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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가난한 과부의 헌신 (막 12:41-4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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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말씀은 우리 성도들에게는 가장 부담스러울 수 있는 주제입니다. 왜냐하면 돈에 대한 말씀이기 때문입니다. 말씀을 준비하면서 이런 생각을 해 보았습니다. '지난 주일에 추수감사절 예배를 드리고나서 헌금에 대한 주제로 말씀을 나누게 되어 오해는 않받겠구나....' 하는 생각 말입니다. 말씀을 듣는 성도 여러분과 제가 순전한 마음으로 함께 은혜를 나눌 수 있어서 얼마나 감사한지요.

사실 신앙생활을 하는 분들 중에도 돈 얘기만 하면 괜히 긴장되고, 시험에 들었다며 실제로 교회에 나오지 않는 분들도 있음을 우리는 잘 알고 있습니다. '교회 가면 돈 얘기만 하더라. 그래서 못 가겠다' 이런 부정적인 평가들은 그동안 한국 교회가 부흥회나 집회들을 통하여 역기능적인 모습을 보여왔기 때문에 얻은 '자책골'인 줄로 생각됩니다.

그러나 우리는 이 부분에 대해 좀 더 적극적이면 좋겠습니다. '존 칼빈'은 이 부분에 대해 이렇게 말씀하고 있습니다. '문제는 교회가 돈에 대해 이야기하는 것이 아니라, 교회가 돈에 대해 바르게 이야기하지 않는 것이다' 그렇습니다. 말씀을 전하는 동기가 순수하고, 그 말씀을 듣는 우리의 자세가 진지하다면 문제 될 이유가 없다는 것입니다.

'존 웨슬리' 목사님도 이 부분에서 아주 유명한 말씀을 하셨습니다. '나는 주머니가 회개하지 않은 사람의 회개는 믿지 않는다' 그렇지요. 주머니는 지갑이 들어 있는 곳이기에 결국 지갑이란 물질을 대표하는 대명사가 되는 셈입니다. 아무리 우리가 회개한다고 해도 물질에 대한 근본적인 가치관이 변하지 않는다면, 그것은 머리속에서만 이루어진 개념적 회개, 피상적 회개가 될 수 밖에 없다는 것입니다.

한 사람의 물질에 대한 가치관을 알 수 있는 방법은 무엇입니까? 그것은 바로 그 사람의 돈에 대한 씀씀이를 보는 것입니다. 씀씀이를 보면 그의 인격이나 가치관, 나아가 그의 비전까지도 알 수 있기 때문이지요. 가령, 청소년들에게 추석이라고 용돈을 주었을 때 대부분을 오락실에 가서 다 써버리는 것과 필요한 참고서나 저축등을 한다면 여러분은 어느 쪽에 더 호감이 가십니까? 씀씀이는 그의 관심사요 습관이요 결국은 미래의 모습이기도 하기에 중요한 것입니다.

월 100만원 정도 수입이 있는 가정에서 한 달에 외식비로 50만원을 지출한다고 하면, 우리는 그 가정을 건강하고 규모있는 가정이라고 여기지는 않을 것입니다. 왜냐하면 그 돈의 사용에는 사용하는 이의 생각과 계획들이 씀씀이를 통해서 표현되기 때문입니다. 검소함과 사치스러움, 계획성과 충동적 삶의 색깔들이 드러나기 때문입니다.


오늘 주님께서는 예루살렘 성전의 두 번째 뜰인 '여인의 뜰'에 놓여져 있는 헌금궤 앞에 앉으셔서 헌금하는 유대인들의 모습을 보셨습니다. 성소에는 유대인들이 들어갈 수 있었고 그들은 여인의 뜰을 지나야 했습니다. 헌금궤는 언제나 이스라엘 백성들이 드나들 수 있는 여인의 뜰에 놓여 있었는데, 전승에 의하면 예루살렘 성전에 약 10여개의 헌금궤가 놓여 있었고 그 헌금궤는 놋으로 만들어져 있다고 했습니다.

문제는 헌금궤가 놋으로 만들어졌기에 헌금을 하는 유대인들에게는 굉장히 신경이 쓰이는 부분이었습니다. 왜냐하면 당시에는 지폐가 없는 시대이기에 동전을 헌금궤에 넣으면 부딪히면서 소리가 나게 되어 있어요. 멀리 있어도 헌금하는 사람의 소리만 들어도 '이분은 오늘 헌금을 많이 하는구나' 아니면 '이 분은 오늘 헌금을 조금 하는 구나'하고 알 수 있었지요. 그러니 헌금하는 사람의 입장에서 얼마나 신경이 쓰이겠습니까?

평안의교회가 창립된지 20년이 되었습니다. 교회를 창립하기전 목사님을 도와서 사역하는 동안 느꼈던 여러 가지 관심 사항들을 마음에 두고 있었는데, 교회 창립을 통하여 그 부분들을 실천하는 기회가 주어졌습니다. 당시 헌금들을 보면 보통 1,000원 정도였지만, 500원 정도 하시는 분들도 계셨습니다. 그 때 500원이라고 하면 지금의 5,000원 정도는 될 것이지만 아무래도 동전으로 헌금을 드리기에 마음 편한 일은 아니었습니다.

그때 제가 두 가지를 기도하면서 결정을 하였는데, 하나는 전통적으로 헌금 바구니를 돌리면서 헌금을 하던 방식을 좀 더 성숙한 방법으로 드릴 수는 없을까? 하는 것이었고, 결국 예루살렘 성전에서 사용했던 방식으로 성전 입구에 헌금궤를 놓고 들어오는 분들이 자유롭게 헌금을 드리고 예배를 드리도록 한 것이고, 또 하나는 동전을 드리는 분들의 자존심을 세워주기 위해 주일 헌금 봉투를 만들어 거기에 동전을 얼마를 넣든지 보이지 않게 하여 헌금함에 봉헌 하도록 한 것입니다.

아직도 헌금함을 사용하기 보다는 헌금 바구니를 일일이 돌리는 교회들이 많이 있습니다만 그 주요한 이유가 다름아닌 헌금 액수의 증감에 대한 확신이 없기 때문입니다. 일반적으로 헌금함에 드리는 방식을 채택하면 헌금액수가 줄 것이라는 기우가 지배적인 것이 사실입니다. 줄어도 급격히 줄어든다는 염려가 많은 목회자들을 위축시키고 있는 것이 사실입니다. 예산이 넘치면 교회가 은혜스러워서 그런 것이고, 예산이 줄면 목회가 부실해서 그런 것이라는 비판자들의 왜곡된 논리가 헌금함을 사용의 결단을 주저하게 만드는 '내적 귀인'이라고 할 수 있겠지요.

하지만, 많은 우려의 목소리를 뒤로하고 시작된 저희 교회의 헌금 제도 개선은 놀랍게도 20년 동안 변함없는 모습을 유지하고 있는 줄로 믿습니다. 지금도 변함없이 여러분들을 존경하고 신뢰하는 것은 전혀 헌금의 액수가 줄어들지 않는다는 거예요. 얼마나 놀라운 일입니까? 적은 액수이지만 봉투에 넣어서 헌금을 하게 함으로서 드리는 분의 자존심도 세워 드리고, 바른 헌금의 제도도 정착시키는 일석이조의 열매를 거둔 셈입니다. 할렐루야 !

41절에 보면, 주님께서 성전에 들어오는 이들의 헌금하는 장면을 묵묵히 지켜보셨습니다. 지나가다가 그냥 한 두 사람의 헌금 장면을 보고 말씀하신 것이 아니라, 아예 헌금하는 이들의 모습을 보시기 위해 헌금궤를 마주하시고 앉으셨다고 했습니다. 그리고 나서 제자들을 부르셨습니다. 당시 12명의 제자들은 지금으로 말하면 신학생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고, 목회를 배우는 수련목회자들이라고 해도 좋을 것입니다.

제자들에게 '와서 이것 좀 봐라' 하며 주님은 그들에게 임상 교육을 시키신 것이지요. '예수의 교훈과 실제'라는 책이 신학생들에겐 고전처럼 여겨지는 것도 이 때문일 것입나다. 이론적으로만 말씀하시는 것이 아니라, 실제적인 상황에서 가르치시고 말씀하실 때 가장 주옥같은 말씀, 생동감 넘친 말씀들이 선포되곤 하였음을 복음서는 잘 증거하고 있습니다.

예를 들면, 오병이어의 기적을 이루신 후, 자신이 생명의 떡이심을 선포하셨고 (요 6장), 어두운 영적 세상의 상태를 지적하신 후, 자신이 세상의 빛이심을 선포하셨고 (요 8장), 양의 탈을 쓴 이리 떼들을 조심할 것을 말씀하신 후, 내가 곧 양의 문임을 선언하셨고 (요 10장), 나사로의 주검을 슬퍼하는 이들을 향해 위로하신 후, 자신이 곧 부활이요 생명임을 선언하셨으며 (요 11장), 세상 속에서 두려움 속에 살아가는 이들에게 근심하지 말기를 권면하신 후, 자신이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임을 선포하셨지요 (요 14장)

헌금을 가르치실 때는 헌금궤 앞에 앉으셔서 당신이 먼저 보시고 제자들을 불러서 거기서 그들을 보게 하시면서 교훈을 하셨어요. '내가 오늘 대단히 헌금을 많이 하는 사람을 보았다' 아마 12명이면 12명 모두가 이렇게 생각을 했을 것입니다. '야, 엄청나게 많은 헌금을 드린 부자를 아마 주님이 보신 모양이다' 그런데 주님께서는 놀랍게도 가난한 과부의 이야기를 하셨습니다. '그는 여러 부자들보다 더 많이 넣었도다. 왜냐하면 부자들은 풍족한 중에서 넣었거니와 이 과부는 구차한 중에서 자기의 생활비 전부를 넣었느니라' 얼마를 넣었길래 그렇습니까? 렙돈 둘을 넣었습니다.

'렙돈'이란 '얇다'라는 뜻인데 유대의 화폐 단위 중 가장 작은 것입니다. '고드란트'라고 하는 단위도 나오는데 이는 로마의 화폐이지만 당시에 유대에서도 통용이 되었습니다. 그런데 '탈무드'에 보면 '하나님께 헌금을 드릴 때 아무리 가난해도 한 렙돈을 드려서는 안된다. 최소한 두 렙돈은 하나님께 드려야 한다'라고 권면하고 있어요. 그래서 이 과부는 두 렙돈, 즉 자신이 헌금을 드릴 수 있는 가장 작은 규모인 두 렙돈을 드린 것입니다. 그런데 그것을 보시고 주님은 가장 많이 드렸다고 평가하고 있는 것입니다.

저는 오늘 주님의 이 말씀을 통해 몇 가지 함께 은혜를 나누고 싶은 부분들이 있습니다. 첫째는 주님께서 평가하신 주요 관심사는 외형적인 것이 아니라는 것이지요. 지갑으로만 바치는 헌금이 아니라 마음으로 드리는 헌금, 습관으로만 쫓아드리는 헌금이 아니라 감사가 담겨진 헌금을 주님은 기뻐하시는 줄로 믿습니다. 다시 말하면 참된 헌금의 정신은 하나님의 마음에 드는 것인데 그것은 곧 하나님만을 의식하며 드리는 것입니다.

속장님들은 금요일 속회를 드리고 나면 속회 헌금이 생기지요. 그것은 이미 성도들이 헌금 한 것을 속회 지도자인 내가 잠시 보관하고 있다가 주일예배시에 전달하는 것에 불과한 것입니다. 그런데 어떤 분들은 그것만 드린다고 그래요. 그것은 무엇을 말하는 것입니까? 자기 헌금은 없는 모습이지요.

예전엔 가끔씩 재무부에서 이런 보고가 있었습니다. 그냥 주일헌금 빈 봉투가 몇 장씩 나온다는 거예요. 그것은 무엇을 말하는 것입니까? 사람들 앞에 '나 지금 헌금하고 있어'라고 하는 것만 보여주는 것이지 헌금의 정신은 없는 것이지요. 요즘은 그런 보고가 없어서 감사합니다 만 결국 그런 행위들은 사람을 의식하기 때문에 일어나는 안타까운 모습들입니다.

진정한 헌금의 정신은 하나님만을 의식하고, 하나님만을 바라보면서 드리는 것인줄로 믿습니다. 그러면 여러분들은 어떤 정신으로 헌금을 드리십니까? '정말 하나님만 아시면 틀림이 없어. 하나님이 보실 때 정말 열납하실거야.' 그런 확신만 있다면 봉투에 1,000원을 넣은 들, 500백원 동전을 넣은들 무슨 상관이 있겠습니까?

그러므로 이 가난한 과부의 헌금하시는 모습을 보고 주님이 말씀하신 그 내용은 오늘 우리에게 얼마나 도전이 되는지 모릅니다. '이 가난한 과부는 모든 사람들보다 많이 넣었도다' 무얼 많이 넣은 거예요? 두 렙돈 밖에 안넣었는데... 그러나 그 속에는 하나님을 향한 그의 마음과 신뢰와 모든 간구가 꽉 차 있는 거예요.

두 번째로 우리가 은혜받아야 할 부분은 헌금자의 희생을 통한 헌신의 모습입니다. '이 가난한 과부는 자신의 생활비 전부를 넣었도다' 무슨 얘기입니까? 주님을 위해서 희생을 한 거예요. 많은 사람은 가진 것 중의 일부를 드렸지만 이 과부는 자기의 전부를 드렸어요. 두 렙돈을 가지고 전부라고 말하는 것을 보니까 가난해도 정말 가난한 사람이지요. 아마 바느질 품삯으로 두 렙돈 을 받아 그날 살고 내일 또 바느질 품삯이 들어오면 살아가는 정말 어려운 여성인 것 같습니다. 그런데 그는 그날 자신의 수입 전부를 드렸고, 주님은 그에게 가장 많이 드린 헌신자라며 축복하셨습니다.

다윗은 성전 대지 구입을 위하여 예루살렘 가장 중심에 있는 땅의 주인을 찾아갔습니다. '아리우나'라고 하는 농부가 그 땅의 주인이었는데 왕이 찾아가 '내가 이 땅을 사서 성전을 건축하겠다'는 말에 농부는 너무나 감동을 해서 '왕께서 그렇게 하겠다면 그냥 드리지요'라고 했지만 다윗은 거절했습니다.

다윗은 보통 사람과 좀 달랐습니다. '내가 하나님께 봉헌하는 것을 거저 할 수 없다'는 이유에서 입니다. '내가 값을 주고 사리라' 희생하겠다는 말이지요. 반드시 값 없이는 하나님 앞에 헌신하지 않겠다는 고백이 담겨 있는 대목입니다. 싸구려 헌신은 안하겠다는 말입니다. 내 눈물과 정성이 담겨진 헌신을 하겠다는 것이지요. 결국 왕은 농부에게서 삯을 주고 정상적으로 땅을 샀고, 후에 그의 아들 솔로몬은 그곳에 예루살렘 성전을 지어서 하나님께 봉헌한 줄로 믿습니다. 할렐루야 !

하나님의 은혜가 값싼 은혜가 아니듯이, 우리가 하나님을 향해서 드리는 예배도 값싼 예배가 되어서는 안됩니다. 정말 거기에는 우리의 희생이 담겨져 있어야 하고 우리의 눈물이 담겨져 있어야 합니다.

또한 저는 이 헌금을 물질에만 국한시키고 싶지는 않아요. 왜냐하면 지금은 다양한 가치가 존재하는 다변화된 사회이기 때문입니다. 가치가 물질에만 있는 것은 아니잖아요. 시간이 돈이고, 지식이 돈인 세상입니다. 좋은 환경과 여건이 돈이고, 앞선 정보가 돈이 되는 세상입니다. 즉 모든 것이 가치 있게 평가되는 이 사회 속에서는 물질뿐만 아니라 성도 여러분이 드리는 모든 것들이 하나님 앞에 열납될 수 있는 헌신의 재료라는 사실을 우리는 알아야 합니다.

문제는 그 헌신이 하나님만을 의식하면서 드리는 것이냐 하는 것입니다. 그 헌신 속에 나의 눈물과 희생이 담겨져 있느냐 하는 것입니다. 여러분들이 마음껏 쓰고 난 자투리 시간으로 교회에서 무슨 봉사하려고 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여러분의 자투리 시간이 봉사할 시간과 맞지 않는다고 오히려 짜증을 내어서는 않됩니다. 시간을 내어야지요. 내 시간 다 쓰고 남는 시간에 '교회에 도와줄 것이 없나? 하고 두리번거리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일을 위해 먼저 시간을 내고 재능을 쓰겠다고 하는 그런 마음이 중요합니다.

한 과부의 헌신을 너무나 기뻐하셨던 주님을 기억하며, 주의 제자된 우리가 이 시대의 진정한 ' 한 가난한 과부의 헌신'의 삶을 살아가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간절히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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