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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왕의 눈물 (막 11:1-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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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이 살면서 인정받고 산다는 건 참으로 기분 좋은 일입니다. 며칠 전 뉴스에서는 월드컵에서 열심히 뛰었던 선수들 중 몇몇이 해외로 진출하게 되었는데 특별히 터어키 프로리그로 진출하는 이을용 선수는 참 보기 좋았습니다. 터어키 프로리그의 3 대 명문 팀 중에 하나인 '스트라브존스포로'에 무려 50억원의 이적료를 받고 떠나는 그가 자랑스럽기 까지 하였습니다.

이스탄불 공항에 도착하였을 때 팬들의 열렬한 환영은 우리 나라 부천 SK에서 뛸 때보다 훨씬 더하였는데, 공항에서 그를 기다리던 팬들은 이을용 선수를 무등을 태워 '리용!, 리용!'하면서 환호하며 공항을 빠져나갔고, 데뷔전도 아닌데 감독의 배려로 후반전 15 분만 뛰었을 때도 그 날 경기의 입장권이 매진되었고, 그 지역의 스포츠 신문들은 온통 이을용 선수에 관한 기사로 도배를 하다시피 하였는데 판매량이 무려 50%나 늘었다는 등 가히 이을용선수에 대한 관심과 인기는 폭발적이었습니다.

반면에 오늘 주님께서 예루살렘에 입성하시면서 타신 것은 작은 새끼 나귀였는데 제자들이 자기들의 겉옷을 나귀의 등에 얹어 주님이 타시도록 하였고 , 백성들은 자기의 겉옷이나 나뭇가지들을 베어다가 길에 깔아 드린 후 '호산나'를 연호하며 앞 뒤로 행렬을 이루었습니다. '이제 우리를 구원하소서'라는 뜻을 가진 '호산나' 연호 속에 주님은 예루살렘 성으로 들어가신 것입니다.

하지만 누가복음 19장에 보면 예루살렘 성에 입성 하시기 전, 주님은 그 성을 바라보시며 우셨다고 하였습니다. 곧 있을 예루살렘 입성시, 백성들의 환호와 기대를 한 몸에 안고 계시기에 매우 흥분되고 기분 좋아야 할 그 시간에 주님은 눈물을 보이신 것입니다. 그리고 주님은 선포하셨습니다. '날이 이르면 네 원수들이 토성을 쌓고 너희를 사면에 가두고 너와 네 자식들을 땅에 메어치며 돌 위에 돌 하나도 남기지 아니하리라' 어떻게 보면 저주 같은 이스라엘의 멸망을 예언하셨던 것입니다.

실제로 약 40년 후인 A.D 70년 경에 로마의 티투스 장군에 의하여 포위된 예루살렘은 물과 양식의 부족으로 인하여 백성들은 지옥 같은 삶을 살아야만 했습니다. 수 많은 군대를 이끌고 예루살렘을 포위한 티투스 장군은 공격은 하지 않고 성 주변에 주둔한 뒤 장기전을 펼치며 성안의 이스라엘 백성들을 굶겨 죽일 작정이었습니다. 시온 산이 중심이 된 예루살렘은 바위 산으로 이루어져 있어서 곡식이나 물이 한방울도 나오지 않는 곳이었기에 백성들의 고통은 말로 다 할 수 없었습니다. 마실 물은 성 밖 기혼샘의 물을 히스기야 터널을 통하여 역류시켜 실로암 못으로 끌어들여서 먹을 수 있었지만 양식은 곧 고갈되었기 때문입니다.

과거 이스라엘의 역사에서도 이와 같은 일이 있었습니다. 열왕기상 6장에 보면, 아람 왕 벤하닷이 사마리아를 에워쌌을 때 백성들이 굶주린 나머지 ' 네 아들을 내라. 우리가 오늘날 먹고 내일은 내 아들을 먹자'라며 싸우는 여인들의 모습을 성을 순찰하던 왕이 보고서 왕이 옷을 찢으며 탄식하기도 하였고, 열왕기하 18장에 보면, 앗수르왕 살만에셀이 사마리아로 쳐들어 왔을 때, 그 후 앗수르왕 산헤립이 유다를 쳐들어 왔을 때, 앗수르의 장군 랍사게는 예루살렘 백성들로 하여금 자기의 대변을 먹게하고 자기의 소변을 마시게 하겠노라고 위협한 때도 있었습니다.

최근 우리나라에서도 과거 이와같은 사실이 있었음을 알려주는 사료가 발견되어 충격을 주고 있습니다. '너무나 기근이 들고 배가 고픈 나머지 사람들이 수도 없이 굶어죽었고, 굶어죽은 사람이 생기면 벌떼 같이 사람들이 모여들어 그 사람의 살을 뜯어먹었는데 불행하게도 그들도 며칠 후에는 또 죽었다'라고 기록이 되어 있어요. 저는 그 기록을 보면서 '예루살렘의 상황이 이와 같겠구나'라는 확신을 가지게 되었습니다.

결국 예루살렘은 굶어죽다 못해서 다른 사람들의 인육을 먹는 지경에 까지 이르다가 항복을 하였지만 로마의 군사들은 무자비하게 백성들을 학살하였고, 군사들은 예루살렘 성을 모조리 무너뜨리고 말았습니다. 왜냐하면 그들에게 이상한 루머가 퍼졌기 때문입니다. '이스라엘 사람들은 보화를 돌 틈에 감추어 둔다' 라는 것이었는데 이를 확인하기 위하여 군사들은 지렛대를 가지고 엄청난 규모의 돌들을 성 아래로 밀어 떨어뜨려 결국 성은 돌 위에 돌 하나도 남김없이 무너져 버리고 말았습니다.

백성의 일부는 유대 광야의 요새 '맛사다'로 피신하여 끝까지 버티었지만 그곳으로 추격해온 티투스 장군은 예루살렘 성을 포위했던 것 처럼 그들이 요새에서 굶어죽거나 항복하기만을 기다리는 장기전을 펼쳤는데, 생각보다 저항하는 기간이 오래 걸리자 티투스는 맛사다 요새와 같은 높이로 토성을 쌓기로 하고 백성들을 동원하여 흙 성을 쌓자 '맛사다'에 있던 이스라엘의 마지막 용사들은 이렇게 최후 결정을 하였습니다. '할례 받지 못한 이방인에게 죽느니 보다 우리 손으로 죽자....' 그리고는 아버지가 가족을 죽이고 마지막으로 자신이 자결하는 방법으로 모두가 죽음을 결행하였고, 로마의 군대가 사다리를 놓고 요새를 점령하였을 때에는 이미 그곳에는 한 사람도 살아있는 사람이 없었습니다.

A.D 70년에 이스라엘은 이렇게 멸망을 하였습니다. 그 과정에서 살아남은 몇몇 여성과 아이들을 통하여 1세기 유명한 역사가인 요셉푸스에게 이러한 사실이 알려지게 되었고 그의 '이스라엘 역사'라는 책을 통하여 또 다시 후대에 당시의 처절했던 상황이 알려지게 되었습니다.

저는 일주일 내내 이 말씀을 묵상하면서 주님을 환호하던 이스라엘 백성과 이을용 선수를 환호하던 터어키 팬들의 환호하던 장면이 크로즈업 되어 많은 것을 생각하게 되었습니다.

한국과 터어키가 3, 4위전을 벌이던 날, 대부분의 신문들은 한국과 터어키가 피로 맺은 혈맹의 나라, 형제의 나라라고 썼을 때 서울에 주재하고 있던 한 일본 기자는 이런 글을 썼습니다. '한국과 터어키가 언제부터 피를 나눈 혈맹의 국가였더냐? 언제부터 한국이 터어키를 응원했느냐?' 라고 말입니다.

한국과 이탈리아가 경기를 하던 날 대부분의 일본인들은 한국팀을 응원한 것으로 통계가 나온 반면, 일본과 터어키가 경기 하던 날은 대부분의 한국인들이 터어키팀를 응원하여 매우 대조적이었습니다. 아주 중요한 관점이예요. 한국은 월드컵 동시 개최국인 일본보다 성적이 앞서기를 바랬고 그러한 심리적 기대가 자연스럽게 터어키를 응원하면서 과거의 잊혀진 역사까지 들추어 내면서 응원의 명분을 찾으려 했다고 일본 기자는 평가하고 있었습니다.

반면 일본인들은 이탈리아보다는 한국을 더 응원했었는데 거기에 '우리가 한국을 응원해도 축구 강국 이탈리아를 이길 수는 없다'는 묘한 심리적인 배려가 깔려 있었다는 것이지요. 즉 일본인들은 월드컵 동시 개최국이자 이웃나라인 한국을 응원했다는 명분과 그래도 한국팀이 이탈리아를 이길수는 없다는 심리적 안도감을 함께 즐겼다는 것입니다. 결국 두 나라 모두 엄격하게 보면 순수한 응원은 아니었다는 것이지요.

성도 여러분들도 아시지만 '호산나'하면서 주님을 환호했던 대부분의 사람들은 곧 주님을 십자가에 못 박으라고 외치는 군중으로 바뀌어 버렸지요. 저는 확신합니다. 결코 군중이라고 하는 집단은 신뢰할 수 없다고 하는 거예요. 그러므로 군중들의 환호에 들뜰 이유도 없고, 군중들의 박수에 감격할 일도 없다고 하는 거예요. 하나님께서는 성경 66권 어느 곳을 보아도 군중들과 일하신 적이 없습니다. 주님은 12명의 제자를 부르시어 3년 반이나 훈련시키셨고, 그 중 11명은 주님을 위하여 땅 끝까지 증인의 사명을 감당하다가 순교의 삶을 이룬줄 믿습니다. 복음은 제자들을 통해 전파된 것이지 군중들을 통해 이루어지지 않았다는 말씀입니다.

저는 이 자리에 있는 수많은 평안의 성도들도 결코 군중이기를 원치 않습니다. 그것은 주님이 원하지 않는 삶이며
여러분 자신들도 원하지 않을 것입니다. 환란과 핍박 중에서도 증인의 삶을 살아가는 주의 제자가 되시기를 간절히 축원합니다.


제자들은 새끼 나귀를 얻기 위해서 보냄을 받았습니다. 하지만 얼마나 황당한 일인가요? 나귀 주인과 그것을 이용하기로 계약을 한 일도 없고, 나귀 주인이 주님을 위해 그것을 내놓겠다고 기증한 적도 없는데 주님은 예루살렘 성이 가까워 오자 두 제자를 보내시며 나귀새끼를 가지고 오라고 하신것입니다. 대책이 별로 없는 그런 주님의 명령에 2명의 제자들은 고민을 많이 했을 것입니다. '이거 도대체 우리가 어떻게 해야 하나? 정말 나귀는 있을 것인가? 혹 있다면 그것을 끌고오다가 도둑으로 몰려 봉변이나 당하지 않을까?' 이런저런 염려로 두 사람의 대화는 계속 되었으리라 짐작합니다.

그러나 오늘 우리는 6절의 말씀을 보며 큰 감동을 받게 됩니다. 제자들이 예수께서 이르신 대로 말하였더니 그들이 허락한 줄로 믿습니다. 제자들 역시 그들 나름대로의 생각과 비판적 의문들이 있었겠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주님의 말씀대로 결론을 내었다는 것입니다. 곧 주님께서 말씀하신대로 말하고 행동했다는 것이지요.

아브라함의 믿음을 기억합니다. 어느 날 하나님께서는 늘상 아브라함이 하나님께 번제 제사를 드리던 것과는 다르게 '이번에는 너의 아들 이삭, 100세에 얻은 독자를 제물로 드려라'는 아주 이상한 명령을 하시게 됩니다. 왜냐하면 하나님께 드리는 정상적인 제사에 있어서는 사람을 제물로 드리는 법이 없었기 때문입니다. 가나안 족속들이나 모압, 암몬 족속들에게서는 사람을 제물로 드리는 일이 종종 있었습니다 만은 하나님께 드리는 제사에서 사람을 제물로 드리는 일은 결코 없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지금 아브라함에게 실천하기 어려운 명령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얼마나 아브라함은 고민했겠습니까? 고민하던 그는 결국 아들과 함께 모리아 산으로 출발하였지만. 아들의 질문에 다시한번 당황하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창세기 22장 7절에 보면 이렇게 기록되어 있습니다. '불과 나무는 있거니와 번제할 어린 양은 어디 있나이까?' 불도 있고 장작도 있지만 가장 중요한 제물이 빠졌다는 것이지요.

그 때에 아버지가 아들에게 말합니다. '아들아. 번제할 어린 양은 하나님이 자기를 위하여 친히 준비하시라라' 이때만 해도 아브라함의 이 대답은 희망사항을 넘어 간절한 기도의 제목이었을 것입니다. 하지만 하나님께서는 아브라함이 순종하기로 결심하고 모리아 산을 향해 떠났을 때 이미 준비해 두신 줄 믿습니다. 할렐루야 ! 히브리서 기자는 이 장면을 이렇게 고백하고 있습니다. '아브라함은 시험을 받을 때에 믿음으로 이삭을 드렸으니......저가 하나님이 능히 죽은자 가운데서 다시 살리실 줄로 생각한지라' (히 11:17-19) 이미 아브라함에겐 생명을 주관하시는 전능하신 하나님, 엘 샤다이의 확신이 있었는 줄로 믿습니다.

수양을 산 위에 준비해 두신것을 발견한 후에 아브라함이 외쳤던 고백을 기억합니다. '여호와 이레 ! 우리 하나님께서 예비해 두셨습니다. 이 믿음을 가진 모든 사람들에게 여호와의 산에서 예비될 것입니다.' 사실 이 고백은 눈물의 고백이며 생명을 걸었던 믿음의 사람의 절규라고 할 수 있습니다. 믿고 순종하는 성도만이 누릴 수 있는 환희이기도 하지요.

주님이 원하셨던 것은 나귀 새끼 보다 제자들의 순종의 믿음이었습니다. 며칠 전 남북 장관급 회담이 있었습니다만 남쪽에서는 합의 사항이라고 발표를 하였고, 북측에서는 군부에 대한 건의 사항이라며 발표하는 모습을 보면서 지금까지도 그랬지만 앞으로도 그들이 합의 사항을 이행하고 실천한다는 것은 믿기 어렵다는 것을 느끼게 하는 장면이었습니다. 우리 정부 입장에서는 정권 말기에 몸이 달아서 북측에 질질 끌려 다니면서라도 남북 협력에 대한 실적이라도 하나 올리려고 애를 쓰는 모습이 그저 안타까울 따름입니다.

성도 여러분, 주님이 원하시는 것 한가지, 곧 실천입니다. 아무리 약속하면 뭐해요. 실천이 되지 않는데... 여러분들이 아무리 말씀을 다 알고 있으면 뭐하나요? 젊은 부자가 주님 앞에 와서 주의 계명을 다 알고 있다고 했지만 정작 네가 실천할 수 있겠느냐고 요청하셨을 때 그는 근심하며 돌아갔다고 했습니다. 머리 속의 신앙, 알고만 있는 신앙은 변화의 능력이 나타날 수 없음을 잘 보여 주는 장면입니다.

오늘 주님께서는 두 제자에게 그런 실천을 통한 순종을 원하셨고, 그들은 결국 나귀 새끼를 주님이 말씀하신 그대로 실천함으로서 귀한 체험을 한 줄로 믿습니다. 나귀를 가져오는 것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말씀대로 순종하였다는 것이 중요하다고 하는 것입니다.

주님께서 나귀 새끼를 타고 예루살렘에 들어가시는 모습을 보면서 우리는 많은 생각을 해봅니다. 주님의 관심은 외형적인 영광과 자랑이 아니라 오히려 예루살렘과 이스라엘 민족을 향한 눈물이었습니다. 주님을 고난이 있을 예루살렘 성으로 들어가게 한 것은 바로 사랑이었습니다. 곧 있을 멸망과 심판을 바라 보면서 주님은 우셨습니다. 왜 그랬습니까? 그것은 시대마다 하나님의 능력의 종들을 통해서 우상과 범죄의 길로 치닫는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생명의 말씀을 외쳐도 목이 곧은 백성들은 귀도 마음도 열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지금 우리 나라는 모든 면에서 엄청난 성장을 분야마다 이루고 있습니다. 경제적인 분야, 특히 IT 분야나 DVD 분야 그리고 IMT 2000 과 같은 분야에서는 일본을 누르고 세계 1위를 차지하고 있습니다. 정말 놀라운 도약이 아닐 수 없습니다. 그러나 정작 우리의 영적 분야는 얼마나 성장되고 성숙되었는지를 물어야 합니다.

예수님 당시의 영적인 분위기는 이제는 메시야가 올 때가 되었다는 분위기가 가득찬 때였습니다. 갈라디아서 4장 4절에서는 '때가 차매 하나님이 그 아들을 보내셨다'고 강조하고 있습니다. 때가 찼기에 메시야를 기다리는 마음 또한 간절합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있어서 메시아를 기다린다는 말은 왕을 기다린다는 말과 다르지 않습니다.

주님께서 베들레헴에서 탄생하셨을 때 당시 헤롯 왕이 놀라 근방의 2 살 이하의 사내아이들을 다 죽인 사실은 공평과 진실로 오실 평화의 왕에 대한 불의한 왕권의 만행이었습니다. 다. '왕이 오시다니.. 이 땅의 내가 왕인데...' 그러나 평강과 평화의 왕으로 오신 주님을 불의한 헤롯 왕이라도 막을 수는 없었습니다.

이제 백성들은 메시야를 기다립니다. 왕을 기다립니다. 예레미야는 23장 5절에서 이렇게 고백합니다. '나 여호와가 말하노라. 보라. 때가 이르리니 내가 다윗에게 한 의로운 가지를 일으켜서 그가 왕이 되어 지혜롭게 행사하며 세상에서 공평과 정의를 행하리라' 다윗의 후손을 통하여 왕을 보내시겠다는 것입니다. 공평과 정의를 행할 왕으로 보내심을 받은 주님이십니다.

그런데 그 왕께서 새끼 나귀를 타고 성에 입성하는 장면을 보면 예사롭지가 않습니다. 기껏해야 길가에 깔아놓은 백성들의 겉옷과 나뭇가지를 밟고 가시는 주님은 예루살렘 성이 영광과 자랑의 자리가 아닌 고난과 눈물의 자리임을 알고 계셨습니다. 하지만 주님의 그 모습은 당당하였고 품위가 넘쳐 흘렀습니다. 오히려 성전 안에서 매매하는 자들을 내어 쫓으시고 돈바꾸는 자들의 상과 비둘기 파는 자들의 의자를 둘러 엎으셨습니다. 17절에 보면, '기록된 바 내집은 만민의 기도하는 집이라 칭함을 받으리라고 기록되지 않았느냐'며 실천의 삶을 살지 못하는 성전의 지도자들과 백성들을 책망하시기 까지 하셨습니다.

시편 126편 5절에 보면 '눈물로 씨를 뿌리는 자는 기쁨으로 단을 거두리로다' 고 하셨습니다. 눈물이 뭔가요? 섬김과 희생입니다. 섬김과 희생으로 씨를 뿌리면 한 영혼을 구원하고도 남음이 있는 기쁨의 열매를 거두게 하시는 줄로 믿습니다. 열매가 없다면 그것은 분명합니다. 곧 섬김과 희생의 눈물의 씨를 뿌리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이제 곧 다가오는 가을에 열매가 없어 주님 앞에 부끄러워 할 분들이 계실지 모릅니다. 그리고 송구영신 예배가 다가오면 또 이렇게 기도할 지도 모릅니다. '주여 ! 올해에도 365일을 주셨지만 한 영혼도 구원하지 못하였나이다....' 이제는 제발 그런 부끄러운 기도는 그만했으면 좋겠어요. 그 많은 시간, 그 귀한 물질, 그 좋은 재능, 그리고 강건한 몸까지 주셨는데 어찌 그 부끄러운 고백을 또 해야 한다는 말입니까?

눈물의 씨를 뿌리시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섬김과 희생의 씨를 뿌리는 자들 만이 기쁨의 열매를 거둘 수 있기 때문입니다. 오늘 주님께서는 백성들을 향해 눈물의 씨를 뿌리고 계십니다. 왕으로서 이 땅에 오셨지만 , 영광과 존귀, 권위와 힘보다는 사랑과 용서, 섬김과 눈물로 우리에게 다가오셨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십자가에서 고통 받으시는 주님을 바라보며 울었을 때, 누가복음 23장 28절에 보면, 주님께서는 '나를 위하여 울지 말고 너와 너희 자녀를 위하여 울어라'고 부탁하셨습니다. 주님이 손수 우셨을 뿐만 아니라 너희들도 좀 울었으면 좋겠다는 말씀입니다.

부모가 자식을 위해서 울지 않는다면 그건 부모라고 할 수 없습니다. 자녀를 위해 기도하려고 눈만 감아도 눈물이 핑 돌아야지요. 하나님의 축복을 받아야 할 우리의 자녀들이 아직도 믿음생활을 안하고 있거나, 교회를 다녀도 왔다 갔다 왕복 운동하는 수준이라면 곤란하지요.

또 울어야 할 대상이 있습니다. 남편들이 지옥 심판으로 갈 것을 뻔히 알면서도 맨날 얼굴만 쳐다보면서 하하 호호 할 미련한 여성은 없어야 합니다. 등불을 준비 못하여 신랑되신 주님을 영접지 못한 미련한 다섯 처녀의 초라한 모습이 되어서는 안된다는 말씀입니다. 아직도 건강하다며, 아직도 돈이 여유가 있다며 교만한, 그러나 포기할 수 없는 어리석은 영혼을 생각하면 눈물이 안나올 수 없는 일이지요. 주님은 오늘 우리에게 말씀하십니다. '이제는 울 때라'

주님의 눈물은 헛된 눈물이 아니었습니다. 그 눈물은 십자가에서 완성되어 사랑할 수 없는 이들을 사랑하는 능력이 되었고, 용서할 수 없는 이들을 용서하는 능력이 되었습니다. '십자가의 도가 멸망하는 자들에게는 미련한 것이요, 구원을 얻는 우리에게는 하나님의 능력이라'(고전 1:18) 할렐루야 ! 주님은 십자가에서 눈물의 의미를 실천하신 줄 믿습니다. 주님의 사랑에 빚진 우리가 이제 눈물로서 구원의 놀라운 열매들을 맺어 왕의 눈물을 헛되이 하지 않는 삶들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간절히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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