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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불리한 조건을 이겨낸 용기 (막 07:24-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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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에 구입한 책 중에 축구에 관한 것이 3권이었는데 , 그 중의 한권이 '한국은 축구다'라는 아주 도전적인 제목의 책이었습니다. 또 한권은 '마이클 오웬의 축구 이야기' 입니다만 어떻게 그가 그렇게 축구를 잘하게 되었는지를 어린 시절부터 청소년시절, 그리고 지금의 세계적인 선수가 되기까지의 과정을 자세히 소개한 글을 읽고 큰 감명을 받았습니다. 축구 황제라는 브라질의 '펠레'가 말하기를 '2002년 한국과 일본이 공동 개최한 월드컵의 최고 스타는 '마이클 오웬'이 될 것이다'고 하여 화제입니다.

축구에 관한 책을 쭉 보면서 느껴지는 것은 훌륭한 선수는 하루 아침에 이루어지는 것은 아니라는 것입니다. 몇해 전 아르헨티나의 축구 영웅 '마라도나의 축구 이야기'를 읽고서도 같은 감명을 받은 적이 있었습니다. 놀라운 일은 세계적인 축구 스타들이 사실상 축구를 하기에는 기본적인 조건에 있어서 남들보다 뛰어나지 않다는 것입니다.

예를 들면, 키가 별로 크지 않다는 것이지요. 보통 축구경기의 해설을 듣다보면 선수들을 소개할때 '아무개 선수는 키가 좀 작은 것이 문제입니다' 하면서 '키가 178㎝ 밖에 안돼요' 라고 한다든지, 아주 어릴 때부터 축구를 시작해야 하는데 그 선수는 고등학교나 심지어는 청년시절에 축구선수로 종목을 바꾸었다든지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세계적인 명성을 지닌 선수들의 대부분은 170㎝을 오르내리는 그 세계에서 보면 아주 작은 선수입니다. 아르헨티나의 마라도나나 잉글랜드의 마이클 오웬, 브라질의 호나우도나 프랑스의 앙리같은 이들은 축구선수로서의 치명적인 약점인 작은 키를 가졌습니다. 뿐만아니라 이탈리아의 비에리는 헤비급 복서였지만 지금은 축구선수로서 명성을 떨치고 있습니다.

저는 그러한 그들에게서 한가지 공통점을 찾을 수 있었는데 그것은 최선을 다하는 끊임없는 자기 노력의 사람들이었다는 점입니다. 똑같은 시간에 운동을 한 뒤, 지치고 피곤한 몸을 이끌고 샤워하기도 힘들터인데 저녁 시간에 라이트를 켜놓고 다시 공을 들고 나와서 오늘 훈련 중에 뭔가 부족하다고 느낀 부분을 보충하기 위해 밤 늦도록 혼자서 연습을 하는 것입니다. 불리한 신체적 조건이나 여건을 원망하기보다는, 운동선수로서 가장 좋은 조건을 가진 동료들보다 더 많은 훈련과 자기개발을 위해 땀흘려야 한다는 것을 그들은 알고 있었다는 것이지요.

소도 비빌 언덕이 있어야 한다는 우리말 처럼, 세상에서 출세를 하는 일도, 사업의 세계에서 성공을 하는 일도 부모나 친구, 심지어는 공무원이나 권력기관에 뇌물을 써서라도 유리한 조건을 차지하려고 몸부림 치는 것이 오늘의 현실이고 보면, 이들의 땀과 수고는 너무나도 아름다운 모습이 아닐수 없습니다.


오늘 본문 말씀에 보면, 한 여인이 소개되어 있습니다. 수로보니게 족속의 헬라인이라고 하였는데, 마태복음 15장에서는 가나안 여인이라고도 소개되어 있습니다. 마태의 의도는 아마도 그가 유대인이 아닌, 즉 할례 받지 못한 이방인임을 강조하기 위하여 그렇게 표현했을 것입니다. 아주 분명하게 유대인과 그 밖의 사람으로 구별하던 당시의 사고 속에 수로보니게 족속의 한 여인이 그들 세계 속에 뛰어든 셈입니다. 홀홀 단신 배경도 없고 조건도 불리한 그가 주님 앞에 와 무릎을 꿇었습니다. 25절에 보면 '그 발 아래 엎드렸다'고 했습니다.

'예배하다'라는 뜻을 가진 'worship' 의 의미는 '엎드려 경배한다'는 말입니다. 지금 여러분들은 엄밀한 의미에서는 예배자의 자세가 아니예요. 의자에 앉아있지요, 그 의자가 어떤 의자입니까? 인도네시아에서 수입한 백색의 맑고 향기나는 백나왕입니다. 그 위에 황토 흙칠을 한 뒤 니스를 바른 것입니다. 장시간 앉아있어도 허리가 아프지 말라고 15도 정도 경사가 나 있을 뿐아니라 엉덩이가 아프지 말라고 푹신한 방석까지 깔아 놓았습니다.

비록 여러분들이 문화적인 변화의 추세로 인해 편안한 의자에 앉아 계시지만, 여러분의 마음만큼은 주님의 발 앞에 엎드려 있는 자세이시기를 바랍니다. 그런데 다리를 꼬고 앉아요? 다리가 좀 불편하다고 앞 좌석에 발을 올려놓아요? 그러한 모습은 진정한 예배자의 모습과는 거리가 먼 것입니다. 우리 평안의교회에서는 있을 수 없는 일이지요.

간혹 다리를 꼬고 앉은 분들이 계신데 틀림없는 새가족이거나 이곳에 다니러 왔다가 예배에 참석한 분들입니다. 어쩌다가 신학교에 가면 교수님들이 강단 위에서 다리를 꼬고 앉아 있는데 그거 정말 보기 싫데요. 그분들 그것 좀 고쳤으면 좋겠어요. 학생들이 자기들의 제자라고 해서 그러는 것 같은데 그건 크게 착각하는 것이지요.

예배자의 모습이란 하나님 앞에서의 자세이지 스승과 제자라는 관계의 시간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강의실에서 교수가 다리를 꼬고 앉아 있다고 누가 시비하겠습니까? 하지만 예배는 하나님 앞에서 모두가 동일한 줄 믿습니다. 누가 높고 누가 낮지 않아요.

제가 군복무 시절, 모범 사병으로 육군 본부교회를 방문했는데 성가대석 건너편에 붉은 카페트가 깔린 특별한 자리가 있어서 '여긴 무슨 자리입니까?' 했더니 안내자의 말이 '장군석'이라고 해요. 그 교회를 출석하는 많은 장군 성도(?)를 위하여 붉은 카페트를 깔아 만든 특별한 자리를 따로 마련했다는 것입니다. 하지만 이것은 아주 잘못된 것이지요. 교회 안에 무슨 장군과 졸병이 있어요. 장군을 위해서 카페트를 깔고 별도의 자리를 만든다는 것은 정말 군인다운 발상이지만 예배자의 발상은 아니예요.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는 헬라인이나 유대인이나 차별이 없다고 하신 말씀이 무색한 현장이었습니다.

이러한 상황으로 볼때, 오늘 수로보니게 여인이 주님의 발 앞에 엎드린 모습은 진정한 예배자의 자세를 다시금 확인해준 아름다운 모습이었습니다. 그가 주님께 간청합니다. '내 어린 딸이 더러운 귀신이 들려 고통을 받고있으니 쫓아주십시오' 자식에게 병이 있다면 그 병은 부모 자신의 병보다 더 큰 아픔이지요. '차라리 내가 아팠으면, 차라리 내가 그렇게 됐으면.....'라고 호소할 만큼 부모의 고통은 큰 것입니다. 더구나 귀신 들려 고통을 받고 있는 딸을 바라보는 어머니의 마음은 감당키 어려웠을 것입니다. 하지만 생각해 보면 그는 할례 받은 사람도 아니고, 더구나 유대인도 아닌 이방인으로서 주님 앞에 가까이 가기란 정말 어려운 조건이었지만, 그는 용기를 가지고 주님 앞에 나아와 엎드린줄 믿습니다. 할렐루야 !


성도 여러분, 교회 주변의 많은 분들이 우리를 주목하고 있어요. 사업을 하는 분들, 혹은 주변에 사시는 분들도 그들이 교회에 나오지 않을 뿐, 우리 교회에 대한 소식은 너무나 잘 알고 있어요. 저는 그분들을 잠재적인 성도라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그들이 한마디 한마디 해주는 것이 중요합니다. 새로 이사온 분이 '이 근처에 좋은 교회 없습니까?' 라고 물었을때 '나는 교회는 안다니지만 교회는 평안의교회로 가세요'라고 세탁소에서, 슈퍼에서, 부동산에서, 미장원에서 그렇게 이야기 해준다는 이야기를 들을 때마다 얼마나 감사한 지 몰라요. 심지어는 다른 교회를 나가시는 성도까지도 교회를 나가려면 그곳으로 가라며 소개해준다는 이야기를 듣고는 감사의 말문이 막힙니다.

여러분이 이웃과 자그마한 일 때문에 다투는 일이 있어서는 안됩니다. 당장 싸워서 단돈 10,000원 이득을 볼지는 모르지만, 천하보다 귀한 영혼을 구원할 수 있는 기회를 잃어버리는, 전도의 문을 닫아버리는 일을 해서는 결코 안될 것입니다. 주님께서는 모든 사람과 더불어 화평하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이웃은 곧 내가 전도해야 할 사람들이요, 구원받아야 할 하나님의 백성임을 잊지 않기를 바랍니다.


주님 앞에 용기를 가지고 나온 그 여인에게 주님께서는 좀 의외의 말씀을 하셨습니다. '이렇게 어려운 조건에서 내게 왔느냐?'고 칭찬과 격려를 해도 이 여인에게는 위로가 될까 말까 한데 얼마나 냉정하게 말씀하셨는지 몰라요. '자녀의 떡을 취하여 개들에게 주는 것이 마땅치 않도다' 얼마나 충격적이고 도전적인 말씀인지 몰라요. 아마 웬만한 사람 같으면 이 대목에서 벌떡 일어났을 거예요. '까짓 것 내가 안고치면 안고쳤지, 내가 그런 수모를 당하면서까지......' 자녀라고 하는 말은 이스라엘을 의미하는 것이고, 개는 할례 받지 못한 이방인 전체를 통털어 칭하는 말입니다. '할례 받고 택함 받은 백성도 은혜를 받을까 말까 한데 네가 달라고 그러느냐? 말도 안되는 소리 하지 말아라' 그 얘기예요. 얼마나 자존심이 상했겠습니까?

그런데 이 여인 하는 말을 보세요. 28절에 보면 '주여, 옳습니다' 당신의 백성들에게 복음 전하시고, 치료해 주시고, 은혜를 베푸시는 것만도 시간이 모자라시지요. 저도 인정합니다. 하지만 자녀들이 먹던 상에서 부스러기가 떨어지지 않습니까? 그 부스러기를 개들이 먹지 않습니까? 그 부스러기를 저에게 줄 수 없나요?'

저는 오늘 말씀의 제목을 '부스러기 은혜'라고 정하고 싶었습니다. 부스러기 은혜라도 사모하는 이 여인의 사모하는 마음이 제게 큰 도전이 되었기 때문입니다. 예수 제대로 믿으려면 자존심을 버려야 합니다. 아멘 ? 예수 바로 믿으려면 체면도 좀 잊으셔야 돼요. 지금 수로보니게 여인은 할례도 안받은 이방인이었지만 주님께 엎드려 예배자의 자세를 갖출 뿐 아니라, 겸손한 마음으로 은혜받을 준비까지 되어 있었습니다.

주님께서는 수로보니게 연인에게서 외형적인 용기와 예배자의 자세를 보시고 감동하셨지만, 한가지 더 확인을 원했어요. 바로 이 여인의 마음에 진정한 믿음과 사모함이 있는가를 확인하기를 원했어요. 사람의 마음을 확인할 수 있는 좋은 경우는 이해관계가 걸렸을 때입니다. 천사와 같이 좋다가도 이해관계가 걸리면 악마가 되는 사람이 있어요. '역시 이분은 크리스챤이다' '이 사람은 10년을 믿었지만 개떡 같이 믿었구나' 이런 평가들은 평소 파티 매너를 보고 내리는 것이 아니라 삶의 현장에서 겪어본 후의 평가들입니다.

우리 교회가 94년 6월 건축을 시작하면서 지하를 13m 가까이 파낼 때, 대부분이 돌덩어리였습니다. 여러분, 더위가 시작된 6월에 포크레인이 돌을 깨는 소리를 상상을 해보세요. 건축 현장 바로 옆 교육관 3층 목사관에서 제가 들어도 견디기가 어려웠습니다. 팡팡.....! 한달 내내 굉음을 내며 바위를 깼는데 그것 때문에 이 주변에 사시는 분들이 공사에 방해를 하지 않았어요. 언제 공사가 마치느냐며 두 어깨를 들썩하곤 돌아가시는 그분들이 얼마나 감사했는지요.

몇 해전에 건축을 하면서 곤혹을 치뤘던 어느 목사님이 그래요. 포크레인이 땅을 파고, 레미콘이 드나들다 보니 그 주변의 가게들이 굉장히 불편하지 않겠어요? 그래서 그들이 연합하여 프랭카드를 들고 구호를 외치고 머리띠를 두르고 외치는 말이 '보상하라. 교회는 보상하라' 그러더래요. 건축위원장과 현장 소장이 큰일났다며 목사님을 찾아 나가보니 포크레인 앞에 드러누워서 날 찍고 나가라고 하며 난리가 아니었어요.

그런데 가만히 보니까 기가 막힌 상황이었답니다. 그렇게 머리띠를 두르고 보상하라고 떠드는 사람들 속에 자기 교회 집사들도 섞여있더라는 말입니다. 여러분 상상이 되나요? 교회 가까이 가게를 열게되었다며 할렐루야 하며 좋아하면서 개업예배를 드린 그 사람들이, 공사 때문에 장사가 방해가 된다고 난리를 치고있으니..... 이해관계가 걸려보아야 그의 됨됨이를 알수 있는 거예요.

여러분이 바쁠 때 정말 교회 일에 충성할 수 있나요? 정말 시간을 낼 수 있나요? 정말 내가 이 시간도 모자라지만 거기서 시간을 떼어낼 때가진정한 봉사요, 헌신인 줄 믿습니다. 빵 한조각이 내게는 딱 정량인데 그것을 반을 잘라서 이웃을 줄 때 그것이 구제요, 사회 선교인 줄 믿습니다. 우리 교회가 선교를 그렇게 많이 하는 것인 재정이 남아서가 아니잖아요. 꼭 써야 하지만 선교가 주님의 명령이기에 눈 딱 감고 먼저 그거 하는 거 아니예요. 남는 거 주는 것은 쓰레기 처리 하는 것과 다를바 없지요.

이제 우리의 모든 영역에서 정말 재정리가 필요한 때입니다. 꽃꽂이 봉사하는 것도 시간 남은 사람들이 하는 것이 아닙니다. 제가 꽃예술선교회 회장님에게 부탁하는 말은 ' 꽃꽂이 당번 정할 때 바쁜 사람들도 빼놓지 말고 순서에 넣어달라' 는 것입니다. 바쁘다고 안하면 그게 무슨 봉사요 헌신입니까? 정말 우리가 하나님 앞에 헌신이 무엇인가를 알아야 합니다.

'주님, 내 딸이 귀신 들렸는데 고치기 원합니다' 엎드려 절합니다. 외형적으로는 합격점이예요. 그런데 주님은 그 여인을 처음 보았고 그의 마음을 알기를 원했어요. 그래서 그의 자존심을 긁었어요. 그랬더니 그 여인이 자존심에 상처를 입고 반발하며 튀어나간 것이 아니라 오히려 주님을 무안하게 만들었어요. '부스러기면 어떤가요. 그것도 좋아요. 난 주님을 만난 것 자체가 좋아요. 난 주님 앞에 있는 것 자체가 행복합니다. 주님이 주시는 은혜가 부스러기라도 내게는 과분한 것이지요.

성도 여러분! 여러분이 주님이시라면 어떻게 하셨겠어요? 주님은 이 여인의 고백에 감동 또 감동했습니다. 마태복음 15장은 말합니다. '내가 이스라엘에서 이만한 믿음을 만나본 적이 없다. 믿음이 있다고, 오래 믿었다고 한 사람들도 이만한 대목에서는 삐치고, 시험들고, 별일이 다 생기는데 이 여인, 이 믿음 내가 처음 보았다. 돌아가라. 평안히 돌아가라. 너의 딸이 치료가 되었으니 돌아가라' 여인이 집에 돌아와 본즉 귀신이 나가고 그의 딸이 평온한 은혜를 입은 줄 믿습니다.

성도 여러분, 믿음은 이와 같은 것입니다. 여러분의 자존심과 여러분의 체면이 믿음에 걸림돌이 된다면 아직 나의 믿음은 그냥 교회에 왔다 갔다 출석만 하는 단계에 와있는 것이지요. 교인은 대한민국에 1,200만이러고 합니다만, 정말로 스로보니게 여인의 믿음을 가진 사람은 몇 퍼센트나 될지 궁금합니다. 아무쪼록 여러분 자신이 스로보니게 여인의 믿음을 가지시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축구 얘기를 좀 더하면 좋겠어요. 우리 대표 선수가 23명인데 그중에 7명이 크리스챤 청년들입니다. 이영표, 최태욱, 안정환, 송종국, 최태영, 차두리, 이천수까지.. 이 친구들은 주로 21세에서 많아야 25세입니다. 최근 스코틀랜드 전에서 첫 골을 넣고 감격해 기도하는 골 세러머니를 했던 이천수 선수, 얼마나 방송에 신문에 멋있게 나왔는지 몰라요.

그런데 사실 이천수는 예수 믿은 지가 몇 달이 되지 않아요. 이천수 선수는 사실 올 초에 미국에서 열린 북중미 골드컵 대회에서도 무릎 부상 때문에 벤취에서 그냥 구경만 했습니다. 이 친구가 굉장히 도전을 받은 것이 하나 있어요. 차두리, 혹은 최태욱, 혹은 이영표 이런 선수들이 승승장구하는 것을 보면서 마음에 도전을 받았어요. 특히 이영표 선수가 그들보다 위인데 '저 형이 저렇게 잘하는 이유가 뭘까?' 어쩌다가 연습이 없는 날 휴가를 주면 대부분의 선수들은 쇼핑을 가는데 이영표 선수나 이 최태욱 선수는 쉬는 날이면 외국에 나가도 근처에 교회를 갑니다.

교회 가서 기도하고 교회 주변에서 쉬고 그럽니다. 그날도 이천수 선수가 어디로 갈까 하다가 이 이영표 선수를 따라서 교회를 갔어요. 그때는 단순히 구경을 간 것입니다. 쇼핑을 가지 않고, 자기가 마음에 두었던 도전이 되었던 선수들의 마음 속에 '왜 저 선수들은 저렇게 건강하고 저렇게 잘할 수 있을까? 교회 다니는 형들이 공도 잘 차더라' 이런 도전이 된 거예요. 교회를 따라 나온 그를 기쁘게 여겨서 그날부터 이영표 선수는 휴대 전화로 계속 문자 메시지를 보냈어요. 전화하는 것과 문자 메시지는 느낌이 또 달라요.

이영표 선수가 문자 메시지로 계속 이천수에게 보냅니다. 그런데 거기에 감동이 되었어요. 그래서 이제 돌아와서 교회에 다니는 형들과 같이 교회를 다녔습니다. 그리고 스코틀랜드는 얼마 직전이잖아요. 예수 믿은 지 몇 달도 안되었는데, 여러분, 골을 넣고 나서 그 국제적인 대회에서 골 세러머니 너무 멋있잖아요. 이번에 세네갈 선수들은 웃옷을 벗고 둘러서서 함께 하는 것, 정말 멋있어요. 그런데 그런 개인적인 감격과 감정 표출하고 싶은 유혹을 떨치고 손을 모아서 기도하겠다고 하는 것은 하루 아침에 되는 것은 아닙니다.

우리 호산나 선수들도 골을 넣으면 다같이 기도하자고 부탁을 하고 이젠 곧잘 합니다 만은 가끔씩 보면 아직도 기도하는 것이 불편해 보이고 어색한 분도 있어요. 하지만 영적인 삶은 훈련이 필요하기에 시간을 두고 함께 성숙한 모습으로 나아가길 기다리는 것입니다. 11명 선수가 함께 기도해 주고, 함께 기뻐해 준다면 얼마나 아름다운 모습입니까? 선수들이 기도하고 있는 장면을 상상해 보시기 바랍니다......

이번 개막식을 60억이 보았다는데 한달 남짓한 월드컵 기간 동안 600억명이 이번 월드컵을 시청할 예정이라고 합니다. 제가 우리 홈페이지 담임목사 칼럼란에 '이제는 16강입니다'라는 제목으로 칼럼을 올렸습니다. 왜 16강이 가야하는지 여러분 좀 보시면 좋겠습니다.

우리나라가 16강, 혹은 8강에 올라가면 여러분에게 어떤 일이 일어나나요? 사실 여러분과는 아무 상관없어요. 그런데 왜 난리입니까? 우리 믿음의 사람은 왜 16강을 가야 하는지, 왜 8강을 가야 하는지 분명히 이유가 있어야 됩니다. 대답이 잘 안나오면 홈페이지 컬럼을 좀 읽어봐요. '아, 이래서 우리가 16강을 가야 하고, 이래서 우리가 8강을 가야 되겠구나'

주님이 말씀합니다. '너 가는 길을 왜 가느냐고 묻거든 확실한 증거를 알려주어라' 대답할 것이 있어야지요. 그냥 분위기에 뜨지 마세요. 지금 뭐라고 까지 분위기가 뜬 줄 아세요? '히딩크를 귀화시켜서 대통령 후보로 삼자' 지금 대한민국이 온통 들끓고 있구요, 대통령 후보, 도의원 후보들 입에 히딩크 얘기 안하는 사람 없어요. 웬난리입니까? 16강 올라갔나요? 내일 모레 있는 일인데... 몇 달 전만 해도 계속 5:0으로 지니까 언론은 '히딩크의 이름을 5:0으로 갈자' 고 했었습니다. 그 언론이 이제는 몇 달만에 히딩크를 대통령 후보로 삼자고 합니다. 이걸 소위 냄비의식이라고 그러지요. 만약 폴란드 전에서 우리가 져서 16강에서 떨어진다면 히딩크를 아마 암살하겠다고 하는 사람이 나타날 거예요. 괜히 들뜨면 안되지요. 왜 우리가 그렇게 해야 하는지, 왜 우리가 이겨야 하는지 이유가 있어야 됩니다.

저는 기대합니다. 월드컵 경기장에서 수십억이 바라보는 그 경기장에서 믿음의 형제가 그 하고 싶은 개인적인 감정의 골 세러머니를 생각하고 두 손 모아 하나님 앞에 자신의 이 귀한 기회 주심을 송축하고 찬양하는 그 모습이 전 세계 방송과 언론에 나갈 때 목사가 수십번 수백번 부흥회 한 것 보다 훨씬 은혜가 되고 영향력이 있는 줄 믿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믿음의 사람들이 기도의 골 세러머니 하는 것을 보고 싶은 거예요. 그것이 부흥회요, 그것이 전도예요. 거기에는 중동 사람들도, 예수 믿는 사람을 죽인다는 이슬람도, 공산주의자도 다 보고 있어요. 그들 앞에 하나님을 송축하는 장면을 보고 싶은 거예요. 이천수가 골 세러머니를 하는 것을 보고 싶고, 최태욱, 차두리가 기도하는 모습을 우리는 보고 싶은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가 16강을 가야 하고, 그래서 우리가 8강을 가야 합니다.

대표팀 관계자가 이렇게 말합니다. '그동안 많은 스타급 선수들이 술과 담배와 여자 등의 유혹에 이기지 못해 결국 대표팀에서 탈락했는데 신앙을 가진 선수들은 절제된 사생활 덕분에 꾸준히 기량을 발휘하면서 대회가 가까워질수록 부각되고 있다' 저는 이 관계자의 평가가 참 마음에 들어요. 왜요? 내가 아무리 좋다고 그래봐야 뭐해요. 주관적인 것은 영향력이 작은 것입니다.

여러분이 우리 평안의교회 좋다고 하는 것은 50% 의 영향력 밖에 안돼요. 다른 교인이나 이웃들이 평안의교회를 좋다고 할때 그것은 100%의 영향력이 있어요. 축구 관계자가 믿음의 형제들을 지켜볼 것 아닙니까? 그러면서 그들이 결론 내리기를 저들이 믿음을 가지고 신앙을 가지면서 점점 더 좋아지고 있다는 간증은 바로 많은 사람들이 하나님을 모르는 사람들이 하나님의 사람들을 바라보면서 '너는 하나님께 복받은 자라' 이삭을 향해서 아비멜렉이 말하지 않습니까? '너는 하나님께 복받은 자로다' 이런 간증을 들어야 하는 거예요.

월드컵이 중요하고, 16강, 8강이 중요한 이유는 여기에 있어요. '하나님, 이번 월드컵을 통해서 전 세계에 복음을 수출하는 최고의 기회가 되게 하옵소서' 이렇게 기도하셔야 합니다. '하나님, 우리 믿음의 사람들이 승리할 때마다 전 세계 수십억 인구들에게 주님을 송축하는 장면들이 그들을 통해서 주님을 소개하게 하옵소서'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오늘 우리는 한 여인을 통해서 놀라운 그의 헌신과 인내의 모습을 바라봅니다. 그렇지요. 좋은 환경, 좋은 여건은 아니었습니다. 불리한 조건이었습니다. 하지만 그에게는 한가지 분명한 것 일차적으로는 자신의 자녀를 사랑하는 마음이 있었어요. 우리 부모님들은 자녀들이 믿음 생활을 제대로 못하더라도 그 자녀를 위해서 불타는 애정이 있어야 합니다. '주님, 우리 아들, 딸들을 축복하옵소서' 축복은 부모의 신앙으로도 자녀들에게 전달되기 때문입니다. 나중에 복받은 그가 내가 이 복을 받았는가를 깨닫게 되는 날, 우리 아버지, 어머니의 기도의 열매라고 깨닫는 그 날 그도 주님의 백성이 될 줄로 믿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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