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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당신의 가정이 흔들리고 있습니다 (막 10:1-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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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신의 가정이 흔들리고 있습니다'라는 오늘 말씀의 제목은 대단히 도전적입니다만, 사실 이 제목은 어느 대학의 교육학자이신 분이 이 시대의 자녀를 둔 부모들을 향해 쓰신 '당신의 자녀가 흔들리고 있습니다'라는 제목을 패러디 한 것입니다.

주님께서 요단강 건너편으로 가셨을 때 바리새인이 몰려와서 예수님에게 질문합니다. '사람이 아내를 내어버리는 것이 옳은 일입니까?' 사실 이 질문의 표현은 21세기를 사는 지금의 시각으로 보면 많이 잘못된 표현입니다. 우리 여성들에겐 정말 자존심 상하는 그런 표현이 아닙니까? 아내를 내어버리다니요...하지만 지금의 표현은 퍽 오래전, 예수님 당시의 사회적 분위기를 그대로 전해 주고 있는 것입니다.

슬픔에 대한 내적인 차이를 어느 심리학자가 분석 하였는데, 동양이나 서양이나 남편이 죽으면 아내가 슬피 우는 것은 같은데 그 눈물의 내용이 다르다는 것이지요. 미국의 경우, 아내의 눈물은 사랑하는 배우자가 곁을 떠났기 때문에 슬퍼서 우는 것이고, 우리 한국의 경우는 삶의 대한 대책이 막막해서 울었다는 것이지요. 당신 없으면 아이들 공부는 어떻게 시키며 생활은 또 어떻게 할 것인가...'

요즘 같으면 여성들에게도 전문적인 일터가 있어서 옛날 같이 망연자실하며 울진 않을 거예요. 사랑하는 배우자를 떠나 보냄에 대한 슬픔의 눈물은 있을지언정 '이제는 어떻게 살아가나..' 하며 생활에 대한 막막함 때문에 울지는 않을 것입니다.

오늘 이혼에 대한 문제는 사실상 바리새인들의 깊은 의도에서 질문된 것입니다. 본문 말씀 2절에 보면 '바리새인들이 예수께 나아와 그를 시험하여 묻되'라고 기록된 것을 보면, 질문의 의도가 순수하지 않다는 것이지요. 왜 바리새인들은 주님에게 이런 질문을 했을까?

사실 바리새인들의 시험하는 질문은 한 두번이 아니지요. 현장에서 간음하다가 잡힌 여인을 데리고 와서 '모세의 율법대로 돌로 쳐죽여야 옳습니까? 아니면 풀어주어야 옳습니까?'라는 곤란한 질문도 했을 때, 죄없는 자가 먼저 돌로 치라 하시며 그들을 놀라게 하셨고, 또 동전을 가지고 와서 가이사에게 드려야 합니까? 아니면 성전에 드려야 합니까?'라는 곤란한 질문도 했을 때, '가이사의 것은 가이사에게, 주님의 것은 주님에게'라는 놀라운 말씀으로 그 당시 바리새인들의 어리석음을 꾸짖으셨습니다.

오늘 이 질문도 주님을 시험하여 넘어뜨리려는 시험이었습니다. 당시 이스라엘의 왕은 헤롯이었는데 그는 이혼의 경험을 가지고 있습니다. 아니 더 정확하게 말하면 아내를 버리고 동생의 아내를 빼앗은 부도덕한 사람이었습니다.
그러므로 당시에 이런 문제를 언급한다고 하는 것은 대단히 민감하고 위험한 일이었습니다. 실제로 세례 요한은 그 문제에 대하여 부당함을 지적하다가 목숨을 잃었습니다. 당시 백성들에게 가장 존경받는 세례 요한이 그 문제로 목숨을 잃었다면 이스라엘의 어느 누구가 그 문제에 대해서 감히 이야기 할 수 있겠습니까?

이 땅에 복음이 전파된지 117년이 되었지만, 강단에서 이혼 문제 같은 것이 설교의 주제가 되는 일은 거의 없었습니다. 아주 민감한 문제이고 또 시험들기 쉬운 부분이기 때문에 대개는 그냥 넘어가는 경우가 많았습니다. 오늘 제가 이러한 주제로 주일 낮 예배시간에 말씀을 나누는 것만 해도 우리 성도들의 의식 수준과 교회의 분위기가 많이 달라졌음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바리새인들은 이 부분에 대해 예수께서 실수하기를 기대했고, 그것은 곧 헤롯 왕에 대한 도전으로 간주 되어 세례 요한처럼 제거할 수 있는 절호의 기회를 얻으려고 틈을 엿보고 있었습니다. 반면에 그 부분에 대하여 성경적으로 잘못 해석함으로서 당시 이스라엘 백성들의 정신적인 지주였던 모세의 교훈에 위배되도록 유도하려는 위도도 가지고 있었습니다.

하지만 주님께서는 바리새인들의 질문의 의도를 잘 알고 계셨습니다. 그들은 주님에게 이렇게 묻고 있습니다. '사람이 아내를 내어버리는 것이 옳으니이까?' 쉽게 말하면 이혼의 문제입니다. 과거나 지금이나 상당수의 이혼의 문제는 남편에 의해서 주도되는 경우들이 많았습니다만, 최근에는 여성들에 의해 이혼 문제가 제기되는 경우들도 많아지고 있는 추세입니다.

예수를 믿지 않는 사람들에게 물었습니다. '이혼을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41%가 '상황에 따라서 이혼할 수 있다'는 대답을 했습니다. 크리스챤들에게 물었더니 34%의 성도가 긍정적인 대답을 하였습니다. 믿지 않는 사람과 믿는 사람의 이혼에 관한 의식 차이가 약 7-8% 밖에 나지 않았습니다. 이것이 오늘 한국 사회의 이혼에 대한 국민적 의식입니다. 엄청난 가치관과 의식의 변화를 우리는 실감하고 있는 것입니다.

제가 상담대학원 공부를 하면서 이 이혼의 문제가 이제는 교회에서 입다물고 그냥 지나가야 할 문제가 아니라고 하는 사실을 알았습니다. 사실 그래서 이렇게 이런 주제를 가지고 주일 낮예배에 말씀을 드릴 수 있는 용기가 생겼는지도 모릅니다. 이것은 민감하기 때문에 그냥 터치하지 않고 지나가면 좋을 문제가 아니라 이제는 우리 크리스챤 공동체에서도 이제 중요한 문제가 되었다는 것이지요.

여러분들은 이혼한 사람들을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이혼한 사람들은 교회 생활을 할 수 있다고 생각하십니까? 아니면 할 수 없다고 생각하십니까? 과거에는 이혼한 경험을 가진 분들은 교회에 발걸음을 하기가 어려웠어요. 너무나도 눈초리가 따가웠기 때문에 이혼한 분들은 교회에 나오기 어려웠어요. 지금도 그렇게 생각하시나요? 결론부터 말씀드리면 이것은 아주 잘못된 생각입니다. 지금 우리의 사회에 1/3이 가까운 사람들은 이혼의 경험과 이혼이라는 문제로 고통을 받고 있는 사람들인데 우리가 천만의 성도들이 그들을 외면한다고 하면 우리는 결코 교회 공동체가 될 수 없다는 말입니다. 이제는 교회가 가지고 있는, 교회가 세상을 향해서 나아가야 할 품어야 할 중요한 주제 중의 하나가 바로 이 주제입니다. 이에 관계되는 사람들을 우리가 모른체 하거나 혹은 그들에게 마음의 고통을 주는 그러한 자세를 가지고는 이제는 진정한 크리스챤의 자세라고 할 수 없다라고 하는 것입니다.

오늘 신문을 받았습니다. 7월17일, 얼마되지 않은 최근의 영국 성공회에서 결정된 그러한 내용을 보았습니다. 영국 성공회가 결혼 정책에 대한 개정을 하였는데 그동안 재혼 금지 전통이 지난 17일에 성공회 전국 의회에서 투표로 결정이 되었습니다. 찬성 269표, 반대 83표 압도적인 숫자로 영국 성공회는 성도들의 재혼을 정식으로 허용했습니다. 물론 그 법이 통과되기 전에도 성도들의 재혼은 되어졌어요. 그러나 성공회 신부님이 주례는 하지 못했습니다. 그런데 7월17일 이후에는 성공회 신부님들이 교회 안에서 재혼의 주례를 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성공회는 대단히 보수적인 집단인데 그 성공회에서 21세기에 들어서 이런 결정을 했다고 하는 것은 대단히 중요한 의미를 갖습니다.

어떤 사람은 이렇게 평가하기도 합니다. 지금 영국 황실의 찰스 황태자가 이혼의 경험을 가지고 있어요. 파멜라라고 하는 지금 사귀고 있는 여성이 이혼의 경험을 가지고 있는 사람입니다. 그 두 사람이 좋아서 결혼을 하려고 하는데 그 사람들의 결혼의 굴레를 풀어주기 위해서 그런 결정을 한 것이 아니냐? 이렇게 말하지만 제가 볼 때에 영국의 정서상 그렇지는 않다고 생각합니다. 영국 왕실의 권위는 거의 땅바닥에 떨어져 있는 상태입니다. 그 왕실을 살리기 위해서 성공회가 그런 법을 개정했다고는 제가 믿어지지 않습니다. 시대의 흐름이지요. 이제는 이혼, 그리고 재혼, 이것이 교회에서 공식적으로 인정되는 시대를 맞고 있습니다.

자, 그러면 이런 상황 속에서 우리의 의식도 변화가 엄청나게 되었음을 우리는 통계를 통해서 보았고, 가정 보수적인 그런 교단에서도 이제는 새로운 변화의 물결의 물고를 트고 있음을 우리는 보았습니다.

주님의 말씀으로 돌아갑니다. 주님께서 반문하고 계십니다. '모세는 어떻게 너희에게 명하였느냐?' 이스라엘 사람들의 가장 중요한 기준은 모세의 율법입니다. '그 모세의 율법은 너희들에게 뭐라고 말씀하고 있느냐?'하는 것입니다. 모세의 이혼에 관한 율법은 신명기 24장에 잘 나와있습니다. 이혼에 관심있는 분들은 신명기 24장을 집에 가서 잘 읽어보시기 바랍니다. 거기는 한가지 이유만 허락을 했습니다. '결혼을 하였는데 결혼 후에 아내의 부정이 수치스러운 일이 발견되었을 때 남편은 아내를 버릴 수 있다'

제가 지금부터는 버린다는 표현을 쓰지 않겠습니다. 정서상 지금의 상황에 맞지 않는 이야기지요. 이혼이라는 말로 바꾸겠습니다. 결혼 전에 아내의 부정이 발견되었을 때 남편은 이혼을 할 수 있다는 말이지요. 그 당시에는 남성 위주의 사회였기 때문에 아내의 입장에서 '남편의 부정이 발견되었을 때 아내는 이혼할 수 있다'라는 조항은 없어요. 하지만 저는 같은 조항으로 생각하고 싶습니다. 한가지 이유, 모세가 이혼을 허락한 한가지 이유는 배우자의 부정입니다.

최근의 통계를 보면 그것은 지금으로부터 3,500년 전의 모세 시대의 이야기일 뿐 아니라 지금 21세기에도 이혼하는 가정의 사유를 조사해보니까 첫 번째 이유가 배우자의 부정이었습니다. 성격차이나 수입이 없어서라고 하는 이유는 첫 번째 이유와는 굉장히 차이가 있습니다. IMF 때 많은 가장들이 실직하고 배우자로부터 이혼을 강요받았지만 그래도 첫 번째 이유와는 비교가 되지 않았습니다.

얼마전 한 여성의 에이즈 소동을 여러분 기억하시지요. 에이즈에 걸린 한 여성이 분풀이로 수많은 남자들과 의도적으로 관계를 가졌고, 그것이 알려지면서 그 지역의 1,500명이 넘는 남성들이 보건소에 가서 에이즈 감염 조사를 받았다고 합니다. 저는 그 1,500명이라는 숫자를 곰곰히 생각해 보았어요. '이 사람들은 어떤 사람들일까?' 저는 빙산의 일각이라고 생각합니다. 보건소에 가서 그런 검사를 받고 드나들면 사람의 일이라 신분이 노출될 수 있어요. 가정 파탄으로 갈 수 있습니다. 하지만 그 1,500명은 가정이 파탄이 되는 것이나 자기의 신분이 노출되어서 자기의 체면이 손상되는 것보다도 내가 에이즈에서 빨리 치료되어져서 살아야 되겠다고 하는 의지가 더 강한 사람들이라고 생각됩니다. 체면이 중요하거나 가정 파탄을 염려한 사람들은 속앓이만 하고 못 갔을 거예요. 그 숫자가 얼마나 되겠습니까? 엄청난 숫자라고 생각합니다.

지금 우리 사회는 배우자의 부정이라는 문제로 우리는 큰 홍역을 치루고 있습니다. 아내들이 눈을 부릅뜨고 남편들을 지키려고 해보지만 시시때때로 휴대폰으로 확인 전화를 해보지만 여러분, 휴대폰은 제가 어느 식당에서 보니까 식당에서 식사를 하는데 전화가 왔어요. 전화를 받으면서 '나 지금 사무실인데...' 그러면서 전화를 합디다. 여러분, 휴대폰으로 남편들을 감시할 수 있다고 생각하십니까? 여관에 들어가서 '나 지금 사무실인데..'하면 여러분 어떻게 확인할 수 있겠나요? IMT2000 화상이 뜨는 것으로는 가능하겠습니까?

남편들도 시시때때로 아내에게 전화를 해서 화장실도 마음대로 못 가게 만드는 남편들이 있지요. 전화를 안받으면 기겁을 하고 쫓아와서 확인하는 남편들이 있지요. 그렇게 해서 아내들이 감시가 됩니까? 우리의 그런 방법은 참으로 유치한 것이지요. 진정으로 우리의 마음을 사로잡지 못하는 한 배우자의 부정은 막을 길이 없습니다. 그래서 가정에 가장 중요한, 가정을 지탱하는 가장 중요한 것은 서로 간의 신뢰라고 하는 사실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신뢰하듯이 하나님을 신뢰하기 때문에 어떤 시련과 역경이 와도 하나님을 떠날 수 없듯이 우리 배우자에 관해서도 신뢰가 무너지면 모든 것을 포기할 수 밖에 없어요.

오늘 주님께서 말씀하신 가장 중요한 핵심이 그 안에 있습니다. 모세의 율법을 끄집어내면서 바리새인들이 대답을 했지만 우리 주님께서 5절에 하신 말씀을 보면 주님의 해답은 다른 곳에 있었습니다. '예수께서 저희에게 이르시되 너희 마음의 완악함을 인하여 이 명령을 기록하였거니와' 무슨 말입니까? 모세 시대에도 모세가 이혼을 이야기 한 그 시대에도 중요한 이혼의 동기는 '너희 마음에 완악함 때문이다' 완악하다고 하는 말의 뜻이 무엇인가요? 몰라서가 아니라 알지만 자신의 욕심 때문에 고집을 부리는 것을 완악함이라고 하지 않습니까?

우리는 성경에서 완악함의 가장 상징적인 인물로 바로 왕을 들 수 있습니다. 모세가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고 한가지 한가지 심판을 행하지만 그 심판이 지나가면 모세의 그 말씀 약속을 깨뜨리고 바로는 또 이스라엘 백성들을 풀어주지 않습니다. 성경은 그것을 바로의 완악함이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우리 성도들에게 있어서도 우리가 하나님 앞에 바로 살지 못하는 이유가 무엇인가요? 하나님의 말씀을 몰라서인가요? 십계명을 여러분이 기억하지 못해서인가요? 알지만 우리의 육신의 욕심 때문에 고집 피우는 일이 우리의 완악함입니다. 완악함 때문에 실족하고, 완악함 때문에 하나님의 뜻에서 멀어지는 일들이 얼마나 많습니까? 주님의 말씀이 그것입니다. '너희의 완악함 때문이라고 하는 것은 하나님 앞에서 이런 가정에 문제가 생기고, 가정이 파괴되고, 해체되는 이유는 바로 너희의 내면의 동기에서 비롯된다'고 하는 거예요. 우리의 마음의 욕심이 이런 문제들을 야기시킨다고 하는 것입니다.

주님께서 6절 이하에 보면 세 가지의 원리를 말씀하고 있습니다. 결혼의 원리요, 가정의 원리입니다. 6절에 보면 '창조시로부터 저희를 남자와 여자로 만드셨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보완의 원리입니다. 남자와 여자를 우리가 성으로 말할 때 남성과 여성이라고 말합니다. 여러분, 여행을 가실 때 여권이나 혹은 입국신고에 혹 보면 male, female이라는 그러한 난이 있어요. 남성이냐? 여성이냐? 하는 성에 대한 구별을 분명히 물어봅니다. 성에 대한 하나님의 창조에 대한 계획은 우리가 남성과 여성으로서 이 두 개의 성이 보완되어질 때 진정한 가정이 완성된다고 하는 비밀을 말씀하고 있어요. 그래서 결혼은 동성은 안됩니다. 요즘 유럽 사회는 동성간의 결혼도 허용하려고 하고, 동성도 이제는 결혼이라고 하는 합법적인 대우를 받으려고 하지만 이것은 하나님의 창조의 계획과는 거리가 먼 것입니다.

여러분, 요즘에 한 배우가 성을 바꾸어 화제입니다. 트랜스젠더가 된 이 사람은 본래 남자였는데 여성이 되어서 굉장히 인기를 끌고 있어요. 한 인격으로서의 한 생명으로서의 그는 제가 존경합니다. 우리 딸들이 질문해요. '아빠, 트랜스젠더를 어떻게 생각하시나요?' '한 생명체로서는 존중해야 된다' 그 자체를 부정해서는 안되겠지요. 하지만 하나님이 주신 성을 인간의 방법으로 바꾸어서 산다고 하는 것은 그것은 우리가 옳게 인정할 수 없다고 생각합니다. 이것은 오늘 6절의 이 말씀, '창조시로부터 남자와 여자로 만드셨다'고 하는 하나님의 계획에 대한 정면 도전이 되는 것입니다.

두 번째 7절에 보면 '이러므로 사람이 그 부모를 떠나서'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떠남의 원리입니다. 결혼은 잘 떠나야 합니다. 잘 떠나지 못하기 때문에 결혼 생활이 피곤하거나 갈등을 빚거나 파탄이 되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무엇을 떠나야 하는 것입니까? 우선 결혼은 인격적으로 부모에게서 떠나야 합니다.

여러분, 인격적으로 부모에게서 독립되었다고 생각하십니까? 아내들이 남편에게서 스트레스 받는 부분이 뭐예요? 흔히 마마보이라고 말하는 인격적으로 부모에게서 독립되지 않은 남편 때문에 고통받는 아내들이 많습니다. 냉장고 하나를 사도 부모님에게 전화를 할 수 밖에 없어요. '국산으로 살까요? 외제로 살까요? 칼라는 그린으로 할까요? 아니면 화이트로 할까요?' 그런 남편을 바라보는 아내는 착잡하지요. 이런 남편을 우리는 'adult child'고 그럽니다. 성인 아이라고 그럽니다. 육체적으로는 성장했지만 정신적으로는 여전히 아이의 구조입니다. 반대일 수도 있어요. 아내가 인격적으로 독립되어 있지 못한다면 이런 부분은 참으로 피곤합니다.

인격적인 독립뿐만 아니라 우리는 경제적인 독립도 되어야 합니다. 경제적으로 독립되지 않으면서 결혼을 하고 나면 얼마나 피곤합니까? 생활비를 부모에게서 타쓰는 분들이 있다고 하면 이미 그것은 결혼이 아니지요. 더 나아가서 영적인 독립이 되어야 합니다. 신앙적으로 독립이 되어야 합니다.

저는 요즘에 기도합니다. 우리 믿음의 가정의 자녀들이 신앙적으로 독립할 수 있도록... 특별히 부모님에 의해서 신앙생활이 잘 되어진 가정들은 처음에는 그것이 축복이지만 그들이 신앙생활이 습관적인 것이 많아요. 교회 생활은 하고, 교회 활동은 하지만 아버지의 하나님, 어머니의 하나님의 그늘 아래 여전히 갇혀져 있는 거예요. 나의 하나님이 되지 못하고 있는 사람들이 너무 많아요. 여러분들의 자녀들은 신앙적으로 독립해 있습니까? 이제는 부모님이 없어도 내 신앙, 내 믿음으로 이 하나님 앞에서 예배하지 않고서는 견딜 수 없고 하나님의 자녀의 길을 가지 않고는 견딜 수 없다고 고백할 수 있느냐 하는 그 말이예요. 그래서 여름 수련회가 필요합니다. 주님을 만나게 해주는 이 중요한 시기에 세상으로 나아가게 해서는 안됩니다. 수련회라고 하는 것은 주님을 만나는 기회를 제공해 줍니다.

세 번째 8절에 보면 '그 둘이 한 몸이 될지니라'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하나됨의 원리입니다. 연합의 원리입니다. 여러분, 떠남이 없으면 연합도 없어요. 완전한 독립이 될 때에 완전한 연합이 가능하다고 하는 이 결혼의 비밀을 여러분이 알아야 합니다. 가정이 단단하게 세워지려고 하면 부모로부터 완벽하게 독립되어야 합니다. 가정 생활이 정말 행복하려면 부모로부터 완벽하게 떠나야 가정의 행복이 이루어집니다. 대단히 중요한 것이지요. 둘이 한 몸이 된다고 하는 것은 육체적으로도 연합이 되며, 심리적으로도 연합이 되며, 영적으로도 연합이 되는 것을 말합니다. 그러니까 부모로부터 완벽하게 독립된 그 요소들이 부부를 통해서 다시금 완벽하게 연합이 되어질 때 결혼과 가정은 완성이 된다고 것이지요.

부부는 여러 가지 관계성의 산물입니다. 인간 관계를 가지고 있어요. 부모를 떠나서 배우자와 연합해서 한 몸이 되는 것을 결혼이라고 말할 때 그 결혼은 첫 번째 1차적인 요인으로 조화를 이룹니다. 처음 결혼하면 사람들은 말합니다. '우리는 아무 것도 필요없어요. 우리는 냄비 1개, 젓가락 2개면 충분합니다' 그렇지요. 1차적인 요인으로 볼 때 그것은 충분해요. 왜? 조화를 이루니까...

그런데 살아보면 그 1차적인 조화만으로는 살 수 없음을 우리는 느끼기 시작합니다. 어느날 남편이 말합니다. '우리 시골가자' '왜요?' '우리 부모님 생신이야' 직장을 빠져야 하는 문제가 생기고, 부모님 선물을 준비해야 하는 문제가 생기고, 부모님 댁에 가면 사촌들이 있고 이웃들이 있는데 그들과의 관계에 문제가 생깁니다. 한번 다녀오고 홍역을 치룹니다. '결혼이라고 하는 것은 1차적인 요인만 가지고는 살 수 없는 것이구나'

얼마 있다가 아내가 말합니다. '여보, 우리 시골 가요' '왜?' '우리 어머니 생신이예요' 장모님 생신이랍니다. 처가집의 인간 관계가 새롭게 그들의 삶 속에 들어옵니다. 갔다 와서 아내가 열을 받습니다. 왜 그래요? 시댁에 갈 때 선물은 10만원 짜리였는데 친정에 갈 때 선물은 남편이 5만원 짜리를 들고 가요. '당신의 부모는 10만원 짜리 선물이어야 하고, 우리 집 선물은 왜 5만원 짜리어야 하나요?' 중요한 갈등의 원인입니다.

제가 여러분들에게 한가지 제안을 드리지요. 아직도 시댁과 친정 부모님의 용돈에 차이를 두고 계신 분들이 있으면 오늘 당장 고치세요. 왜 양가 부모님의 용돈이 차이가 나야 합니까? 시댁에 10만원 드리면 친정에도 10만원 드려야 합니다. 시댁에 10만원 짜리 선물을 가지고 가시면 친정에도 반드시 반드시 10만원 짜리 선물을 가지고 가세요. 이 상식에서 아직 어긋난 삶을 산다면 그는 21세기의 사람이 아닙니다. 저는 적어도 평안의 성도들은 그런 분들은 없으리라 생각합니다. 있어서도 안되지요. 그런 사고를 가지고 있다면 오늘 이 말씀을 들을 자격이 없는 것입니다. 결혼은 1차적인 요인만 가지고는 살 수 없어요.

그래서 2차적인 요인이 무엇입니까? 갈등입니다. 여러 가지 사회생활하면서 결혼의 갈등이 생기기 시작합니다. 이 갈등을 지혜롭게 풀지 못하면 파괴가 되고 이혼으로 가는 거예요. 주님께서 우리에게 말씀하십니다. 인간관계의 지혜를 요구하시는 것입니다.

뿐만 아니라 결혼에는 성적인 관계가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부부에게 성이라고 하는 축복을 주셨습니다. 우리가 꼭 한가지 기억해야 할 것은 우리 성도들은 모든 것을 나눌수록 주님께서 기뻐하시고, 주님께서 나누기를 명령하셨어요. 나누기 위해서 수입을 가지라고도 말씀하셨습니다. 그런데 단 한가지 배타적인 축복이 있습니다. 그것이 바로 성입니다. 성 문제 만큼은 하나님께서 배타적인 축복으로 주셨어요. 부부만이 나눌 수 있는 것입니다. 이 하나님의 창조의 질서를 어기면 가정이 깨집니다.

뿐만 아니라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사회적인 관계도 주셨습니다. 사회의 기초집단으로 가정을 주셔서 이 기초적인 사회 단위 안에서 삶을 배우도록 하셨습니다. 자녀들도 태어나면서 부모라고 하는 그 사회 구성원의 첫 번째 교사로부터 사회생활을 배우기 시작합니다. 거기서 학습이 시작되는 것입니다. '놀만 라이트'라고 하는 분은 말합니다. '배우자와 화평을 누리는 지혜가 필요하다' 부부는 화평을 만들어 가는 지혜를 얻어야 합니다. 일방적인 최선은 안된다고 말씀을 드렸지요. 그것은 배우자에게는 최악이라고 말이지요. 그래서 중요한 것이 대화입니다. 내가 좋아하지만 상대방이 좋아하지 않는다면 그것은 최선이 아니라는 것이지요. 나이가 들어갈수록 대화가 많이 필요합니다. 그래서 결혼은 갈수록 신혼이 되어야 할 줄로 믿습니다. 신혼에서부터 점점 악화되어져서 3년, 4년, 5년, 10년에서 갈라서는 부부가 많지요.

여러분, 미국에는 요즘에 이런 직종이 유행이예요. '결혼 반지를 빌려드립니다' 무슨 말이예요? 저 가정도 몇 년 못 가서 깨질거라고 하는 것을 전제로 하고 몇 개월, 몇 년 동안 결혼 반지를 빌려주겠다는 거예요. 보석상에서 그런 임대업이 유행입니다. 결혼 반지를 빌려준대요. 몇 개월 동안 몇 년 동안만 거기에 수수료만 내면 되는 거예요. 여러분의 결혼 반지도 그런 상황입니까?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그래서 결혼은 신뢰가 중요합니다. 전적인 신뢰가 중요한 것입니다. 우리 주님께서 말씀하십니다. '너희가 그런 이혼 문제를 제기하고 모세가 배우자의 부정일 경우에 이혼 증서를 써주라고 한 그것은 바로 너희 마음에 완악함 때문이다' 우리 마음에 욕심 때문이라고 하는 것이지요.

미국 사회에서대통령을 지낸 분들 가운데 존경받는 몇 사람이 있습니다. 제퍼슨이나 링컨, 그리고 프랭클린 루즈벨트 입니다. 루즈벨트 대통령은 그가 대통령이 되기 전에 아주 단란한 결혼생활을 했습니다. 6남매를 낳고 키우면서 아주 행복한 삶을 살았습니다. 그런데 어느날 이 루즈벨트의 다리 하나가 힘이 빠지기 시작했습니다. 결국은 병원에 가서 진단을 받은 결과는 치료할 수 없다는 것이지요. 결국 그는 휠체어를 타지 않고는 다닐 수 없는 상황이 되었어요. 남편의 영향력이 중요하고 사회활동이 중요한 시대에 남편이 휠체어를 타고 다녀야만 되는 상황에서 그의 가정, 아내의 가정은 긴장했습니다.

결국 친척들이 루즈벨트 아내 엘레나에게 이렇게 권면합니다. '야, 이혼해라. 저런 남편과는 네가 더 이상 사회생활을 할 수 없어. 6남매를 키우기에는 어려워. 이혼해라' 그랬을 때 이 엘레나가 자기 친척들에게 이렇게 대답한 것이 유명합니다. '저는 우리 남편 다리와 결혼 것이 아닙니다. 저는 남편과 결혼했지요. 제가 사랑한 것은 남편의 다리가 아니라 남편입니다' 결국 그 아내는 남편을 미국에서 가장 존경받는 대통령이 되게 했습니다.

오늘 우리의 욕심이라고 하는 것이 무엇인가요? 젊을 때에 한 젊음을 여러분이 사랑하셨나요? 한 아내와 한 남편의 그 명성을 사랑하셨나요? 그가 가진 재물을 사랑하셨나요? 그가 가진 용모를 사랑하셨나요? 용모도 나이가 들면 사라집니다. 재물도 시간이 가면 없어질 수 있어요. 그가 가진 명성도 때를 따라서 지나갑니다. 권세도 10년이라고 말하지 않습니까?

여러분이 사랑한 것이 무엇입니까? 우리의 욕심으로 우리의 완악함으로 우리의 가정이 비롯되었다면 그 가정은 깨어질 수 밖에 없어요. 주님은 근본적인 대답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진정으로 우리의 가정이 출발하는 출발의 동기는 완악함, 욕심이 아니라 사랑과 신뢰이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창조의 질서에 의거해서 하나님의 계획에 따라서 우리의 가정이 비롯된다는 것입니다. 그 가정은 주님 부르시는 날까지 흔들릴 수 없다는 것입니다. 이 믿음, 이 사랑이 여러분의 가정의 기초가 되고, 여러분의 결혼 생활에 가장 중요한 원동력이 되시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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