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그인

  • 목록
  • 아래로
  • 위로
  • 쓰기
  • 검색

설교 계명 중의 큰 계명 (막 12:28-34)

첨부 1



서기관 중 한 사람이 주님께 질문을 하였습니다. '계명 중에 어느 계명이 가장 큰 계명입니까?' 사실 이 질문은 서기관만의 궁금증이 아니라 당시 유대인들에게 있어서 가장 큰 관심거리였습니다. 이 궁금한 문제를 당시 가장 존경받고 권위있다고 여긴 주님으로 부터 대답을 듣기 원했던 것입니다. 하지만 사람들은 대부분 자기의 전문적인 지식이나 관심하는 범위 안에서 대답하기 마련입니다.

예를 들면, 교육학자는 '이 세상의 가치를 교육을 통해서 변화시킬 수 있다'고 믿고 끊임없이 노력하지요. 그런가 하면 윤리학자는 가르치는 것만으로는 되지 않는다면서 이 사회를 변혁시키기 위해서는 '인간의 윤리의식 부터 바꾸어야 한다'고 강조합니다. 또한 정치인은 '내가 대통령이 되면 이 나라를 이렇게 발전시킬 수 있다' 며 무리한 공약을 남발하곤 하지요. 모든 분야가 다 자기의 전문적인 분야에서 얻은 안목으로 세상을 바라보며 진단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오늘 본문에서 서기관의 질문으로 대표되는 이 계명을 생각하면서 정말 계명 중의 첫 째는 무엇일까? 를 생각해 보기를 원합니다. 29절에 보면, 주님께서 두 가지로 대답을 하셨습니다.

'첫 째는 이것이니 너희가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뜻을 다하고, 힘을 다하여 주 너의 하나님을 사랑하라'는 것이라. 쉽게 말하면 하나님 사랑이 계명 중의 첫 째라는 말씀입니다.
'둘 째는 이것이니 네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라'는 것이라.

성도 여러분, 바보도 자기 몸은 귀하게 여기지요. 자식이나 혹은 배우자를 돌보지 않는 무책임한 사람도 자기 몸은 소중하게 여길줄 압니다. 철부지 어린아이들 조차도 땅에 떨어진 과자나 음식물을 최소한 옷에 닦아서 먹을 줄 안답니다. 결국 두 계명은 하나의 주제로 합치면 사랑이라는 계명으로 정리가 되겠지요. '계명 중의 계명은 사랑이다' 그래서 바울 사도도 '믿음, 소망, 사랑 이 세 가지는 항상 있을 것인데 그 중의 제일은 사랑이라'고 선언한 줄로 믿습니다.

바울 사도는 고린도 교회가 수 많은 은사를 받아 힘있는 사역을 감당한다는 소식에 기뻐했지만, 그 은사가 한 분 하나님으로부터 왔고, 한 분 성령께서 역사하심을 잊어서는 안된다고 강조했습니다. 방언하는 은사, 병 고치는 은사, 통역하는 은사, 가르치는 은사, 권능과 능력 행하는 은사, 이렇듯 다양한 은사들이 그들에게 주어졌지만 놀랍게도 바울 사도는 고전 12장31절에서 이렇게 성도들에게 권면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너희가 더욱 큰 은사를 사모하라'

결국 고린도전서 13장으로 넘어와서는 사랑에 대한 말씀을 하시는데, 그것은 다시 말하면 우리가 가질 수 있는 모든 은사들보다 더 귀하고 귀한 은사는 '사랑'임을 확인시키고 있는 것입니다.

사랑은 은사이기도 하고, 또 사랑은 열매이기도 합니다. 갈라디아서 5장22절에서는 성령의 9가지 열매 중에 첫 번째 열매로 사랑이 소개되어져 있어요. 또한 고전 13장13절에서는 성도의 덕목중에 제일은 사랑이라고 소개되어져 있는 것을 보면, 어느 누가 보아도 사랑이 가장 귀하고 귀하다는 것을 잘 알 수 있습니다.

강원도 강릉과 경북 김천 지역은 최근 태풍 '루사'로 인하여 큰 피해를 입은 대표적 지역입니다. 이번에 그곳에 봉사활동차 다녀왔던 목사님 한 분이 이런 이야기를 하세요. 참으로 놀라운 것은 가보니까 자원봉사 온 사람들이 하루에 약 6,000-7,000명 정도 되는데, 그 중에서 군인을 빼놓고는 거의가 중년 이상의 나이가 든 분 들이었답니다. 간혹 젊은이들은 봉사를 위해 부모님과 함께 온 자녀들이어서 순수한 젊은이들은 많지않았다며 안타까워하는 말씀을 들었습니다.

저는 그 말씀을 들으면서 지난 번 전교인 수련회회 때 젊은이들이 많이 보이지 않았던 사실과 유추해 보았습니다. 당시 어떤 성도께서는 '전교인 수련회에 젊은 집사 부부들은 다 딴 데로 빠져버리고 중년 이상의 성도들만 참석을 한것 같다'며 안타까워하기도 했습니다. 교회 밖이나 교회 안이나 젊은이들이 문제인 것 같아요. 젊은이라고 하면 30대 중반 이하라고 해야 될 것 같은데 말입니다. 문제는 사회 의식이나 관심이 없는 거예요. 공동체 일에는 별로 관심이 없고 가족별로 따로 가야 만족해 하는 신현대주의가 지배하는 삶의 구조가 문제입니다.

공동체를 위해 희생하지 않으려고 해요. 다 그런 것은 아니겠지만 전체적인 분위기가 사회적으로도 그렇고 교회적으로도 그렇기에 우리가 함께 고민하며 풀어야 할 숙제인것 같습니다. 내 몸을 사랑한다고 하는 것, 이것은 참 잘하는데, 내 이웃을 내 몸처럼 사랑한다는 일에는 너무나 서투른 것이 사실입니다.

사랑이란 마음을 주는 것입니다. 공동체 일에 마음을 주고 시간을 주어 동참하는 것이 실천적인 사랑이지요. 교회를 사랑한다고 하는 의미는 그런면에서 대단히 실제적인 것입니다. 동행한다는 것은 곧 거기에는 마음도 가고 시간도 가고 물질도 가야 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럴 때 우리는 그를 바라보면서 '저 분이 교회를 사랑하고 있구나'라고 생각하며 기뻐하는 것입니다.

주님께서 사랑에 대한 두 가지 기준을 말씀하자 서기관이 고백을 합니다. '정말 옳습니다' 라며 하나님은 유일하신 주이시기에 신앙 고백 중 가장 우선적이고 변함없어야 할 고백 임을 서기관은 고백하고 있는 줄 믿습니다.

예배가 시작되면 사도신경을 고백합니다. 보수적인 교단에 속한 분들은 간단한 기도회만 모여도 '사도신경으로 기도회를 시작하겠습니다' 그럴 정도입니다. 최근에 미국에 안식년을 대신하여 휴가를 다녀오신 목사님이 계셨는데 그분의 말씀이 최근 미국교회의 예배 형태가 많이 변했다면서 그 중에서도 예배 순서 중에 사도신경을 뺀 교회들이 많아지기 시작했다는 거예요.

사실 성경 전체의 말씀을 신학적으로 다듬은 것이 사도신경인데 그 사도신경을 고백하는 것이 생략되거나 무시된다면 이것은 대단히 우려할만한 일이지요. 사도신경에는 창조주되신 하나님에 대한 고백, 죄를 대속하시기 위해 이 땅에 오셔서 십자가를 지신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고백, 우리의 삶속에 언제나 동행하시는 성령님에 대한 고백, 재림하실 주님과 부활 소망에 대한 고백 등이 담겨져 있는데, 이러한 고백을 포기한다면 과연 우리의 신앙이 유지될 수 있을까요?

그런 의미에서 서기관은 주님 앞에서 아주 중요한 고백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한분이십니다' 유일 신앙을 고백하는 것이지요. 저는 세상이 아무리 편의주의로 바뀌고 인본주의 사상으로 물결치더라도 이 분명한 신앙고백은 흔들리지 않아야 한다고 믿습니다.

그러면서 서기관은 자신의 신앙고백을 거기다가 포함시킵니다. 전체로 드리는 번제물보다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과 이웃 사랑하는 것이 더 낫다고 말입니다. 신앙이란 자신의 언어로 고백되어져야 힘이 있어요. 그래서 가끔 베델성서대학 공부 시간에 '이 부분을 당신의 언어로 표현해 보세요'라고 주문할 때가 있어요. 사업을 하시는 분은 사업가의 마인드를 가지고, 가르치는 분은 교사의 마인드를 가지고, 학생은 배우는 이의 마인드를 가지고 해보는 거예요.

주님께서는 서기관이 그런 부분에 있어서 익숙했던 자신의 삶을 비유해서 '모든 번제물을 드리는 것보다 하나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하는 것이 더 귀하고 낫습니다'라고 고백하고 것을 보시고 너무나 기뻐하셨습니다. 사실 호세아서 6장 6절에도 '나는 인애를 원하고 제사를 원치 아니하며...'라는 말씀이 있습니다. 이 말은 너희들에게서 예배가 필요가 없다는 말씀이 아니라 내가 정말 원하는 우선적인 것이 다름아닌 사랑임을 강조한 것입니다.

우리 주님께서 감격하셨습니다. 34절에 보면, 주님께서 놀라운 선언을 하고 계십니다. '네가 하나님 나라에 멀지 않도다' 얼마나 놀라운 축복의 말씀입니까? 복음서 중에 그와 같은 축복의 선언이 누가복음 23장에도 있습니다. 주님께서 십자가에 달리셨을 때 좌우편에 강도가 함께 달렸지요. 그런데 그 중의 하나는 주님의 비방하고 또 하나는 자기의 죄를 인정하고 자신은 마땅히 죽어야 할 죄인이지만, 주님은 그런 분이 아님을 고백하고 마지막 때에 주님의 은혜를 요청했을 때 눅 23장43절에서 주님은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오늘 네가 나와 함께 낙원에 있으리라' 언제? 오늘입니다. 구원은 오늘 이루어지는 줄 믿습니다.

뿐만 아니라 누가복음 19장에 보면, 삭개오가 자신의 삶에 대한 회개와 고백을 주님 앞에 드렸을 때 주님께서 9절에 '오늘 구원이 이 집에 이르렀으니 이 사람도 아브라함의 자손이로다' 라고 선언하심을 주목해야 합니다. 오늘입니다. 삭개오의 구원도 오늘 이루어졌고, 십자가상의 강도도 오늘 이루어진 줄로 믿습니다.

오늘은 우리가 일년 중 가장 큰 마음을 가지고 하나님 앞에 감사로 제사를 드리는 시간입니다. 이 뜻깊은 날에 저는 이런 결론을 내리고 싶습니다. 계명 중의 큰 계명, 그것은 사랑이라고 주님께서 말씀하셨는데, 그 사랑의 대상이 하나님과 이웃이라면, 감사라고 하는 실제적 삶의 언어로 주님과 이웃에게 다가가자고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향한 절대적 감사의 고백과 내가 오늘날 여기에까지 이르도록 함께한 주변의 모든 이웃들에 대한 감사가 살아있는 건강한 성도의 생활신앙이 이 풍성한 추수의 계절, 가을에 충만하시기를 간절히 축원합니다.
 

이런 글도 찾아보세요!

공유

facebooktwitterpinterestbandkakao story
퍼머링크

댓글 0

권한이 없습니다. 로그인

신고

"님의 댓글"

이 댓글을 신고 하시겠습니까?

삭제

"님의 댓글"

이 댓글을 삭제하시겠습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