의 사랑이 언제나 표현될 수 있고 부모님의 사랑이 언제나 나누어질 수 있는 그래서 집 하면 언제나 따뜻하고 가고 싶은 가정이 있느냐 그 말이예요. 아이들이 말합니다. '우리에겐 돌아갈 가정이 없어요' 집은 다 있어요. 번듯한 집들은 많은데 돌아갈 가정이 없다고 아이들은 안타까워합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가 이러한 비극을 경험하는 것이 사실 우리만의 일은 아닙니다. 전국적인 일이고 세계적인 현상입니다. 그렇게 세계적인 현상이라고 위로받기에는 너무나 심각합니다. 이러한 어려움을 해결할 방법은 없습니다. 가정을 세우고, 가정을 구원할 힘은 없을까?

요즘 '프라미스 키퍼스' 즉, 약속을 지키는 사람들 운동이 많이 일어나고 있습니다. 특별히 가정의 아버지들이 그 가정에서 약속을 지키는 주체가 되자고 하는 운동들이 일어나고 있습니다. 마치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을 통해서 약속하셨듯이... 그리고 아브라함은 그 하나님과의 약속을 듣고 지켰듯이 오늘 우리 가정의 아버지들이 하나님과의 약속의 말씀을 소중히 여기고 그 하나님과의 약속을 지키기 위해서 전심을 기울이는 그러한 아버지들이 이 시대에 필요한 줄로 믿습니다. 우리 평안의교회도 '프랑스 키퍼스' 운동이 일어나야 합니다. 하나님과의 약속, 자녀와의 약속, 교회와의 약속, 사회와의 약속을 지켜야 합니다.

이 사회는 사실상 모든 것이 약속으로 되어 있어요. '빨간 불이 들어오면 건너지 마세요' 약속입니다. 그냥 가도 누가 뭐라고 그래요? 그런데 그것은 약속을 어기는 것이기 때문에 안되는 거예요. 하나님과의 약속을 소중히 여긴다면 그 하나님께서 당신의 형상으로 지으신 사람과의 약속도 소중할 줄로 믿습니다. 하나님을 경솔히 여기는 사람이 사람을 소중히 여기겠습니까?

오늘 우리는 이런 의미에서 우리의 가정을 회복하고, 점점 해체되는 가정이 늘어가는 이 시대에 가정을 복원시켜야 됩니다. 기도하신 것처럼 가정 같은 교회, 교회 같은 가정이 우리에게 필요합니다. 그 가정을 세우고, 그 가정이 교회 같고 천국 같으려면 무엇이 있어야 할까? 아주 단순하지만 너무나 중요한 대답을 여러분에게 드리기 원합니다. 그것은 곧 그 가정이 하나님의 말씀으로, 하나님의 의로 지켜지는 가정일 때 가정이 하나님이 축복하시는 공동체가 될 줄로 믿습니다. 하나님의 의가 지배하는 가정이 되게 하시기를 축원합니다.

여러분 가정에서 하나님의 말씀이 가장 소중한 것으로 여겨지도록 하셔야 합니다. 하나님 앞에 먼저 순종하게 해야 합니다. 교회에 순종하게 해야 합니다. 사회의 질서에, 사회의 약속에 순종하도록 키워야 합니다. 오죽하면 요한 웨슬레 목사님은 'will breaking' 의지를 꺾는 것부터 가정 교육을 시작하라고 그랬습니까? 순종하는 일입니다. 우리의 교만을 꺾지 않고서는 우리는 하나님 앞에 옳게 설 수가 없고 우리는 부모 앞에 바른 효도로 설 수가 없다고 하는 것입니다. 어린이를 사랑하셨고 한 어린이를 통해서 어른들을 부끄럽게 하신 주님, 한 아이의 헌신이 그 수천의 공동체를 살렸던 것처럼 오늘 이 시대 우리의 자녀들이 진정으로 하나님의 말씀, 하나님의 의로 양육되어져서 가정과 교회와 이 시대를 살려가는 하나님의 축복의 주인공들로 양육될 수 있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간절히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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