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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당신의 우선 순위는 무엇입니까? (막 10:17-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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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가복음에는 관원으로 소개된 '한 사람'이 주님께 다가와 질문을 합니다. '선한 선생님이여, 어떻게 하여야 영생을 얻을 수 있습니까?' 상당히 정중한 모습으로 신앙의 문제를 가지고 다가온 이 사람은 젊은 관원일 뿐만 아니라 부자였습니다. 하지만 주님께서는 그의 질문을 들으시고 '어찌하여 네가 나를 선하다고 하느냐? 하나님 한 분 외에는 선한 분이 없느니라' 고 하시며 그를 쑥스럽게 만드셨습니다.

젊은 부자요, 관원은 무척 당황하였을 것입니다. 그런데 주님께서는 그에게 오히려 반문하십니다. '네가 계명들을 지켰느냐?' 그러자 이 젊은이는 갑자기 희색이 가득해졌습니다. 반가운 질문이라는 그런 분위기입니다. '계명이요?, 그런 것이라면 제가 자신있습니다' 네 부모를 공경하라. 도적질 하지 말라. 거짓증거 하지 말라. ......청년은 이런 계명들은 어릴 때부터 지켰노라고 대답하였습니다. 분명 그 대답에는 힘이 있었고 자신감이 넘쳐 보였습니다.

하지만 22절에 보면, 그는 주님의 말씀을 듣고 근심하며 돌아갔다고 했습니다. 왠일입니까? 문제는 계명을 암기하듯 머리속에서의 신앙이 아니라 행동이었습니다. 주님의 질문의 요지는 한마디로 '실천하며 살았느냐?'는 것이었는데, 당당하던 그가 그 부분에서 자신감을 상실한 채 근심하며 돌아갔다는 것을 보면, 그의 삶은 생각만의 실천이었다는 것이지요. 행동이 따라주지 않은 관념적인 신앙이었음을 잘 알 수 있습니다. 성도들 중에 '나는 그래도 꽤 괜찮은 신앙인이야. 십계명이나 하나님의 말씀을 그런대로 잘 지키면서 살아가고 있으니까...'라고 착각한다면 이 부자 청년의 경우와 조금도 다르지 않을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오늘 이 말씀이 제3자를 위한 말씀으로 여러분 귀에 들려진다면, 듣기에는 편안하시겠지만 전혀 은혜는 되지 않을 것입니다. 하지만 그것이 나를 향한 말씀, 곧 레마가 되어 여러분의 삶에 적용된다면 여러분들은 오늘 대단히 중요한 은혜의 자리에 계신 줄로 믿습니다.

그러나 불행하게도 젊은 부자는 자신을 향한 레마의 말씀을 듣고 '근심하며 돌아갔다' 고 했습니다. 요즘 말로 하면 시험받고 돌아갔다는 것이지요. 주님의 말씀을 듣고도 시험받고 돌아가는 사람이 있다면, 목사의 설교를 듣고 시험에 들었다며 교회를 나오니 안나오니 하는 일은 별로 놀랄 일이 아니것 같습니다. 가끔 저는 그렇게 위로받기도 한답니다.

젊은 관원이었던 이 사람이 시험에 들어 주님을 떠날 수 밖에 없었던 진정한 이유는 무엇이었을까? 저는 오늘 이 문제를 여러분과 고민해 보고 싶습니다. 누가복음에서는 그를 관원이라고 하였고, 마태복음과 마가복음은 그가 부자였다고 하였습니다. 결국 그는 부자였고, 관원이었고 더구나 젊은이였습니다. 환상적인 인생의 구조를 가지고 있었다는 말입니다. 지위와 부와 젊음까지 소유한 그는 부족할데 없는 사람이었습니다.

대개 사람들은 물질적으로 부를 누릴만 하여 여행이라도 갈만 하면 그 땐 팔, 다리 쑤셔서 거동이 자유롭지 못합니다. 자식들이 '여행 좀 다녀오세요. 온천 좀 다녀오세요' 할때면 이미 건강은 남의 애기란 말입니다. 명예가 좀 생겼나보다 하면 인생을 자랑하기엔 너무나도 짧은 것이 한이지요. 이것이 일반적인 삶의 구조인데 지금 이 주인공은 세 가지를 모두 가지고 있어요. 일찍 출세한 사람입니다. 일찍 성공한 사람입니다. 뭐가 부족하겠습니까? 거기에 믿음까지 있습니다. 어릴 적부터 계명을 지키며 살았다고 말하는 것을 보면 일찍부터 신앙생활을 한 것 같습니다. 세상 모든 사람들의 부러움을 한 몸에 받으며 인생의 모델이 되기에 충분한 조건들을 그는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주님은 그에게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네게 한 가지 부족한 것이 있노라' 저는 이 본문 말씀을 생각하면 옛 일이 떠오릅니다. 1976년으로 기억되는데, 제가 신학교 3학년 때 교육 전도사로서 첫 번째 주일 저녁 헌신예배 설교를 할 때입니다. 오늘 본문은 마가복음 10장입니다만 그때 저는 누가복음 18장 본문을 가지고 '한 가지 부족'이라는 제목으로 설교한 기억이 납니다. 저의 공식적인 첫 번째 설교였어요. 그 이후 수없이 많은 설교를 하였지만 제가 한 설교의 본문이나 제목을 다 기억하기 어렵습니다만, 그 날의 설교는 본문과 제목을 아직도 기억하고 있습니다.

특별히 그 날이 기억이 나는 이유는 두 가지입니다. 아마도 저녁예배에 500명쯤 모인 것 같은데, 그 많은 성도들 앞에서 설교 하면서 얼마나 떨었는지, 사시나무 떨 듯 했으니까요. 그런 와중에서도 성도들이 '교육전도사 저 양반 저렇게 떨면 어떻하나?' 할까봐 발꿈치를 들고 설교했던 기억이 납니다. 수 많은 성도들의 얼굴은 제대로 보이지 않고 마치 안개 낀 것처럼 뿌였게만 보였습니다. 지금은 설교 시간에 저 끝에서 손을 만지작 거리는 사람도 누구인지 알 수 있습니다만 .....

오늘 주님께서는 이 부자 청년 관헌에게 '네게 한가지 부족한 것이 있다'라고 지적합니다. 청년은 주님으로부터 완벽하다는 칭찬을 기대했는데 오히려 부족하다는 어떻게 보면 책망을 받았습니다. 하지만 우리는 주님께서 그가 가지고 있는 문제를 지적하실 때의 동기를 주목하여야 합니다. 21절에 보면, '예수께서 그를 보시고 사랑하사 가라사대...' 주님께서 그에게 말씀하실 때의 동기는 다름아닌 사랑이었습니다. 할렐루야 ! 미워해서가 아닙니다. '너 한번 나한테 망신 당해봐라' 이런 의도가 아니라 그의 영혼을 불쌍히 여기고 사랑하기 때문에 그의 부족한 것을 지적해 주셨다는 말입니다.

성도 여러분, 제가 여러분의 신앙 생활에 부족한 것을 혹 지적할때도 그것 때문에 괜히 시험 들지 마세요. 아멘?... 아멘!... 감사합니다. 왜냐하면 여러분을 사랑하기 때문입니다. 사랑으로 다가감을 인정받을 때 우리는 말씀으로 인하여 시험들거나 근심할 이유가 없을 줄로 믿습니다. 목회자가 때로는 따뜻함과 다정다감한 모습으로 ,때로는 불같이 강하고 냉정한 모습으로 다가갈 수 도 있습니다. 그러나 그 모든 것의 동기는 사랑인 줄로 믿습니다.

그러면 그에게 무엇이 부족하다는 말입니까? 21절에 보니까 '가서 네게 있는 것을 팔아 가난한 자들에게 주라' 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여기에서 주목할 것이 있는데 바로 3개의 동사형 어휘입니다. '가서(가다)... 팔아(팔다)...주라(주다)... 굳이 동사의 의미를 강조한 것은 신앙생활이란 곧 사랑의 실천임을 강조하기 위함입니다. 혹자는 말합니다. 사랑이란 명사가 아니라 동사라고 말입니다. 우리의 행동과 결단이 동반되어야 하는 삶을 주님은 요청하신 것이지요. 주님은 그의 한가지 부족함을 채우기 위해서 고통받고 있는 형제들이 있는 삶의 현장 속으로 '가라'고 하셨고, 넉넉하게 축복으로 베푸신 물질들을 형제들을 위해 '팔라'고 하셨고, 그것이 필요한 형제들에게 '나누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사실 우리는 작은 것도 나눈다고 하는 것이 결코 쉬운 일이 아님을 고백합니다. 여러분들이 가진 것을 이웃들과 나누라고 주님께서 말씀하신다면, 그들과 나눌 수 있는 것이 무엇인가요? 삭개오 집을 방문하셨던 주님은 그로부터 놀라운 고백을 들으셨습니다. '토색한 것이 있다면 4 배를 갚겠고, 가진 것의 절반은 가난한 이웃을 위해 쓰겠습니다' 이제 우리는 삭개오의 실천적 결단에 도전을 받으며 구체적으로 무엇을 나누며 살아야 할지를 고민해야 하겠습니다.

용인의 어느 가정은 문중의 땅이 너무 많아서 몇 살되지 않은 증손자들에게까지 수 억원씩 분배를 해주었는데, 정작 집안의 여성들에게는 한 푼도 줄 수 없다고 하여 재판까지 간 경우였습니다. 문중의 내규에는 여자에게는 상속할 수 없다고 되어있었지만, 최근의 상속법에서는 시집간 딸들에게도, 들어온 사위에게도 똑같이 상속을 하게 되어 있어 갈등을 빚은 경우입니다.

그런데 TV에서 비춰주는 장면을 보니까 상상을 초월하는 모습들이 보여지고 있었습니다. 문중의 가장 어른이 되는 할아버지를 향해서 손자 뻘 되는 여성들이 손가락질하면서 입에 담지 못하는 욕을 하는 모습, 서로의 소송 대리인인 변호사를 고액에 고용하여 법정 싸움하는 모습을 보면서 이건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지요. 부모와 자식간의 관계, 어른과 젊은이의 관계, 존경하고 존경 받는 관계가 완전히 깨져버린 비극이었습니다.

법정 싸움 끝에 얼마의 돈이 그들의 손에 주어진들 만신창이가 된 그들의 관계가 회복되겠습니까? 우리 주변에도 물질 때문에 평화가 깨진 가정들이 있을 거예요. 성경은 분명히 말슴합니다. 물질은 삶의 도구이지 목적이 아니라고 말입니다. 바울 사도는 이 부분을 더 구체적으로 선언합니다. ' 너희가 먹든지 마시든지 무엇을 하든지 오직 주의 영광을 위하여 하라'

지금 부자 청년은 주님과 물질 사이에서 심각한 고민을 하고 있는 거예요. '주님의 말씀을 따를 것인가? 아니면 내 방식대로 살 것인가...' 우리 성도들에게도 이것이 제일 어려운 문제일 것입니다. 그래서 오늘 말씀의 제목을 '당신의 우선 순위는 무엇입니까?'라고 정한 것입니다. 주님의 말씀만 있고 내 생각은 없거나, 환경적인 도전이 없을 때에는 얼마나 신앙생활하기가 좋아요. 그런데 나의 삶의 방법과 주님의 말씀이 동시에 주어질 때, 우리는 고민하게 됩니다.

멀리서 예를 찾을 것도 없습니다. 내일부터 있을 전교인 수련회가 여러분들에게는 고민거리이지요. 직장 때문에 정말 불가피하게 참석하지 못할 분도 계실 것입니다. 이번 경우, 회비의 절반을 부담해 드리기 때문에 물질때문에 부담되어 참석이 어렵다는 말씀은 하기 어려울 거예요.

좀더 구체적으로 얘기해 본다면 참석하기 어려운 분들의 가장 큰 이유는 오히려 여러분들의 경제적인 넉넉함 때문입니다. 올해 우리 국민이 휴가때 쓸 예상 비용이 평균 30-40만원이라는 통계가 나와 있어요. 약 40%의 사람이 그 정도의 휴가비를 쓰겠다고 했어요. 자가용이 없었다면 수련회를 갈텐데 그 놈의 자가용이 문제예요.

제가 준비위원들 보고 그랬어요. 우리가 개척한지 5년 뒤부터 격년으로 전교인 수련회라는 걸 시작했는데, 이제 7회니까 15년되었어요. 하지만 우리 교회의 교세가 지금의 절반 밖에 안될 7-8년 전에도 평균 250명은 참석을 하였다고 말입니다. 무엇을 얘기하는 건지 아십니까? 하나님이 주신 물질적 축복 때문에 오히려 하나님의 일, 공동체의 일에서 멀어져 가고 있다는 거예요. 사실 수련회는 선택 사항이 아니라 모든 성도가 참여하여 함께 은혜받고 친교를 나누어야 할 의무사항입니다.

정상적인 학생이라면, 학기중에 제대로 하지 못했던 과목들을 방학 중에 보충하여 정상적인 학업을 하는 것 처럼, 성도들이 평상시 소홀하였던 성도간의 친교나 은혜받는 일에 수련회 처럼 좋은 기회가 없다는 것이지요. 그러므로 이를 위하여 휴가를 내어서라도 가야 할 일이고, 일이 있다면 미루어서라도 가야 할 일이 수련회라는 말입니다. 그런데 최근에는 젊은 층을 중심으로 가족 단위로 따로 가는 일들이 많아져 공동체 사역에 큰 어려움이 있은 것이 사실입니다. 그러므로 우선 순위의 문제는 사실 신앙고백적인 결단도 필요하고 희생의 마음도 따라 주어야 가능한 일이지요. 하지만 이 단계를 넘어서지 못하면 우리는 주님의 제자로서의 길을 가기가 어려운 것입니다.


두 번째 이유는 무엇인가요? 22절에 보면 '이 말씀으로 인하여....' 쉽게 얘기하면 말씀 때문에 시험받았다는 것입니다. 가끔 설교 때문에 시험된다는 얘기를 듣지요. '목사님, 그분이 요즘 안나와요' '왜요?' '목사님 설교에 시험받았나봐요' 시험에 들었다는 분들을 전도사님들이 가서 심방해 보면 대개 이렇게 이야기를 한다고 합니다. '어쩌면 목사님이 그렇게 내 얘기만 하느냐? 누가 가서 고자질 한 것 아니냐?' 참 불행한 일이예요. 그 분은 바로 그 주간, 그 시간이 최고의 은혜를 받을 수 있는 기회였는데 사탄의 유혹으로 실족의 길로 가 버린 것입니다.

주님께서 마지막에 뭐라고 말씀하십니까? 29절에 '나를 위하여 집이나 부모나 자식이나 어미나 아비나 전토를 버린 자는 복이 있도다' 두렵지 않습니까? 주님을 위해서 자신의 주변을 정리한다는 것이 쉬운 일이 아니잖아요. 하지만 제자들이 고백합니다. '우리는 주님을 위하여 모든 것을 버렸나이다'

주님의 제자가 된다고 하는 말은 버릴 수 있는 용기와 믿음을 가졌음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이 부자 청년이 먼저 해야 할 것은 가서 모든 것을 팔아 나누는 일이었습니다. 죽고자 하는 자는 살고 자신을 위해 살고자 하는 자는 죽으리라는 주님의 역설적인 말씀이 믿어져야 한다는 말씀입니다. 30절에 보니까 '금생에 있어서 집과 형제와 자매와 모친과 자식과 전토를 100배나 받고.....' 이렇게 놀라운 축복의 말씀이 또 어디에 있습니까? 즉 우리가 주를 위하여 버려야 한다는 이 말씀은 우선 순위가 하나님에게 먼저 있어야 함을 강조한 말씀인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들은 이제 결코 주님보다 앞서지 않기를 바랍니다. 기도보다 앞서지 않기를 바랍니다. 말씀보다 앞서지 않기를 바랍니다. 평안의교회가 20년 동안 많은 환경적, 경제적인 어려움이 있었지만 하나님의 거룩하신 역사 속에 중단없는 선교의 확장과 구제와 봉사를 통하여 오히려 교회는 날로 부흥함이 그 증거인줄 믿습니다.

저 밀레니엄의 두 사역, p.p.m 센타봉헌과 샬롬복지센타 건축이라는 우리로서는 감당할 수 없는 사명을 주셨지만, 믿음으로 순종하며 나아갈 때 오히려 교회가 강건해지고 있지 않습니까? 쓰면 쓸수록 더하시는 하나님의 축복을 맛보시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주를 위해서 죽고자 하는 자는 살리라' 주님은 젊은 부자 관헌에게 이 비밀을 말씀하고 있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평안의 성도 여러분들에게 있어서도 주님의 명령이 여러분 삶에 있어서 제일의 우선 순위가 되도록 믿음으로 결단되어짐으로 언제나 그 나라와 그 의를 먼저 구할 수 있는 복된 삶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간절히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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