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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맺힌 것은 풀어야 합니다 (막 07:31-3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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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민족의 정서를 대표하는 말이 있다면 '한'이라는 단어입니다. 억압과 설움에서 몸부림치던 민족의 한의 역사들이 아직도 우리의 삶을 짓누를 때가 있습니다. 반도 국가로서 대륙에 진출해 보고자 하는 꿈이 번번이 좌절되면서 느끼는 한도 있고, 일본의 오랜 억압으로 짓눌렸던 설움에 대한 한도 있습니다.

남과 북의 전쟁으로 인하여 받은 상처는 아직도 1,000만이 넘는 이산 가족들에게 재회를 향한 한으로 남아 있습니다. 이벤트성 행사가 되어 안타까움을 더해주는 남북 이산 가족들의 만남은 이제 좀더 상호주의에 입각한 편안한 만남, 지속적인 만남이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그런가 하면 지난 1954년 스위스 월드컵 대회 때부터 시작된 대회에서의 첫승의 기대는 반세기를 넘기고서야 겨우 한을 푼듯 싶습니다. 내일에는 대구에서 미국과의 경기가 있는데, 뉴스를 보니 전국의 학교들이 휴교나 오전수업을 할 예정이며, 직장들도 대부분 오전 근무만 할 정도로 국민적 관심은 대단합니다. 이쯤되면 월드컵 경기는 스포츠 차원을 넘어 민족적 행사요 염원이 되는 셈입니다.

지난 목요일에 있었던 부천남지방 감리사기 체육대회에서 우리교회가 종합우승을 하였습니다. 줄넘기와 릴레이는 우승을 하였고, 배구는 준우승을, 피구와 족구는 3위를 하였습니다. 기대하였던 축구팀은 8강전에서 사실상의 결승전을 치루어 승부차기까지 갔지만 내년을 기약해야 했습니다.

여러분들의 수고와 희생을 감사드리며 선수들과 온 종일 뙤약볕에서 응원하신 성도들께도 감사를 드립니다. 저녁에 소변을 보니까 샛노란 소변이 나올 정도로 선수는 물론이고 응원하신 분들의 노고도 결코 간과할 수 없음을 우리는 알고 있습니다. 맛있는 육계장 점심과 삼겹살에 상추쌈 저녁 식사를 준비해 주신 여선교회에도 감사를 드리고 싶습니다. 또한 보이지 않는 부분, 예를 들면, 작은 아이스박스를 준비하여 흰수건을 얼음에 담가 두었다가 경기가 마치면 어김없이 다가와 건네주는 사랑의 손길은 차라리 감동이었습니다. 할렐루야 !

대회를 치루면서 '이건 아닌데.....' 하는 안타까운 모습들도 있었습니다. 그래서 어떤이들은 체육대회를 아예 하자 말자고 하는 분도 있고, 축구가 과격하니까 축구만 없애거나 따로 개최하자고 하는 분 등 여러 가지 건의들이 있었습니다. 내년에는 우리 교회가 청장년연합회 회장 차례이어서 더 많은 관심과 기도가 요청됩니다만, 제 생각에는 이와같은 일들이 ' 마치 장마철의 홍수'와 같다고 생각됩니다. 홍수가 나면 그것으로 인해 피해를 보는 분도 있지만, 홍수를 통하여 지구상의 무질서한 생태계가 새롭게 질서를 잡아가는 또 하나의 기적을 맛보는 것입니다.

예를 들어, 한강의 하상을 준설하려고 한다면 천문학적인 비용과 상상할 수 없는 시일이 필요하겠지만 홍수는 이 문제를 자연스럽게 해결해 주고 있습니다. 그런 의미에서 체육대회라는 삶의 자리를 통하여 성도 개개인의 인격의 성숙함과 미숙함이 드러나고, 교회의 건강함과 병듦이 자연스럽게 드러나는 것입니다. 건강한 교회, 성숙한 성도들에게는 기쁨의 시간이 되고, 건강하지 못한 교회, 미숙한 성도들에게는 그런 행사를 통하여 부족함을 돌아보고 다듬어지는 시간이 되어야 할것입니다. 저는 그런 면에서 문제가 있다고 피해가기 보다는, 오히려 더 적극적으로 문제들을 해결하려고 하는 의지를 갖는 것이 좋겠다는 생각을 해보았습니다.


주님께서 이방지역인 두로와 시돈, 데가볼리와 갈릴리 지역을 지나 가시다가 사람들이 '귀먹고 어눌한 자'를 데리고 옴으로서 오늘 말씀은 시작이 되고 있습니다. 많은 사람들은 주님께서 그를 고치시는가를 구경하기 원했습니다. 단순히 그들은 군중이었고 관중이었습니다. '잘하는가 보자'하는 것이지요. 지금 이들의 관심은 '예수께서 과연 고칠 수 있는가?'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주님께서는 치유의 역사에 구경꾼은 허락하지 않았습니다. 33절에 보면, 예수께서 그 사람을 따로 데리고 가셨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구경꾼들이 보는 앞에서 안수하시고 치료하신 것이 아니라, 구별된 장소에서 그를 치료하기 원하셨습니다. 오늘 우리의 예배가 그것입니다. 예배에는 구경꾼을 허용하지 않습니다. 그러므로 오늘 이 자리에는 단 한 사람도 구경꾼도 없는 진정한 예배자들의 예배가 되어야 할 줄로 믿습니다.

보통 때 같으면 그냥 말씀만 하셨어도 충분한 것을, 오늘 이 사람에게는 아주 특별한 관심을 보여주셨습니다. 손가락을 그의 양 귀에 넣고, 침을 뱉아 그의 혀에 손을 대어주셨습니다. 바로 앞장에서 보았듯이, 수로보니게 여인의 딸이 더러운 귀신이 들렸음에도 불구하고 주님께서는 '평안히 가라' 는 말씀 한 마디로 그 가정의 견디기 어려운 상처와 고통을 치유해 주시고 사탄의 억압에서 해방시켜 주신 능력의 주님이신줄 믿습니다.

하지만 오늘은 주님께서 그의 귀와 혀를 만져주시는 아주 특별한 장면들이 소개되어 있습니다. 아마도 주님께서 생각하실 때 그 사람에게는 좀 더 따스한 애정을 표현하는 것이 필요하다고 판단하신 듯 합니다. 주님께서는 하늘을 우러러 기도하시고 그에게 말씀하시기를 '에바다'라고 하셨습니다.

우리 교회에도 '에바다 중창단'이 있습니다 만, 아마 대한민국에 '에바다'라는 이름을 가진 중창단이나 성가대 수를 헤아린다면 상상하기 어려울 것입니다. 그 말은 '에바다'라고 하는 말의 의미가 우리 성도들에게 굉장히 어필하고 있다는 말입니다. 우리가 알다시피 '에바다'는 '열리다'라는 뜻을 가지고 있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들에게도 삶 속에 맺혀있는 부분들이 '에바다'라고 선언하시는 주님의 능력을 힘입어 맺힌 곳마다 풀어지고, 상처난 부분마다 온전히 치유되는 역사가 일어나기를 주의 이름으로 간절히 축원합니다.


'에바다'란 '귀가 열린다'라는 의미일 뿐만 아니라, 마음에 맺혀있는 것이 풀린다는 의미도 가지고 있습니다. '데스모스'라고 하는 헬라어는 사탄의 세력에 억압되어 있는 상태를 말하는데, 이 사람의 심령을 짖누르고 있는 한은 다름 아닌 사탄의 세력에 의한 것임을 잘 말해 주고 있습니다. 그로 인하여 그에게는 평안이 없었고, 기쁨이 없었으며, 감사의 삶은 있을 수가 없었습니다. 주님은 불안과 고통속에 짓눌려 있는 '데스모스'의 인생에게 참된 해방을 선포 하신 줄로 믿습니다.

우리가 음식을 먹어도 체하면 다 토해내지 않고서는 평안함을 얻을 수 없는것 처럼, 심령속에 맺혀 있는 이 '데스모스' 때문에 삶에 생기가 없고, 평안이 없는 사람들은 신앙에 있어서도 성장하지 못하는 결과를 가질 수 밖에 없습니다. 그러한 이들의 삶 속에 주님의 '에바다'의 선언은 사막에서 샘을 만난것과 같은 생명의 부활이요, 축복인줄 믿습니다. 사탄의 권세가 더 이상 우리를 지배하지 못하고 오히려 주님의 말씀의 권능이 우리를 사로잡는 새로운 삶의 세계로 인도하게 된 것입니다.

'에바다'란 문이 열림을 의미합니다. 문이 열려야 출입이 자유로워지는 것입니다. 빌라델피아 교회에 주님께서 말씀하시기를 '내가 문을 열어놓았다'고 하셨습니다. 바울과 실라가 빌립보에서 전도하다가 옥중에 갇혔을 때 기도와 찬송을 쉬지않았던 그들을 위하여 하나님께서는 옥 문을 열어주신 줄 믿습니다. '에바다'의 역사가 일어난 것입니다.

'에바다'란 형통함을 의미합니다. 병든 자에게 형통함이란 강건함입니다. 사업을 하는 이에게 형통함이란 사업의 번창함입니다. 사회생활을 하는 이에게 형통함이란 모든 삶의 자리에서 머리가 되는 것입니다. 학업을 하는 이에게 형통함이란 학문의 길을 열어주시는 것입니다. 성도 여러분, 이처럼 모두가 인생의 길목에서 목마른 사슴이 시냇물을 찾듯이 형통함을 사모하고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어떤 이들에게 형통함을 주신다고 하였습니까?
신명기 19장 9절은 하나님의 언약의 말씀을 지키는 자에게 형통함을 주신다고 약속한 줄 믿습니다. 영국의 빅토리아 여왕은 이 말씀을 붙잡았습니다. '내가 이 말씀을 의지하여 이 나라를 통치하리라' 며 하나님의 말씀을 의지한 왕이 되어 영국 최고의 빅토리아 시대를 열었습니다. 시편 122편은 '예루살렘을 사랑하는 자는 형통하리라'고 말씀하셨습니다. 하나님의 성전, 하나님의 백성들의 공동체를 소중하게 여기는 이들에게 형통함의 은혜가 임함을 약속하고 있는 것입니다.

중환자실에 가면 산소호흡기를 끼고 있는 환자들이 대부분입니다. 그들에게 있어서 산소호흡기는 곧 생명줄이나 다름없습니다. 그렇다면 우리 성도들에게 있어서 생명줄은 무엇입니까? 그것은 곧 '에바다'라고 선포하시는 주님의 말씀이 곧 우리의 형통함의 근거가 되어야 할 줄 믿습니다.

뿐만 아니라 '에바다'는 생명입니다. 죽은 나사로에게 있어서 주님의 음성은 그를 죽음의 문에서 걸어나와 생명의 길로 걸어가게 하셨습니다. 무덤의 문을 여셨다는 것입니다. 그 말은 그가 새로운 생명을 얻었다고 하는 것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에바다'란 이렇게 우리의 삶의 다양한 부분에서 역사합니다. 형통함으로, 강건함으로, 문을 열어주심으로 우리의 삶을 새롭게 하시는 하나님의 축복인 줄로 믿습니다.

하나님은 사랑이십니다. 이 사랑과 은혜의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모든 사람과 화평하기를 원하시지만, 사탄 마귀는 그것을 가로막습니다. 그러므로 우리에게 있어서 맺혀 있는 부분의 매듭을 마지막 쥐고 있는 세력은 바로 사탄 마귀라고 하는 것입니다. 그 사탄의 억압에서 우리가 해방되지 않으면 우리의 삶에 맺혀 있는 것들이 풀려질 수 없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오늘 우리는 귀먹고 벙어리되었던 사람이 예수 그리스도를 만나 '에바다'를 선언받았던 것처럼, 여러분들의 삶에서도 능력의 주님을 붙잡고 모두가 '에바다' 의 형통함의 삶이 누리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간절히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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