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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제자들의 2가지 고민 (막 09:14-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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며칠 전 한 TV 에서 방영된 프로그램에서 '불치병 어린이들을 둔 부모들의 모임'이라고 하는 단체의 활동 상황을 보았습니다. 어떤 아이는 너무 먹는 문제, 즉 배가 고파서가 아니라 먹는 것 자체가 절제가 되지 않아서 오는 비만으로 초등학교 어린이가 120㎏이 넘는 아이가 있었고, 또 어떤 아이는 아무리 잘 먹여도 발육이 되지않아 부모가 마음의 고통으로 힘겨워하는 등 일반적으로 치료하기 어려운 난치병 자녀를 둔 부모들이 인터넷에서 동호회를 만들어 서로 위로하며 치료의 방법을 찾아보려고 애쓰는 그런 내용이었습니다.

우리 나라에는 약 100여 가지의 불치병이 구별되어 있으나 치료제는 거의 개발되어 않다고 하는데 반해서, 미국은 약 1,000여 가지의 불치병이 구별되어 있을 뿐 아니라 그 중에 약 절반 정도는 치료제가 개발되어 있다는 이야기를 들으면서 미국 사회의 의학의 발전이 부러웠습니다.

오늘 본문 말씀을 보면, 벙어리 귀신 들린 아들을 제자들에게 데리고 왔다가 치료하지 못하자 제자들과 아버지가 논쟁하고 있는 장면을 주님께서 보시고 '너희가 무슨 일로 변론하느냐?'하시며 주님께서 상황에 개입하는 것으로 말씀이 시작되고 있습니다.

아마도 아이의 아버지는 제자들에게 아들을 맡기면 시원하게 고쳐 주리라고 생각을 했던 것 같습니다. 하지만 제자들 입장에서 보면 '뭐 이렇게 골치 아픈 문제를 우리한테 가지고 오나...' 그럴 수 있었을 거예요. 그라나 제자들은 벙어리 귀신들린 아이를 데리고 간절히 기도도 해보며 치료를 위해 애를 썼을 것입니다.

하지만 결과는 치료가 되지 않았어요. 아버지 입장에서는 '제자들이 그것도 못 고치느냐?'라고 항의했을 것이고 '우리가 못고친 것이 우리의 책임이냐?'하며 제자들은 변명하고 있었을 것입니다. 주님께서 그들의 이야기를 변론하느냐고 물으신 것만 보아도 아버지와 제자들의 대화의 분위기는 썩 우호적이지는 않았음을 짐작할 수 있습니다.

주님께서 그러한 상황에 개입 하시면서 아이의 아버지에게 질문하셨습니다. 21절에 보면 '언제부터 그렇게 되었느냐?'고 물으셨고, '어릴 때부터' 라고 부모가 대답하였습니다. 결국 이 병은 아주 오래된 고질적인 병이라는 말입니다. 우리는 흔히 사람들이 할 수 없는 일을 불가능, 혹은 인간의 한계라고 표현합니다. 그리고 그 불가능한 문제들은 우리가 쉽게 포기하는 것이 일반적인 모습이기도 합니다.

어느 심리학자가 벼룩을 가지고 실험을 했는데, 보통 1㎜ 정도 되는 작은 몸집의 벼룩이지만 자기 몸집의 수백배의 높이까지 점프를 할 수 있어요. 보통 20-30㎝ 점프를 합니다. 축구나 농구 선수들의 점프력이 뛰어나다고 하지만 자기 키의 1/3 정도만 뛰어도 대단하다고 말하는것을 보면 벼룩의 점프력은 놀라운 것이지요. 이 벼룩에게 높이 10 ㎝ 정도의 유리컵을 덮어 씌워 2시간 정도를 두었더니, 벼룩이 계속 뛰기는 했지만 결국 유리컵을 벗겨놓았어도 7-8㎝만 뛰었다는 것입니다.

사실 이 벼룩 뿐만 아니라 사회적인 동물이라는 사람들도 환경에 쉽게 굴복하는데 듣기좋은 말로 '환경에 적응한다'고 하지요. 주어진 환경에 잘 적응하는 것도 좋지만 심리학적인 평가로는 인간의 연약함을 말해주는 것입니다. 때로는 우리에게 주어진 하나님의 능력은 큰데, 주변의 환경 때문에 허락하신 능력의 절반도 발휘하지 못하고 있지는 않은지, 하나님께서 많은 재능을 주셨는데 우리의 연약함 때문에 주신 은사를 잘 선용하지 않고 그냥 땅에 파묻고 있지는 않은지 다시한번 생각해 보아야 하겠습니다.

주님과 제자, 그리고 귀신들린 아들을 둔 아버지, 이 3자의 관계에서 주님은 제일 먼저 아이의 아버지에게 중요한 질문을 하셨습니다. 아버지는 지금까지의 상황, 즉 아이의 병력을 쭉 이야기합니다. '귀신이 자주 이 아이를 불과 못에 던져 죽이려고 했습니다......'

귀신이 불과 못에 던져 죽이려고 했다는 표현은 이런 것입니다. 귀신들린 사람들을 보면 주로 남자는 여자를, 여자는 남자의 힘이나 음성을 흉내내어 사람들을 당황시키곤 합니다. 40여년 동안 목회 사역을 하셨던 아버님의 경우에도 이런 류의 환자들이 많이 찾아와 고침 받기를 원했는데, 특별히 아버님은 하나님께서 신유의 큰 은사를 주셔서 귀신 들린 자들이 많이 치유가 되었고, 그일로 인하여 가족이 인가귀도되는 부흥의 역사도 뒤따랐습니다.

돌이켜 생각하보면, 귀신들린 가정을 목사님과 함께 방문할때면 모두가 초긴장의 상태가 되곤 했습니다. 기도많이 하시는 권사님들과 밤이 새도록 기도하며 찬송하는 일이 많았는데 놀랍게도 귀신들인 자들이 우리가 찬송하고 기도하때면 아주 기가 죽어있어요. 살기 등등하던 모습은 간데없고 눈을 아래로 깔고 아무런 저항도 하지 않은채 얌전히 앉아 있지요. 하지만 찬송이 끝나거나 기도가 끝나고 나면 눈을 치켜뜨고 소리를 막 질러댑니다.

한번은 아주 아리따운 아가씨인데도 불구하고 거친 남성의 목소리가 나오고, 힘이 얼마나 쎈지 부모님이 붙잡아도 한손으로 뿌리쳐 사람들을 놀라게 하였는데, 정말 성경에 나오는 군대 귀신 들린 사람을 연상할 정도였습니다. 목사님께서 '너는 누구냐?'라고 물어보시자 '나는 ㅇㅇㅇ이야'하며 남자 이름을 대곤 하였습니다. 집안 사람들에게 물어보니 그 남자는 딸이 사귀던 친구였는데 최근에 사고로 죽었다는 거예요.

이런 귀신 들린 자들에 대한 치료의 사역이 전국 방방곡곡에서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행해지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일부에서는 '귀신이 어디있느냐?' 라며 부정하는 사람들을 볼 수 있습니다. 하지만 그들이 성경을 한번이라도 제대로 읽었다면 그런 무지한 이야기는 하지 않을 것입니다. 또한 자신의 가정이나 가까운 이웃들이 이런 귀신 들림으로 인하여 고통을 받는 모습을 보았다면, 결코 그런 이야기는 하지 않을 것입니다.


벙어리되고 귀신 들린 아들의 고침 문제로 변론하는 제자들과 아이의 아버지의 이야기를 들으신 주님께서는 이제 문제의 해결을 위하여 순서를 정하고 계심을 저는 보고 있습니다. 아주 중요한 포인트입니다. 주님께서는 놀랍게도 문제 해결의 1 순위자로 아이의 아버지를 택하셨습니다. 벙어리되고 귀신들린 아이가 문제 해결의 우선이 아니라 오히려 아이의 아버지였음을 우리는 크게 주목해야 합니다.

22절에 보면, 아이의 아버지 입에서 의외의 말이 튀어나왔습니다. '그러나 무엇을 하실 수 있거든 우리를 불쌍히 여기사 도와주옵소서' 언듯 듣기에는 굉장히 겸손한 표현 같지만 이것은 대단히 불신앙적인 표현입니다. 이 표현을 우리말로 바꾼다면 '반신반의'라고 할 수 있습니다. 어느 때는 믿음이 있는것 같이 말하고 행동하지만, 어느 때는 전혀 믿음과는 거리가 먼 말과 행동을 하는 사람들의 모습입니다.

이 때 주님의 놀라운 말씀이 선포됩니다. 23절에 보면, '할 수 있거든이 무슨 말이냐? 믿는 자에게는 능치 못할 일이 없느니라' 할렐루야! 주님께서 하신 능력과 은혜의 선언은 대부분 어떠한 사건이나 문제를 해결하시면서 이루어지고 있음이 놀랍습니다. 고통과 역경의 광야에서 오히려 하나님의 은혜와 기적을 체험하는 기회가 많음도 우연은 아니겠지요. 자녀의 병고침을 위하여 부모의 간절한 믿음과 확신이 선행되어야 하는 데 오늘 이 부모는 그렇지 못했습니다. 주님은 그를 엄하게 꾸짖고 말씀으로 책망하신 것입니다. ' 할 수 있거든이 무슨 말이냐....?'

성도들이 신앙생활하면서 믿음으로 고백하는 고백은 참으로 다양합니다. 새로 나오신 분들에게 묻습니다. '교회 나오시니까 어떠신가요?' '좋지요. 목사님께서 좋은 말씀도 해주시고, 거 목사님 다 잘되라고 하시는 말씀 아닙니까? 그래서 우리 애들과 집사람도 보냅니다' 새신자의 입에서 그런 말이 나왔다면 참으로 감사하게 받아야 할것입니다.

하지만 집사님, 권사님 입에서 그런 얘기가 나온다면 그건 기가막힌 일이지요. 좋은 이야기 들으시려면 이 비오는 날 여기까지 오실 일 없어요. 텔레비젼 프로그램 중에 좋은 얘기 나누며 생활에 유익한 프로그램 많아요. 그것만 보고 앉아 있어도 주말을 잘 보내시는 겁니다. 하지만 여러분들이 이 예배의 자리에 나오는 것은 좋은 얘기, 잘되라는 얘기 들으러 오신 것이 아니지요.

예배란 사실 알고 보면 '사느냐, 죽느냐' 하는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 주님 앞에 엎드리는 경배의 시간인 줄 믿습니다. 다시 말하면 구원의 문제를 해결하기 위하여 우리의 죄를 고백하고, 미쁘신 하나님의 사랑과 긍휼하심을 인하여 예수의 이름을 믿고 의지하는 이들에게 허락하시는 용서와 구원의 은총을 확신하고, 그 구원의 하나님을 찬양하는 것이 예배인줄 믿습니다. 받은 바 은혜의 감격을 가지고 다시금 세상으로 나아가 증인으로서 삶을 사는 것이 성도의 생활인 것입니다.

아이의 아버지가 책망받는 것은 당연합니다. 왜냐하면, 네 아들이 불치의 병, 벙어리 귀신 들려 귀신이 이끄는 대로 불과 못에 끌려 다니는데, 그 기막힌 아이의 문제를 해결하려고 네가 나한테 왔는데 기껏 하는 말이 '할 수 있거든 고쳐주옵소서' 그 정도냐?' 하는 것이지요. 믿음은 바라는 것들의 실상이라고 성경은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에게 있어서 중요한 것은 정신입니다. 자세입니다. 하나님을 향한 우리의 믿음과 신뢰의 자세가 분명하다면 '믿고 구하는 것은 받은 줄로 알라'고 선언하신 주의 말씀을 능히 이룰 줄 믿습니다. 할렐루야!

하나님 앞에서 우리의 마음의 자세라고 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저는요, 여러분들이 지난 주일에 맥추감사도 했지만 여러분, 맥추감사 제대로 하셨나요? 십일조 수준으로 하시라고 그랬는데 제가 그 보고서를 쭉 보니까 마음이 참 아프더라구요. 손님 대접하고, 식사 대접 몇 사람만 해도 돈 100,000만원 그냥 나가는데 여러분, 함께 모여서 밥 한끼 먹는 것 보다도 하나님 앞에 드리는 맥추감사의 손길이 적다면 다시 생각해 보아야 할 것입니다.

우리가 오늘 주님께서 이 아버지의 말을 듣고 화를 내시고 분노하신 것은 보통 사람이라면 그만한 말만해도 주님이 축복하시고 칭찬하셨을 것입니다. 지금 불치의 병을 고치겠다고 벙어리 귀신 들린 아들이 귀신이 저를 죽이려고 불과 물에 자주 끌고 간다고 자기가 평생토록 어릴 때부터 그 아이를 키우면서 고통을 받았노라고 그런 얘기를 해가면서 주님 앞에 와서 하는 이야기가 '고칠 수 있으면 고쳐주시지요. 고칠 수 없으면 말고...' 그 마음의 헌신이 몇 %나 되겠습니까?

우리가 헌신이라고 말할 때 내 마음의 100%를 주님 앞에 드리고도 한쪽 구석이 허전해서 '더 헌신할 것 없을까?' 내가 시간을 주님 앞에 드리고도 부족함이 있어서 '내 시간의 어느 부분을 더 정리해서 주님에게 더 드릴 수 있을까?' 고민하는 사람과 자투리 시간도 주님에게 드리기도 아까워하는 사람과 많이 차이가 있잖아요. 여러분의 일주일의 스케줄 중에서 교회에, 선교회에, 속회에 중요한 일이 생기면 여러분의 스케줄을 뒤로 미루고 그것을 조정하고, 상대방에게 양해를 구하고 하면서 주님의 일을 하려고 하는 사람과 '나 이런 스케줄이 있어서 안되겠네요' 교회에 중요한 일인데도 자기의 개인적인 스케줄 때문에 교회의 일이 무산되는 그런 사람들도 봐요.

저는 요즘에 우리 주변에서 이런 얘기를 들어요. '목사님, 약속을 잘 안지키시네요' 참 마음 아픈 얘기지요. 저는 약속을 지키는 것에 최선을 다하는 사람입니다. 그런데 왜 동료들에게 그런 이야기를 듣는줄 아십니까? 사실 왠만한 주변의 선교의 사역들은 2-3달 전에 다 스케줄이 잡혀있어요. 그렇게 미리미리 준비해놓고 예약을 해놓지만 갑자기 교회에 중요한 일이 생기면 저는 눈 딱 감고 그 일을 취소하고 우리 교회 성도의 일을 먼저 합니다.

왜그렇습니가? 제가 평안의교회 담임목사인 사실이 우선이기 대문입니다. 대외적인 활동은 그 다음이고 밖의 일은 그 다음 일입니다. 하나님의 일이 우선이고, 하나님의 일 중에서도 이 교회 일이 우선입니다. 다른 사람들에게 혹 싫은 소리를 들어도 이 일이 먼저입니다. 마음이 아프지만 어떤 때는 중복이 안됐으면 좋겠지만 꼭 그렇게 되어야 한다면 저는 밖의 일을 포기합니다.

여러분들이 주님의 일을 하고 주님의 일을 사랑한다고 하는 것은 말이 아니라 여러분의 삶에서 실천이 되어져야 합니다. 주님의 일이 더 소중해지고, 교회 일이 더 소중해지기 시작할 때부터 여러분들은 비로소 주님을 사랑하는 사람인 줄로 믿습니다. 주님을 사랑한다고 하는 것은 희생이 따라야합니다. 여러분의 시간도, 여러분의 물질도, 여러분의 정성도 시간의, 물질의 희생이 없이는 안돼요. 자투리 시간 가지고 주님의 일 맞춰보려고 애쓰지 마세요. 여러분, 여러 사역하는 주의 종들이 있습니다 만은 자투리 시간에 맞추려고 머리 쓰지 마세요. 그것은 하나님께서 받으시지 않습니다. 말라기에 뭐라고 그럽니까? '너희가 병든 것, 저는 것, 너희 총독에게 드려도 받지 않을 것을 주님 앞에 드리고 드렸다고 하느냐?'

자투리 시간은 사람도 기분 나빠요. 두 사람이 서로 사랑한다면 만나는 시간이 자투리 시간에 만나겠어요? 가장 중요한 시간에 만나는 것을 좋아하시지요. 주님에게 드리는 여러분의 정성은 나머지가 아니라 중심이시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주님이 이 아버지에게 책망을 하시고 분노하시는 것도 바로 그거예요. '네가 지금 내게 내 마음의 전부를 주어도 이거 고쳐줄까 말까 한 일인데 할수 있거든 이게 무슨 소리냐?' 주님은 전심으로 주님을 신뢰하고 의지하는 사람을 기뻐하시는 줄 믿습니다. 결국 이 아버지는 주님의 그 말씀에 대해서 즉시 회개하고 응답했습니다.

여러분, 믿음이라고 하는 것은 잘못된 것을 지적하면 즉시 돌아서는 거예요. 회개라고 하는 것은 가던 방향을 돌이킨다는 거예요. 죄라고 하는 것은 잘못된 과녁을 향해서 가는 것을 죄라고 그럽니다. 우리가 회개한다고 하는 것은 즉시 말씀을 듣고 돌아가는 거예요. 여러분 돌아가셔서 '내가 생각해 보고 내가 바꿔야겠다' 이건 아닙니다. 이 자리에서, 말씀을 듣는 이 자리에서 '내 삶에 이런 부분이 내가 자투리 시간이었고, 이런 부분이 내 마음의 절반도 안드렸고..' 이런 것이 깨달아지거든 이 시간 즉시 주님 앞에 회개하고 새로운 다짐과 서원을 하시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이 아버지의 모습을 보세요. 24절, '그 아이의 아버지가 소리를 질러 가로되 내가 믿나이다. 나의 믿음 없는 것을 도와주소서' 믿음이 없다는 것을 말하는 것은 부끄러운 일이지요. 체면에 손상이 가는 일입니다. 여러분이 예수를 10년동안 믿었는데 '당신 정말 믿음이 있습니까?'라고 제가 얘기했을 때 가슴에 크게 와닿는 것이 있어서 '아, 내가 50% 밖에 아니었구나. 목사님 저의 믿음 없음을 용서해 주옵소서' 그렇게 말할 수 있나요? 우리 권사님, 장로님들이 그렇게 저에게 말할 수 있나요? 이건 크게 체면에 관계되는 문제입니다. 믿지도 않으면서 믿는 척, 믿음도 없으면서 믿는 척 하지 마세요. 그것은 시간이 갈수록 더 여러분의 영적인 상태만 골병이 드는 것입니다.

이 아버지의 위대한 점은 아버지의 체면과 주변의 수많은 무리들이 바라보는 자신의 입장을 생각하지 않고 있는 그대로 주님 앞에 반신반의했던 자신의 잘못됨을 회개하고 '믿음 없음을 도와주옵소서. 내가 믿나이다. 이제는 주님이 요구하는 100%의 믿음, 전심으로 주님을 내가 구하겠나이다' 주님께서 더러운 귀신을 꾸짖어 그의 자녀를 치료해 주신 줄 믿습니다. 다시 말하면 문제 해결의 첫 번째는 아이가 아니라 부모였다고 하는 거예요.

여러분, 부모들은 부담이 되겠지만 분명한 사실은 자녀 문제의 80-90%는 부모 문제입니다. 그럼으로 우리 부모는 자녀 문제에 관한한 거의 100%의 책임을 지셔야 합니다. 자녀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는 그래서 주님이 그 아이와 먼저 대면하신 것이 아니라 그 아이의 부모, 아버지의 문제를 해결하셨어요. 아버지를 해결해 놓고 나니까 아이의 문제는 그냥 해결이 된 것입니다. 부모가 믿음이 바로 서면 자녀들도 바로 서게 되어 있어요. 부모가 하나님 앞에 정직하게 살면 자녀들도 잘 되게 되어 있어요. 하나님께서 가장 우리에게 가장 예민하게 말씀하시는, 하나님의 메시지가 가장 예민하게 우리에게 올 때가 언제냐 하면 아이들에게 문제를 줄 때입니다. 영적으로 예민한 사람들은 아이들에게 문제가 생기면 제일 먼저 내게 무슨 문제가 있는가를 엎드려서 기도합니다. 정확한 거예요. 거의 정확한 거예요. 가장 예민한 메시지가 아이들을 통해서 오는 거예요. 병원에 먼저 뛰어갈 것이 아니라 무릎을 꿇으시기를 바랍니다.

아이의 문제, 어릴 때 문제, 시시하게 곪아터진 문제인 것 같지만 사실은 아버지의 문제였어요. 아버지의 믿음의 문제가 해결되고 나니까 아이는 주님의 전능하신 능력으로, 단 한번의 말씀으로 치료가 된 줄로 믿습니다.
의사들도 믿음이 없는 의사들은 이런 부분을 부정합니다. 하지만 연세대학이나 이 믿음을 가진 의사들은 인정하지요. '목사님, 이것은 예수의 능력, 주님의 능력이 아니면 안됩니다' 연세대학에도 이런 정신 신경과라든지, 여러 과의 교수들이 계시지만 그분들도 다 인정을 하지요. 하지만 믿음이 없는 사람은 자신들의 그 권위 때문에 인정하고 싶지 않은 거예요.

목사님께서 원자력 병원에 입원해 있는데, 사실 원자력 병원에 입원하면 99.9%가 사망이지요. 치료해 보는 거예요. 사망 선고를 받고 죽을 날을 기다리는 분에게 목사님께서 몇 번을 가서 안수기도 해주셨어요. 3번째 안수기도 할 때에 그 부인이, 배가 남산처럼 나온 그 암덩어리가 화장실에서 몇 번을 쏟았어요. 핏덩어리를 쏟았어요. 그리고 낫고 그분이 아직도 권사로서 열심히 살고 있는데 그 의사가 뭐라고 그러는 지 아십니까? '그것은 목사가 기도해서 나은 것이 아니라 원자력으로 치료를 했는데 그동안 효과가 없다가 그때와서 효과를 본 것입니다' 죽어도 체면이 있어서 인정을 안하는 것이지요. 방송에서 여러 가지 문제들을 이렇게 집중 취재할 때도 보면 끝까지 인정하지 않더라구요. 그럴 수 밖에 없지요. 영적인 세계를 모르는 사람이 영적인 세계를 인정한다고 하는 것은 아마 죽기 보다 어려울 것입니다. 하지만 오늘 이 자리는 어떤 자리입니까? 믿음의 사람의 자리인 줄 믿습니다.

주님께서 아버지의 문제를 해결하고 아들의 문제를 해결해 주셨습니다. 그리고 나서 세 번째 제자들의 문제를 해결하십니다. 제가 오늘 제목을 '제자들의 2가지 고민'이라고 그랬습니다. 제자들의 고민은 첫 번째 그런 것이지요. '왜 우리가 못 고쳤습니까?' 그래서 예수님이 고치고 들어오시니까 집으로 따라들어와서 씩씩거리면서 하는 얘기가 주님이 고치신 것에 대해서 축하하고 영광 돌리는 것보다는 자기들의 체면이 말이 아닌 것에 대해서 지금 항의하고 그리고 지금 질문하는 거예요. '왜 우리는 그 귀신을 쫓아내지 못했습니까?'

똑같은 말씀이 마태복음 17장에도 있습니다. 그 마태복음 17장 20절에서는 주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셨어요. '너희 믿음이 적은 연고니라' 너희 믿음이 문제라고 하는 것이지요. 제자들의 첫 번째 문제는 믿음의 문제였습니다. '믿음'하면 자기들인 줄 알았는데 놀랍게도 주님께서 문제의 핵심을 지적하시기를 '믿음이 적은 연고로' 얼마나 충격적인 얘기입니까? 여러분, 믿음이 없으면서 있는 척 하지 마세요. 다시한번 강조하거니와 믿음이 없으면서 있는 척 하지 마세요. 주님이 이렇게 말씀하시는 자리는 제자들과 함께 방에서였지만 수많은 사람들 앞에서 그런 이야기를 듣는다면 얼마나 체면에 손상이 가겠어요. 그러면 믿음이 없는 척 하고 그냥 뒤로 자빠질 거냐? 침륜에 빠질 거냐? 아니지요. 다시 시작해야지요. '주님, 내가 믿음이 있는 줄 알았는데 그래도 '믿음'하면 나인 줄 일았는데 제자인 내가 주님으로부터 믿음이 적다는 말씀을 듣고 보니까 보통 문제가 아닙니다. 주님, 다시 시작하겠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때때로 우리는 스스로의 자만심에 빠질 때가 있어요. 믿음의 문제가 우리의 문제인데도 우리는 믿음의 문제가 아닌 다른 문제라고 생각합니다. 왜? 믿음은 내게 넉넉하다고 착각하고 있기 때문이예요. 아마 주님께서 제자들이 그렇게 질문했을 때 다른 대답을 하실 줄 알았을 거예요. 그런데 놀랍게도 주님은 제자들에게 '너의 믿음이 적은 연고니라' 저와 여러분들에게 주시는 주님의 도전인 줄 믿습니다. '주님, 그래요. 사실 알고보니까 믿음의 문제였습니다. 다른 문제가 아니라 저 아버지의 문제, 아들의 문제가 아니라 문제는 저였는데 제가 문제였습니다' 여기서부터 문제는 풀어지기 시작한 것입니다.

주님께서 말씀하십니다. 29절, '이르시되 기도 외에 다른 것으로는 이런 류가 나갈 수 없느니라' 이런 류가 뭐예요? 귀신의 역사를 우리가 승리하게 하려면, 귀신을 내어쫓으려고 하면 기도 외에는 안된다는 거예요. 기도의 문제입니다. 우리 주님께서 말씀하시지 않습니까? '두려워말고 믿기만 해라'

우리 주님께서 말씀하십니다. 주님께서 마가복음 21장에서도 '너희가 기도할 때에 무엇이든지 믿고 구하는 것은 다 받으리라' 받는 것을 우리는 관심 갖지만 받는 것 전에 선행 조건이 있어요. 믿음입니다. 믿고 구하는 것, 곧 믿음으로 기도하는 것이 중요하다는 것입니다. 여러분의 삶의 문제들을 믿음으로 구하시기를 간절히 축원합니다. 우리가 불가능하다고 인간의 한계의 문제라고 스스로 포기하고 환경에 적응해 버리시지 말고 전능하신 하나님을 기억하면서 그 하나님을 신뢰하면서 믿음으로 구하시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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