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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네 부모를 공경하라 (엡 06: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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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모든 부모님들은 적어도 자기의 자녀들만큼은 좀더 효도가 남다른 자녀를 기대하실 것입니다. 부모님들은 이렇게 표현합니다. ‘우리 아이를 어떻게 키웠는데, 우리 아이는 다른 아이와 다릅니다.’ 이런 표현들을 주로 사용합니다. 하지만 부모님들의 그런 기대와는 달리 전혀 기대하지 않은, 오히려 충격적인 일을 만나면서 우리는 고통을 받곤 합니다.

작년 5월에 있었던 대학생 이 모 군의 부모님을 토막 살인한 사건을 기억하십니까? 서울 거리를 다니면서 그 토막 난 시신을 버리는 그런 행동을 보면서 결과적으로 보면 천인공노할 일이지만 우리는 그런 일이 왜 일어났는가 하는 배경과 동기도 살펴보아야 합니다.

연세대학교의 이훈규 교수는 그 학생의 일기와 주변의 친구들, 주변의 인물들을 면담을 통해서 글을 하나 썼습니다. ‘미안하다고 말하기가 그렇게 어려웠나요?라는 제목의 책을 하나 썼는데 그는 이글 속에서 이 학생이 부모를 그렇게 살인할 수밖에 없는 내면의 문제들을 아주 섬세하게 교육심리적인 차원에서 파헤치고 있습니다.

내용이라는 것은 이런 것입니다. 그 학생은 어릴 때부터, 아동기부터 부모로부터 심한 학대를 받은, 부모의 폭력에 시달린 그런 학생이었습니다. 부모의 폭력에서 어린아이들은 거의 대항할 수 없죠. 초등학교 정도까지는 아마 그럴 것입니다. 중학교만 되어도 요즘 신체발육이 빨라서 어른만한 육체의 성장을 이룬 아이들이 있는데 아마 중학교 정도만 되어도 어른들은 물리적으로 아이들을 제압하기가 쉽지 않을 것입니다.

초등학교와 그 이전에 물리적으로 심한 폭력에 시달렸던 이 학생은 내면으로만 그것을 계속 쌓아두고 있었어요. 마치 바다 속에 돌덩어리를 빠뜨려 놓는 것처럼 보이지 않지만 그것이 계속 쌓여가면서 결국은 부모를 토막내야겠다는 결론에 까지 이르게 만들었습니다. 이 학생은 중고등학교시절을 거치면서도 ‘대인기피증’이라는 그런 심리적 현상 때문에 사람들 만나는 것을 싫어하고 친구들 만나는 것을 싫어해요. 가장 많은 사람들을 만나서 경험을 쌓고 대화를 하고 인생을 논의해야 할 그 중요한 시기에 이 학생은 사람들을 기피하고 친구들을 기피하는 대인 기피증에 시달렸다는 말입니다.

그가 청년이 되어서 자기의 힘으로 무엇인가를 해 볼 수 있는 나이가 되었을 때 그가 결심한 첫 번째 일은 부모를 죽여야 되겠다고 결심한 것입니다. 결과만 놓고 본다면 이 자녀가 불효막심한 자녀이지만 그러나 그 동기는 부모로부터 시작되었다는 것을 잊으면 안됩니다. 다시 말하면 우리가 자녀를 키우면서 좋은 부모가, 존경받는 부모가 된다는 것이 얼마나 중요하고 또 어려운가 하는 것을 역설적으로 말해주는 그런 사건입니다.

부모들은 모든 자녀들이 늘 부모를 존경하고 공경하기를 기대하지만 그건 그야말로 기대요 희망사항일 뿐입니다. 그런 기대가 큰 부모일수록 자녀에 대해서 많은 투자를 아기지 않습니다. 좋다고 소문난 사립 유치원에 보내려고 밤을 세워가며 입학원서를 받기 위해 줄을 서고, 학군이 좋다는 중고등학교에 보내기 위해 수백만원이 들어가는 과외를 마다하지 않습니다. 심지어는 파출부를 해서라도 너희들의 과외비를 대겠다는 장면에서는 눈물이 날 지경입니다. 이렇게 해서라도 자녀들에게 최선을 다하는 모습으로 그들에게 비쳐지기를 원합니다. 그건 한가지 이유때문입니다. 내가 너희들을 잘 키우기위해 정말 희생했음을 자식들이 알아주길 바라는 거죠. 그리고 그런 부모일수록 나중에 자신을 지성으로 섬기며 효도할 것이라고 기대합니다.

그런데 최근 청소년들의 설문조사를 통해 나온 결론은 가히 충격적인 것이었습니다. 21세기를 살아가는 학생들의 부모에 대한 효도관은 달랐습니다. 그것은 자신의 부모가 얼마나 좋은 것으로 나에게 해주었냐 하는 것보다는 부모가 당신의 부모, 즉 할아버지, 할머니에게 평소에 얼마나 효도하고 섬겼느냐를 기준으로 가지고 있다는 것입니다.

우리 주변에는 늙은 노인들이 홀로 사는 경우가 많습니다. ‘지금은 내가 아직 건강하여 밥이나 빨래도 할 수 있으니까 우리끼리 살테니 너희는 너희끼리 살아라’ 이렇게 부모님이 주도하여 분가해 사는 것은 문제가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심각한 현실적 문제는 따로 살 수 없는 병들고 가난한 부모들임에도 불구하고 그들의 자녀들이 돌보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외람된 표현이지만 버려진 부모님들이 우리 주변에는 너무도 많이 계십니다.

그런데 놀라운 것은 그렇게 부모를 버려두고 사는 사람일수록 자기 자식에게는 끔찍히 잘 한다는 것이죠. 그리고 그들은 기대할 것입니다. ‘내가 너희들에게 이렇게 한 만큼 너희도 나에게 잘해야 한다' 그런데 그 아이들의 부모에 대한 가치관은 그렇지 않았습니다. 쉽게 이야기해서 당신이 당신 부모에게 한 만큼만 하겠다는 것입니다. 얼마나 두려운 것입니까?

오늘 이시간, 이러한 잘못된 가치관을 가지신 분들이 계시다면 철저하게 깨지는 시간이 되기를 바랍니다. 아이들에게 잘해서 효도 받겠다는 생각이 얼마나 어리석은 일인지 알아야 합니다. 기대가 많은 부모일수록 자신은 결코 자식 덕을 보지않을 것이라고 공언합니다. 자신의 속마음까지 속이는 이중적인 태도이지요.

아이들에게 잘 할 시간과 돈이 있으면 그것으로 부모님를 잘 섬기는 것이 유익한 일입니다. 아이들은 부모가 그들의 부모를 섬기는 모습을 보면서 나도 저렇게 해야 되겠다고 생활속에서 교육을 받기 대문입니다. 이것은 가정에 있어서 가장 중요한 교육은 말에 있지 않고 실천에 있음을 증거해 주는 것입니다. 주님께서도 하나님을 향한 우리의 신앙이 말에 있지 않고 오직 능력에 있다고 하셨습니다.

바울 사도는 고린도전서 11장에서 말씀하기를 ‘내가 그리스도를 본받은 자 된 것 같이 너희도 나를 본받으라’고 선언하고 있습니다. 사실 이렇게 말하기는 쉽지 않은 일입니다. 나를 본받으라고 말하는 것은 두려운 일입니다. 하지만 바울 사도는 성도들에게 그렇게 말하고 있습니다. 내가 여러분들을 섬기면서 신앙의 삶에 모델이 된 것 같이, 여러분들도 그런 삶을 살기를 원한다는 것입니다, 다른 사람은 몰라도 적어도 우리 부모들이 자식을 향해서 '너희들은 이 부모 만큼만 살면 좋겠다'라고 말할 수 있어야 합니다. 그 말을 할 수 없는 부모라면 자녀교육은 실패했다고 보아야 합니다.

부모가 무엇입니까? 그저 대접받는 게 부모가 아니거든요. 대접 받을 수 있는 삶을 살아야 하는 것이 부모의 사명입니다. 나이만 많다고 대접받는 세상이 아님을 우리는 실감하며 살고 있습니다. 권리주장을 위해 '내 나이가 얼만데......’그러면 대번에 ‘누가 나이 많이 먹으라고 했습니까? '이렇게 나오는 시대입니다. 나이만 가지고 대우를 받겠다는 생각은 적어도 21세기를 사는 사람이라면 일찌감치 버려야 합니다. 그래야 우리의 정신이 건강해집니다.


두 번째로 우리가 생각해야 할 것은 자녀에 대해서 정말 신사적이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성경은 말씀합니다. “너희 자녀를 노엽게 하지 말라” 이 말씀의 헬라어적 원 의미는 자녀에게 변덕스럽게 대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어린아이일수록 약속을 지킬 수 있어야 합니다. 최근 약속을 지키는 사람들이란 의미의 '프라미스 키퍼스 운동'이 미국을 중심으로 전 세계에 확신되고 있음을 주목해야 합니다. 일관성이 없는 부모의 태도는 주님께서도 금하신 일입니다.
‘자녀를 노엽게 하지 말라’ 자녀의 분노가 그 심령 깊은 곳에 계속 쌓이게 해서는 않됩니다. 그렇게 되면 그들은 결국 부모도 믿을 수 없는 존재라고 결론을 내리게 되고 세상을 향해 불신의 벽만 키워가게 되기 때문입니다.

최근, 미국 초등학교에서 조사를 했어요. ‘여러분, 뉴스 때마다 자동차 사고로 귀중한 생명이 죽고, 교통이 마비 되는 것을 보게 되죠? 이것은 교통법규를 어기는 불법의 사람들, 과속과 난폭운전을 하는 사람들 대문인데, 여러분들은 이들이 누구라고 생각합니까?’ 한 어린이씩 발표를 합니다. 놀랍게도 대부분의 아이들의 대답은 '우리 아버지' 라는 대답이었습니다. 우리 부모가 난폭운전, 과속운전, 불법운전의 주인공이라고 아이들은 믿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 부모들이 착각하지 말아야 할 것이 있습니다. 가족들이 모처럼 휴가를 간다고 생각해 보세요. 평소 두 시간 정도 걸리던 곳이 휴가인파로 인해 다섯 시간이 걸린다는 뉴스를 들은 부모는, 아이들이 지루해 할까봐 안되겠다며 과속과 불법 추월을 일삼아 세 시간 만에 목적지에 도착했다고 생각해 보세요.
‘야! 다섯 시간 걸려도 어려운 길을 아빠가 이렇게 열심히 운전해서 세 시간 밖에 안걸렸지? 좋지?’ 하지만 아이들의 머릿속에 입력된 메세지는 ‘우리 아버지는 난폭 운전자, 불법 운전자’라고 입력이 될것입니다. 아이들을 위한다며 불법과 과속을 하여 한 두시간 단축했다고 자랑스러워하는 부모가 있다면 이건 정말 부끄러운 모습이 아닐 수 없습니다.

문제는 정신입니다. 운전을 하는 사람들이 종종 이렇게 이야기 합니다. “그 길로 가면 신호등이 없어 좋아.......!” 오늘 이후, 적어도 우리 평안의 교회 성도들의 입에서는 신호등이 없기 때문에 그 길로 가는 것이 좋다는 말은 절대로 나와서는 않됩니다. 신호등이 있다는 말은 그 길에 질서와 약속이 존재한다는 의미입니다. 왜 그걸 피해서 신호등이 없는 길로 가야 합니까? 신호등이 없는 길은 질서와 약속이 미쳐 준비되지 못한 길입니다. 대강 대강 넘어갈 수 있는 길이라는 말입니다. 약속을 지키면서 가는 멋있는 가장의 모습을 보여주며 사시기를 축원합니다.


마지막으로 저는 좋은 부모가 되는 일에 있어서 결론적인 것은 자녀를 무엇보다 잘 알아야 하고, 또 우리 자녀들은 부모를 잘 알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신앙에 있어서도 ‘영생은 곧 주님을 아는 것입니다’라고 말했습니다. 여기서 안다고 하는 것은 단순한 지식을 의미하는 것이 아닙니다.

여러분이 저를 안다고 할 때에 무엇을 말하는 것입니까? 외모에 대해서 이야기할 수 있겠지요. 하지만 그것은 껍데기에 불과한 것입니다. 저의 인격, 저의 가치관, 저의 삶의 철학, 이런 것들은 살아가면서 설명이 되지 않아도 “아, 그분!”하면 마음에 감동이 되어지고 정리가 되어지는 부분이 있어요. 그것이 아는 것입니다.

자식이 부모를 안다고 할 때 얼마나 부모를 잘 알고 이해하는 지 우리 부모님들이 자식을 안다고 할 때에 얼마나 자녀를 깊이 이해하고 있는지 이것은 참으로 중요한 과제가 아닐 수 없어요.

심방을 가면 서재들을 살펴봅니다. 사실 서재라고 할 것도 없지요. 그냥 책장 한 두 개만 있어도 감사한 일입니다. 여러분들은 오늘 집에 돌아가셔서 한번 둘러보세요. 우리 가정에는 서재라고 할만한, 아니 책장이라고 할만한 것이 있는가? 집은 점점 넓어지는 추세인데, 안방에도 화장실이 따로있을 만큼, 화장실은 늘어나는 추세인데 말입니다. 방이 3개면 작은방 하나는 서재로 꾸며 아이들과 어른들이 거기에서 책을 보며 숙제도 할 수 있는 공간이 마련된다면 얼마나 멋있을까 생각해 봅니다. 공간은 있는데 마음이 없는것이 문제입니다.

언젠가 연대의 이성호 교수님이 ‘당신의 자녀들이 흔들리고 있습니다’라는 책을 써 학부모로 부터 선풍적 인기를 모은 적이 있었습니다. 베스트셀러가 되었지요. 그 책이 주는 도전은 다름이 아니라 우리의 자녀들이 얼마나 방황하고 흔들리고 있는데 우리 부모들은 눈치도 못 채고 있다는 거예요. 그리고 문제가 뻥 터지고 나면 ‘우리 아이는 그럴 아이가 아닌데.....’ 하며 마치 유행가 후렴처럼 그 소리를 반복한다는 것이지요.

여러분들에게 몇 가지 질문을 해도 좋을지 모르겠습니다.
여러분의 자녀들이 최근 제일 좋아하는 게임의 이름을 알고 계십니까?
여러분의 자녀들이 요즘 제일 좋아하는 가수와 노래의 제목이 무엇인지 아십니까?
여러분의 자녀들과 휴대폰을 가지고 문자로 마음의 소리를 전하신 적이 있으신지요? “아들아! 공부하느라 피곤하지? 엄마는 너를 사랑한단다” 말로 하기는 좀 어려운, 아이들이 하는 말로 닭살 돗는 이야기가 문자로는 그리 어렵지 않다는 것이지요.

적어도 21세기를 사시는 부모라면 자녀들과 휴대폰을 통해 그 정도의 기본적인 교류는 할 수 있어야 합니다.
지금 목사님이 도대체 무슨 이야기 하는 것인가? 그렇게 감이 안잡히는 성도가 있다면 오늘 중으로 사표내시기 바랍니다. 누구한테 내야 되겠어요? 자식한테 내야지요.

목사는 성도들의 삶을 알기 위해서 고민합니다. 서점에 가서 이 주간의 베스트셀러, 소설 부문에서 요즘의 사람들은 어떤 소설을 많이 읽는지, 비소설 부분에 가서 어떤 비소설 부분을 많이 읽는지, 시 분야에 가서는 어떤 시를 많이 읽는지, 만화는 요즘 아이들이 어떤 만화를 좋아하는지... 다행히 요즘은 인터넷이 있어서 서점에 가지 않아도 그런 것들을 다 조사할 수 있고 책도 살 수가 있어요. 저는 이번 주간에도 인터넷에서 제가 필요한 책 세권을 장바구니에 담아서 3일만에 책이 도착하는 기쁨을 맛보았어요.

자녀에 대해서 연구해야 합니다. 물질을 투자하셔야 됩니다. 여러분의 시간을 투자하셔야 합니다. 세상에 여러분들이 하루 24시간을 사는 동안에 아무리 바쁘다고 해도 자녀를 위해서 바쁘지 않다고 하면 부모라고 할 수 있겠습니까? 알아서 잘 자라요?

또 자녀가 된 우리들은 부모님의 필요가 무엇인지를 알아야 합니다. 부모님들이 지금 무엇을 원하고 있는지... 여러분, 여러분의 부모가 제일 좋아하는 음식이 무엇인지 아십니까? 목욕탕은 어느 목욕탕을 제일 가고 싶어하시는지 아시나요? 이런 잔잔한 것들이 일상생활을 통해서 주고받지 않으면 알 수 없는 거예요. 우리 부모님들이 왜 고민하고 있는지, 무엇을 고민하고 있는지, 무엇 때문에 마음 아파하고 있는지를 우리 자녀들은 알아야 합니다. 그 부모를 알기 위해서 또 많은 시간과 많은 물질을 투자해야 돼요. 좋은 세미나들이 많고 좋은 책이 많아요.


요즘, 생명의전화에서 실시하는 '시민 상담대학'에 나가시는 여덟 분의 우리 성도님들이 참으로 행복하다고 그래요. 대한민국의 상담과 심리의 최고의 권위자들이 전문 대학원에서 일년이나 들어야 할 내용을 석달 동안 일주일에 두 번씩 강의하는데 참으로 유익하다고 입소문이 무섭습니다. 육신적으로는 무척 피곤한 시간인데도 불구하고 우리의 이웃들, 부모와 자녀들, 그리고 사는 많은 사람들의 삶의 내용들을 상담하며 그들의 아픔을 나누며 치유할 수 있는 훈련을 통해 먼저 자신들이 성숙해져가며 치유되고 있음을 느끼기 때문일 것입니다.


오늘 우리는 좋은 부모가 되기 위해서, 그리고 자녀된 입장에서는 좋은 자녀가 되기 위해서 우리 함께 노력해야 할 줄로 믿습니다. 주님은 원하십니다. “네 부모를 공경하라” 예수 안에 살면서 형식적이고 율법적인 신앙은 금물입니다. 오늘 주님께서 본문의 말씀도 그것입니다.

고르반이라고 하는 제도는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하나님을 향한 가장 아름다운 헌신의 제도였습니다. “내가 가지고 있는 재물을, 내가 가지고 있는 소유물을 하나님에게 드리겠다. 주님의 이름으로 쓰도록 내가 그것을 드리겠다”고 하는 제도입니다. 그렇게 되면 어느 누구도 그것을 손대지 않게 되어 있어요.

그런데 당시의 사람들은 부모 공경에 대해서 부담감을 적게 갖기 위해서 고르반이라고 하는 제도를 악용하기 시작했습니다. 부모를 위해서 귀한 것들을 쓸 수 있어야 하는데 부모를 위해서 쓰는 것이 아까운 그들이 부모가 원하는 그것을 집이든, 땅이든, 재산을 제사장에게 가서 “나 이 땅을 고르반하겠습니다. 이 집을 고르반하겠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성전에 드리는 거예요. 그리고나서 부모가 요구합니다. “야, 어디에 있는 땅, 그거 팔아서 이거 이거 좀 쓰자” “어머님, 그러고 싶은데 어떻하지요? 그 땅 벌써 하나님께 고르반했는데요” “그래. 너 언제 고르반 했니? 너 믿음 크구나. 잘했다. 하나님께 드렸어? 그래” 믿음의 부모로서 믿음의 결단을 한 그 자식이 얼마나 귀하겠어요? 부모님은 고르반 했다니까 그것으로 만족하고 자신의 불편과 어려움을 그냥 감수하면서 살아갑니다.

어느 정도 시간이 지나고 나서 부모가 그 부분에 대해서 단념을 하고 나면 이 자녀는 성전으로 달려가서 제사장에게 말합니다. “언젠가 드린 땅, 돌려주세요! “왜요? 고르반하지 않았습니까?” “예! 고르반 했는데 물르려고 그럽니다” 물리는 제도가 있었어요. 거기서 얼마나 제하면 물려주었어요. 그래서 부모 몰래 고르반을 다시 물려가지고 와서는 자기를 위해서 사용합니다. 하지만 부모는 까마득하게 모르고 있는 거예요. “우리 아이는 그 땅을 하나님께 고르반 했다” 얼마나 가증한 일입니까? 하나님의 이름을 가지고 거룩한 이름을 가지고 인간의 욕심을 채우려고 하는 이런 율법주의자들과 잘못된 인간의 유전들을 우리 주님께서는 지금 책망하고 있는 거예요. 책망 받아야 할 사람들은 당시의 이스라엘 백성들 뿐 아니라 오늘 우리가 아니겠습니까? 내가 하나님 앞에 책망 받아야 할 삶은 없습니까?

이제 우리가 마음과 뜻과 정성을 다하여 하나님을 섬기는 것처럼 우리의 부모님도 그렇게 섬길 수 있기를 간절히 축원합니다. 보이는 부모를 공경하지 못하면 보이지 않는 하나님을 섬길 수 없다고 주님은 정의합니다. 그렇습니다. 보이는 부모님에 대한 우리의 공경이 우선입니다. 그래서 교회보다 가정이 우선이라는 말이 나오는 것이지요.
오늘 성가대와 예배 전에 손을 잡고 기도하면서 그런 권면을 드렸어요. “여러분의 가정이 평안해야 그 평안한 가운데에서 우러나오는 찬양이 살아있는 찬양이지 집에서 실컷 죽이니, 살리니 싸우고 나서 찬양을 부른다면 그게 무슨 은혜로운 찬양이 되겠느냐? 외우고 기억된 노래는 될지언정 그건 살아있는 찬양은 될 수 없다”

가정이 화목해야 합니다. 가정이 평안해야 할 줄로 믿습니다. 그래서 가정을 천국의 작은 모델이라고 그랬어요. 천국을 맛보는 곳이라고 그랬습니다. 그 가정이 건강할 때 가정이 모여진 교회도 건강하고, 그 교회 교회가 건강해야 하나님 나라가 건강할 줄 믿습니다. 가정 같은 교회, 교회 같은 가정을 비전으로 삼고 있는 평안의교회, 모든 성도들 가정이 주안에서 화목하시고, 특별히 우리에게 허락하신 축복 중의 축복인 부모님들을 전심을 다하여 온전히 섬기는 아름다운 성도의 삶을 살아가시를 주님의 이름으로 간절히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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