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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너희는 나를 누구라 하느냐? (막 08:27-3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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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주님께서는 제자들에게 '사람들이 나를 누구라 하느냐?' 고 세상 돌아가는 여론을 물어보셨습니다. 그동안 제자들은 주님과 함께 거하면서 많은 사람들을 만날 수 있었고, 그들 속의 이야기를 진솔하게 주님께 전할 수 있었습니다. 대략 3가지로 요약된 여론은 모두 특정인과 비유된 것이었습니다.

'사람들이 주님을 세례 요한이라고 생각합니다' 대단히 긍정적인 평가입니다. 세례 요한은 예수님 당시에 최고의 존경받는 인물이었고, 왕이나 당시의 가장 영향력을 가졌던 정치 사회 지도자들도 그를 두려워할 만큼 그는 그 시대 최고의 인격자이었고 신앙의 지도자였습니다. 헤롯왕조차도 그가 하는 말은 두려워하고 어려워하였다고 그렇게 성경은 말씀하고 있습니다. 예수님을 가리켜서 세례 요한, 죽은 세례 요한이라고 하는 말은 그가 그 당시에 가장 영향력이 있었던 사람이었던 것처럼 예수님을 가리켜서 사람들이 '당신은 이 시대에 가장 영향력 있는 존경받는 사람입니다'라는 평가, 그렇게 나쁜 평가가 아니지요. 좋은 평가를 하고 있었습니다.

'사람들이 예수님을 엘리야라고 말합니다' 엘리야는 구약 시대에 하나님의 종으로서 기적과 능력의 상징적인 하나님의 사람이었습니다. 예수님을 가리켜서 시대의 기적과 능력의 사람이라고 말한다면 그것도 아주 괜찮은 평가였습니다.

마지막으로 제자들은 예수님을 사람들이 선지자 중의 하나라고 말한다고 전해드렸습니다. 아마도 사람들이 생각하고 있는, 그 여론이 가지고 있는 예수님에 대한 이미지 중에 가장 근접한 이미지라고 생각합니다. 선지자, 당시에 기름 부음을 받아야 할 세 지도자의 하나였습니다. 왕과 제사장, 그리고 선지자는 기름 부음을 받는 하나님이 선택하고 인정하는 지도자였습니다. '선지자 중의 하나입니다. 모든 삶을 인도하고 지도하는 목자입니다'라고 하는 평가는 가장 주님의 이미지를 잘 표현해 주는 것이지요.

그런 여론을 들으신 주님께서 가타부타하지 않으시고 제자들에게 말씀하시기를 '그러면 너희들은 나를 누구라 하느냐?' 그렇게 물으셨습니다. 이 질문에서 가장 중요한 부분을 우리가 악센트를 준다면 '너희는'이라는 것입니다. 오늘 여러분들께서 예수님과 제자들 관계들에 대한 대화를 3자의 입장에서 구경하시는 입장을 취하신다면 오늘 이 자리는 별 의미가 없을 것입니다. 이제부터 여러분들은 주님께서 여러분에게 물으시는 질문을 듣고 여러분들은 분명히 대답하셔야 합니다. 주님께서 여러분에게 물으십니다. '너희들은 나를 누구라 하느냐?' 이제부터 말씀을 들으시면서 여러분 자신의 부모와 형제와 다른 누구의 고백이 아니라 바로 여러분 자신의 고백을 드리는 시간이 되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베드로가 대답합니다. '주는 그리스도이십니다' 마태복음 16장에 보면 '주는 그리스도시요,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이십니다' 조금 더 설명이 자세하게 되어져 있습니다. 4복음서 가운데 가장 기본적인 원복음서를 우리는 마가복음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마가복음은 군더더기가 없이 간략하고 간소한, 마태복음은 유대인들을 위해서 좀 더 설명과 내용을 자세하게 해 주어서 우리가 읽고 이해하기에는 마태복음이 도움이 됩니다. 주님께서 그 고백을 들으시고 나서 대단히 기뻐하셨습니다. 마태복음 16장에 보면 '바요나 시몬아, 이것을 알게 한 이는 사람이 아니다. 내가 육적으로 이것을 알게 한 것이 아니다. 이것은 정말 하나님의 은혜가 아닐 수 없다'

주님께서는 그 베드로의 고백을 기뻐하셨고, 칭찬하셨고, 인정하셔서 '내가 그 고백 위에, 그 신앙의 고백 위에 나의 교회를 세우겠다'고 약속하셨습니다. 처음으로 주님께서 교회를 언급하셨습니다. 천국문을 여는 열쇠를 주시겠다고 하셨습니다. 얼마나 놀라운 일입니까? 베드로와 함께 했던 제자들은 너무나도 기쁘고 감사한 일이었습니다. 감격했을 것입니다.

그리고 나서 주님께서는 31-32절에서 비로소 공개적으로 주님의 사역의 내용을 주님이 가셔야 할 길을 말씀하셨습니다. 그전에는 제자들에게만 하셨던 것을 이제는 드러내놓고 말씀하셨다고 했습니다. 3가지를 말씀하셨는데 첫째는 '네가 고난을 받을 거다. 견디기 어려운 고난을 받을 거다' 고난 중의 고난은 물질적인 고난이겠지요. 경제적인 고난은 참 클 것입니다. '눈물의 빵을 먹어보지 않고는 인생을 논하지 말라'라고 말할 정도로 경제적인 고난은 큰 것입니다. 여러분들이 경제적으로 고난을 겪고 그 경제적인 이유 때문에 내일을 염려하고 근심한 경험을 가지고 있다면 소중한 경험입니다. 잊어버리고 싶은 추억이 아니라 꼭 간직해야 할 소중한 것입니다. 오죽하면 선진들이 젊어서는 고생을 사서도 한다고 했겠습니까?

저도 무척 가난에 관한한 많은 경험들, 체험들을 하고 있어요. 그리고 지금 그것을 매우 소중하게 여기고 있고, 목회하면서 가난한 분들이 교회에 오시면 굉장히 반갑고 그리고 그들을 고난에 대한 삶들을 나누고 위로하고 세우는 일에 굉장히 중요한 사역에 밑받침이 됩니다. 제가 만약 가난을 경험해 보지 못했다면 아마 제대로 목회할 수 없으실 거예요. 그런 면에서 저는 어린 시절에 가난함을 정말 찢어지게 가난함을 감사하게 추억으로 가지고 있습니다.


두 번째 주님께서 말씀하신 것은 많은 세상 사람들, 특별히 세상적으로 지도자라고 하는 영향력 있는 그들에 의해서 오히려 주님이 보호를 받고 도움을 받아야 할 그러나 실제는 정 반대인 장로들과 대제사장들과 서기관들에게 죽임을 당할 거라고 하는 충격적인 말씀을 하셨습니다. 이 성경의 신약에서 주님에게 어려움을 주었던 그룹들 중의 하나가 장로들인데 여러분들은 오늘날 우리 교회의 장로님들과 동일시하면 안됩니다. 좀 다른 그런 그룹입니다. 연장자의 지도층의 그룹이라고 생각하면 좋겠습니다. 우리 장로님들은 이런 성경을 읽으시면 굉장히 마음이 불편하실 거예요. 하지만 오늘날의 장로님들과는 조금 의미가 다릅니다.

세 번째 주님께서는 '그러나 하나님께서 다시 사흘만에 죽음 가운데서 살아나게 하실 거다'라는 놀라운 부활을 예고하셨습니다. 그런데 좀 성격이 급한 베드로가 이 세 가지 내용을 다 듣고 언제 우리말은 마지막이 중요하지 않습니까? 이스라엘도 그래요. 그런데 그 마지막 다시 부활하시겠다고 하는 그것까지도 깊이 새겨야 하는데 첫째와 두 번째 이야기를 듣고 욱하는 마음이 생겼어요. '주님, 주님을 붙잡고 간하기를 절대로 그렇게 할 수 없습니다. 고난을 받다니요? 십자가를 지고 죽으시다니요? 내가 살아있는 한 그런 일은 있을 수 없습니다' 고마운 일입니다. 그런 말을 할 수 있다고 하는 것도 얼마나 감사한 얘기인가요?

제가 어려움에 직면해 있을 때 여러분들이 나서서 그런 어려움을 여러분이 막아주시거나 대신 지시겠다고 말씀해 주는 분이 있다면 저는 목회자로서 대단한 고마움을 느낄 것입니다. 두고 봐야겠지요. 앞으로 많은 어려움이 올지 몰라요.

예를 들면 전쟁이 일어나서 우리가 북한에 점령을 당하고 이 역곡 지역에 있는 수많은 크리스챤들이 이 교회에 끌려와서 '누구든지 예수 그리스도를 인정하는 사람은 저 성가대 석으로 가라. 그렇지 않은 사람은 이쪽으로 와라' 그러면 그때에 여러분의 신앙이 도전을 받을 것입니다. 총을 들고서 지금 이쪽으로 가는 사람은 죽을 지 모르는 그 위급한 상황이라면 과연 몇 %가 목숨을 무릅쓰고 성가대 석으로 갈 것인가? 하는 것이지요. 언제나 신앙은 위기 속에서 빛을 발하게 되어 있습니다. 평상시의 신앙은 사실 신앙이라고 할 수 없어요. 모두가 파티 매너는 좋기 마련입니다. 돌, 회갑, 칠순, 팔순 잔치의 주인공은 도둑놈이라도 매너가 좋기 마련이예요. 좋은 시절에는 우리의 신앙을 테스트할 수 없어요. 위기가 와야 진정으로 산 믿음, 진정한 믿음은 빛을 발하는 줄 믿습니다.

주님께서 이 세 가지 말씀을 하셨을 때 앞의 두 가지 부분만 베드로에게는 마음에 들어왔어요. '주님이 고난을 받다니... 주님이 더구나 세상에 그 가장 사람들이 존경하는 그들에 의해서 죽음을 당하시다니... 있을 수 없습니다' 그는 단정지어 버렸어요. '내가 있는 한 그런 일은 생기지 않을 것입니다' 좀 주님을 보호하고 그리고 주님을 감싸는 그런 부분에서는 귀한 일이었지만 조금 앞서 멀리 나간 것 같습니다. 이 부분에서 우리 주님께서 아주 단호하게 말씀하셨습니다. 33절에 보면 '예수께서 제자들을 보시며 베드로를 꾸짖어 가라사대 사탄아, 내 뒤로 물러가라' 놀라운 말씀이지요. 어떻게 바로 앞에서 천국 열쇠를 주겠다고 하신 그 베드로에게 지금 주님은 사탄이라고 말씀할 수 있습니까?

여러분, 오늘 이 말씀을 여러분 자신에게 적용해서 이렇게 여러분 자신에게 도전되면 좋겠습니다. '네가 주님에게 있어서 가장 인정받는 믿음의 사람일 수도 있고, 반면에 주님의 사역에 가장 걸림돌이 되는 사탄이 될 수도 있다' 여러분 자신이 사탄이 될 수 있다고 생각해 보십시오. 얼마든지 가능한 일입니다. 천사를 그렸던 화가가 이제는 사탄을 그려야 되겠다고 사탄의 형상을 한 사람을 수년을 걸쳐 찾아다니다가 마침내 거리에서 바로 저런 얼굴이면, 저런 이미지면 사탄의 이미지가 근접하겠다고 생각해서 그를 만나서 그리다 보니까 전에 천사의 모델이었다고 하는 아주 충격적인 사실을 여러분 기억하시지요.

한 사람의 모습에서 천사와 사탄의 모습을 볼 수 있는 거예요. 얼마나 두려운 일입니까? 사탄과 천사는 따로 있는 것이 아니라 우리의 속에서 사탄이 될 수 있고 천사도 될 수 있는 거예요. 여러분들은 오늘 돌아가셔서 얼굴을 보시면서 여러분의 이미지가 어느 쪽에 가까운가를 한번 보시기 바랍니다.

사람의 생김새는 그렇게 중요하지 않다고 생각합니다. 요즘은 성형수술이 남자들도 유행이라고 그래요. 여자와 닮은, 여자의 이미지를 가진 남자들이 인기라고 그래요. 사회가 좀 이상하게 가는 것 같지요. 옛날에는 남자다운 남자를 원했는데 요즘은 여자다운 남자가 인기라는 거예요. 그래서 남자도 턱을 깎고 여자스럽게 만들어 가는 그런 시대인데 그것은 좀 정상의 부분은 아니겠지요.

자, 하나님께서 남자와 여자를 지으실 때 분명히 구별하신 이유, 그렇지 않다면 굳이 남자 여자를 구별해 지을 이유가 없을 것입니다. 여자는 남자스러워서 난폭해지고 말이나 행동이 뒤에서 보면 전혀 여자 같지 않은 그런 사회, 또 남자들은 말투나 행동이 뒤에서 보면 남자 같지 않은 이런 헷갈리는 시대에 우리가 살고 있지요. 그런 시대 속에서도 우리는 분명한 기준을 가져야 합니다.

지금 주님께서 말씀하시는 것 중에 아주 냉정한, 주님은 사실 냉정한 분이 아닌데 때로는 눈물을 흘리시면서 우리의 삶을 위로하시고, 염려하시고, 슬퍼하신 주님께서 때로는 이렇게 냉정하게 말씀하시는 주님의 모습을 볼 수 있습니다. 왜 그랬을까? 저는 아주 중요하고 필요한 부분이라고 믿습니다.

주님이 말씀하시기를 33절 후반에 보면 '네가 하나님의 일을 생각하지 아니하고 도리어 사람의 일을 생각하는도다'라고 말씀하셨어요. 이 말씀을 좀 더 우리가 이 말씀을 이해하기 쉽게 구별해 본다면 '네가 하나님의 의도보다는 사람의 의도에 치우쳐있구나. 네 마음이 사람 중심으로 기울어 있구나'라는 말씀이예요.

우리는 마태복음 6장에서 주님이 말씀하신 삶의 우선 순위를 생각합니다. '너희는 먼저 그 나라와 그 의를 구하라. 그리하면 이 모든 것을 너희에게 더하시리라' 그 말씀의 핵심은 먼저라고 하는 우선 순위에 있습니다. 하나님의 의와 하나님의 나라를 먼저 구하는 것이 중요하다는 것이지요. 우리의 육신의 일이 소홀해야 되어야 된다고 하는 것이 아닙니다.

보통 우리가 '하나님을 사랑하십시오' 그러면 그럼 남편은 사랑하는 것은 소홀히 하고, 아내 사랑하는 것은 소홀히 하고, 자식 사랑하는 것은 소홀히 하라는 말입니까? 아니지요. 남편도 중요하고, 아내도 소중하고, 자식도 귀하지요. 사랑해야 합니다. 그리스도 안에 있는 사람들은 누구보다도 자신의 배우자와 자녀와 부모를 소중히 여길 줄 알아야 합니다. 오죽하면 주님께서 '보이는 부모를 사랑하지 아니하면 보이지 않는 하나님을 사랑할 수 없다'라고 말씀하셨어요. 진정한 그리스도인이라면 가장 이 땅에서 부모를 공경하는 사람이어야 하고, 부부의 사이가 좋아야 하고, 자녀와 부모와의 관계가 원만해야 할 줄로 믿습니다.

사랑에 있어서 비교할 수 없는 것이 있어요. 우리가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과 우리가 사람을 사랑하는 것은 그것은 비교될 수 없는 거예요. 종종 그것을 비교하는 억지를 부릴 때가 있지요. '야, 너 예수를 믿을래, 나를 믿을래? 너 예수를 사랑할래, 나를 사랑할래? 둘 중에 하나 택해!' 이렇게 윽박지르는 사람이 있지요. 이것은 비교할 수 없는 것을 비교하겠다고 억지를 부리는 거예요. 하나님에 대한 사랑, 이것은 영적인 거고, 사람에 대한 사랑은 육적인 것입니다. 육적인 것과 영적인 것을 비교하겠다고 하는 이건 참으로 어리석기 짝이 없는 것이지요.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주님께서 오늘 제자들을 보시며 베드로를 꾸짖으신 이유가 무엇입니까? 방금전까지 정말 좋은 신앙고백을 칭찬하셨는데 왜 지금 사탄이라는 표현까지 쓰시면서 주님께서 새롭게 그에게 말씀하고 계십니까? 주님의 관심은 우리의 삶에 있어서 중심이 흔들려서는 안된다는 거예요. 고난이 와도, 우리에게 죽음이라는 견디기 어려운 두려움이 와도 우리의 신앙의 축이 옮겨져서는 안된다는 것을 말씀하는 것입니다.

여러분 어제 축구 경기를 보시고 마지막 터키 선수들과 서로 얼싸안고 하나가 되었어요. 그런 축구 경기를 보신 적이 없지요. 그리고 터어키 국기와 태극기가 함께 나부끼고, 함께 관중들이 응원해 주고, 격려해 주고, 심지어는 터어키의 감독이 태극기를 들고 흔들면서 그렇게 화기애애할 수 없었어요. 10,000여명이 넘는 여단 급의 병력을 6.25 전쟁 때 우리 나라에 보내서 미국 다음으로 많은 군대를 보내주고, 거의 대부분이 우리 나라에서 전사를 한 그런 피의 혈맹이다. 그런 얘기를 많이 합니다 만은 사실 옛날 얘기예요. 1950년대 얘기입니다. 지금 젊은이들에게 그것이 무슨 의미를 줄 수 있어요? 현실이 중요하지요. 그런데 그들과는 그런 깊은 부분에서 형제와 같은 따뜻함을 느낄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저는 그런 장면에서도 놓치지 않고 꼭 보고, 볼 수 밖에 없었던 장면들이 있어요. 이제 월드컵 경기는 우리 경기는 끝났습니다. 환호하고 수십만, 수백만의 관중들이 응원하고 그들을 태워주는 그 장면에서 종료의 휘슬이 불었을 때 믿음의 형제들은 푸른 잔디 위에 무릎을 꿇고 기도하는 것을 잃지 않았습니다. 신앙은 습관입니다. 신앙은 훈련입니다. 하루아침에 되지 않아요. 그래서 우리가 날마다, 그리고 매주마다 하나님의 전에서 말씀을 들어야 하고 우리가 기도해야 하고 우리가 새로워져야 할 이유, '내가 작년에 집회에서 은혜를 세게 받았으니까 한 1년은 약효가 가겠지' 그렇지 않거든요. 어제 은혜가 충만했어도 오늘 신앙의 뜨거움이 변치 않아야 할 이유입니다. 신앙은 하루아침에 되어지지 않아요.

그런 의미에서 우리는 믿음이라고 하는 것을 생각합니다. 그리고 그것이 내 삶에 중심이 있어서 '내가 중심에 주님이 있습니다' 말하지 않아도 내 말과 행동에서 자연스럽게 '아, 저 사람의 중심에는 언제나 예수 그리스도가 있구나'라고 말하고 표현될 수 있는 그러한 삶이 되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중심에 주님이 계신 것이 어색해서가 안돼요. 여러분의 삶 속에 예수께서 함께 계신 것이 불편해서는 안됩니다.

'레오나르도 다빈치' '최후의 만찬'으로 유명한 세계적인 화가입니다. 이탈리아 밀라노라고 하는 북부 도시, 참으로 유명한 도시입니다. 그곳에 한 귀족이 레오나르도 다빈치에게 최후의 만찬을 그려달라고 부탁을 했습니다. 3년여만에 긴 세월동안 고민하고 또 고민하면서 예수 그리스도와 제자들의 최후의 만찬을 스케치했습니다. 그리고 마무리가 된 그 그림을 가지고 먼저 친구에게 보여주었습니다. '내가 이 지역의 유력한 사람에게 예수의 최후의 만찬을 부탁 받았는데 3년여 동안 고민하며 내가 이 스케치를 완성을 했는데 네가 좀 보고 소감을 말해줘라'

친구가 그것을 보고 하는 말이 '야, 예수님의 손에 들려져 있는 그 잔, 너무나 사실적이고 너무나 인상적이 너무 멋있다' 그렇게 칭찬해 주었어요. 그랬더니 레오나르도 다빈치가 친구가 보는 앞에서 그 예수님 손에 있는 그 컵을 지워버렸어요. '너 지금 뭐하고 있는 거냐?' '이 그림의 중심은 예수 그리스도인데 네가 지금 이 그림을 보면서 제일 첫 눈에 가장 인상적이고 사실적으로 보인다고 하는 것이 예수님의 손의 컵이라면 이 그림은 잘못된 거다. 그러므로 내가 그 컵을 지워버리는 중이다'

성도 여러분, 여러분 삶의 중심이 무엇입니까? 진정으로 여러분의 삶의 중심에 무엇이 차지하고 있습니까? 예수 그리스도가 여러분의 중심에 자리하고 있기를, 그래서 결코 예수 그리스도가 여러분의 삶에 변질이 되어서 방황하지 않기를 축원합니다. 그 분은 우리의 중심입니다. '내가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니 나로 말미암지 않고는 아버지께로 올 자가 없느니라' 예수 그리스도, 그가 곧 우리의 메시야 되시고, 구세주 되시고, 우리의 삶에 중심임을 다시한번 확인하는 복된 시간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간절히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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